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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단과 현장

 

카메라는 바라본다, 그리고 묻는다

EBS국제다큐멘터리 페스티벌 2006

 

 

고영범 高榮範

영화감독, 서울예술대학교 영화과 겸임교수.단편영화 「낚시가다」 등을 연출했고, 역서로 『독립영화 만들기』 『시나리오 어떻게 쓸 것인가』 등이 있음. oldbumk@freechal.com

 

 

지난 7월 10일에서 16일까지 EBS다큐멘터리 페스티벌(EIDF 2006)이 열렸다. 이번으로 3회째를 맞는 이 페스티벌에는 ‘페스티벌 초이스—화해와 공존, 번영의 아시아’ ‘EIDF다큐멘터리 최전선’ ‘EBS미래리포트’등 총 13개 쎅션에 걸쳐 장편 63편, 단편 10편이 선정되었다. 여기서‘EBS미래리포트’는 EBS의 현역 PD들이 제작한 것으로, 이들을 빼면 지난 한해 동안 전세계에서 만들어진 다큐멘터리 중 60여편이 공중파TV를 통해 국내에 소개된 것이다. 현대 다큐멘터리의 주요작가 중 하나인 로스 매켈위(Ross McElwee)가 어느 인터뷰에서“요즘에는 다큐멘터리라는 용어가 의미하는 것이 불확실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각양각색의 시도들이 이뤄지고 있다”고 말한 것처럼, 이번 EIDF에는 실로 다양한 스타일을 지닌 작품들이 선을 보였다. 대부분의 작품들이 충분히 언급되어 마땅한 가치를 지니고 있지만, 온라인상에서 가장 극단적인 평가를 받은 두 작품을 통해 우리 관객의 수용의 스펙트럼을 살펴보기로 하자. 이번 영화제 출품작들 중 가장 파격적인 형식으로 매우 뜨거운 반응을 불러일으킨 작품은 영국 감독 브라이언 힐(Brian Hill)의 「쏭 버즈」(Song Birds, 2005)였다.

이 영화는 영국 써튼지방의 다운뷰 교도소에 수감된 죄수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 교도소에는 250여명의 여죄수가 갇혀 있다. 죄명은 마약매매에서 살인까지 다양하지만, 자신들이 이야기하는 교도소 밖에서의 삶의 모습은 크게 다르지 않다. 어렸을 때는 아버지에게, 나이 들어서는 남자친구나 남편에게 학대받은 경험이 이들을 폭력적인 인간으로, 혹은 법의 영역 밖에 거주하는 인간으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남성들만 이들을 학대한 것은 아니다. 학대당하는 이들을 보고만 있었던 동료 여성들, 특히 무력한 어머니에 대한 기억은 이들에게 한결같이 큰 상처로 남아 있다. 등장인물들을 괴롭히는 것은 물론 오랜 기간에 걸친 피학대의 기억과 현재의 수감생활이지만, 무엇보다 견디기 힘든 건 밖에 두고 온 아이들의 존재다. 아이들에 대한 그리움으로 인한 아픔도 있겠지만, 이들을 내면으로부터 파괴하는 것은 버림받은 상처를 지닌 자신이 자식들에게도 같은 종류의 폭력을 저질렀다는 깨달음이다. 아버지와 이 사회의 남성들이 자신을 학대할 때 방관하고 보호해주지 않았던 어머니를 비롯한 성인여성들의 과오를 자신이 더욱 적극적인 형태로 자행했다는 죄의식이 이들을 근본적으로 괴롭히는 것이다.

형식상으로 영화는 크게 수감자 몇사람의 인터뷰와 그들이 직접 출연한 뮤직비디오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작가는 인터뷰를 통해 수감자 개인에게 일어났던 일들을 진술하게 하고, 뮤직비디오에서는 그 과정에서 이들이 입은 정신적 상처와 내면에 고여 있던 이야기를 다양한 대중음악 장르에 얹어 보여주는 식이다. 객관적인 서술부는 산문으로, 감정적이고 사적인 서술부는 음악에 실린 노랫말로 그 표현영역을 나눠놓은 것이다. 그렇다면 ‘사전조작 없이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담아낸다’는 다큐멘터리에 관한 가장 오래되고 느슨한 정의조차 ‘가볍게’무시하고 있는 이 작품을 다큐멘터리로 규정하는 판단기준과 내용은 무엇인가.

현대작가 중에서 이 문제에 명확한 답을 내놓은 사람은 별로 없다. 앞서 언급한 로스 매켈위는 자신의 작품을 ‘논픽션에쎄이 영화’라고 부르면서 다큐멘터리의 개념과 영역 논쟁에서 스스로 비켜나 있고, 휴대 가능한 동시녹음용 16mm카메라를 개발해 미국판 씨네마 베리떼(cinéma vérité, 진실의 영화)라고도 불리는 다이렉트 씨네마(direct cinema)를 여는 데 크게 공헌한 페니베이커(D.A. Pennebaker) 역시 자신의 작업을 ‘논픽션문학에 가까운 어떤 것’으로 규정했을 뿐이다. 심지어 다이렉트 씨네마의 엄격한 제작방법론을 제시하고 여전히 그 방식을 사용하고 있는 프레더릭 와이즈먼(Frederick Wiseman)은“다큐멘터리는 연극이나 소설, 시와 마찬가지로 픽션의 한 형식으로 ‘리얼리티 픽션’(reality fictions)이라고 할 수 있다”고 극언한 바도 있다. ‘사실의 기록으로서의 다큐멘터리’로부터 ‘리얼리티 픽션으로서의 다큐멘터리’에 이르는 이 다양한 견해들의 스펙트럼을 관통하는 특성에 대해 명확한 대답을 부여하고자 한 이는 현역 다큐멘터리 작가 중 가장 완고하게 미국판 씨네마 베리떼의 전통과 방법론을 고수하는 알버트 메이슬스(Albert Maysles)이다.

그는“다큐멘터리 작업의 핵심은 대상을 컨트롤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컨트롤의 결여에 있다. 그러나 그것이 단지 ‘벽에 붙은 파리’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수중의 온갖 기법을 다 쓰되 (대상에게) 변화를 일으키려는 노력은 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한다. 메이슬스는 미국판 씨네마 베리떼의 주요 모토였던 ‘벽에 붙은 파리’, 즉 카메라는 대상에게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않고 단지 관찰자로 기능해야 한다는 생각을 적극적으로 부정하지만, 여전히 인터뷰를 거의 하지 않고, 가능하면 대상과 눈도 마주치지 않고 일상적인 대화도 없이 촬영에 임한다. 메이슬스의 생각에 그러한 사소한 행위조차 대상을 정서적으로 휘젓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그 대신 그는 대상의 상태를 면밀하게 관찰하고 정서적으로 접근하는, 이른바 ‘응시와 감정이입’(gaze and empathy)을 중시한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이야기가 대상에 대한 작가의 전기가 아닌, 대상의 자서전이 될 때 좋은 다큐멘터리가 완성된다고 말한다.

「쏭 버즈」는 표면적으로는 미국판 씨네마 베리떼와 큰 차이를 보이지만, 사실상 메이슬스의 이같은 신념을 매우 잘 반영하는 작품이다. 이 작품에서는 등장인물 하나하나가 자기 이야기를 풀어낼 충분한 공간뿐 아니라 선호하는 표현매체도 얻는다. 아름답고 세심하게 구성된 미장쎈과 세련된 촬영은 교도소라는 현실 속에서도 인물들 내면 깊숙이 간직된 여성성을 부각시키려는 의도로 읽힌다. 이 영화의 성취는 대상에 대한 조작보다는 작가의 도구인 카메라의 표현방식을 적극적으로 확장한 형식적 파격에서 비롯된다.

이번 영화제에서 「쏭 버즈」만큼이나 독특하고 매력적이지만 정반대로 아주 차가운 대접을 받은 작품이 「일용할 양식」(Our Daily Bread, 2005)이다. 오스트리아 감독 니콜라우스 가이어할터(Nikolaus Geyrhalter)의 이 작품은 우리 식탁에 오르는 식재료들이 생산되는 과정을 내레이션이나 음악, 효과 등의 도움 없이 보여준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소, 돼지, 닭 들은 고도의 효율성을 위해 고안된 장치 위에서 단 하나의 예외도 없이 예정된 길을 간다. 관객들은 동물들의 예정된 생애 끝에 놓인 도살의 살풍경에 불편해하고 심지어 분노하기도 하는데, 그 배후에는 이들 동물들의 운명의 예외 없음에 대한 절망과 그것을 보여주는 카메라의 차가운 눈에 대한 거리감이 놓여 있다. 이 작품에는 대상을 개별적으로 포착하는 클로즈업 쇼트가 단 한번도 등장하지 않는다. 예외 없는 운명을 가진 대상에게서 개별성을 읽어낼 수도 없거니와, 정서적 개입을 전제로 ‘가까이 들여다보는’클로즈업이 전혀 필요하지 않다고 판단했기 때문일 것이다.

도살의 피할 수 없는 잔혹함을 가감없이 보여준다는 점에서 동물보호주의자의 선동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겠으나, 격앙된 감정을 누르고 나머지를 들여다보면 식물들에게도 같은 시선을 던진다는 것을 알게 된다. 비닐하우스 안에서 재배되는 각종 작물들은 고추건 오이건 사람 키를 넘겨서까지 깨끗하게 정렬된 채 촘촘히 열매를 매달고 있고, 초원에 시원하게 펼쳐져 자라는 작물조차 때가 되면 기계적으로 수탈당하는 운명을 면치 못한다. 자그마한 열매들을 가득 매달고 선 나무에게 진동기계가 다가와 온몸을 뒤흔들어 열매를 떨어뜨리고, 해바라기꽃이 들판을 황금빛으로 물들일 때 이들 위로 비행기가 건조제를 뿌리며 날아간다. 그러자 순식간에 말라버린 해바라기를 거대한 콤바인의 칼날이 훑고 지나간다. 더 놀라운 것은 비닐하우스 안의 작물들이 땅에 뿌리박은 것이 아니라 영양분을 담고 있는 스티로폼에 살짝 꽂힌 채 천정에 매달려 자라고 있다는 사실이다. 수확이 끝나면 이들은 마치 참수당하듯 가느다란 밑동을 잘리고 만다. 이 참혹한 기계적인 이미지는 보는이에 따라서 동물의 도살보다 더 끔찍하게 느껴질 것이다.

작가는 이런 장면 틈틈이 식품공장에서 일하는 이들의 식사장면을 끼워넣는다. 사육장과 도축장, 비닐하우스, 들판에서 헤드폰을 낀 채 아무 말 없이 일하던 이들은 역시 아무 말 없이 자기 몫의 식사를 마친다. 생산재와 생산자를 차분하게, 매우 균형잡힌 아름다운 영상으로 보여주면서 작가는 과연 무엇을 말하려 한 것일까? 정말로 육식을 하지 말자는 얘기인가? 어차피 삶이란 먹고 먹히는 관계다?

쉽게 단정해 대답할 수 없는 이런 방식의 질문을 던지는 것, 보여주고 질문을 던지는 일 외에 아무런 시도도 하지 않는 것을 처음으로 본격적인 방법론으로 삼은 이는 아마도 앞서 언급한 프레더릭 와이즈먼일 것이다. 그는 정신질환이 있는 죄수들을 수용하는 시설을 다룬 「티티컷 풍자극」(Titicut Follies, 1967) 이래 최근의 「정원」(Garden, 2006)에 이르기까지 36편의 영향력있는 다큐멘터리를 만들어온 거장이다. 그는 이 작품들을 통해 시종일관 조직과 개인의 관계를 다루면서 일체의 내레이션이나 음악 등의 요소를 사용하지 않고 여러 대상의 일상생활을 포착한 후 편집과정에서 조심스럽게 그들 사이의 관계를 드러내며 판단은 관객에게 맡기는 방법을 써왔다. 첫 작품 이래 상당히 강력한 효과를 가진 것으로 증명된 이 스타일은 이후 다이렉트 씨네마의 흐름에서 중요한 형식적인 특성의 하나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오늘날의 TV다큐멘터리, 특히 소위 ‘휴먼다큐’라는 영역에서 여전히 중요한 방법론으로 활용되고 있다.

영화 「일용할 양식」의 한 장면

영화 「일용할 양식」의 한 장면

그렇다면 이처럼 상당히 잘 알려지고 감각적으로 익숙한 방법론에 기대어 있는 「일용할 양식」이 이렇게 낯설고 거북스러운 이유는 무엇일까? 우선 형식상의 ‘지나친 일관성’을 들 수 있다. 앞서 언급했듯 이 작품은 관찰자의 시선의 거리를 유지하기 위해 일체의 개별적인 클로즈업 쇼트를 배제하며, 대상의 규모를 보여주기 위해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카메라를 고정하고 있다(특히나 식재료가 될 운명인 동물과 식물 들을 보여줄 때에는). 그 결과 카메라와 피사체 사이에 극복되기 어려운 차가운 거리가 생긴다. 관객은 대상에 대한 감정이입을 차단당하고 오로지 지적인 판단을 통해서만 작품세계로 진입할 수 있다. 소위 ‘어려운 작품’이 되는 것이다. 여기에 우리 ‘TV환경’의 영향도 한몫한다. 우리 TV다큐멘터리는 크게 보아 소위 휴먼다큐와 시사/역사 다큐멘터리로 나뉘는데, 주로 감성에 호소하는 휴먼다큐는 말할 것도 없지만 복잡한 역사적·사회적 이슈조차 감성화시키는 경향에 익숙해져 있는 우리 관객들에게 이 작품은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웠을 것이다.

다양한 스타일과 경향의, 상당한 수준에 도달한 작품들로 채워진 이번 EIDF에서 초청작가로 존 앨퍼트(Jon Alpert)가 선정되었다는 점은 매우 흥미롭다. 그는 70년대부터 지금까지 길고 짧은 87편의 작품을 만들었으니 한해 평균 세편은 만든 셈이고, 그동안 에미상을 열두 차례나 수상한 ‘묵은 구렁이’지만, 정작 다큐멘터리 영화제에서 주목받은 적은 별로 없었다. 우선은 그가 TV저널리스트로 출발해 철저히 TV중심으로 활동해왔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특출난 자기 스타일을 고집하지 않는 작가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EIDF가 존 앨퍼트를 초청작가로 선정한 것은 TV를 기반으로 한 다큐멘터리 페스티벌로서의 정체성을 확보하고자 하는 노력인 것 같아 매우 반가웠다.

존 앨퍼트는 70년대에 뉴욕 다운타운의 커뮤니티 활동가로 일을 시작해서 효율적인 활동매체로 비디오를 선택한, 이를테면 문화운동가이다. 1972년에 그가 시작한 DCTV(Downtown Community TV)는 현재까지 미국 내에서 가장 성공한 미디어운동단체로 손꼽힌다. DCTV이후 미디어 민주주의에 대한 관심이 고양되면서 많은 단체들이 생겼지만, 아직까지 남아서 제 역할을 하고 있는 곳은 찾기 어렵다. DCTV는 존 앨퍼트가 5달러를 주고 구입한 폐차 직전의 고물 우편배달차에 TV를 싣고 다니며 거리상영회를 열면서 활동을 시작했다. 작품내용은 지역 교육위원회의 문제를 비롯한 지역현안을 다룬 것들이었다. 주민들로 하여금 지역문제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하려는 것이 활동의 기본목적이었다. 그후 DCTV는 버려진 소방서 건물을 사들여 지역주민에게 비디오 제작을 교육하고, 한편으로는 미디어를 통한 지역운동을 전개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전문적인 제작인력을 양성해내기 시작했다.

이번에 상영된 네 작품 중 「의료보장제도: 돈과 생명의 거래」(Healthcare: Your Money or Your Life, Part I, 1977)는 이 시기에 만들어진 작품이다. 이 작품은 의료보장제도에 의지하는 가난한 사람들의 병원과 부자들의 병원을 직접적으로 비교하면서, 간단한 의료기기의 부품 하나를 교체할 예산이 없어 환자가 죽어나가는 가난한 킹스카운티 시립병원의 모습을 보여준다. TV에서 금기로 취급되어왔던 실제 죽음의 모습은 당시 엄청난 충격을 불러일으켰다. 사회적 금기를 두려워하지 않고 사실을 직시하는 태도, 미디어는 사회적 여건의 개선을 위해 쓰여야 한다는 앨퍼트의 신념은 그후로도 줄곧 이어져 그의 작품세계의 골간을 형성했다. 그가 스스로도 인정하는 바이지만, 그는 영화적 스타일이나 테크닉에 자신이 없을 뿐만 아니라 큰 관심도 없다. 관심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에 대해 그다지 즐겨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의 스타일은 표면적으로는 미국판 씨네마 베리떼와 닮아 있지만, 메이슬스 형제처럼 응시와 감정이입을 중시하는 태도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사회적 맥락에서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것을 보여준다는 면에서 전형적인 저널리스트의 면모를 가지는가 하면, 이야기의 완결성을 가장 중시한다는 면에서는 페니베이커와 닮아 있다.

그가 자신의 병든 아버지의 말년을 담아낸 「파파」(Papa, 2002)에서조차 그런 태도는 사라지지 않는다. 불치의 병으로 죽어가는 아버지를 바라보는 그의 시선에는 어떠한 감상주의도 개입되지 않는다. 다만 아버지의 말 한마디 한마디를 곱씹고, 그의 일과를 담아내는 일에만 관심을 기울일 뿐이다. 이미 치유 불가능하다는 판정을 받은 채 10년 넘게 신경계통의 질병을 앓아온 아버지는 더이상 고통을 이겨내며 살아가는 것이 불필요하다는 판단이 서는 순간, 그리고 어지럽혀진 서재를 다 정리하는 순간, 자신의 삶을 스스로 마감하겠다고 말한다. 작가는 아버지의 자살계획을 다함께 생각하고 이야기를 나눠야 하는 소재로 삼아 식구들에게 공개해버린다. 영화는 아버지가 그동안 가족들에게 숨겨왔던 사실, 즉 젊은 시절에 자살한 아버지의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로 이어지면서, 아버지가 오랜 세월 혼자서 감당해왔던 고통을 가족들이 나누는 장면으로 연결된다. 한편, 작가의 형제들은 아버지가 서재 정리를 마치는 걸 막기 위해 일부러 서류들을 흩뜨려놓는가 하면, 무언가 아버지가 열중할 수 있는 일을 만들어주기 위해 애쓴다. 아버지는 작가가 이 작품을 만드는 이유조차 자신을 붙들어 매어놓기 위한 술책으로 여길 정도다. 이 모든 이야기는 항상 현실을 직시하는 어머니의 강한 성격과 작가 가족의 유머감각에 뒤섞여서 필연적인 끝, 아버지의 죽음을 향해 흘러간다. 이야기가 끝나고 난 뒤 작가는 아버지가 자기 삶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자막으로 이 작품을 마무리한다.

한 작가가 자신의 매체 안에서 하나의 방법론을 고수하고 그것을 심화시키는 과정을 보는 즐거움도 크지만, 세상의 다양한 이야기를 들여다보며 스스로 성장하고 그 다양성들을 두루 이해하고 담아내는 과정을 지켜보는 것도 분명 의미있는 일이다. TV를 주무대로 활동해온 한 작가의 이런 성장과정을 지켜보면서 드는 생각은 우리 TV에도 과연 이런 여지가 있는가 하는 점이다. 존 앨퍼트는, 우리 식으로 표현하자면 외주제작 환경에서 성장한 작가이다. 과연 우리 TV씨스템이 외주제작 감독에게, 심지어는 방송국 직원인 PD에게조차 이런 성장의 통로를 어느 정도나 열어주고 있는지 심각하게 질문을 던져봐야 할 때이다. TV다큐멘터리는 오늘날 한국 다큐멘터리의 지도에서 명백하게 가장 넓은 영토를 차지하고 있고, 우리는 그 안에서 살아야 한다. 이 영토 안에서 자라나고, 그 땅에 반역하여 갈아엎고, 그리하여 결국 이 영토를 풍요롭게 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확보해나가는 그런 작가가 출현할 수 있는 건강한 정신의 싸움터로서 TV다큐멘터리가 필요한 것이다. 이번에 존 앨퍼트를 초청한 EIDF에 그런 문제의식이 있었기를, 그리고 그것이 EBS를 시작으로 해서 방송국들의 폐쇄성과 엘리뜨주의를 넘어 우리 TV다큐멘터리 제작씨스템에 대한 문제의식으로 전개되기를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