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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평론
꽃의 뿌리를 향한 행려의 기록
박영근 추모평론
나희덕 羅喜德
시인, 조선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시집 『어두워진다는 것』 『사라진 손바닥』, 시론집 『보랏빛은 어디서 오는가』 등이 있음. rhd66@hanmail.net
아, 사람들은 쉽게 모든 걸 참는구나. 사람들은 여전히 젊고 건강하기만 하다.
—케테 콜비츠의 ‘전쟁일기’중에서
박영근(朴永根) 시인을 떠올릴 때마다 그는 나에게 황량하고 어두운 거리를 터벅터벅 걷고 있는 모습으로 현상된다. 한밤중 술취한 목소리로 아직 살아 있다고, 또는 살고 싶다고 타전해올 때에도 그의 한숨과 침묵 사이로 끼어들던 것은 밤거리를 질주하는 차 소리였다. 빗물을 으깨는 차들의 굉음 속에서 위태롭게 들리던 목소리는 늘 젖어 있었지만, 길 위에서 느꼈을 통증이 얼마나 치명적이었는지 실감한 것은 그가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고 난 뒤였다.
이제 내가 신뢰할 수 있는 것은 가끔씩 찾아오는 통증뿐인가. 그 통증이 시시때때로 나를 텅 빈 공장 마당에 세워놓고 끝도 없이 기계를 돌리게 하고, 지쳐 녹슬어가는 사유의 뼈대 위에 톱밥 따위를 날려줄 것인가. 이제 나의 글쓰기 곁에는 서성거리는 그림자조차 없지 않은가. 고통만이 구원이라면 참으로 지나친 것이 아닐 수 없다. (박영근 「오늘 살자, 모든 것은 지나간다」,『실천문학』 2000년 봄호, 53면)
지나간 연대에 대한 어떤 강박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시인들에게 ‘길’은 여전히 고통스러운 현재형의 은유일 수밖에 없다. 신경림의 『길』, 백무산의 『길은 광야의 것이다』, 최두석의 『꽃에게 길을 묻다』 등에서 ‘길’이 인생론적 범주를 넘어 한 시대를 건너는 일을 의미했듯이, 박영근이 줄곧 길 위에서 보여준 행려의 자취는 단순한 부랑이 아니라 속화된 세계에 안주하기를 거부하는 일종의 싸움이라고 말할 수 있다. ‘행려(行旅)’의 의미는 ‘여행(旅行)’과 대비시켜보면 더 선명하게 드러나는데, ‘여행’이 떠나온 곳과 돌아갈 곳이 비교적 분명한 이가 잠시 일상을 벗어난 상태라면, ‘행려’는 정해진 거처나 돌아갈 곳이 없는 이가 근원에 대한 갈망을 지니면서도 자신을 묶고 있는 현실을 벗어날 수 없는 상태를 말한다. 따라서 귀환을 전제로 떠돎의 자유를 누리는 ‘여행’과는 달리 ‘행려’는 어디로도 돌아갈 수 없음을 고유한 존재방식으로 수납한 자의 떠돎이다. ‘행려’라는 말에서 방외인의 고독이나 남루하고 병적인 이미지가 읽히는 것은 그래서이다.
‘행려’는 귀향과 해탈을 유보하거나 반납하고 길 위의 삶을 온몸으로 받아들인다는 점에서 ‘불귀(不歸)’의 정신과도 통한다. 임우기는 「미당 시에 대하여」(『그늘에 대하여』, 강 1996)에서 미당의 시에는 세속적 삶의 고투 속에서 얻어진 ‘그늘’이 없다고 비판하면서 그 원인으로 타성화된 영원회귀를 들었다. 그러고는 ‘회귀’의 반대편에 ‘불귀’를 놓고, 나그네 정신의 연원을 소월에게서 찾았다. “어제도 하룻밤/나그네 집에/까마귀 가왁가왁 울며 새웠소”로 시작되는 소월의 「길」은 고향을 그리워하면서도 어디로도 돌아갈 수 없는 불귀의 운명을 노래하고 있다. 돌아갈 수 없음의 비애는 김지하의 「不歸」에서 다시 빛나는 표현을 얻기도 하는데, 박영근의 행려의식은 그 연장선상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끝없는 행려의 길로 박영근을 이끌었던 것은 쉽게 정착하지 못하는 기질과 출분의 욕구만은 아니었다. 그에게 ‘길’은 제도화되지 않은 공간, 또는 자본주의적 질서에 포섭되지 않고 버텨내기 위한 마지막 참호 같은 것이었다. 하지만 그 고독과 절망이 너무 컸던지 박영근의 시적 여정은 ‘길’위에서 시작되어 ‘길’위에서 문득 멈추어버렸다. 봄비 속에서 누군가 그에게 “이제 그만 내려놓아라/힘든 네 몸을 내려놓아라”속삭였던 것처럼, 아아, “냉동의 시간들, 그 감옥 한 채”(「봄비」) 벗어두고 그는 영영 가버린 것인가.
취업 공고판 앞에서
취업 공고판 앞에 막막하게 서 있는 한 청년이 보인다. 제대를 하고 “갈 곳이 없”는 그는 모집공고 위에 내리치는 눈발을 보며 차라리 이력서도 구겨버리고 “내려앉고 싶”(「취업 공고판 앞에서」)다고 말한다. 노동자계층에도 속하지 못한 채 도시변두리를 떠도는 화자에게 각성된 계급의식 같은 게 있을 리 없다. 이처럼 박영근의 첫시집 『취업 공고판 앞에서』(청사 1984)는 노동현실을 사실적으로 묘사하거나 해방의 비전을 제시하기보다는 지상에 뿌리내리고 싶지만 어디로도 갈 수 없는 자의 실존적 슬픔과 절망을 보여준다.
안양천. 비로소 떠날 곳조차 없는 이곳에서
흐를수록 목마름은 차오르고
어지러워라 헛발 디뎌 일당마저 빠뜨리고
돌아보면 성장이라는것이어찌쉽게손안에쥐어지랴
때때로가슴쥐어뜯고진흙밭에나뒹굴어도
소, 리, 내, 지, 마, 라
고개숙이고눈물씻고다시천천히걸어야한다
사소하게사소하게말이다 검은 물빛
상처 속엔 듯 깊어지고
—「비로소 떠나갈 곳조차 없는 이곳에서」 부분
도시변두리 철거민이나 공장노동자의 일상적 공간을 상징하는 ‘안양천’은 원형적 공간인 ‘고향(백제)’과 역사적 공간인 ‘수유리’와 함께 이 시집의 핵심적인 공간 중 하나다. “비로소 떠날 곳조차 없는 이곳에서”살아가는 그들의 고통은 검은 물빛처럼 깊어져간다. 그런데 그 암울한 실감은 묘사나 서사보다는 서정성의 언어적 조율을 통해 살아난다. 먼저 ‘비로소’라는 부사어에 주목해보자. 이 말은 ‘떠나다’라는 동사에 걸릴 수도, ‘없는’이라는 형용사에 걸릴 수도, ‘이곳에서’라는 또다른 부사어에 걸릴 수도 있다. 수식관계가 모호할 뿐 아니라 어떤 경우든 ‘비로소’는 뒤에 오는 말들과 의미의 마찰을 빚으며 이런 의문을 갖게 한다. ‘비로소’는 어떤 일이나 상태가 이루어지고 난 뒤에야 갖게 되는 변화의 시작을 나타내는데, 그렇다면 더이상 떠날 곳조차 없게 되는 상태를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말인가. 하지만 좀더 되새김질해보면, 말의 돌연한 부딪침이 오히려 민중적 생존의 막다름을 강조하면서 거기에 이르기까지 겪어야 했던 신산한 삶의 무게를 시행 속으로 이끌고 들어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만일 그 자리에 ‘더이상’같은 순연한 부사어가 쓰였다면 비극성의 부조(浮彫) 효과는 한결 약화되었을 것이다.
긴장과 마찰의 어법은 역설적 표현, 도치와 생략, 띄어쓰기의 의도적 해체, 구두점의 변용, 척치(擲置)의 수법 등으로 이어진다. 이 기법들은 80년대 초반 이성복, 황지우, 최승자 등의 시에서 이미 다채롭게 변주되었기 때문에 그다지 새롭다 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80년대의 다른 노동시들이 사실적 묘사나 풍자의 미학 등 산문적인 방식으로 현실을 재현했던 것에 비하면, 형식실험이나 운문적 운용을 통해 감정을 섬세하게 전달하는 박영근의 노동시는 유다른 데가 있다. 이런 면모가 당대에는 시읽기를 방해하는 “구문론적 결함”으로 이해되거나 계급의식에 충실하지 못한 “작자의 설익은 인텔리적 태도”(이재현 「감상적 서정성과 건강한 현장성」, 『취업 공고판 앞에서』 해설)로 비판을 받았지만, 노동시의 구호적 한계를 극복하려는 박영근의 미학적 모색과 실험은 지금에 와서 오히려 소중하게 여겨지기도 한다.
『취업 공고판 앞에서』 2부는 「故鄕의 말」 연작과 백제 시편들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렇게 노동현실 속에 ‘들’의 기억, 곧 농민공동체의 정서나 가락이 상당히 남아 있는 것도 주목할 만한 대목이다. 노동자의 연대감이나 투쟁의지보다 고향과 식구들에 대한 연민과 그리움이 주조를 이루는 것도 그 때문이다.
돌아오너라, 해창벌 밀물이 들어도 어둡고
돈 한푼에 팔려서 네 아우들
헛주먹 감추고 떠나고 있으니
싸락눈 내려 쌓이는 노루목
흐린 서울길 지우며 큰 바람 울 때
보리밭 외진 두렁에서
네 어미, 옷고름마다 끓는 눈물로
시퍼런 쑥물을 들이고
보듬는 하늘 캄캄히 서리서리 피 적시는
눈송이여 뜨거운 맨발로 붉은 흙 한 짐 다져지고
허기진 별빛으로 들잠 밝히며
발자욱들 시퍼렇게
돌아오너라, 봄빛 서러운 눈길 위에 네 어미
칼꽃 그려 접고 있으니
부르도져에 깎여버린 산허리 돌아
갯들을 건너
—「故鄕의 말·4」 전문
고향 역시 근대화에 의해 파괴되기는 마찬가지지만, 그래도 시인은 “뜨거운 맨발로 붉은 흙 한 짐 다져지고/허기진 별빛으로 들잠 밝히며”고향으로 돌아가는 꿈을 포기하지 않는다. 이때 귀향의지를 ‘나’의 입장에서 직접 드러내지 않고 ‘고향’을 화자로 삼아 ‘너’라는 2인칭을 향해 말하는 방식은 민요의 가락과 전통적 정서를 살리는 데 일조하고 있다. 물론 “우리 문학은 매우 뿌리깊은 농업적 체질을 가지고 있”고, 그것은 “낭만주의의 온상”으로서 “자본주의를 움직이는 기제에 대한 집요한 분석 대신에 자본주의에 대한 체질적 거부에 기인한 일종의 투정 또는 낭만적 초월의 욕구가 혁명문학에도 계승”(최원식 「80년대 문학운동의 비판적 점검」, 『생산적 대화를 위하여』, 창작과비평사 1997, 54면)되었다는 지적처럼, 농업적 체질이 80년대 문학에 긍정적으로 작용한 것만은 아니며 박영근의 시에서도 그런 폐해가 없지 않았다.
그러나 농본주의적 세계관이나 낭만주의적 서정성을 정치적 반동성과 동일시하면서 현장성을 약화시키는 요인으로 간주하는 선입견 또한 80년대 문학을 바라보는 시선에 적지 않게 남아 있었다. 서정성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판소리체를 도입하거나 장시, 이야기시 등의 형식에 지나치게 집착했던 현상도 낭만적 서정성에 대한 피상적 이해에서 나온 것이다. 박영근 역시 새로운 민중적 형식을 고민하면서 장시 「김미순傳」을 썼는데, 그런 전환이 시인의 기질이나 삶에 충분히 밀착되었다는 느낌이 들지는 않는다. 박영근의 시는 아무래도 풍자미보다 비애미에서 그 독자적 깊이를 열어 보이는 듯하다. ‘고향’이라는 근원에 대한 회귀욕구를 지니고 있으면서도 ‘지금—여기’의 현실을 끝까지 놓지 않으려는 의식, “비로소 떠날 곳조차 없는 이곳”에서의 모순과 갈등이 바로 박영근의 비애가 생겨나는 자리다.
이런 특징들은 박영근의 시를 ‘노동시’라는 범주로 간단히 귀속시키는 것을 방해한다. 노동시의 계보 속에서도 그의 행보는 노동시의 대세나 유행과는 조금씩 비껴난 자리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1984년은 박영근의 『취업 공고판 앞에서』와 박노해의 『노동의 새벽』이 나란히 나와 노동시의 물꼬를 열어놓았다는 점에서 기억될 만한 해다. 박영근과 박노해의 첫시집은 공히 노동자에 의한, 노동자를 위한, 노동의 시집이지만, 그 질감은 사뭇 다르다. 강한 계급적 당파성으로 노동해방을 외치던 박노해와 달리 박영근은 노동자를 실존적이고 미학적인 주체로서 부각시킨다. 당위적인 희망의 메씨지를 남발하기보다 절망을 더듬더듬 발음하는 쪽을 선택했던 박영근의 목소리는 왜소하지만 정직한 것이었다. 이처럼 현실의 대세나 문학적 주류에 대해 최소한의 염결성을 지키려는 자의식에서 나는 ‘행려’의 단초를 발견한다.
대열 속으로
박영근이 ‘대열’에 합류해 노동현장의 투쟁과 현실풍자를 본격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대열』(풀빛 1987)에 이르러서다. 「농성장의 밤」 「자본가」 「아메리카」 「싸움 전야」 「노동자」 「구로동 일기」 등 제목만으로도 싸움의 주체와 대상이 선명하게 드러나는 이 시집은 그야말로 “80년대 노동현실의 거의 전국면이 다 들어 있”(『대열』 표지글)다고 할 정도로 현장성이 강하다. 화자의 단일한 정서적 톤에서 벗어나 활달한 구어체로 다양한 노동자상을 실감있게 그려내는가 하면, 「공장 비나리」 연작에서는 공장의 낙서판을 그대로 시각화해서 노동자의 육성을 전달하기도 한다.
친구들이 쓰러지고 있어요.
탈춤 팔목장단 가락에 해고의 사연을 담으며
끝까지 함께 싸우겠다고 하더니
어깨춤 한번 올리지도 못하고
어린 경실이 복숭아꽃처럼 어둡게 떨어져
병원으로 실려가고
호소문을 쓰던 정순이는
찬물만 들이키다
한 움큼 구역질로 물을 다시 토해내며
못다 쓴 호소문 구절을 깔고 바닥에 눕고
쓰러지고, 쓰러짐으로 하나가 되어 어우러지고.
어머니, 저는 왜 이 대열에 섰을까요
—「어머니, 저는 왜 이 대열에 섰을까요」 부분
그런데 첫시집을 지배하던 비애와 연민의 어조가 완전히 걷힌 것은 아니다. 투쟁의 이유를 말할 때도 확언 대신 질문의 방식을 취하고 있고, 농성장에서 기진한 몸을 일으키게 하는 힘의 원천도 ‘어머니’또는 ‘고향땅’에 있다. 노동자들이 연대할 수 있는 것은 다만 “쓰러지고, 쓰러짐으로 하나가 되”는 연민에서 비롯되며, 그들이 꿈꾸는 ‘그날’또한 “우리들 튼튼한 바윗돌이 되어 굴러가/서러운 눈물 터뜨리는 날/굴러가 오래 헐벗은 어머니의 들판에 박혀/곧게 설 날”로 그려진다. ‘대열’속의 시간들조차 그에게는 어머니의 들판으로 돌아가기 위한 ‘행려’의 한 과정이었는지 모른다.
아아 살아온 짧은 한 생애
덧없는 외줄이었네
캄캄 세상에 외줄을 딛고
캄캄 허공 외줄에 매달렸네
(…)
내 이제 끊으리
이 외줄
굴종의 운명을 끊어
자유로운 바람이 되리
아아 허공에 저렇게 아름답게 피어나는 꽃들
하나둘 춤추는 벗들의 얼굴
나를 부르는 왈순이 언니 목소리
눈물도 고운 아아 우리 어머니
—「김미순傳」 부분
장시 「김미순傳」의 마지막 부분이다. 「김미순傳」은 『대열』에서 개진된 서사성이 집약된 내용과 형식을 얻은 성과로서, “고향집 싸리울 밑 채송화 닮은 이름”을 가진 여성노동자 김미순이 자본의 유혹에 넘어가 공단 프락치가 되고, 그에 따라 노조가 탄압을 받는 상황과 김미순이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어머니’대신 자본의 폭력에 희생된 ‘누이’가 호명되지만, 김미순이 외줄에 매달린 듯 위태로웠던 생애를 마감하면서 회오의 순간에 부르는 이름 역시 ‘어머니’다.
그런데 이런 식의 비극적 결말은 다분히 상투적이고 감상적으로 느껴지며, 김미순의 변모과정 또한 자연스럽지 못하다. 김미순을 움직이는 권도(權道), 노조사무장인 왈순이 등의 인물들도 지나치게 정형화되어 있어서 서사적 필연성을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다. 또한 장시로서 갖추어야 할 서사적 구조, 사건의 자연스러운 연결, 인물의 입체성 등이 약한 편이고, 주인공의 타락과 노동탄압의 배후로 지목하고 있는 ‘자본’에 대한 이해 역시 그리 정교하다고 보기는 어렵다. 판소리의 풍자와 서정시의 비애미, 몽따주 기법 등을 결합하려는 야심찬 시도에도 불구하고 이 장시의 조준력이 떨어지는 것은 충분한 내면화를 거치지 않은 채 외화적(外華的) 형식에 머물렀기 때문이다.
박영근의 사유와 언어가 구체적인 형상성을 얻게 되는 것은 『지금도 그 별은 눈뜨는가』(창작과비평사 1997) 이후로 자본과 분단을 자신의 ‘몸’의 현실로 받아들이는 데서 시작된다. 박영근이 일찍이 사숙했던 김지하의 시(『화개』)나 동료 노동시인 백무산의 시(『초심』)에 대해 “사유가 아무리 도저하더라도 그것이 시에 있어서 서정적 울림과 설득력 있는 현실을 얻지 못한다면 앙상한 시적 관념으로 떨어질 것”(「시인의 관념과 시적 소통」, 『실천문학』 2002년 가을호, 519면)이라고 경계한 것은 스스로에 대한 엄정한 주문이기도 했다. 초월적 이념의 관성에서 벗어나 몸을 통해 현실과의 접점을 찾아가는 일, 그것은 한편 ‘대열’로부터 떨어져나와 개별자로서 감수해야 할 고통스러운 해체의 과정이자 ‘행려’의 고독을 요구하는 과제였다.
그 단칸방의 기억
90년대가 끝나갈 무렵 노동문화제의 노래공연을 보다가 문득 시인은 “비애도, 노여움도, 하나가 되는 흥겨움도 없이 몸만이 자꾸만 굳어가는 것”을 느끼고는 “나는 어느새 구경꾼이 되어 있었”(박영근 「오늘 살자, 모든 것은 지나간다」, 53~54면)다고 탄식한다. 다시 찾아간 방과 광장에는 더이상 그의 자리가 없었다. ‘대열’밖의 현실을 지탱해주는 것은 이제 ‘기억’밖에 없다.
공단 골목에 자리잡고 있던 그 단칸방은 작고 초라하지만 현실을 바꾸려는 열기로 충만한 공간이었다. “그 방 용접불꽃에 먹혀 뜨거운 모래알이 구르는,/벌겋게 달아오른 쇳조각 같은 눈으로/문건을 읽었다 이 빠진 받침들과/시커멓게 뭉개진 활자들은 바로 세우고/읽고 나선 서둘러 아궁잇불에 태우던/한밤중, 어둠속으로 피세일을 나갔다 달빛은/골목 어귀에 소식지 위에 날을 세우며 떨고/보안등 불빛에 쫓기며 한바퀴, 또 한바퀴…… 돌아와/새벽시장 봉지김치에 라면밥 말아먹던, 방”(「그 房」)의 기억. 시인은 문득 돌아갈 자리를 찾을 때마다 ‘그 방’을 떠올린다.
그래요, 뜨거운 물방울들이 내 몸속으로 아주 힘겹게 떨어지는, 그런 때가 자주 찾아오곤 했어요
당신과 내가 십오년 넘게 끌고 다닌 그 단칸방들이었어요. 시궁쥐들이 와서 조합신문을 쏠고, 쪽방 불빛을 가리고 학습을 하고, 짠지와 막걸리잔으로 서로 건네주던 먼 지역의 소식들, 그리고 늦은 잔업에서 돌아오면 마당에서 눈을 맞고 있던 빨래들…… 그런데 그 단칸방에, 십여년이 흘렀는데 내가 다시 그 방에, 아파트를 돌며 아이들을 가르치는 내가 걸레쪽 같은 몸을 끌고 돌아와 흰 벽을 바라보고 있는 거야 분명 그 방들을 떠난 지 오랜데, 그 텅 빈 방에 주저앉아 한움큼씩 안정제를 먹고, 나가게 해달라고 쌍소리질을 하고 있는 거야 정말이지 그 방을 빠져나오지 못할 것 같았어
—「겨울비」 부분
그러나 기억 속의 ‘그 방’조차 현실에 대한 환멸과 광기에 점점 침윤당하고 만다. 18평짜리 임대아파트에 “걸레쪽 같은 몸을 끌고”돌아와 밤늦게 소주를 마시는 시인의 넋두리는 계속된다. “다시 현장에 들어가 살아야겠다 이건 온통 사기다 북한에 한번 갔다와야겠다 세상 보는 눈이 넓어질 텐데 아니야 자본주의를 더 깊게 보고 파들어가야 해 아직 껍데기만 보고 있어” (…) 이 시대착오적인 헛소리밖에는 이제 진실이 거할 자리가 없어진 것일까. “현실이라는 위험을 겪지 않은 사람은 환영에 매혹될 수 없다”는 타데우즈 칸토르(Tadeuz Kantor)의 말처럼, 『저 꽃이 불편하다』에 일렁이는 환영과 환청의 그림자는 현실의 위험이 그만큼 몸 깊숙이 들어와 동거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로 인해 생활의 훈기와 공동체적 활기가 넘치던 단칸방의 기억은 분열된 내면을 가두고 있는 ‘흰 벽’의 공포로 다가오게 된다. 시인은 다시 ‘거리’로 내쫓긴다.
신문을 구기고 나는 걷고 또 걷는다
(…)
비가 내린다
바람에 거세어지는 빗속에서
늘 분명했던 말들이 지금은 비틀거리는 말들과
엉망으로 하나가 되어 취해간다
—「나는 걷고 또 걷는다」 부분
나의 실업은 자주 사소한 것이었고
전화는 불통이었다
수직으로 솟은 거대한 탑에 새들이 내려앉아 노래를 불렀다
죽은 사람들이 다시 살아나 며칠 동안 신문을 팔았다
80년대와 90년대가 두서없이 찾아왔고
아, 지긋지긋한 不立文字, 임시
막사의 희극, 찢어진
얼굴
나에게는 현실이 없었다
다시 시간이 흘러간다
—「나는 지금 어디를 바라보고 있는 것일까」 부분
박영근의 근작시에 범람하는 이 취기와 착란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90년대 이후를 부재와 소멸의 시간으로 겪어내야 했던 것은 어느 진영에 국한된 사정은 아닌 듯하다. 노동자시인 박영근이 “나에게는 현실이 없었다”고 말할 때, 요절한 해체주의자 진이정 역시 “내겐 추억 없다/찰나 찰나 연소할 뿐”(「추억 거지」)이라고 말하고 있지 않은가. 두 시인이 말하는 ‘현실’의 부재와 ‘추억’의 부재는 그 거리가 그리 멀지 않다. 역사적 현실이든 개인적 일상이든 중심이나 실감을 잃어버리기는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마치 한개비의 성냥처럼 순간적인 연소를 통해서만 실재성을 부여받을 수 있는 시간들이 이제 지리멸렬하게 흩어져 있을 뿐이다.
그런 ‘임시막사’같은 삶 속에서 “나에게는 현실이 없었다”고 말하는 것은 얼핏 지나간 연대에 대한 전면적 부정처럼 들리기도 한다. 하지만 이 말의 진의는 전면적 부정과 해체의 과정 없이는 치유나 극복 또한 불가능하다는 데 있으리라. 또한 이 말은 변화된 세계를 표현할 새로운 내용과 형식을 얻고자 하는 간절한 허기(虛氣)의 표현이기도 하다. 그에게 ‘치유’란 섣부른 낙관이나 희망의 확인이 아니라 악몽을 악몽으로 드러내면서도 그 어둠의 바닥에서 ‘환한 빛’을 발견하는 것이었다. 난장(亂場)의 현실 속에서는 길을 잃는 것이 길을 찾아가는 행위일 수도 있다.
길 위에서, 길을 잃다
박영근은 “살아남는 일의 생존과 자신의 얼굴을 스스로 외면하는 자의 치욕이 나의 문학”(「백무산 읽기, 변화의 의미와 그 미래」, 『내일을 여는 작가』 2005년 봄호, 74면)이라고 고백한 적이 있다. 그는 이 글에서 백무산의 ‘단절’을 “외부 현실을 겨냥해야만 정당화될 수 있었던 비판의 시선을 그 자신과 자신이 속했던 진영의 내부를 향해 예각화하고, 그것을 통해 지나간 삶을 과거로 화석화하지 않고 오늘의 ‘절박한 오류들’로 다시 살게 하는”노력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 말처럼 지나간 삶을 정리된 역사가 아니라 생생하게 살아 있는 현실의 내부로서 살아내기 위해서는 해체의 혼란과 고통을 감당해야 한다. ‘절박한 오류’로서의 시. 현실을 어떤 정언(定言)으로 추상화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끌어안으려는 고투가 박영근에게는 길 잃음, 곧 ‘행려’의 형태로 나타났던 것이다.
길 위에서, 길을 잃으며
저를 찾고 있는
망가진 사내 하나를 보았다
온몸 환하게 얼어가는 겨울비 속에서
—「겨울비」 부분
그는 현실 속에서는 길을 잃은 자였지만 시에서는 길을 잃지 않았다. 시가 세상의 ‘거짓’을 넘어서는 또다른 ‘속임수’라는 것을 그는 충분히 알고 있었던 듯하다. “그랜저가 전광판 속을 질주하는 밤하늘 아래/나는 고개를 숙”이지만, 이것을 자본에 대한 무력한 긍정으로 읽을 필요는 없다. “이제 정직한 것은 거리에 저렇게/넘쳐나는 불빛과 소란과 광기/그 속에 비치는/살을 섞지 않는 나의, 詩의 속임수”(「고개를 숙인다」)라는 구절은 자본주의의 현란한 불빛과 소란과 광기에 끝까지 살을 섞지 않으려는 의지의 표명이라고 할 수 있다. 시인은 이렇게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집이 어디 있느냐고 성급하게 묻지 마라
길이 제가 가닿을 길을 모르듯이
풀씨들이 제가 날아갈 바람 속을 모르듯이
아무도 그 집 있는 곳을 가르쳐줄 수 없을 테니까
믿어야 할 것은 바람과
우리가 끝까지 지켜보아야 할 침묵
그리고 그 속에서 타오르고 있는 불
—「흰 빛」 부분
이 시는 처음 발표될 때의 제목이 「서시」였듯이, 박영근판 서시라고 부를 만하다. “밤하늘에 막 생겨나기 시작한 별자리”를 보며 “고통은 그냥 지나가지 않는다”고 말하는 그에게는 “밥 한그릇 앞에서 자신을 들여다보는 일이/치욕”이다. 그러나 삶의 순결한 의지를 고양시켜주는 것 또한 그 치욕이다. 중요한 것은 집이 어디 있는가를 알고 도달하는 데 있지 않고, 그 길을 정직하게 걸어가는 도정 자체에 있다. 그 고단한 ‘행려’의 스승은 바람과 침묵과 불이다.
‘행려’의 길에서 겪는 온갖 감정의 회오리가 지나가고 그 어둠의 바닥에서 한점 빛이 비치는 순간, 시는, 문득, 침묵, 속에서, 떠, 오, 른, 다. “그래, 이제 詩는 그만두기로 하자/그 숱한 비유들이 그치고/흰 빛, 흰 빛만 남을 때까지”라는 마지막 연은 시의 포기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거기엔 침묵 속에 타오르는 ‘불’처럼 자신의 시가 ‘흰 빛’의 극점에 도달하기를 바라는 자의 기원이 서려 있다.
더 깊이 가라앉아
꽃의 뿌리에 닿도록
아픈 몸이여, 흘러라
나 있던 본디 자리로
—「물의 자리」 부분
이런 순결한 갈망을 지닌 영혼이 어찌 세간에 오래도록 머물 수 있었겠는가. 박영근 시인의 서러운 뒤꿈치를 따라가는 심정으로 이 글을 쓰는 동안 내 안에 몇번이나 아프게 울려퍼지는 탄식이 있었다. “아, 사람들은 쉽게 모든 걸 참는구나. 사람들은 여전히 젊고 건강하기만 하다.”지금도 지구 한켠에서는 말할 수 없는 전쟁과 재해가 일어나고 있는데,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꽃들은 활짝 피어나고 사람들은 웃고 있지 않은가. 그래서 박영근 시인은 “저 꽃이 불편하다”고 말했던 것일까. 그 욕망의 꽃덩어리로부터 거슬러올라가 근원에 이르는 길을 찾으려고 ‘행려’를 자처했던 것일까.
빛의 극점, 꽃의 뿌리를 향해 아픈 몸을 이끌고 가던 이여. 그대가 그림 속에서 보았다는 맹목조(盲目鳥)처럼 어둑한 허공을 응시하던 눈먼 새여. 이제 그대를 가두던 조롱(鳥籠) 같은 세상을 벗어났으니 땅속의 하늘을 훨훨 날아라. 마침내 꽃의 뿌리에 닿을 때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