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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2000년대 한국문학이 읽은 시대적 징후 2
사회적 상상력과 상상력의 사회학
2000년대 젊은 소설을 보는 한 시각
진정석 陳正石
문학평론가. 주요 평론으로 「모더니즘의 재인식」 「길 위의 소설, 소설의 길」 「민중적 주체성의 복원을 위한 도정」 등이 있음. jjsssj@hanmail.net
1. 사회적 상상력의 귀환?
2000년대의 젊은 소설가들에게서 정치에 대한 관심이나 사회적 상상력의 편린이 명시적으로 발견되는 것은 아니다. 연대기적 단순화의 폭력을 감수하고 말할 때, 그들에게는 1980년대 문학이 스스로 부과했던 역사적 책무와 계몽적 포즈는 물론, 1990년대 문학에 지배적인 자아의 이상화나 개인주의에 대한 주장도 별로 없다. 역시 익숙한 전통적 이분법에 기댄다면, 이들은 ‘현실 반영’이나 ‘전형의 창조’라는 리얼리즘적 요청에 무심할 뿐 아니라, ‘미적 자율성’과 ‘전위주의’를 바탕으로 하는 모더니즘적 실험에 전념하는 경우도 많지 않다. 그들은 애당초 그런 “환멸과 저항의 전선을 설정하지 않는” “무중력 공간”1의 아이들이며, “자신의 현실적·정신적 무력함을 일종의 운명으로 내면화하고 있는” “빈곤하고 왜소한 주체”2들이다.
물론 이런 비평적 호명은 어느정도 2000년대 문학의 ‘새로움’을 적극적으로 의미화하기 위한 전략적 과장이기도 하다. 주류의 단선적 교체라는 고질에서 벗어나 작가들의 세대, 경향, 화법 등에서 과거 어느 때보다 다양한 층위와 두께를 가지게 된 것이 2000년대 문학의 실상에 좀더 가깝기 때문이다. 하지만 연속이 아닌 단절의 측면에 주목해 새로운 변화의 조짐과 징후를 예감해볼 수는 있다. 이때 한가지 뚜렷한 특징으로 들 수 있는 것이 바로 사회적 상상력의 퇴조 현상일 것이다. 확실히 강영숙 김애란 김윤영 김중혁 박민규 박형서 백가흠 손홍규 윤성희 이기호 천운영 편혜영 한유주 등 2000년대에 접어들어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는 젊은 작가들 대다수는 보편적 의지의 모색보다 개인적 실존의 탐색에 전념하고, 이념적 지향보다 문화적 향유를 중시하며, 현실의 탐구보다 유희적 상상에 몰두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상상은 현실의 결핍을 보상하는 문화적 장치이며, 사회적 상상력의 결여 역시 사회적으로 결정된 문화적 징후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특정 세대의 문학에 사회적 상상력의 결여가 집단적으로 나타나고 있다면, 그 상상의 존재방식에 대한 분석을 통해 현실적 조건에 대한 성찰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최근 주요 문예지들이 ‘사회학적 상상력의 귀환’이나 ‘2000년대 한국문학이 읽은 시대적 징후’, 또는 ‘탈주체론을 넘어서’ ‘지구적 자본주의와 약소자들’이라는 주제로 연이어 기획특집3을 마련한 것을 보면, 2000년대 문학에서 철지난 유행으로 치부되던 사회정치적 상상력이 조금씩 복원되고 있거나, 적어도 그런 관점에서 동시대 문학을 재구성하려는 시도가 점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가운데 특히 ‘6·15시대론’의 관점에서 2000년대 한국문학을 분석한 한기욱(韓基煜)의 「한국문학의 새로운 현실 읽기」4는 정치와 문학, 사회적 상상력과 상상력의 사회학에 연관된 문제를 검토하는 데 유익한 논점을 제공하고 있어 주목된다. 그는 “2000년대 문학의 기점에 해당하는 역사상의 계기”로 1997년 IMF사태와 2000년 6·15 남북공동선언을 거론하고, “남녘 사람의 일상생활에 직격탄을 날린” 전자보다 “한반도 주민 전체의 장래에 더 결정적인 사건”인 후자가 더욱 “획기적인” 사건이라고 파악한다. 한기욱에 따르면 6·15선언은 한반도 분단극복과정의 한 전환점일 뿐 아니라, “한국문학의 심층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야기한 “2000년대 문학의 기점”이자 “최종심급”이기도 하다. 그는 소설공간의 확장과 소재의 다변화, 상상력의 변화 등 2000년대 문학의 특질들이 6·15 경험에 연원을 두고 있다고 가정하고, ‘경계넘기’라는 분석틀을 폭넓게 활용하면서 2000년대 문학의 현장에 접근한다. 기본적인 취지와 방향에 충분히 공감하면서도, 좀더 진전된 토론을 위해 몇가지 논점에 대해 의문을 제기해보기로 한다.
먼저, ‘6·15시대론’에 내포된 현실인식의 타당성 문제이다. 한 논평자의 지적처럼 한기욱이 IMF와 6·15를 “양자택일의 문제로 설정”5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후자에 좀더 규정적인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왜 IMF는 아닌가?’라는 상식적인 반문을 던져볼 수 있겠다. 분단체제론과 그에 이어진 ‘6·15시대론’은 한반도 전체를 분석의 지평에 담는 포괄적 비전이지만, 남한 주민의 생활실감에는 IMF위기 이후 경제적·사회적·문화적 방면에서 벌어진 엄청난 변화가 훨씬 더 크게 다가올 것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남한사회의 미래와 한반도의 운명을 별개로 치부하는 것은 일종의 허위의식이지만, 그런 일그러진 의식 역시 분단체제에 강요당한 정신적·문화적 효과이기도 하다. ‘6·15시대론’이 이론적 정교함과 대중적 설득력을 좀더 높이기 위해서는 분단체제에 대한 개념적 인식과 분단현실에 대한 일상적 실감의 낙차 문제를 고민할 필요가 있다.
둘째, ‘6·15시대론’의 문학적 적용 가능성 문제를 제기할 수 있다. 시대적 인식의 타당성이 문학적 분석틀로서의 효과를 보장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6·15시대론’이 전제하는 ‘6·15시대’는 현실 자체가 아니라 현실을 보는 하나의 관점이며, 어떤 의미에서는 하나의 이념이기도 하다. 때문에 “6·15시대의 관점”에서 2000년대 문학에 접근하는 것은 6·15를 하나의 “최종심급”으로 전제하고 그 기준에 적합한 경향과 작품을 선별하는 연역적 독해가 되기 쉬우며, 6·15와는 다른 맥락에서 개별 텍스트들이 달성한 인식적 가치와 상상적 모험을 외면할 가능성이 크다. ‘민족문학’ 또는 ‘분단체제의 극복에 기여하는 문학’이라는 총론적 규정이 개별적인 문학작품을 읽어내는 데 일종의 중압감으로 작용할 수 있듯이, ‘6·15시대의 문학’이라는 규정은 2000년대 문학 텍스트 안에서 6·15의 흔적, 영향, 자취를 찾아내려는 무의식적 강박이 될 수도 있다. 따지고 보면 문학현장의 세밀한 국면을 탐사하고 그 의미와 맥락을 밝히는 데 ‘6·15시대론’은 너무 커다란 틀이다. 정당한 시대적 통찰을 설득력있는 작품읽기로 전용할 수 있는 각론과 매개가 부족한 형편인 것이다.
셋째, 매개적 도구로 제시되는 ‘경계넘기’의 분석적 효용성 문제이다. 사실 ‘경계넘기’는 매우 진폭이 크고 애매한 개념이다. 그것은 좁게는 이념이나 국경과 같은 가시적인 경계를 문제시하는 것에 머무를 수도 있고, 넓게는 좋은 문학이라면 마땅히 갖추어야 할 기본적 자질 가운데 하나일 수도 있다. 한기욱은 ‘경계넘기’의 기원을 최대한 좁히고 그 외연은 최대한 넓히는 방식으로 논의를 전개한다. 그러나 경계에 대한 예민한 감각과 자의식은 충격적인 사회적 경험에 의해 야기될 뿐 아니라, 내밀한 개인적 기억에서 비롯되기도 하는 것이니, 2000년대 문학에 나타난 ‘경계넘기’의 기원을 설명하는 방식은 좀더 복합적일 필요가 있다. 한편, 경계의 외연이 지나치게 넓은 것도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외연이 넓어질수록 내포가 희미해지고 기원에서 점점 더 멀어지기 때문이다. 한기욱이 전성태와 김연수의 최근 작품에 대한 섬세한 분석을 통해 보여주고 있듯이 국경과 민족의 경계에는 적실하게 들어맞지만, 박범신 천운영 배수아 등에서 성적·인종적·관념적 경계에 대한 관계는 논증이 필요하며, 문화적·세대적·계층적 경계의식이 두드러진 김경욱 박민규 김중혁 김애란 등의 작품에는 아마도 분석의 어려움이 적지 않을 것이다.
몇가지 의문을 표시했지만, 이 글 역시 이런 문제들에 관해 어떤 체계적인 대안을 마련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대신 이 글은 박민규 김중혁 김애란 등 사회적·정치적 관심을 명시적으로 드러내지 않는 ‘IMF세대’의 최근 작품 몇편을 따라 읽으면서, 단수(單數)의 이념을 대체한 복수(複數)의 상상력들이 지금 어떤 소설적 지형도를 그려나가고 있는지 점검하고, 2000년대 문학에서 가능한 사회적 상상력 혹은 상상력의 사회학 문제를 생각해보려고 한다.
2. 신세기 에반게리온
박민규(朴玟奎)의 『핑퐁』(창비 2006)은 “한 쎄트”로 ‘따’를 당하는 ‘나’와 ‘모아이’ 두 중학생의 이야기를 그린 작품이다. ‘나’는 “허약하고, 겁이 많고, 눈에 띄지 않고, 공부도 못”하는 그야말로 “따의 전형”이다. 그 맞은편에는 “그 존재 자체가 의심스러울 만큼 악(惡)하고, 존재 자체를 의심할 수 없을 만큼 월등”한 치수와 그 패거리들이 있다. 우리의 “일과”는 치수 패거리에 시시때때로 불려가 돈을 빼앗기거나 얻어맞는 것이며, 그외의 일과를 가져본 적은 별로 없다. 이 일상적 폭력은 ‘나’에게 “죽여주세요. 제발 죽거나, 사라지게 해주세요”라는 자기소멸의 충동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끔찍하고 공포스러운 것이다.
이런 설정에서 ‘보통’의 소설이 나아가는 방향은 대충 두가지 정도가 될 것이다. 하나는 왕따와 학원폭력을 소재로 한 사회소설의 방향이다. 『핑퐁』에는 십대들의 왕따, 폭행, 갈취, 원조교제, 자살 등 첨예한 사회적 현안이 될 만한 소재들이 적지 않지만, 물론 이것은 박민규 소설에 어울리는 방식이 아니다. 작가는 학원폭력의 실상을 세밀하게 묘사하는 대신, 그것을 인간의 본성에 내재된 폭력성 또는 세계 자체의 근본적인 상태로 일반화하는 데 주력한다. 치수 패거리의 직접적인 폭행만이 아니라 침묵하는 다수의 간접적인 묵인과 조장도 그에 못지않은 폭력이다. 박민규는 이것을 “다수결”의 원리로 명료하게 정의하고, 인간은 누구나 “다수인 척”하면서 살아가는 존재라는 결론을 내린다.
두번째는 원초적 폭력에 맞서 자아의 각성과 정신적 성숙을 이룩하는 성장소설의 유형이다. 하지만 “확실히 고등학생 정도로 늙거나 부패한다면 나는 순순히 노인이 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같은 대목이 예시하듯이, 『핑퐁』의 주인공들은 기본적으로 성장을 거부하는 인물들이다. 그들이 성장을 거부하는 이유는 이 세계에 모범이 될 만한 어른이 거의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 작품에는 특히 식물인간이 된 ‘모아이’의 할아버지나 “세계를 쥔” 세 노인처럼 무기력하거나 부정적인 노인의 형상이 다양하게 나타나는데, ‘나’와 ‘모아이’가 심하게 맞는 것을 보면서도 모른 척 운동을 계속하던 노인들이 나중에 100만원을 받고 안마를 해주는 장면은 그 둘이 결합된 희극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박민규는 ‘나’와 ‘모아이’에게 사회소설이나 성장소설의 주인공보다 훨씬 막중한 ‘지구적’ 또는 ‘인류적’ 임무를 부여한다. 불운한 왕따인 ‘나’는 끊임없이 “나는 왜 사는가”라고 자문하는데, 이 질문은 언제나 “인류는 왜 사는가”라는 질문으로 단숨에 비약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나’가 보기에 60억이나 되는 지구의 인간들은 자신이 왜 사는지 아무도 모르는 것 같다. ‘나’는 “그걸 용서할 수 없”다. “지구를 떠나보지 않고는 세계의 정체를 알 길이 없”(「몰라 몰라, 개복치라니」)는 것처럼, 무한한 것과 사소한 것의 대조, 비루한 일상에서 ‘우주적’ 시각으로의 비약은 박민규 소설 특유의 인식론적 전도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물음에서 ‘왜 사는가’로의 근본주의적 방향전환, ‘나는 왜 사는가’에서 ‘인류는 왜 사는가’로의 비약적 범주 확장은 현실의 의미를 새롭게 발견하는 인식론적 전도가 아니라 세계의 본질에 대한 과도한 일반화로 이어질 공산이 적지 않다.
중반부에 접어들면서 『핑퐁』의 서사는 환상적 색채를 강화하며 예정된 결말을 향해 숨가쁘게 달려간다. ‘나’와 ‘모아이’는 우연히 발견한 벌판의 탁구대에서 탁구를 시작하게 되고, 탁구전문점 ‘랠리’의 주인 세끄라탱에게 탁구의 ‘폼’을 배우거나 ‘탁구는 원시우주의 생성원리’라는 허황된 가르침을 받기도 하며, ‘핼리혜성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모임’ 따위를 잠시 기웃거리기도 한다. 그런데 알고 보니 세끄라탱은 지구인이 아니라 탁구인, 지구라는 생태계의 폼을 관리하는 “탁구계의 간섭자”였다. 세끄라탱의 인도로 인류 대표와 탁구시합을 벌여 승리한 두 사람은 ‘인류를 유지할 것인가, 언인스톨할 것인가’를 결정할 권한을 갖게 된다. “언인스톨? 우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인류보완계획에 따라 14세 소년 소녀 신지와 아스카만을 남기고 인류를 멸종시키는 ‘신세기 에반게리온’의 결말처럼, 불운한 두 왕따는 지구 멸망 뒤에 유이(唯二)하게 살아남은 최후의 인간이 된 것이다.
“세계가 깜빡한 인간”이나 “세계는 언제나 듀스 포인트” 같은 특유의 에피그램, 「방사능 낙지」 「핑퐁맨」 등 가공의 삼류작가 존 메이슨이 쓴 기상천외한 삽입소설들, ‘핼리혜성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모임’ 홈페이지 게시판을 뒤덮은 갖가지 엉뚱하고도 서글픈 사회적 낙오자들의 사연처럼, 『핑퐁』에는 단순한 플롯을 보충하고 교란하면서 읽는 즐거움을 느끼게 해주는 장치들이 여럿 들어 있다. 그러나 『핑퐁』을 지배하는 기본적인 정조는 여전히 세계의 부정성에 대한 도저한 환멸과 분노라고 할 수 있다. 심각한 절망과 유쾌한 낙관이 공존하던 이전과 달리 세계에 대한 환멸이 삶에 대한 긍정적 수락을 압도하는 형국인 것이다. 이런 근본주의적 태도는 존중할 만한 사회관일 수 있지만 그다지 효과적인 소설전략은 아니다. 『핑퐁』은 우리에게 ‘인스톨할 것인가, 언인스톨할 것인가’라는 양자택일적인 질문을 던진다. 인스톨을 선택하면 문학 이전이 되고, 언인스톨을 선택하면 문학 이후가 된다. 그러나 우리가 선택해야 할 삶의 자리는, 그리고 아마 문학의 자리도, 인스톨과 언인스톨 사이 어디쯤일 것이다.
3. 마니아와 회사원 사이
박민규의 주인공이 ‘다수결’ 사회의 낙오자들이라면, 김중혁(金重赫)의 주인공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물건들이라고 할 수 있다. 김중혁 소설의 대표적인 공간표상을 하나만 꼽자면, 단연 ‘무용지물 박물관’(「무용지물 박물관」)이 될 것이다. 이 박물관의 전시품 목록에는 연필, 라디오, 자전거, 타자기, LP판 등 오래되고 망가지고 필요없어진 온갖 잡동사니들이 망라되어 있다. 이 물건들은 자본주의적 교환가치에서 배제된 것은 물론 고유한 사용가치로부터도 해방된, 단독자적 ‘사물’들이다. 그리고 여기에 ‘유비쿼터스’ 씨스템에 비트(beat)와 노이즈(noise)로 저항하던 비밀결사단체 ‘펭귄뉴스’(「펭귄뉴스」)의 회원들이 합류한다. “마치 타자기가 살아서 말을 거는 듯한 느낌”(「회색 괴물」) 같은 대목에서 드러나듯이, 기능적 가치에서 벗어난 사물들과 자본주의의 공고한 씨스템에서 탈주한 인간들이 이 안에서 공유하는 충일한 교감은, 벤야민이 말한 바 있는 수집가와 사물 사이의 그것과 정확히 일치하는 것이다. 수집가의 애착과 경배를 통해 사물은 자본주의적 기능성의 악순환에서 해방되며, 수집가는 사물과의 교감을 통해 ‘자동화’된 감각과 상상력을 해방시킨다.
물론 이 ‘해방’은 해방된 사물과 인간이 속해 있는 현실세계의 해방이 아니며, 어떤 측면에서는 현실적 해방에 대한 전망을 유보한 댓가이기도 하다.6 그러나 수집가나 마니아, 발명가 등 자본주의의 규격화된 씨스템에서 자발적인 소외를 선택한 김중혁 소설의 인물들에게 직접적인 현실비판의 자세를 요구하는 것은 부당한 처사일 것이다. 그들은 시대의 과제에 투신하는 비판적 지식인이 아니라 감각의 향유에 전념하는 자율적 예술가이며, 자본주의적 기능성의 논리에 대항하는 문화적 전선에서 그 나름의 싸움을 치열하게 전개하고 있기 때문이다.
「유리 방패」(『창작과비평』 2006년 여름호)는 지식인의 책무와 예술가의 향유, 마니아의 세계와 시민적 일상 사이에서 새로운 방향과 좌표를 모색하는 김중혁 소설의 현주소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면접 퍼포먼스’가 ‘거리의 예술’로 오인되어 잠시 유명인사가 되는 두 젊은이의 이야기를 그린 이 소설은 대략 세가지 층위를 갖고 있으며 각각의 방식으로 다르게 읽어볼 수 있다.
첫번째 방식은 청년실업이라는 ‘사회적’ 소재를 담은 세태소설로 읽는 것이다. 이때 입사시험 낙방만 서른번째인 ‘나’와 M, 두 젊은이는 경기침체와 고용불안, 비정규직 확산 등으로 원치 않는 실업상태를 이어가는 동시대 불우한 청년들의 전형적 형상이 된다. 그들은 “저희가 가장 좋아하는 건 면접장에서 노는 겁니다. 취직할 생각은 없었지만 면접을 자주 봤죠”라고 장담하는가 하면, 실제 면접시험장에서조차 만담, 마술쇼, 행상 등 기발한 ‘면접쇼’를 연출할 정도로 진지함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지만, 이런 장난은 사실 “백전백패, 승률은 제로”인 취업경쟁의 난관 속에서 가까스로 찾아낸 방어적 유희에 다름 아니다. ‘점수를 받는 사람’에서 ‘점수를 주는 사람’으로 자리바꿈하고 싶다는 그들의 은밀한 소망은, 유명인사가 된 뒤 쇄도하는 각종 강연과 인터뷰 요청을 모두 거절하고 신입사원 면접관 역할을 수락하는 장면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두번째 방식은 작가의 예술관을 유비적으로 드러낸 알레고리 소설로 읽는 것이다. 이때 ‘나’와 M은 마니아·수집가·발명가 등으로 변주되는 김중혁식 예술가의 또다른 변형이며, ‘유리 방패’ 놀이를 비롯, 그들이 연출하는 각종 퍼포먼스와 기발한 이벤트들은 예술적 충동의 주요한 원천이거나 예술 그 자체가 된다. 실제로 두 젊은이가 잠시 ‘거리의 예술가’ 대접을 받게 된 것도 실패한 입사퍼포먼스를 지하철에서 장난삼아 실연한 것이 인터넷에 올라가면서 화제가 된 사건 때문이었다. 그들에게는 “장난도 예술”이고 “재미있게 노는 거”도 예술이며, 심지어 그들의 무의미한 이벤트를 기발하게 해석한 200여개의 인터넷 댓글도 “정말 상상력이 대단한” 일종의 예술이다. 이런 유희적 예술관의 이면에는 그 유희가 언제라도 제도화되거나 유형화될 수 있다는 예민한 자의식이 깔려 있기도 하다. 현란한 전문어를 동원한 심오한 해석으로 무의미한 장난을 예술로 공인하는 ‘예술전문기자’의 행태나, “우리는 점점 지쳐갔다. 아이디어도 고갈되는 것 같았고, 무엇보다 갈수록 재미가 없었다”는 진술이 그 단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세번째 방식은 자아의 탄생에 관한 무의식적 드라마로 읽는 것이며, 앞의 두 방식과 겹쳐 읽을 때 더욱 흥미로운 독법이 될 수 있다. 이때 ‘나’와 M은 “이인삼각”의 단짝, “한 사람의 앞모습과 뒷모습”처럼 “분리될 수 없는 사이”인 ‘이자 관계’에 놓이게 된다. 「유리 방패」는 마치 라깡의 ‘거울단계 이론’의 소설적 번안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상상계와 상징계 사이에 걸쳐 있는 자아의 심리적 정황을 적실하게 그려내는데, 이런 측면에서 ‘나’가 M과의 분리를 예감하는 소설의 결말부는 자못 의미심장하다. 그것은 상상적 자아가 상징적 질서 안으로 들어가는 문턱에 서 있다는 것, 바꾸어 말해 아이와 어른, 마니아와 회사원, 예술가와 시민의 경계에 대한 김중혁 소설의 고민이 점점 더 심화되고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4. 나는 어떤 인간인가, 당신은 어떤 인간인가
2000년대 젊은 작가 중에서도 가장 연배가 낮은 편에 속하는 김애란(金愛爛)의 주된 관심사는 뜻밖에도 ‘나’의 기원이나 세계의 의미, 타자와의 소통처럼 고전적이라 부를 만한 주제들이다. 김애란 소설의 주인공은 기본적으로 “내가 어떤 인간인가에 대해 자주 생각하는 사람”이며, 동시에 “당신이 어떤 인간인가에 대해서도 자주 생각하는 사람”(「영원한 화자」)이라고 할 수 있다. 전자의 ‘생각’이 자아의 정체성 형성에 관련된 질문이라면, 후자의 ‘생각’은 자아와 타자의 관계에 대한 질문이 된다. 지금까지 발표된 김애란의 단편들은 기본적으로 두 ‘생각’ 사이를 왕복하는 양상을 보이는데, 전자에서 나온 것이 일종의 ‘가족로망스’(「달려라, 아비」 「스카이 콩콩」 「그녀가 잠 못 드는 이유가 있다」 「사랑의 인사」)라면, 후자에 이어진 계열은 ‘도시의 생태학’(「노크하지 않는 집」 「나는 편의점에 간다」 「베타별이 자오선을 지나갈 때」 「성탄특선」)이라고 할 수 있다.
두 ‘생각’ 중에 좀더 근원적인 것은 물론 전자이다. 김애란은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아버지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으로 대체하고, 아버지와의 상상적 관계를 통해 ‘나’라는 자립적 주체를 만들어나간다. 부권 추락의 시대를 경험한 IMF세대답게 김애란은 아버지를 자식을 버린 무책임한 인간이거나 딸에게 기식하는 무능력자로 그려낸다. 그러나 김애란은 달갑지 않은 ‘아비’를 의식에서 배제하거나 부정하지 않고 긍정적으로 수용하는 특이한 양상을 보여준다. 이 점에서 김애란의 서사적 자아는 원초적 기원을 충만한 상태로 가정하는 낭만주의자가 아니라, 상상된 기원의 가공적 성격을 냉철히 의식하는 사실주의자에 가깝다. 작가의 이런 강점은 두번째 영역으로 거론된 ‘도시의 생태학’ 유형에서 잘 발휘된다. 김애란은 섬세한 관찰과 신선한 감각, 풍부한 디테일을 동원하여 주변부를 배회하는 대도시 젊은이들의 일상적 삶과 라이프 스타일을 매력적으로 그려낸다.
김애란의 최근작 「침이 고인다」(『문학사상』 2006년 11월호)는 어느정도 분리된 상태로 이어져온 두 계열의 통합 가능성을 암시하고 있어 흥미롭다. 주인공은 “매달 13평형 원룸의 월세와 의료보험, 적립식 펀드 한개와 적금을 부어나갈 만한 생활력”을 유지하기 위해 “오늘 하루, 열심히 얼룩말처럼 달리고, 곰처럼 춤”추어야만 가까스로 “경제적 독립”을 유지해나갈 수 있는 입시학원 강사 ‘그녀’이다. 그녀의 원룸에는 석달째 더부살이를 하고 있는 ‘후배’가 있다. 원래 친한 사이도 아닌 후배와 불편한 동거를 하게 된 것은 후배의 “이야기” 또는 “목소리” 때문이다. 어릴적 엄마가 손에 ‘인삼껌’ 한통을 손에 쥐여주고 사라졌다는 것, 단 한개가 남을 때까지 껌을 씹으며 엄마를 기다렸다는 것, 그날 이후 엄마를 생각할 때면 지금도 입에 침이 고인다는 것. 후배는 그동안 소중히 간직해왔다는 마지막 껌 하나를 반으로 잘라 그녀에게 건넨다. 후배의 이야기는 진짜일 수도 있고, 동정심을 유발하기 위해 꾸며낸 거짓말일 수도 있다. 사실 ‘그녀’가 보기에 후배의 이야기는 별로 신빙성이 없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것이 사실이냐 아니냐를 떠나, 후배의 이야기가 그녀의 마음을 ‘움직이고’ 있다는 데 있”다.
후배의 사연은 그동안 김애란 소설의 주인공들이 여러번 되풀이한 가족로망스의 변주라고 할 수 있다. 아이를 버린 부모가 아버지가 아니라 어머니라는 차이는 있지만, 그로 인해 부모와 가족의 울타리 안에서 보호받지 못한 채 불우한 성장을 강요받았다는 점에서는 큰 차이가 없다. 이보다 더 중요한 차이는 이야기의 내용이 아니라 이야기의 전달방식, 즉 후배의 이야기가 직접 진술되지 않고 ‘그녀’를 매개로 객관화되고 있다는 점이다. 더욱이 촛점화자 ‘그녀’는 ‘나’라는 1인칭이 아닌 화자 3인칭으로 한번 더 객관화되어 있으니, 가족로망스라는 상상적 허구는 이제 자의식적 반영의 대상으로 상대화되고 있는 셈이다.
진짜 고아인지 아닌지는 확실치 않으나, 어쨌든 당분간 한식구가 된 후배는 기식자(寄食者)다운 처세술을 터득한, 밉지 않게 눈치 빠른 인간이다. 더욱이 후배는 이야기를 아주 잘한다. 고아가 된 사연도 어제 꿈에 ‘그녀’가 나왔다는 황당무계한 이야기로 분위기가 무르익은 끝에 슬며시 털어놓은 것이다. 단지 대학 선후배 사이일 뿐, 만났던 기억조차 희미한 ‘그녀’를 꿈에서 보았다는 것은 누가 들어도 믿기 힘든 얘기이다. ‘그녀’는 후배의 꿈 이야기를 듣고 크게 웃는다. “너, 순 거짓말쟁이구나?” 김애란의 소설쓰기와 함께 시작된 가족로망스가 작가의 성숙과 더불어 서서히 사라져갈 조짐을 보이는 대목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침이 고인다」는 고아나 독신, 애인이나 가족 등에 한정되었던 김애란 소설의 공간적·관계적 국면이 좀더 확장, 심화되어가는 국면을 보여주는 작품이기도 하다. 등가교환의 법칙과 집단의 논리가 통용되는 입시학원 세계에 대한 반응과 묘사가 확장의 차원이라면, 후배와의 우연한 동거생활에서 빚어지는 양가적 반응은 심화의 한 양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녀’와 후배가 동거하는 13평형 원룸은 순전한 타인 사이에 생겨날 수 있는 공감과 연민의 한계지점을 탐사하는 실험실과도 같다. 「침이 고인다」는 낯선 타인으로 만난 선후배가 ‘부탁’에서 ‘농담’을 거쳐 대화와 공감에까지 이르는 친밀성의 정치학을 섬세하게 그려낸다.
함께 밥을 먹는 ‘보통사람’의 일상을 새삼스럽게 누리면서 그들은 오랜 고독과 외로움에서 잠시 벗어난 듯 보인다. 그러나 함께 산다는 것은 말투, 옷 입는 방법, ‘즐겨찾기’ 목록처럼 은밀한 취향들을 어쩔 수 없이 공유한다는 것이며, 의식적인 배려와 상당 수준의 참을성이 필요한 고된 연기(演技)이다. ‘그녀’는 후배가 싫지는 않지만 왠지 불편하고 거슬리며 언젠가부터 “어서, 고독해지고 싶다”. 마침내 후배는 짐을 챙겨 떠나게 되는데, 그러나 이 ‘유사가족’이 이로써 완전히 해체된 것은 아니다. 소설은 ‘그녀’가 “몇달 동안 까맣게 잊고 살았”던 예의 반토막 난 ‘인삼껌’을 꺼내 먹는 장면으로 끝이 난다. “‘세상에’ 그녀가 놀란 듯 중얼거린다. ‘아직 달다’”.
5. 상상력의 사회학을 위하여
사회문제에 대한 구조적 인식이나 적극적인 개선의지라는 측면에서 사회적 상상력을 말한다면, 2000년대 젊은 소설들에서 그것은 아주 드물게만 발견된다. 물론 그들도 빈곤과 실업, 소외와 배제, 약자와 소수자의 존재에 대해 각자의 방식으로 자각적이지만, 그들은 그 부정적 현실의 교정을 적극적으로 도모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빈곤과 실업은 개선의 대상인 동시에 상상의 원천이고, 소외와 배제는 극복할 문제인 동시에 향유의 자리이며, 약자와 소수자는 사회적 보호의 대상인 동시에 미학적 매혹의 대상이기도 하다. 이런 기준에서 보면 2000년대 젊은 소설은 다양한 개성적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일종의 문화적 보수주의에 빠져 있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모든 상상은 현실을 우회적으로 호명하고 간접적으로 환기한다는 의미에서 상상력을 말한다면, 2000년대 젊은 소설은 그 어느 때보다 풍부한 목록을 보여주는 편이다. 이 글에서 간단히 살펴본 세 작가의 경우 역시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지구를 언인스톨한다는 박민규의 황당한 공상은 가시적·비가시적 폭력이 일상화된 세계에 대한 도저한 절망과 분노를 함축하고 있으며, 소수자를 체계적으로 배제하는 다수자의 논리에 대한 급진적 항의의 한 방식이다. 쓸모없는 잡동사니들을 부지런히 수집하고 유희적 퍼포먼스를 일삼는 김중혁의 주인공들은 모든 사물과 인간을 교환가치의 영역으로 끌어들이려는 자본주의의 거대 씨스템에 치열하게 맞서는 중이다. 한편, 상처를 윤색하고 변형하는 김애란의 거짓말과 판타지는 주체의 결핍을 보상하고 스스로를 위로하는 방식이며, 낯선 타인들 사이에 이루어지는 유대와 공감의 매개이기도 하다.
2000년대 젊은 작가들은 대체로 좁은 의미의 현실에 얽매이기보다 오히려 그로부터 점점 더 멀어지려고 하는 경향이 있다. 그들의 작품에 현실이 있다면, 그것은 환상, 망상, 거짓말을 통해서 간접적이고 우회적인 방식으로 겨우 드러나는 어떤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현실이 아니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것이야말로 그들이 경험한 절실한 현실이며, 각자의 방식으로 가공하고 재현한 현실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상상은 현실을 경험하고 재현하는 방식에 의해서 늘 재구성된다. 그런 의미에서 이제는 사회적 상상력이 아니라 상상력의 사회학을 본격적으로 논해야 할지도 모른다. 2000년대 젊은 소설에서 사회적 상상력은 죽은 것이 아니라 여러 갈래로 분화되어나간다. 지금, 사회적 상상력의 전통적인 존재방식을 가로지르는 그들의 서사적 모험은 한창 진행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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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광호 「혼종적 글쓰기, 혹은 무중력 공간의 탄생」, 『이토록 사소한 정치성』, 문학과지성사 2006, 101면.↩
- 김영찬 「2000년대, 한국문학을 위한 비판적 단상」, 『비평극장의 유령들』, 창비 2006, 73면.↩
- 「사회학적 상상력의 귀환」, 『문예중앙』 2006년 봄호; 「2000년대 한국문학이 읽은 시대적 징후」, 『창작과비평』 2006년 여름호; 「탈주체론을 넘어서」, 『실천문학』 2006년 여름호; 「지구적 자본주의와 약소자들」, 『실천문학』 2006년 가을호.↩
- 한기욱 「한국문학의 새로운 현실 읽기」, 『창작과비평』 2006년 여름호↩
- 홍기돈 「경계와 윤리, 그리고 포월」, 『창작과비평』 2006년 가을호, 368면.↩
- 김중혁 소설은 동시대 현실에 대한 비판적 자의식을 여러 곳에서 드러내지만, 직접적인 현실비판으로 나아가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의 소설이 드러내는 공동체적 지향 또한 예술적·문화적 취향을 공유하는 느슨한 집단, 그의 거의 모든 소설에 등장하는 마니아집단 정도에 그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