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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전인터뷰
여성운동의 중심에 물음표를 매긴다
한국여성단체연합 정현백 대표와의 대화
정희진 tobrazil@naver.com
지금 한국사회에서 젠더(gender)는 일상생활부터 국가정책, 사회운동, 국제관계, 지식사회에 이르기까지 가장 첨예한 논쟁 주제 중 하나다. 세계적으로도 페미니스트들은 자기 공동체에서 새로운 지식 생산과 대안적 사회운동을 주도하고 있다. 지난해 한국여성학회와 이화여대가 공동 주최하여 성황리에 치러진 제9차 세계여성학대회의 주제는 ‘경계를 넘어서’(Embracing the Earth)였다. 경계(b/order)와 연대에 관한 사유인 여성주의는 성별뿐만 아니라 인종, 국가, 지역 같은 기존 질서에 의문을 제기한다. 여성주의는 인간과 사회현상을 ‘온전히’파악하고 지속가능한 미래를 상상하는 데 있어서, 자기 성장과 사회변화를 고민하는 모든 사람들이 중요하게 고려해야 할 정치학으로 부상하고 있다.
특히 1990년대 이후 한국 여성운동의 급속한 발전은 국제적으로도 주목받고 있다. 한국은 UN등에 ‘군위안부’문제를 보편적인 인권의제로 제기하는 데 성공했고, 계층과 세대를 아울러 여성운동이 가장 활발한 사회로 평가받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급격한 주류화·제도화에 따른 국가와의 관계정립, 계급 등 여성들간의 차이, 성인지적 관점(genderperspective)에서의 신자유주의에 대한 저항, 그리고 여전한 남성중심적 일상문화와의 투쟁 등 산적한 과제를 앞두고 논쟁과 모색을 거듭하고 있다. 이러한 성장통의 한복판에서 지난 20여년간 여성운동을 주도해온 ‘한국여성단체연합’(이하 여연)의 정현백 대표를 만났다. 나는 말이든 글이든 ‘지당하신 말씀’이나 ‘홍보용 멘트’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다행히 ‘도전’인터뷰라는 지면의 특성상 기탄없는 논쟁적 대화가 가능했다. 인터뷰를 통해 여성운동의 주장을 알리기보다는 여성들 사이의 ‘갈등’을 보여주고 싶었다. 차이가 발생시키는 긴장이 여성운동의 힘과 가능성이 되리라 믿는다.
정희진•선생님을 처음 뵌 것은 제가 1992년 ‘여성의전화’에서 상근자로 일할 때였어요. 예전 신촌 석탑노동상담실 건물에서 여성운동 강의를 하셨는데, 독일 예를 들면서 가부장제는 얼마든지 변화가능하다고 말씀하셨죠. 독일남성들은 가사노동에 많이 참여하고 특히 요리를 잘하는데, 그건 독일의 음식조리법이 간단하기 때문이다, 누구나 책자를 보고 곧바로 식사준비가 가능하다, 이런 말씀을 하셨는데 인상적이었어요. 한국음식은 조리가 복잡하고 손이 많이 가죠. 계량화도 쉽지 않고. 오늘 인터뷰를 이 얘기로 시작해볼까요? 사회마다 일상문화의 차이가 구조적 성별 권력관계를 다르게 구성하잖아요. 다시 말해, 가부장제는 초역사적인 것이 아니라 시공간의 제약을 받는 사회적 산물임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라고 생각해요. 다른 사회 여성의 삶은 우리 사회의 가부장제를 상대화할 수 있는 상상력과 용기를 준다고 봅니다.
정현백•네, 그 강의 기억합니다. 저는 한국 사회운동이 여전히 일상적 실천에 대해 둔감하다고 봅니다. 예컨대 요즘 양극화 해소방안에 대한 논의가 많잖아요. 하지만 경제민주화가 이루어지면 국민들이 만족할까요? 전 그렇지 않다고 생각해요. ‘잘사는 것’에 대한 개념이 변하지 않는 한 말입니다. 우리 사회에는 개인이 문화적 실천을 할 수 있는 공간이 턱없이 부족해요. 남성이 밤 10시, 11시에 퇴근하는 한 가사분담이 어렵지요.
정희진•지금 유럽에서는 주5일제 근무로 부부갈등이 심해지고 이혼율이 높아질 조짐이라고 합니다. 주5일제로 배우자들이 같이 지내는 시간이 많아지니까 가사분담 갈등이 생기는 거죠.
정현백•그렇죠. 하지만 이혼율이 높아져도, 구소련처럼 동일노동·동일임금을 실시하면 재혼도 많아집니다. 이런 얘기를 하면 사람들이 비판할지 모르지만, 저는 우리나라의 소비수준이 지나치게 높고, 국민소득이라는 것이 참 허구적이라고 생각해요. 국민소득이 3천 달러 정도인 에스토니아나 리투아니아에 가보면 사람들이 얼마나 절제있고 교양있게 사는지가 거리에서도 느껴지거든요. 우리는 사회운동조차 모든 것을 경제와 정치의 문제로 환원해버립니다. 물론 정치와 경제가 문제해결의 기본구조가 되기는 하지만 정작 행복해지는 방법은 다른 데 있다는 거죠.
정희진•한국이 술, 담배, 의류, 화장품 소비수준이 세계 1위라던데요.
정현백•그래요, 우리는 자신의 소비욕망이 굉장히 높은 것 자체에 불감증이 있습니다. 이 얘기가 어떻게 들릴지 모르겠는데…… 한국이 어려울 때 노동운동을 지원해주던 ‘인간의 대지’라는 독일 NGO가 있어요. 저와 친한 그 단체의 활동가가 이런 얘기를 해주었어요. 자기랑 같이 68운동을 했던 사람들을 꼽아보니까 나중에는 3분의 1 정도가 자살했더래요. 68운동이 실패하고 자본주의 씨스템이 완벽하게 돌아가는 사회에서 살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던 거죠. 그들은 자기 삶의 의미에 대해 상당히 치열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에 반해 우리는 아버지, 어머니 때문에 살아야 하고, 자식 때문에 살아야 하고…… 살아야 할 이유가 굉장히 많죠.(웃음)
정희진•재미있는 얘기인데요.
정현백•그런데 제가 꼭 자살을 권장하는 것 같잖아요.(웃음)
정희진•선생님이 권장하지 않으셔도, 이미 우리나라 20대의 사망원인 1위가 자살입니다.
정현백•서구에서는 좌파들이 자살도 많이 하고 이혼도 많이 해요. 현실에서 타협을 못하는 거죠.
정희진•우리나라는 좌파 지식인이 이혼하면 아웃일걸요. 진보진영도 굉장한 가족주의 사회죠. 그럼 이제 ‘준비해온’질문을 시작할까요.(웃음) 선생님께서는 ‘여성학’과 ‘여성운동’양 진영에서 활동해오셨고, 여성사에서 평화운동까지 관심사도 상당히 다양합니다. 또한 여성운동계에서는 ‘대표적’인물로 알려져 있습니다. 저는 여성주의자에게 ‘이론’과 ‘실천’의 관계는 기존 지식인에 있어서의 그것과는 다르다고 생각하는데요, 서구의 경우 여성학의 아카데미즘화가 심각하지만, 저는 여전히 ‘강단 좌파’는 있어도 ‘강단 페미니스트’는 드물다고 봅니다. 여성주의는 보편성의 철학이자, 자기 일상을 정치화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 정체성의 정치이기 때문이죠. 여성학과 여성운동의 관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여성학과 여성운동의 충돌?
정현백•여성학자들이 남성 진보지식인에 비해서 실천적인 것은 사실이지만, 정희진 선생 의견은 별로 현실적이지 않다고 생각해요. 사실 운동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여성학과 여성운동 사이에 일정한 거리감을 느낍니다. 여성운동가는 현실에 책임을 져야 하거든요. 안 그러면 운동은 망하게 되어 있어요. 그런데 여성학자는 주로 글쓰기를 통해 실천하기 때문에 부담이 적죠. 그래서인지 여성학 쪽에서 이상적인 얘기를 하면서 운동을 비판하거나 지엽적인 문제를 가지고 운동을 평가하는 경우가 있어요. 또 우리 사회는 학자는 많은데 사회가 필요로 하는 지식은 얻기 힘들 때가 많아요. 구체적인 예를 들자면 FTA에 관한 여성대책위원회를 만들었는데, FTA가 여성에게 어떻게 성별화된 영향을 미칠 것인가에 대해 외국 사례를 분석한 논문 한편이 없고, 주변에 그 주제를 연구해 글을 쓸 여성학자가 없어요. 실천이 없으면 이론도 역동적으로 발전하기 어렵기 때문에, 여성주의자는 실천을 병행해야 합니다.
정희진•말씀에 공감합니다. 하지만 선생님 논지는 자칫 “여성학과 여성운동이 만나야 한다”는 당위적인 이야기가 되기 쉽지 않은가 생각하는데요. 저는 이론과 실천의 개념과 이들간의 관계에 대한 새로운 사고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급박한 ‘현장’에서 요구되는 지식이 분명히 있지요. 그러나 그것이 담론화되고 이론화되기에는 많은 시간과 자원이 필요합니다. 사실 지식, 교육, 언어, 담론 이런 것 자체가 이미 계급적 산물이고, 여기에 운동과 언어의 시간차가 발생합니다. 이론과 실천의 구분 자체에 의문을 제기해보면 어떨까요? 이론, 언어 자체가 물질적인 힘이라는 것입니다. 저는 어떤 면에서는 선생님과 반대로, 여성의 변화된 현실에 비해 여성주의 담론이 빈약하다고 보고, 이것이 운동에 제약을 가져온다고 생각합니다. 여성에게 근대교육이 ‘허락’된 지 겨우 한세기 정도가 지났지요. “여성이 글을 배우기 시작하자 여성문제가 생겨났다”는 말이 있잖아요? 여성주의 지식은 급진적이거나 이상적인 것 혹은 시기상조가 아니라, 운동의 시작이라고 생각합니다.
정현백•그렇기는 하지만, 일단 운동과 이론 사이에 소통이 원활하지 않은 면은 지적되어야 합니다. 이건 좀 논쟁적인 문제인데, 저는 여성학 이론 전공자들이 너무 정체성의 정치나 쎅슈얼리티에 집중하는 탓에, 우리가 실제로 필요로 하는 사회구조와 여성문제의 관계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관심이 부족하지 않은가 생각해요.
정희진•글쎄요, 그 얘기를 하려면 일단 쎅슈얼리티가 무엇인가부터 얘기해야겠죠. 저는 쎅슈얼리티가 몸에 관한 사회적 해석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것이 개입되지 않은 정치는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봅니다. 더구나 지금처럼 여성노동은 성애화(sexualization)되고, 성문화 자체가 매춘화된 지구화시대에 여성노동자에 대한 차별을 쎅슈얼리티를 빼놓고 논할 수 있을까요? 그리고 정체성의 정치적 의미는 문맥에 따라 달라진다고 생각합니다. 저도 한국남성과 이야기할 때는 ‘페미니스트’가 되지만, 미국여성과 만날 때는 ‘민족주의자’가 되죠. 여성들이 여성운동뿐만 아니라 다른 사회적 구조에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논리는, 여성문제(gender issues)는 ‘사회적’ 문제가 아니라 ‘개인적’문제라는 인식이 전제된 게 아닐까요? 이런 논리대로라면 미국의 여성학자 오드리 로드(Audre Lorde)는 흑인, 여성, 레즈비언, 장애인이니까 네 가지 운동을 모두 해야 하죠. 이렇게 말하기는 싫지만, 지금 우리 여성운동이 공적 영역 이슈 중심이기 때문에, 사적인 문제로 간주되는 쎅슈얼리티에 대해 불편한 시각이 있지 않은가 생각합니다.
정현백•쎅슈얼리티를 몸에 관한 사회적 해석이라는 좀더 광범한 의미로 사용한다면, 앞에 내가 한 발언은 수정해야겠네요. 그러나 그렇게 정의를 내리는 데도 토론이 필요할 텐데, 이 문제는 다음 기회로 미룰 수밖에 없군요. 그런데 그런 입장이라면 공적 영역의 기준도 애매해진다는 것을 지적하고 싶어요. 여연이 지난 1년 동안 보육예산 때문에 싸워왔는데, 영하 13도 되는 날 아침에 정부종합청사 앞에서 시위를 할 때는 눈물이 날 정도로 춥데요. 정부가 2010년까지 보육예산에 총 14조 9천억원을 투입하는 대신 보육료 규제제한을 풀어 정부지원을 받지 않는 고급 어린이집 설립을 허용한다고 한 것 때문이지요. 재경부의 입김이 크게 작용했는데, 여연에서는 이를 통해 국공립 시설의 확충이라는 여성계의 요구가 상대화되고, 결과적으로 실질적인 보육료 인상을 초래하리라 우려하는 거죠. 보육정책은 정말 보통 여성들의 일상생활과 직결된 문제예요. 이런 것도 공적인 영역으로만 말할 수 있을까요?
정희진•공사 영역이 실제로 분리되어 있는 것은 아니잖아요? 그 둘이 분리된다는 이데올로기가 있을 뿐이죠. 제가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우리 사회에서 보육문제는 여성인권의 이슈라기보다는 가족의 이슈이고 노동의 이슈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저는 보육의 공공화는 매우 중요하지만, 한편으로는 ‘사적 영역’에서 남성 개개인의 실천이 없으면, 보육은 계속 여성의 일이라는 전제 아래 놓이게 된다는 겁니다. 보육은 사회문제이지 여성들이 해결해야 할 문제가 아니라는 거죠. 다른 예로, 일반 노동조합이나 회사에서는 여성위원회 같은 조직이 성폭력 상담이나 양성평등 교육, 탁아 등을 담당하잖아요? 저는 이래서는 곤란하다고 봅니다. 물론 처음에는 그렇게 시작할 수 있지만, 그건 조직 전체의 의제여야 하지 여성위원회의 업무로 보는 것은 성별 분업입니다. 여성주의는 사회를 여성의 시각에서 재조직화하는 것이지, ‘여성적인’일을 맡아 하는 부분운동이 아니지요.
정현백•나도 그렇게 생각해요. 하지만 내 입장에서 보면, 여성학과 여성운동의 결합은 여전히 너무 미진합니다. 여성학자들의 참여가 오히려 운동과 굉장히 불일치하는 양상을 보일 때도 있고요. 대표적인 것이 성매매 문제라고 생각해요. 일부 여성학자들은 성매매를 성폭력이나 인권유린이 아니라 노동자의 노동권이라고 주장하잖아요? 국제적으로 그런 흐름이 있는 것은 사실이고, 그렇게 주장할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그러나 현재 한국에서는 성매매의 규모를 줄이는 것이 매우 중요해요. 그런데 일부 여성학자 쪽에서 우리를 성판매 여성들의 생존권을 박탈하는 사람으로 여기니까 난감하죠. 이런 부분에서 가끔씩 갈등과 괴리를 느껴요. 그런 점이 여성학자들에 대해서 갖는 불만입니다.
정희진•저는 그냥 이런 질문을 드리고 싶어요. 담론작업은 실천이 아닌가? 그리고 여성학자와 여성운동가의 의견은 반드시 일치해야 하나? 여성학자들 사이에도 내부의 차이가 있고, 여성운동가들 사이에도 다른 의견이 있죠. 남성들은 성별 정체성이 아니라 계급이나 사회적 위치에 따라 구분되는데, 왜 여성들은 언제나 성별 정체성이 사회적 정체성을 압도하나, 왜 여성들은 그렇게 쉽게 ‘여성’으로 환원되나, 그게 가부장제 아닌가 하는 거죠. 물론 공통의 젠더 이해가 있지만, 여성도 남성처럼 계급, 지역, 장애, 성 정체성, 나이 등에 따라 상황이 다 다른데, 왜 꼭 한 목소리를 내야 하나요? 여성들이 서로 다른 다양한 목소리를 낼 때, 오히려 국가를 더 강제할 수 있지 않을까요. 어쨌든 저는 우리 사회에서 여성을 비롯한 사회적 약자, 소수자의 목소리가 거의 담론화·가시화되지 않았다고 봅니다.
중심의 해체냐 총체성의 견지냐
정희진•인터뷰가 아니라 대담 같아져서 죄송하네요.(웃음) 본연의 인터뷰로 돌아와서 질문드릴게요. 현재 주력하시는 여성운동 의제는 무엇인가요?
정현백•올해 여연의 핵심과제는 두 가지예요. 하나는 빈곤의 여성화(feminization of poverty) 문제인데,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결정적 영향이죠. 또 하나는 지역과 서울의 격차를 어떻게 줄일 것인가입니다. 87년 창립 시기부터 여연의 이슈는 주로 민중적 여성운동이었는데, 이걸 어떻게 성 주류화나 중산층 여성의 이슈까지 안을 수 있는 방향으로 갈 것인가 등을 포함해 여연 내부에서도 다양한 논쟁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를 지역으로 전달하는 데 2, 3년 이상이 걸려요. 생각보다 시간적인 지체현상이 심각하죠. 여성학 이론가도 모두 수도권에 있는 탓에 지역에서는 여성주의를 접하기 어렵고 정보도 부족합니다.
정희진•부연한다면, 말씀하신 것처럼 여성들간에 상당한 차이가 있는데, 이 차이는 앞서 제가 말씀드린 여성이라는 범주 자체가 가지는 문제인 것 같아요. 그런데 문제를 좀 다른 방식으로 본다면, “서울과 지역의 격차”가 아니라, ‘지역여성’들이 여성 내부의 타자라면 서울을 중심으로, 서울을 기준으로 그들이 따라와야 한다기보다는, 지역여성의 입장에서 서울중심주의가 비판·해체되는 방식도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이건 장애여성이나 레즈비언의 경우도 마찬가지죠. 보편이 내려가는 것이 아니라, 차이가 위로 올라와서 기존의 보편이 해체·재구성되는 방식으로 지역여성의 입장을 볼 수 있지 않을까요.
정현백•지역에서 올라오는 운동들이 보편을 해체하게 한다, 아주 중요한 지적이에요. 그렇게 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정말 좋지요. 그리고 지역운동 중에 정말 중앙을 능가해서, 감동적으로 여성운동을 잘하는 곳이 있거든요. 내년이 여연 20주년이라서 20주년 운동사를 쓰고 있는데, 과거처럼 평화운동, 노동, 성폭력, 이렇게 주제별로 쓰다보면 결국은 짧은 지면에 지역운동은 한줄도 들어갈 자리가 없더군요. 분류 자체를 다르게 해서, 지역 여연운동사와 전체 여연운동사를 나누어 쓰기로 했습니다. 그러지 않으면 지역운동은 늘 묻히고 말아요.
정희진•예, 원래 분류라는 게 권력관계의 결과죠. 저는 자유주의 페미니즘, 사회주의 페미니즘, 흑인 페미니즘 이런 식으로 여성주의 사상을 구분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이런 분류에서는 앞에 말한 모든 페미니즘은 백인을 전제하게 되죠. 서구중심의 여성주의에 저항한다는 것이 뭐냐, 탈식민 여성주의가 뭐냐고 했을 때, 이제 더이상 우리 자신을 설명하는 인식의 근거, 판단기준을 서구로 삼지 않는 것, 서구를 상대화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거든요. 미국을 거치지 않고 아시아지역 사람들끼리 만나자는 것처럼, 저는 지역운동도 꼭 서울과의 관계 속에서 자기를 재현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 해요. 그냥 서울을 ‘왕따’시키고 지역에서 또다른 중심을 만들고, 그것이 역사화·의미화되는 게 바람직하지 않을까요.
정현백•지금 중앙, 지역을 분류하면서 굳이 중심이라는 걸 설정하고 지역이 할 일을 규정할 필요가 있느냐는 얘기인데…… 저는 그 문제를 조금 달리 접근할까 해요. 저는 여전히 우리 시대에서 근대성의 과제가 사라졌다고 보지 않아요.
정희진•물론 저도 그렇습니다.
정현백•우리가 한국사회를 평가할 때 근대와 탈근대라는 이중의 과제를 수행해야 한다고 보는데, 그런 점에서는 지역이 중앙을 빼고 독자적으로 자기를 규정하고 자기 활동을 만들어가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우리가 함께 근대성을 확산해가고 근대성을 일정하게 체화해가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봐요. 아직도 우리에게는 근대성의 한 측면으로 민주주의 혁명의 학습과 내면화의 프로쎄스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정희진•저는 그게 과잉이라고 생각하는데……
정현백•우리가 여기서 입장 차이가 있네요. 차이와 다양성을 인정하고 수용하는 것은 한국사회에서 굉장히 중요한 과정이라 생각해요. 그러나 차이가 총체성을 굳이 거부하는 것인지에 대한 질문이 필요해요. 차이와 다양성을 통한 합의가 있을 수 있고, 그를 통해서 총체성에 도달할 수 있지 않나요. 최근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우리를 벼랑 끝으로 몰고 있는데요, 빈곤의 여성화와 관련하여 여연이 주장하는 것은 ‘대안적인 세계화’입니다. 자본주의체제의 점진적인 전환을 상정하는 것이지요. 이런 여성운동은 중앙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합의를 통해서 전체 여연 혹은 전체 여성운동이 함께해야 하는 것이죠. 총체화되지 않은 투쟁은 허약합니다.
‘강금실 지지’와 진보의 재개념화
정희진•사실 제가 말씀드리고 싶었던 것은, 전체와 부분, 중심과 주변의 구분 자체가 비판되어야 한다는 것이고요, 또 근대성이 실현되었다 혹은 부족하다는 얘기가 아니라 근대성 자체가 각축하는 개념이고, 성별과 계급 등에 따라 다르게 작동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여성이 국가나 자본주의를 경험하는 방식은 남성과 다르잖아요? ‘맑은정치여성네트워크’얘기를 해보는 것이 좋겠군요. 2004년 총선을 앞두고 여연 주도로 진보·보수진영의 여성인사가 망라되어 맑은정치여성네트워크(이하 맑은넷)를 구성했잖아요? 맑은넷은 공개추천과 심사를 거쳐 101명의 여성후보 명단을 발표하고, 각 정당에 후보공천을 요구하는 활동을 했죠. 그 결과 17대 여성 국회의원 당선자는 39명으로, 16대의 5.4%의 두배가 넘는 13%로 늘어났습니다. 여성 당선자의 54%가 맑은넷 후보에서 선출되는 성과를 거두긴 했습니다만, 여성주의저널 『일다』(www.ildaro.com) 등으로부터 맑은넷에 보수적인 여성인사가 포함되었다고 호된 비판을 받았죠. 그런데 여연은 지난 서울시장 선거 때 강금실(康錦實) 후보에 대한 지지성명에서는 빠졌잖아요? 이건 모순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저는 강금실 전장관은 단순한 열린우리당 후보가 아니라고 보는데요. 저는 여연이 맑은넷 활동은 잘했다고 평가하지만, 강금실 후보를 지지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정현백•강금실 후보의 경우에는 소속정당과 여성으로서의 정체성 사이에서 여연 내부 논의가 많았어요. 강후보 지지 여부를 논의하기 위해서 간담회를 소집했는데 부결됐어요. 왜냐하면 아무리 여성이라고 해도 강후보는 열린우리당 당원이지 않느냐는 거죠. 여연 소속 회원단체들의 정당 지지성향이 일치하지는 않거든요. 그리고 여연에는 ‘무소속 후보만 지지한다’는 원칙이 있었기 때문에, 그것의 개정 여부는 다양한 수준에서 긴 토론이 필요하지요. 결국 과거의 원칙을 고수한 선택이었습니다.
정희진•저는 ‘박근혜 지지론’처럼 여성이면 무조건 지지해야 한다는 입장이 아닙니다. 그렇지만 강금실 후보의 경우는 다르지 않나요? 여연의 결정에 제 주변에서도 놀라워했어요. 심지어 당선이 안될 거라 저러는 거냐는 얘기도 있었어요.(웃음) 이 문제와 관련하여, 여연은 언제나 스스로를 ‘진보적 여성운동’진영이라고 말하면서, 한국여성단체협의회(이하 여협)를 ‘보수적 여성운동’진영이라고 하는데, 이는 무엇을 기준으로 한 구분인가요? 기존 남성 입장에서 구성된 진보와 보수, 좌우 개념의 논리를 그대로 따르는 것처럼 보이는데요.
정현백•이전에는 여협이나 새마을부녀회 같은 조직은 관변이고 동원된 여성들의 조직이다, 독재체제에 야합한다는 식으로 많이 얘기되었죠. 그런데 실제로 경기도지역에서 활동한 여성들을 조사해봤더니 여러모로 매우 헌신적이었어요. 그리고 ‘관변’이긴 하지만 그걸 통해서 나름대로 여성에게 공적 영역에 진입할 수 있는 통로도 열어주었고요. 그런 점에서 보수적인 여성운동이라기보다는 발전국가 모델로 가는 과정에서의 여성참여 모델로 설명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정희진•진보라는 개념 자체가 매우 경합적이고, 그 경합의 과정이 민주주의겠지요. 여성주의를 비롯해 환경, 장애, 인종 등 기존의 근대 주체에서 배제된 이들의 시각에서 진보개념은 기존의 진보와 일치하는 부분도 있고 그렇지 않은 부분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 누가 무엇을 왜 진보라고 정의하는가에 관한 정치학, 권력관계를 질문해야 한다고 봅니다. 저는 여연의 특정한 입장을 접하고 몇차례 놀란 적이 있습니다. 예전에 청와대 홈페이지에 게재된 ‘박근혜 패러디사건’을 두고 “표현의 자유”라고 한다든가, 또 얼마 전 터진 한나라당 박계동 의원의 동영상사건을 두고 “술집 여자니까 엄밀한 의미에서 성추행이라고 볼 수 없다” “몰카 자체가 비윤리적이다”라고 언급했다고 들었어요.
정현백•후자는 분명 잘못 전달된 이야기입니다. 여연 홈페이지에 올라간 5월 3일의 성명서에서 “여성을 술자리의 성적 대상으로 치부하는 작태를 보인 박계동 의원”을 한나라당은 징계하고, “부적절한 술자리와 성적 행동이 발생하지 않도록 특단의 방안을 마련”할 것을 촉구했는데, 왜 그런 오해가 생겼지요?
정희진•여연을 취재한 방송사 PD(남성)가 제게 이메일을 보냈는데, 여성운동가들이 왜 그렇게 여성의식이 없냐는 거예요. 저는 아마 오해가 있을 거라고 하면서, 여연을 옹호하는 답장을 보냈어요.
정현백•이에 대해서는 해명이 필요한데, 패러디사건은 내가 외국에 나간 사이에 터졌어요. 여연 내부에서 토론을 해봤더니,표현의 자유를 둘러싸고 이견이 있어서 신속하게 방향을 잡지 못했어요. ‘문화연대’가 그런 입장이었죠.
정희진•그게 바로 포르노 같은 재현물에 대한 전통적인 남성중심적 입장이고, 그 PD말대로 여연 활동가들의 젠더의식에 점검이 필요한 것이 아닌가 생각해요.
정현백•역시 결정적인 정책적 실수는 즉각적으로 성명을 냈어야 하는데 시기를 놓친 거예요.
정희진•당시 얘기가 어떻게 됐냐면, 여연이 열린우리당 편을 들어서 박근혜 패러디에 대응했다는 거예요.
정현백•그런 오해가 있나요? 여연이 열린우리당에 대한 비판을 망설이는 집단은 아닌데요. 최근에 한미FTA문제나 미군기지 이전문제 등과 관련해서도 열심히 싸우고 있어요.
정희진•패러디사건 경우에는, 평소 여연을 비판했던 『일다』와 여연이 비슷한 입장이었어요. 여연은 표현의 자유 쪽으로 약간 기울었고, 『일다』의 일부 기사는 한나라당이 왜 이제 와서 여성인권을 얘기하느냐, 어불성설이다, 이렇게 나왔거든요.
정현백•나는 개인적으로 박근혜 패러디는 비판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정희진•당연히 그렇죠. 『일다』나 여연이나 모두 진보남성의 입장이지 여성시각이 아니었다는 겁니다. 여성의 시각, 여성운동…… 참 어렵습니다.
북한 미사일 문제와 남북관계— ‘민족’과 ‘여성’사이에서
정현백•네. 저는 지난 6월 광주에서 6·15민족통일대축전을 치르고서도 그런 생각이 많이 들었어요. 남북관계가 이대로 가서는 안되겠다는 자각을 했습니다. 예전에는 북이 어렵기 때문에 우리가 북의 차이를 받아들이면서 북을 지원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이번에는 이것이 단순한 차이가 아니라 서로간의 관계설정 자체가 잘못된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든 거죠. 우리가 북과 충분히 논쟁해야 할 싯점에서 논쟁하지 않고 그냥 잘 지낸 것을 공존하는 걸로 착각했던 겁니다. 행사진행의 형식주의나 과도한 정치화도 참 힘들어요. 게다가 더 힘든 것은 남측 내부의 차이지요. 소위 말하는 남남(南南)갈등이 토론을 통해서도 풀어지지가 않는 거예요. 예를 들어 미국이 저렇게 북을 벼랑 끝으로 모는 한, 핵이나 미사일은 미국에 대한 억제력의 효과를 지닌 무기가 된다는 입장이 있어요. 이와 반대로 북이든 남이든 한반도의 비핵화를 주장하는 입장이 있고요. 그런데 이런 문제가 본격적으로 토론되지 않고, 그러므로 이견이 잘 풀어지지 않아요. 이런 문제들을 앞으로는 여성주의 시각에서 좀더 적극적으로 제기하고 현행의 관계설정을 비판해야 하는데, 쉽지가 않네요.
미사일 문제도 사실은 ‘미사일 실험’인데, 이를 ‘미사일 발사’로 지칭하는 것은 정확한 표현이 아니라는 어느 학자의 문제제기를 들으면서 공감했어요. 일단 용어의 횡포이자 담론 지배라 말할 수도 있지요. 사실 남북관계에서는 현황분석의 정확성이 중요하거든요. 어찌되었건 무력을 과시하는 미사일 실험으로 상황을 뚫어보려는 북의 태도는 유감입니다. 이것으로는 국제사회를 설득할 수 없고, 협상력이 되지도 못한다는 것이 드러난 셈이지요. 마찬가지로 우리 정부도 너무 일찍부터 인도적 지원을 협상카드로 내세우는 바람에, 인도적 지원도 막히고 협상력도 잃었어요. 김영삼정부 시절에도 너무 일찍이 강경조치를 취하는 바람에 협상에서 소외되고, 북미협상으로 사태를 종결한 적이 있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어요. 우리 여성의 입장에서는 일단 인도적 지원은 계속되어야 하고, 동시에 북의 미사일 실험도 비판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6자회담과 병행하여 북미간의 양자회담을 진행하는 그런 조건을 만들어내는 과정에 여성운동도 거들어야지요.
정희진•핵문제와 관련한 선생님 입장은 어떠신가요?
정현백•당연히 비핵화죠. 한반도 비핵화로 가는 것이 해결책일 뿐만 아니라 도덕적으로도 옳다고 생각해요.
정희진•말씀하신 대로 평화운동으로서 통일운동이 어렵습니다. 통일운동을 민족주의운동으로 보느냐 평화운동으로 접근하느냐의 결정적 차이가 바로 젠더라고 보는데요, 민족주의에는 강대국에 대한 남성들의 욕망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통일운동가 중에도 군비경쟁이 소모적이니까 통일 전까지는 서로 군축하되, 통일 이후에는 군비를 증강해야 한다는 분들이 있어요.
정현백•그렇죠. 하지만 나는 민족주의에 대해서 이중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습니다. 나는 우리가 강소국(强小國) 모델로 가야 한다고 봐요. 김진명의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가 국민들에게 정서적으로 공감을 얻은 것을 보면, 우리 정체성 자체가 매우 왜곡되어 있음을 알 수 있죠. 굉장히 욕망화되어 있고, 남성적이고 팽창주의에 기반하고 있거든요. 그것을 남북의 지식인이 일정정도 공유하고 있어요. 사실 남북관계에 있어서 미사일이나 북핵 문제, 통일을 바라보는 입장 차이가 토론을 통해 합의되어야 하는데, 현실은 이번에는 내가 양보했으니까 다음에는 네가 양보해라 하는 식으로 절충되고 있어요. 때문에 여전히 민족문제에 천착할 수밖에 없는 면이 있고요. 다시 말해 민족문제라는 고리를 빼고 나면, 남과 북이 만나야 할 이유가 없다는 거죠. 이웃나라처럼 도와주면 그만이에요. 나는 사실 우리 사회가 민족주의 과잉이라고 생각해요. 진보운동조차 이렇게 민족주의적인 나라는 아마 한국 외에는 없을 거예요. 그러나 내가 민족문제에 접근하는 중요한 이유는, 일단 분단현실을 극복하기 위해서 여성운동도 민족문제를 고려해야 한다는 겁니다. 다음으론 역사가로서 제게 민족주의가 가진 엄청난 동원력이 무시할 수 없는 현실로 다가온다는 점이 있어요. 사회민주당 운동이 크게 일어났던 독일 같은 나라도 결국 민족주의 앞에서 무너져요. 19세기말 20세기초 독일 사민당 노동자들 집에 가보면 비스마르크 사진과 맑스 사진이 나란히 걸려 있었다고 해요.(웃음) 도저히 공존할 수 없는 두 가지가 한집 벽에 같이 있는 거예요. 사람의 정체성이라는 것이 사실은 굉장히 다중적이죠. 서구에서는 페미니즘과 민족주의가 분리되면서 국민국가의 형성과정에서 여성이 배제되는 구도로 가잖아요. 그건 아니라고 봐요. 여성이 개입하고 실천해야 하고, 그래서 국민국가를 만드는 과정에 여성이 참여해야 합니다.
정희진•민족주의의 동원력에 대해서는 저도 동의합니다. 근대에 민족주의를 능가한 정치는 없었죠. 그런데 선생님께서 더 잘 아시겠지만, 민족주의가 어떤 차원으로 가면 금방 파시즘이나 전체주의, 인종청소로 이어지는데, 매우 위태로워요. 저는 민족주의의 동원력이 실질적으로 누구를 위해 봉사하는가를 따져보면, 진보진영이 민족주의의 도움을 받은 적은 역사상 거의 없다고 봅니다. 우리가 원하는 방식의 동원이 가능할지에 대해서도 회의적인 입장이고요. 민족이라는 경계가 특정한 정치적 맥락에서 진보적 의미를 갖는 것이지, 민족주의에 대한 일반적인 옹호로 귀결되어서는 곤란합니다. 민족주의 동원력의 핵심은 남성성 아닌가요? 민족이 상상의 공동체라는 것은, 민족이 의미 없다거나 민족모순이 없다는 말이 아니지요. 민족공동체를 가능하게 하는 상상력, 그 이데올로기의 힘을 해부해야 한다는 것이죠. 그 상상력을 구성하는 핵심에 젠더 이데올로기가 있고요.
정현백•민족주의가 갖는 남성성은 저도 분명히 인정해요. 그리고 그런 남성성에 여성이 동원되는 것도 사실인데, 내가 다른 한편으로 생각하는 것은 국민국가가 여성의 운명을 결정한다는 거죠. 그것이 현실이고. 그러면 여성이 거기에서 발을 뺄 거냐? 나는 그건 아니라고 봐요. 오히려 국민국가의 현실을 어느정도 인정하고 그 안에 들어가서 적극적으로 개입해야지요. 현재는 국민국가의 본질이 남성성이지만 국민국가가 양성성으로 가도록 재건설하는 과정에 여성이 참여해야 한다고 보는 관점이에요.
정희진•맞습니다. 그런데 선생님 말씀은 국가를 성 중립적인 범주로 볼 수 있는 오해의 여지가 있습니다. 문제는 이등국민으로서 여성의 지위가 낮은 이유가, 여성이 참여하지 않아서는 아니잖아요? 사실은 참여해도 불평등하고, 참여하지 않아도 불평등하죠. 저는 민족이나 국가의 개념과 형성기반이 성별화되어 있기 때문에, 이는 참여냐 불참이냐의 문제가 아니라고 보고요. 또 지구화시대에 국가의 의미와 역할이 변화하고 있기 때문에, 개인의 다양한 정체성을 국민국가의 성원으로만 한정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현실을 들여다보면 반미집회 때 기지촌에서 살해된 윤금이씨 시신 사진을 전시하거나 ‘퍼킹 유에스에이’같은 노래를 부르는 것은 민족주의의 동원력과 여성의 인권문제가 갈등하는 대표적인 사례지요. 남정현의 「분지(糞地)」에서부터 시작된 문제입니다.
정현백•그렇죠. 아주 전형적인 경우죠. 우리가 여중생 범대위에 들어가 있었기 때문에 이에 대해 공식적으로 항의하고 여성단체들이 모두 그걸 비판하는 성명서를 냈는데, 문제는 남성들이 그게 무슨 소리인지 못 알아듣는다는 겁니다. 예전에 비슷한 에피소드가 있었죠. 동두천에서 기지촌 여성 살인사건이 났는데, 기자들이 쫓아왔다가 한국남성이 죽였다고 하니까 그 자리에서 돌아갔다잖아요. 미군이 죽였다고 하면 그때부터 취재하느라 난리법석인데 그런 현상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죠. 젠더 관점이 사회 구성원에게 침투하는 데는 아직 한계가 많이 있습니다.
국가와 타협하는 여성운동?
정희진•한국은 여성문제의 법제화가 상당히 빠르게 진행된 경우입니다. 여성운동의 힘이죠.
정현백•우리는 어쨌든 지난 10년간 국가가 여성정책에 대해 호의적이었잖아요. 19, 20세기 서구에서 국가와 자유주의 페미니즘 사이에 벌어졌던 갈등이 우리 사회에는 없는데, 국가의 가부장성이 덜 완고한 거죠. 그것은 국가 자체가 그만큼 정교하지 못하다는 얘기이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여성에 대해 호의적인 면이 있는 것 같아요. 이는 정권이 자기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한 방안이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민주화의 성과이기도 하지요. 또 한가지는 지금 우리 사회복지체제가 정착되는 과정이잖아요. 지금 거기에 개입하지 않으면 나중에 바꾸기가 굉장히 어렵기 때문에 국가와 함께 일하고 있기는 한데, 다른 한편으로는 굉장히 싸우고도 있죠. 요즘 반세계화운동에서는 민중운동도 중요하지만, 로비를 통한 압박도 중요한 전략의 하나잖아요. 그런데 밖에서는 여성운동이 국가와 너무 타협한다, 가깝다는 식의 오해가 있는 것 같아요.
정희진•우리 국가가 여성에게 호의적인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국가가 여성운동의 주장을 수용한 것은, 국가가 워낙 여성정책에 대한 전문성이 없는 탓이 크고, 사적 가부장이 강력한 사회이기 때문에 여성운동이 일상에서 개별 남성을 상대로 하지 못하고 개인 남성보다 ‘더 강력한 남자’인 국가에게 달려간 측면도 있지 않나요?
정현백•글쎄요. 국가를 강력한 남자로 전제하는 것에는 동의하기 어렵네요. 국가를 온전히 가부장적이라고 규정할지에 대해서도 논란이 있습니다. 국가는 국민 전체의 이해관계를 조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게다가 국가가 가부장제라는 고정된 실체라면, 여성이 국가에 개입할 필요도 애초부터 없지 않을까요? 오히려 개입해 들어가면 국가의 정책을 바꿀 수 있는 부분이 상당히 있어요. 그러면 여성이 정치에 들어가면 나아지느냐는 질문도 나오지요. 현재 여연에서는 한명숙(韓明淑) 총리가 불편하죠. 여연의 전 대표가 총리인 데서 오는 불편함이 있어요.
정희진•예, 말씀하신 대로 국가는 움직이는 실체죠. 저는 여성운동가가 정치지도자가 되는 현실을 지지하고 찬성하는 사람이에요. 여성주의 관료(femocrats)도 많을수록 좋구요. 문제는 그들이 우리가 비판해야 하는 위치에 있을 때죠. 역대 여성부 장관도 여연에서 배출됐잖아요?
정현백•여성정치인 시대라고 하지만 역학관계에서 그들은 힘이 없어요. 한명숙 총리가 실세가 아니라고 신문에서 떠드는데, 그 자체가 한국의 남성중심적 문화의 다른 표현이죠. 어찌되었든 한명숙 총리가 반여성적이거나 반민중적인 정책을 편다면 그건 비판해야겠죠. 사실은 그사이에도 평택 미군기지 이전이나 비정규직 문제, 그리고 한미FTA에 대해서도 여성운동에서는 비판을 전달했거든요. 그러나 상황에 따라서 필요하다면 공개적인 비판도 해야겠죠.
정희진•저는 공개적 비판을 하는 것이 오히려 그분에게 힘을 준다고 생각해요. “여론이 나쁘다”이렇게 말이죠. 그래서 남성들과 협상할 수 있는 뒷심이 되도록 하는 겁니다. 그건 노무현 대통령도 마찬가지예요. 한국에 반미여론이 많을수록 대통령이 미국에 가서 협상할 여지가 커진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이 바로 차이가 가진 힘이잖아요? 그런데 우리 사회는 그걸 국론분열이라고 얘기하죠.
정현백•예. 그래서 필요하다면 얘기해야 하는데, 아직은 시기적으로 여성들이 한총리가 좀더 힘을 가질 수 있도록 지지해주는 것이 필요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성매매 문제를 둘러싼 페미니스트들간의 차이
정희진•성매매방지법 법제화 이후 가장 힘드셨던 일은 어떤 것인지요?
정현백•성매매 여성들이 반대시위를 할 때 제일 힘들었어요. 그들을 설득하고 납득시킨다는 것이 쉽지 않았어요. 거기에는 굉장히 큰 계급문제가 수반됩니다. 그런데 포주들이 그걸 악용해서 여성단체 여성들은 성매매 여성들이 따라주는 커피는 더럽다고 마시지도 않는다, 그리고 굉장히 못생긴 여자들이 여성운동 한다고 얘기했다는 거예요. 그래서 이 사람들이 우릴 찾아와서는 “정말 못생겼네”하고 얘기하더라고요.(웃음)
정희진•실제로 ‘성판매’하는 여성 중에는 나이든 여성이나 중년여성, 아이엄마도 굉장히 많은데…… 누가 현실을 모르는지 모르겠군요.
정현백•성매매 문제에서 우리가 잘못 판단한 것 중 하나가 생계형 성매매의 존재를 처음부터 상정하지 못한 거예요. 이와는 반대로 사실 ‘사소한’동기로 성매매로 간 여성들도 있어요. 무분별하게 신용카드를 썼다가 그 돈을 갚지 못해 직업소개소를 찾아갔더니 돈을 잘 벌 수 있다고 해서 흘러들어간 경우죠. 소비욕망이 성산업으로 이끈 사례인데, 그런 경우에는 특히 자활이 어려운 것 같아요. 그러니까 여성계가 곤혹스럽고 괴로운 것은, 사실 성매매 규모를 줄이기 위해 성매매방지법을 만들기는 했지만, 이 과정에서 배제된 여성들에 대한 사회적 대책을 우리도, 국가도 제대로 못 세우고 있는 현실이지요. 죽을힘을 다해 뛰고 있기는 하지만요. 그렇더라도 거의 100만명으로 추산되는 성매매 여성의 규모를 줄였다는 점에서 저는 성매매방지법의 제정은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파생되는 남은 문제들의 해결을 위해 저희 여성단체나 국가가 열심히 노력해야지요.
정희진•예, 여성정책 중 가장 어려운 것이 성매매 부분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성매매는 사실상 가부장제 사회에서 남성과 여성의 모든 친밀한 관계를 망라하는, 엄청나게 넓은 스펙트럼으로 존재하잖아요. ‘원조교제’에서 감금 성매매까지 무척 다양하죠. 성매매, 성폭력, 이성애가 성역할이라는 동일한 연속선상에 있기 때문인데요, 소위 말하는 ‘명문대’여대생들도 ‘원조교제’를 합니다. 지금 출강하는 대학이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웃음) 제가 시간강사를 많이 했는데, 리포트를 보면 “사장님과 사귄다”는 얘기를 쓰는 학생들이 있어요. 그러니까 사장님의 돈이랑 여대생의 젊음과 학벌이 교환되는 거죠. 그런데 거기에 무슨 폭력이 들어가기는커녕, 손도 안 잡고 대화만 한다는 거예요. 그렇게 사장님과 데이트해서 모은 돈으로 유학 가겠다는데 뭐가 나쁘냐고 반문해요. 이런 현상을 보면, 이게 부의 재분배지 무슨 성매매인가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어요.(웃음)
정현백•성관계는 안 갖고요?
정희진•성관계를 하는 경우도 있죠. 하지만 ‘자발적’인 거예요. 젠더화된 자원과 매력의 교환이죠. 이처럼 성매매 범위가 매우 넓기 때문에, 이걸 법으로 제정할 때는 말씀하신 대로 모든 걸 제대로 대처할 수가 없죠. 어떤 면에서는 가부장제 자체가 남성 연대를 위한 여성의 교환이잖아요? 성상납 같은 게 대표적 사례죠. 여성을 몸으로 간주하는 가부장제 문화가 바로 성매매예요. 그런데 그 문화 중에서 어떤 부분은 불법이고, 어떤 부분은 로맨스고, 어떤 부분은 일탈인지를 구분하기가 어려운 데서 성매매방지법의 근본적인 철학적 딜레마가 있는 것 같아요. 역사적으로도 성매매는 여성주의자들 사이에 갈등이 첨예한 문제였죠.
우리 사회의 저출산 대책은 실효성이 있는가
정희진•이어서 저출산에 관한 질문을 좀 드리겠습니다. 저출산 현상을 ‘문제’라고 보십니까? 일부 여성주의자들은 ‘바람직하다’고 보기도 합니다.(웃음) 저출산은 성별관계의 결과이지, 육아와 사교육비 부담 등의 문제가 아니잖아요? 저출산은 기혼여성의 출산율이 낮기 때문이 아니라, 여성들이 결혼 자체를 안하기 때문에 발생한 현상입니다. 기혼여성의 출산율은 1.89로 거의 두명이고, 지금 25~40세까지 여성 중 비혼(非婚) 비율은 20%가 넘습니다.
정현백•도발적인 의견인데요.(웃음)
정희진•아, 통계청 자료에 근거해서 말씀드린 겁니다. 저는 지금 국가가 저출산 원인을 잘못 진단하고 엉뚱한 데 돈을 쓰고 있다고 봐요.
정현백•그 점에 대해서는 동의해요. 왜냐하면 독일이나 프랑스 같은 나라들이 저출산 대책으로 보육정책, 아동수당 그리고 모성보호에 대한 지원에 집중했다가 실패했거든요. 그래도 일단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보육정책밖에 없으니까 지난 1년간 기를 쓰고 보육예산을 위해 재경부나 기획예산처와 싸워오기는 했지만, 보육이나 모성보호 정책을 통해 저출산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아요. 보건복지부가 행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취업한 기혼여성의 49.9%가 첫아이를 낳고 직장을 그만둡니다. 직장이 안정되어야만 여성들이 아이를 낳을 수 있다는 얘기죠. 탁아는 오히려 부차적이에요. 그러니까 일자리 창출을 통해 여성이 일과 가정을 병행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지 않으면 실질적으로 저출산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이 내 입장인데, 이에 대해서 여협은 굉장히 반대했어요. 여협은 출산장려운동을 하자는 입장이기 때문이죠.
그리고 보육노동은 남녀가 공동으로 분담하지 않으면 해결되지 않죠. 아무리 보육시설이 발달한다 해도 실제로 아이가 아파서 밤새 간호해야 하는 경우 아빠와 엄마가 함께 하지 않으면 안되니까요. 돌봄노동을 남성과 여성이 같이 하기 위해 아빠의 육아휴직제도를 관철시켰어요. 하지만 부성휴가를 유급화하는 것은 실패했어요. 그런 점에서 우리는 원칙적으로 지금의 저출산 대책으로는 문제해결이 가능하지 않다고 봅니다. 참 당혹스러운 것이 모 재벌기업 연구소에서 낸 보고서는 아무리 해도 출산율 향상이 어렵다, 그러니까 정년을 늘리고 외국인 노동자를 늘릴 수밖에 없다, 그것이 사회적 비용을 줄이는 길이다라는 결론을 내렸다고 해요. 우리는 저출산을 계기로 해서 차제에 일과 가정의 양립을 확산할 수 있는 방법으로 보육을 밀어붙인 겁니다. 첫걸음은 보육예산을 늘리는 데서 출발할 수밖에 없네요. 물론 지금 늘려도 새발의 피예요. 나의 독일생활 경험에 따르면 유학생 부부가 유학 말기에, 한국의 부모가 생활비를 못 보내면 아이를 낳거든요. 그러면 국가에서 양육수당이 나오는데, 그 액수가 가난한 유학생에게는 생활비의 60% 정도가 되지요. 그러면 청소 같은 일이라도 하면 대체로 학위 끝내고 올 수 있거든요. 그런데 우리는 아무리 보육예산을 늘린다 해도 그 정도 수준까지 올라가기란 불가능해요.
정희진•우리나라에서는 아이를 낳으면 부모가 원래의 계급을 유지할 수 없죠.
정현백•그러니까요. 그래서 여성들은 직장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현실적으로 더욱 힘들죠. 독일은 출산 후 3년 내에 직장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해주잖아요. 3년간 육아휴직을 하면, 그 자리에 임시직만 쓰게 되어 있죠. 우리도 조금씩 그런 보장이 이루어지고 있기는 하지만 아직도 얼마나 부족한지…… 이런 독일만 해도 제 주변에 있는 여자 중에 아이엄마는 거의 없었어요. 이혼하거나 아예 결혼하지 않은 사람이 대부분이었죠. 현실적으로 일과 가정을 병행하기가 쉽지 않아요.
정희진•저는 공적인 영역에서 아무리 제도화가 되어도 사적인 영역에서 남녀간 권력관계가 변하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정말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거죠. 낙태도 마찬가지고요. 한국산 콘돔이 세계시장 점유율 27%거든요. 1위예요. 그런데 콘돔을 그렇게 많이 수출하는 나라에서 낙태도 굉장히 많잖아요. 콘돔을 자판기에서 사탕처럼 판다고 해도, 사적 관계에서 여성이 남성에게 콘돔 사용을 강제할 권력이 없으면, 낙태는 있을 수밖에 없어요. 이처럼 저출산 문제도 남성 개개인들의 여성관, 가정관, 육아관에 굉장한 변화가 있지 않으면 해결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여성들은 희생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결혼 안하겠다는 거죠. 그리고 여성들 중 13~15%가 불임이라고 하거든요. 그러니까 모든 여성이 아이를 낳는 것도 아니죠. 출산은 생물학적인 것이 아니라 사회적 선택입니다. 모든 여성이 아이를 낳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낳고 싶은 것도 아닌데, 우리 사회는 출산을 무슨 본능처럼 생각해요.
‘개인적 글쓰기’와 사적 영역에서의 젠더 문제
정희진•마지막으로 두 가지 정도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선생님에게 글쓰기는 어떤 의미인지요? 저는 글을 쓸 때, 논문이든 ‘잡문’이든 독자를 제가 아는 어떤 사람, 단 한 사람으로 생각하고 쓰거든요. 보통은 대중적인 글쓰기를 해야 한다고들 하는데, 글쓰기와 관련한 선생님의 철학을 듣고 싶습니다. 여성학은 기존 분과학문의 경계를 횡단할 수밖에 없으니까, 여성주의 지식인에게 다학문적(多學問的) 글쓰기는 축복이자 부담이라고 생각하는데요. 이 얘기와 더불어 선생님 저서 『민족과 페미니즘』의 마지막 글을 보면, 선생님은 여성으로서 억압받았다기보다는 지식인으로서의 고민이 더 컸다고 하셨는데, 이번에는 여성으로서의 분노라든가 문제의식 같은 것을 말씀해주세요.
정현백•나는 무엇보다 내 글쓰기가 너무 사회화된 게 불만이에요. 나 스스로 탈출하지 못하는 불만이죠. 우리 시대의 지식인이라는 존재는 공적인 인간으로만 있지 사적인 개인이 없어요. 그래서 내 글쓰기에는 은폐가 있다는 열패감 같은 것이 있어요. 학교 다닐 때도 그렇고 귀국한 이후에도 나는 한번도 사회운동과 떼어서 독자적으로 자신을 위치지어본 적이 없거든요. 여연을 맡고 난 다음에는 그런 현상이 더 심해져서, 글쓰기에서 자기해방이 되지 않는 느낌이에요. 정년퇴임하면 우선은 30년간 못 읽은 소설책을 다 읽고, 두번째로는 우리 시대 여성들에 대한 집단 전기학을 쓰고 싶어요. 대부분 씨스템 속에서 평범하게 살아갔지만, 그 속에서도 평범하지 않았던 특이한 인물들이 있거든요. 그 사람들이 생존해 있는 동안은 사실 얘기하기가 힘든데…… 그들의 이야기를 정리해서 비밀에 묻혀 있는, 70년대 여성들이 살아온 삶을 주제로 글을 쓰고 싶어요. 그걸 써서 집단 전기학을 정리하고, 그 다음에 내 얘기를 하고 싶어요.
정희진• ‘사적인’영역에서 여성주의자로서 정치적 갈등이 있었다면요? 이를테면 결혼 문제 같은 것……
정현백•나는 결혼했으면 망했을 거예요.(웃음) 아마 속 썩이는 남편을 경제적으로 뒷바라지하면서 참고 살았거나, 아니면 전형적인 극성 엄마가 되어서 아이를 일류대학 보내려고 난리치고 살았을 것 같은 생각이 들어요. 우리 사회에서 여성들이 선택할 수 있는 입지가 좁으니까. 특히 우리 세대는 그래요. 소위 출세했다고 하는 제 친구가 있는데, 독서열도 굉장히 높고, 직장에서도 모범적이고 성공적인 삶을 살고, 남편과의 관계도 괜찮은데, 그 모든 것이 자신의 개인적 욕망을 철저하게 포기한 위에서 가능했어요. 저도 연애는 몇번 했어요. 그런데 실제로 결혼은 용기가 안 나서 못했지요.(웃음)
정희진•연애에서는 젠더 문제가 없으셨어요?
정현백•당연히 있었죠. 우리 시대 70학번 남자들은 다 조선족 국화빵이었기 때문에…… 국화빵을 찍어내듯이 다 똑같은 조선사람이었다는 거죠.(웃음) 그러니 거기에 대해 대부분 타협해야 살았겠죠. 그리고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개인적인 연애에도 사회운동이 매개되어 있었고, 그런 가운데 남성상이라는 것은 거의 전형화되어 있어서, 그렇지 않은 사람을 발견하기가 어려웠어요. 아니면 아주 모험적인 사람들인데, 그런 사람은 무진장 속을 썩였겠죠.(웃음)
어느 사회에서나 여성주의 지식인은 여성학교육, 여성정책, 여성운동에 개입해야 하는 삼중의 실천을 요구받는다. 그래서 대개 여성주의자들은 ‘속도사회’에 저항하면서도 정작 자신의 일상은 엄청나게 바쁜 모순 속에서 살아간다. 하지만 여성주의자의 삼중노동을 다른 말로 하면, 이 세 가지 영역 모두에 대해 폭넓은 대화가 가능하다는 이야기도 된다. 원래 이 인터뷰의 녹취록은 270매에 달했는데, 여기 실린 내용은 그 반도 되지 않는 120여매다. 편집되는 바람에 본문에는 자주 나오지 않지만, 인터뷰 도중 정현백 대표가 많이 사용한 표현 중 하나가, “따로 또 같이”혹은 “새판짜기와 끼어들기를 동시에”였다. 연대 속의 비판, 협력과 독자행동은 그가 일관되게 생각하는 여성운동과 진보진영의 관계상이다.
90년대 이후 한국사회에서는 민중, 계급 대신 ‘시민사회’라는 개념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여성과 시민을 배타적인 범주로 보는 “시민운동과 여성운동”이라는 용어도 함께 쓰이게 되었다. 87년체제 이후, 남성은 ‘시민사회’와 ‘민주적 노동조합운동’으로 계급분화가 일어나지만, 여성은 반대였다. 여성운동은 노동계층 여성과 중산층 여성이 ‘여성’이라는 범주로 함께하게 되었고 이것이 여연의 탄생 기반이다. 이러한 현상은 여성의 주변화에 기반한 시민권의 성별화된 경로를 보여주는 것이다. 여성에게는 계급보다 젠더가 더 의미있는 정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후 여성운동의 비약적 발전은 ‘남성들처럼’여성들 내부의 차이를 드러내고 있다. 이제 “따로 또 같이”는 여성과 남성의 관계에서 여성운동의 전략일 뿐만 아니라, 각기 다양한 계급과 정체성 속에서 살아가는 여성들이 다른 여성과 어떤 관계를 설정할 것인가에 대해서도 적절한 구호가 되었다. 어떤 여성들은 남성에게 억압받으면서 동시에 다른 여성으로부터도 차별받는다. 지구화시대의 젠더는 여성과 여성의 차이, 남성과 남성의 차이를 설명하지 않고는 이해될 수 없다. 다시 말해, 여성에게는 남성과의 차이를 강조하는 성별 이해(gender interests)를 실현하기 위한 운동—흔히 ‘근대적 여성주의’라 불린다—을 해나가는 동시에, 자신을 가부장제가 기획한 남녀의 이분화된 체계에 고정시키지 않는, 이중의 과제가 주어진 것이다.
정현백 대표가 기억할지 모르겠지만, 나는 몇년 전 그와 같은 지면에서 만난 적이 있다. 모 대학의 여학생 교지에서 민족과 젠더에 대해 상이한 입장을 가졌다는 두명의 여성주의자를 각각 인터뷰한 것이다. 당시 우리를 인터뷰했던 대학생들이 나를 ‘페미니스트’로, 정대표를 ‘민족주의자’로 간주하여 몹시 당황했던 기억이 있다. 나는 그때 인터뷰에서도 “국적 없는 여성이 없지만 동시에 젠더 없는 민족도 없다” “민족과 여성 모두 환원적인 범주가 되어서는 안된다”고 강조했는데, 잘 소통되지 않았던 것 같다. 이러한 호명은 그에게도 내게도 ‘억울’하다. 모든 이야기는 그것을 말하는 사람이 처해 있는 현장의 산물이며, 따라서 부분적 진실이다. 어떤 면에서 우리의 일상은 기존의 경계를 넘나들며 삼투와 투석(透析)을 끊임없이 시도하고 있는데, 이에 반해 현실을 설명하는 언어는 너무나 고정적이어서 새로운, 언제나 움직이는, 영토를 갖지 않는 정치적 공동체를 상상하기가 어렵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