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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2000년대 한국문학이 읽은 시대적 징후 2
얼굴 없는 노동, 자본주의의 역습
최근 시에서 ‘노동’은 어떻게 존재/부재하는가
김수이 金壽伊
문학평론가, 경희대 교수. 평론집 『환각의 칼날』 『풍경 속의 빈 곳』 『서정은 진화한다』가 있음. whitesnow1@hanmail.net
1. ‘민중’의 사라짐, 자본주의의 역습
그 많던 민중들은 어디로 갔을까? ‘지상의 방 한 칸’(김사인)과 인간다운 세상을 열망하며 “서로가 서로의 몸을 묶어 더 튼튼해진 백성들”(이성부 「벼」), 진보하는 역사의 주체였던 민중들은. 80년대에 민중은 개별자의 총합 이상의 거대한 실체였고, 역사의 진정한 추동력이었으며, 간단히 기표화될 수 없는 살아있는 실재였다. 그렇지 않았다면, 민중의 대변자를 자임하며 그 전모를 낱낱이 실사(實寫)하고자 한 고은(高銀)의 「만인보」 기획은 애초에 성립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사회주의의 몰락 이후 역사의 판관은 민중이 이념의 시대에 명멸한 강력한 신념과 상상의 공동체였음을 선포했다. 짧은 시간에 민중은 지나간 과거의 회색빛 풍문이 되었다. 총과 최루탄으로 무장한 독재정권이 아닌, ‘민중’에 대한 시차(視差/時差)와 회의가 민중을 공중분해한 것이다. 대신 그 자리는 시민, 대중, 다중, 소비자, 네티즌, 겨우 존재하는 파편화된 개인들—범주가 착종된, 불확실한 집단/주체(?)들—로 채워졌다. 더불어 민중에 의해 추동되어야 할 발전적인 역사의 사건들은 대중이 주연하는 달콤하고 무시간적인 상업적 ‘이벤트’로 대체되었다. 이벤트의 진짜 주체는 자본이며, 사상 유례없이 강력해진 자본주의의 체계다. 그 속에서 상업전략과 정치·사회·문화 정책, 조작된 현실원칙의 작동과 창조적인 예술활동, 상품과 작품의 실현과정 사이에는 사실상 큰 차이가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역사의 종언, (근대)문학의 종언, 근대적 주체의 파산, 동일성의 서정적 주체의 퇴조 등 일련의 ‘최후의 담론’이 인문학의 영토에서 번성한 것은, 80년대가 그토록 타파하고자 한 계급적·구조적 모순의 모체(母體)인 자본주의가 행한 역습의 와중에서였다.
현실사회주의를 패퇴시킨 자본주의의 역습의 와중에서 ‘민중’은 해방되지 못한 채 사라졌다. 마치 마술과도 같이. 그러나 사라진 것은 민중의 낱낱의 실체가 아닌, 민중의 명칭과 이념이었다. 민중의 구성원들, 즉 계층과 노동조건과 삶의 방식에 따라 통합되고 분류된 수많은 개별자들은 현존했고, 이들의 삶도 그대로 지속되었다. 사회적 모순과 경제적 불합리 역시 형태를 달리하며 심화되었다. 이 기묘한 역사적 재배치에 대한 문학의 대응방식은 매우 온유한 것이었다. ‘민중’이 특정시대의 한 ‘현상’으로 공인되기 시작하자, 민중문학은 순순히 자신의 미래를 반납했다. 결과는 다른 결과의 원인이 되었고, 인과관계의 적절성은 의심되지 않았다. 그후 십여년이 흐른 지금, 그렇다면 소위 ‘포스트 민중문학’ 시대의 임무의 하나는 새로운 혹은 다른 방식으로 민중문학을 복원하고 계승하는 데 있을까? 답은 ‘예 그리고 아니오’이다. 민중문학이 갖는 현재성을 인식하고 독려하는 차원에서는 ‘예’이며, 민중문학이 누린 과거의 권위를 예우하는 차원에서는 ‘아니오’이다. 더욱이 오늘의 시대는 주체의 속성과 존재방식이 민중의 시대와는 달라진 상황에 있다. 현실의 변화 속도와 주체의 변전(變轉) 양상이 주체를 구(求/究/救)하려는 노력을 앞서거나 무력화할 때(지금이 그러한 상황인데), 그 속에서 정립된 주체는 또 하나의 허구와 상상(그것도 과거형의)의 산물이 되기 쉽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민중문학의 곤경을 포함해 자본의 회로에 포위된 문학의 현실을 돌파하는(‘주체’를 구하는 일에서도) 가능하고 생산적인 방법은 미확인의 ‘주체’보다 확인 가능한 ‘사건’과 ‘행위’에 촛점을 맞추는 것이 된다.
촛점의 하나는 자본의 회로 속에서 주체를 (비)주체로 만드는 중요한 사건/행위인 ‘노동’이다.1 민중문학의 현재성을 논할 자리도 ‘민중’이라는 요령부득의 주체보다 ‘노동’이라는 지속되는 행위를 중심에 둘 때 좀더 넉넉해지게 된다. 21세기에도 노동은 인간과 삶의 변함없는 토대이며, 이로 인해 ‘민중’이라는 이념의 주체는 폐기될 수 있어도 ‘노동자’라는 행위의 주체는 폐기될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노동자의 정체성과 노동환경, 노동의 성격 등은 전 시대와는 많은 차이를 갖게 되었다. 정보화시대의 비물질노동을 연구하는 라짜라또(M. Lazzarato)에 의하면, 오늘의 세계에서 “세계, 노동자들, 소비자들 및 써비스들은 사건(이벤트)보다 먼저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들은 사건들에 의해 산출된다.” 자본주의가 인간의 삶과 영혼까지 생산한다는 말은 더이상 수사나 과장이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할지라도 자본의 물질적이고 규격화된 이벤트에 맞서 인간이 자신의 주체성과 사물과 세계를 창조할 수 있는 최상의 사건/행위는 여전히 ‘노동’이다〔들뢰즈가 한사람이 지닌 존재 능력의 연속적인 변이라고 정의한 ‘정동(情動, affectus)’의 개념에 기초해, 마이클 하트(Michael Hardt)가 사회적 주체성과 삶능력(biopower)을 생산하는 노동이라고 정의한 ‘정동적 노동’, 라짜라또가 주체성과 경제적 가치를 동시에 생산하는 노동이라고 본 ‘비물질노동’이 이러한 노동의 유형이다. 정동적 노동, 비물질노동은 단순히 물질을 생산하던 과거의 노동과는 달리, 써비스, 지식, 소통, 사회적 관계 등의 비물질적 재화와 주체성을 생산한다. 이렇게 생산된 주체성은 자본에 의해 착취될 수도 있지만, 주체성을 (재)생산하는 정동·비물질노동은 살아있는 주체의 기쁜 ‘노동〓삶’이 될 가능성을 지닌다〕. 노동의 주체가 되는 것 혹은 노동함으로써 주체가 되는 것은 이제 인간에게 남은, 자본주의 씨스템을 교란하고 부식시키는 거의 유일한 길인지도 모른다. 노동은 인간이 자본주의 씨스템에 연결된 핵심적인 선이지만, 바로 그 이유에 의해 강력한 탈주의 선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일종의 역사적 사고(事故)에 의한 민중문학의 급격한 쇠퇴는 민중문학이 제출한 현실의 문제들, 특히 ‘노동’의 문제에 대한 외면과 침묵을 초래했다. 노동시, 농촌시 등이 새로운 시적 감각과는 동떨어진 구시대의 잔재로 취급되는 것이 단적인 예다. 그러나 노동시의 명칭과 현재성에 거부감을 지닌 이들이라도, ‘노동’이 소홀히 되거나 부정될 수 없는 우리 문학의 현안임을 부정하지는 못할 것이다.
2. 최근 시에서 ‘노동’이 존재/부재하는 방식
다소 도식적인 정리를 시도하기로 하자. 1980년대에 우리 사회에서 자본주의는 대체로 비판과 저항의 대상이었다. 반면, 2000년대에는 자발적 투신과 내면화의 대상이 되었다. 1980년대에 자본주의가 수정하고 타파해야 할 외부의 적으로 인식된 데 반해, 2000년대에 자본주의는 내부와 외부가 따로 없는 동일자이자 절대자로 개인의 무의식에 각인되어 있다. 말하자면, 자본주의 씨스템은 기계에서 생체로 진화중이고, 이미 우리의 살과 뼈와 내장기관과 합체된 상태에 있는 것이다. 기계와 생체의 혼종인 이 괴물이 자본주의 씨스템과 분리될 수 없는 상태에 이른 우리 자신임은 말할 것이 없다. 1999년에 출간된 시집 『사무원』에서 김기택(金基澤)은 이 괴물의 한 종(種)의 일상(일생)을 탁월한 통찰력과 희비극의 이중 톤으로 묘사한 바 있다.
그가 화장실 가는 것을 처음으로 목격했다는 사람에 의하면
놀랍게도 그의 다리는 의자가 직립한 것처럼 보였다고 한다.
그는 하루종일 損益管理臺帳經과 資金收支心經 속의 숫자를 읊으며
철저히 고행업무 속에만 은둔하였다고 한다.
(…)
이미 습관이 모든 행동과 사고를 대신할 만큼
깊은 경지에 들어갔으므로
사람들은 그를 ‘30년간의 長座不立’이라고 불렀다 한다.
(…)
그의 책상 아래에는 여전히 다리가 여섯이었고
둘은 그의 다리 넷은 의자다리였지만
어느 둘이 그의 다리였는지는 알 수 없었다고 한다.
—「사무원」(『사무원』, 창작과비평사 1999) 부분
의자와 합체된 여섯개의 다리 중에 “어느 둘이 그의 다리였는지는 알 수 없었다”는 이 괴물의 종명(種名)은 ‘사무원’이다. 자본주의 씨스템이 부과하는 ‘고행업무’에 투신해 ‘30년간의 장좌불립’을 달성한 ‘사무원’의 육체와 정신은 완벽하게 부정적인 의미에서 탈인간·비인간·초인간의 경지에 이르러 있다. 아이러니와 풍자, 우의, 펀(pun)의 미학적 장치들이 ‘사무원’의 이러한 경지를 표현하는 데 다채롭고 효율적으로 협력하고 있다. 이 시는 김기택 시의 주제인 ‘자본주의 변종육체(신체 없는 기관)의 현상학’을 사무직 노동자를 대상으로 성공적으로 구현한다. 그 현상학적 시선이 사무직 노동자에 가닿은 것은 김기택의 많은 시도 중 하나였지만, 현실에 대한 거시적 통찰력에서 이 시는 김기택의 시와 1990년대 시의 한 정점을 보여준다. 김기택은, 세기의 전환기에 일어난 정치·사회적 변화의 배후에 자본주의에 의한 인간(특히 노동자)의 생물학적·존재론적 전회가 진행되고 있었음을 날카롭게 간파했던 것이다. 노동의 문제를 중심에 둘 때, 김기택이 이 부분에 대한 탐구를 계속 밀고나가지 않은 것은 아쉬운 일이다. 당대의 사회조건과 직결되는 일이기는 하나, 1980년대의 노동시가 다분히 육체노동을 전제한 것이었으며, 이후 우리 사회의 노동구조에서 사무노동을 비롯한 ‘비물질노동’의 비중이 높아진 정황을 생각할 때 아쉬움은 더 커진다. 이와 관련해, 최근 노동에 관한 시들이 노동구조의 변화를 적극 반영하지 못하고 육체노동을 주로 다루는 것은 현실의 속도에 뒤처져 있는 시의 지체현상을 예증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누락과 지체는, 노동이 시의 주제로 크게 환영받지 못하는 근래의 시단 분위기와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 현재 우리 시에서 비물질노동에 관한 탐색은 김기택이 「사무원」에서 제기한 선에 머물러 있는 셈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시에 담긴 핵심 전언은 이렇게 재해석될 수 있다. 이념의 시대 이후 전개된 자본주의의 역습은 인간의 심신을 전유해 “어느 둘이 그의 다리였는지 알 수 없”게 하는 ‘동일화’의 전략을 현실화하는 데 사력을 다했다.2 이러한 동일화의 전략은 항상 어떤 것의 배제를 전제한다. 배제된 것은 1980년대에는 연대와 혁명의 중심에 있던 자본주의의 아킬레스건, 착취당하는 노동자들이었다. “기계 사이에 끼어 아직 팔딱거리는” 동료의 손을 꺼내 “양지바른 공장 담벼락 밑에 묻”었던(박노해 「손무덤」, 『노동의 새벽』, 풀빛 1984) 생계형 노동자들이 그들이다. 이들을 배제하는 데 근래 우리 시는 알게 모르게 동의해왔는데, 이를 거스르는 반대 흐름도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노동자의 삶과 내면을 진하게 표출하는 유홍준(劉烘埈)은 그 반대 흐름의 편에서 빼놓을 수 없는 시인이다. 흥미롭게도 유홍준이 최근 발표한 시에는 30년 의자고행에 정진한 김기택의 ‘사무원’의 후예가 등장하고 있다. ‘사무원’과 노동의 유형은 다르지만 노동의 속성은 같다는 점에서 유홍준이 그려내는 노동자의 모습은 많은 시사점을 제공한다.
내가 다니는 종이공장
제지기계는
베어링을 돌린다
스님보다도 오래, 수녀님보다도 더 끈질기게
기계는 기계의 염주 베어링을 돌리며 용맹정진을 한다
소음이라 부르는 기계의 염불 소음송(騷音頌)을 외우며
오직 한 길 생산도(生産道)를 닦는다
가진 것 없고 배운 것 없는 내가 믿는 건 이 공장 이 기계의 크신 능력뿐,
오늘도 나는 푸른 생산도복을 입고
닦고 조이고 기름 치나니
일용할 양식 내리시는 기계신 앞에
—「기계는 기계의 염주 베어링을 돌린다」(『나는, 웃는다』, 창비 2006) 부분
“염주 베어링을 돌리”고 “염불 소음송을 외우며/오직 한 길 생산도를 닦는” ‘기계’는 ‘30년간의 장좌불립’을 성취한 ‘사무원’처럼 지극하고 한결같은 수행자의 풍모를 지니고 있다. 우리 시대의 위대한 종교적 경지는 이처럼 노동자와 노동하는 기계에서 가장 온전하게 실현중에 있다. “푸른 생산도복을 입고” “닦고 조이고 기름 치”는 ‘나’는 용맹정진하는 ‘생산교(자본주의)’의 수행자이며, “일용할 양식 내리시는 기계신”의 충직한 신도이다. ‘나’는 인간의 정체성과 주체성을 기계신에게 남김없이 바치고, 기계신이 주재하는 ‘얼굴 없는 노동’의 한 구성요소가 되어 생계를 영위한다. 공장에서 완성된 제품이 필요로 하는 것은 노동자의 얼굴(정체성과 주체성의 표면으로서)이 아닌, 공인된 ‘합격 도장’(「푸른 도장」)이기 때문이다. 이 시에서 유홍준은 인간과 기계의 위상 역전이 기계—신과 노동자—신도의 종교적 단계에 이르렀음을 반어적 어법으로 노래한다. 그러나 이 반어는, 유홍준 스스로도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인식과 수사의 차원에 머물 뿐 현실의 차원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가진 것 없고 배운 것 없는 내가 믿는 건 이 공장 이 기계의 크신 능력뿐”인 상황은, “스님보다도 오래, 수녀님보다도 끈질기게” “염주 베어링을 돌리는” ‘기계’처럼 자본의 컨베이어벨트 속에서 반복되는 진짜 현실인 까닭이다. 진짜 현실의 피로한 언저리에서 얼굴 없는 노동자가 먹는 음식에는 “비곗덩어리 한 점!”에도 “그대가 찍어준 합격 도장처럼” “푸른 도장이 찍”혀 있다. “두 눈 때꾼해지는 야근을 마치고/공단 식당 허름한 방석 위에 앉아 받는/희멀건 밀양돼지국밥/한 뚝배기”(「푸른 도장」) 속에서도 자본의 생산라인은 여지없이 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유홍준은 현실의 도처에서, 예컨대 ‘다방’과 같은 후미진 영업장소에서도 생산라인을 따라 반복되는 노동의 지독한 연결선을 읽어낸다. 그 연결선을 한 지면에 이으면 자본의 생태지도 한장이 완성된다.
우리나라 다방은 18,536개이다 우리나라 다방 종업원은 29,459명이다 오후 3시 38분 현재, 커피를 주문하는 인간은 5,047명이고 배달 가는 오토바이와 티코는 935대이다 지금 3급 카쎈터 더러운 쏘파에서 배달 나온 다방 레지의 젖을 만지는 놈은 2,304명 팁을 받으려고 치마를 걷어올린 년은 576명이다 (…) 엄마 별일 없죠? 네에 저도 직장 잘 다니고 있어요 그럼요 걱정 마세요 타락천사가 1,906명 오늘 보건소 가야 하는 백설공주가 5,401명이다 지금 공주의 썩은 가랑이를 들여다보고 있는 보건의는 152명 오늘 은퇴하는 왕비가 84명 새로 입궐하는 궁녀가 157명이다 정말로 굉장한, 이 나라의 행사다
—「다방에 관한 보고서」(같은 책) 부분
이 시는 영화에서 넓은 공간의 전체적인 움직임을 담는 익스트림 롱샷(extreme long shot)의 기법으로 ‘다방’을 둘러싼 자본의 재생산구도를 극소화해 포착한다. 29,459명, 576명 등의 구체적 숫자로 나열된(통계의 허상에 허구의 숫자겠지만) 노동자와 소비자 들은 얼굴은 물론 실물감마저 제거된 채 미리 설치된 자본의 회로를 따라 쉼없이 이동한다. 이 맹목의 이동은 속성상 “더러운” “썩은” 것이지만, “정말로 굉장한, 이 나라의 행사”, 즉 한순간도 중단될 수 없는 자본의 제국의 이벤트이다. 따라서 사실 단순한 착상에서 출발한 이 시가 환기하는 바는 의외로 단순하지 않다. 노동의 본질과 의미, 노동자의 생명력과 자발성을 포식한 자본의 폭력적 생태계를 미니어처처럼 한 컷에 보는 동안, 우리가 발견하는 것은 그 속에서 점 하나로 배회하고 있는 우리 자신의 모습인 까닭이다.
김진완(金鎭完)은 자본의 회로를 분해해 ‘노동하는 인간’과 ‘인간의 노동’을 구해내고 싶은 소망을 피력한다. 김진완이 등단 13년 만에 펴낸 첫 시집 『기찬 딸』(천년의시작 2006)은 1980년대 혈통의 2000년대 버전이라고 할 수 있다. 김진완이 1980년대의 시법과 세계관을 고수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반대로 1980년대 시가 제기한 문제들을 그가 2000년대에도 계속 살아 숨쉬게 하고 있다는 뜻이다. 더 정확히는, 그 문제들은 현재에도 “환장하게” 지속되고 있기에 김진완은 그것을 생생히 기록하는 데 자신의 시의 목표와 존재 의의를 건다. 그의 혈육인 ‘동생’이 그의 시쓰기를 추동하는 산 증인의 한사람이다.
동생은 온종일 유리를 날라다가 아파트 한 동의 안팎을 만드는데 손에 굳은살이 빨리 안 생긴다고 굳은살이 박여야 유리 모서리에 닿아도 손이 안 아픈 거라며 벌겋게 부은 손바닥으로 흙투성이 발을 투덜투덜 씻는 거였겠지만 (…)
삼형제 중 막내
최종학력 방통대 중퇴
환갑 칠순 지난 노부모 부양중—
“삼팔육이고 사팔육이고 있는 것들이 더 지독해 남 힘들게 일하는 거 뻔히 봐놓고도 잔금 못 주겠다 배 째라며 눈을 치뜨고 입에 게거품 무는 거 보면 아주 환장하겠다니까”
술잔을 손에 감아쥐고 쥐어짜듯 마시는 성원유리 기술자
절대 꺾어 마시는 법이 없는 36세 노총각
그 사내의 손가락 중간마디마다 박인
굳은살을 봐버린 것이다
—「굳은 살」(『기찬 딸』) 부분
아파트 공사장에서 일하는 유리 기술자인 ‘동생’의 “손가락 중간마디마다”에는 ‘굳은살’이 박여 있다. 노부모를 부양하는 36세 노총각의 손에 ‘굳은살’로 각인된 노동의 수고는, 그러나 정당한 보상을 받지 못한다. “남 힘들게 일하는 거 뻔히 봐놓고도 잔금 못 주겠다 배 째라며 눈을 치뜨고 입에 게거품 무는” “더 지독”한 ‘있는 것들’의 횡포 때문이다. ‘굳은살’은 ‘동생’이 온몸을 바쳐 정직하게 일한 결과 생긴 육체적 징표지만, ‘유리’와 같이 투명하게 그를 포위한 가진자들의 철옹벽에 그가 입은 상처이자 본능적인 대응책이기도 하다. “굳은살이 박여야 유리 모서리에 닿아도 손이 안 아픈 거”라는 이치를 체화하고 있는 노동자는 자신의 육체를 훼손하고 변형함으로써 ‘유리 모서리’로 가득한 현실에 간신히 맞서는 것이다.
자본은 가진자들의 횡포 때문에 노동의 선을 따라 합리적으로 흐르지 않는다. 자본이 인간의 이기적 욕망과 한몸을 이루는 한 자본의 합리성은 끝내 실현되기 어렵다. 자본의 합리성은 자본주의가 유포한 이데올로기이며, 이에 생포된 노동자에게 얼굴이 없는 것은 자본이야말로 얼굴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자본은 얼굴도 생애도 없다. 한계 없는 증식만이 있을 뿐이다. 노동이 자본의 회로를 따라 순환(하지 못)할 때, 김진완이 2000년대 한복판에서 맑스의 『자본론』을 재소환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김진완은 자신이 현재 경험하는 자본의 악마성이 세기 반 전에 『자본론』(1867)에 고스란히 예견되어 있었음을, 잊고 있던 중요한 사실을 발견한 것처럼 그 자신과 그의 시를 읽는 독자들에게 상기시킨다. 『자본론』이 교과서였던 시대와의 적잖은 시차 때문에 낯설어서, 동시에 낯익어서 당혹스럽기까지 한 다음의 시는 자본과 자본주의를 살해하는 상징적인 제의를 설화의 공간과 현재의 일상을 넘나들며 다성(多聲)의 화법으로 전개한다. 전통 이야기의 구어체와 서양 서적의 문어체, 3인칭의 서술과 1인칭의 중얼거림, 잔혹과 해학이 뒤섞인 시적 풍경은 흡사 박상륭의 소설 한 대목을 연상하게 하기도 한다.
사내 올무를 목에 건 채 잠시 생각하더니 다음 백년 후엔 어찌 되는가 묻자, 나무는 입을 다물고 뿌리에 뒤엉킨 채 삭아내리던 해골이 덜그럭덜걱 몸을 일으켜 진흙을 토하고는 날 선 쇳소리로 카랑카랑 말하더라 나이면서 너인 네여 내가 말하니 너는 들어라 너는 네 천성을 버리지 못하니 악업의 목숨으로 다시 낳아져 (…) 온 산과 그 품안에 뭇 생명들을 그슬러 먹고는 잿물을 토해 강과 바다의 숨 붙은 것들도 모조리 잡아 죽일 것이다 하자,
사내 눈알을 번들거리며 웃어 말하길 나 스스로 나를 죽이는 데 걸거침이 없게 하여준 댓가로 100년 후에 다시 와 실컷 놀아주마 하고는 즉시로 목을 매달아 혀를 빼어 물거늘……
왜 이런 얘기가 느닷없이 튀어나와 날 뜬금없게 만들까 곰곰 생각하다……아니지…… (…) 아무래도 이자를 그냥 사내라 하기엔 너무 밍숭맹숭한 처사지 싶어, 슬슬 친근함마저 느껴지는 이 사내의 이름을 지어주기로 마음먹고는 책을 펼쳐 뒤적이기 시작했다
만약 貨幣가, 오지에(Marie Augier)가 말하는 바와 같이, “한쪽 볼에 피자욱을 띠고 이 세상에 나온다”고 하면, 資本은 머리에서 발끝까지 모든 털구멍에서 피와 오물을 흘리면서 이 세상에 나온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15)
15) ……資本은 소란과 분쟁을 싫어하는 겁쟁이다. 이것은 진리이지만 결코 완전한 진리는 아니다. 자연이 眞空을 싫어하듯이 자본은 利潤이 없거나 또는 매우 이윤이 적은 것을 싫어한다. 상당한 이윤만 있다면 자본은 과감해진다. 10퍼센트의 이윤이 보장되면 자본은 장소를 가리지 않고 투자된다……50퍼센트라면 대담무쌍해지고, 100퍼센트라면 人間의 法을 모두 유린할 준비가 되어 있으며, 300퍼센트라면 단두대의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범하지 않는 犯罪가 없다. (…) (더닝 T.J.Dunning, 『노동조합과 파업』, pp. 35~36)
『資本論』 비봉출판사 刊 p.956
독한 놈, 네로구나…… 자본
—김진완 「인연설화 혹은, —夢遊盜殺圖」(같은 책) 부분
‘몽유도살도’라는 잔혹한 부제는 ‘자본’이라는 이름의 ‘사내’가 전생과 현생과 후생에서 공히 저지르는 ‘뭇 생명들’에 대한 살육을 의미한다. 또한 그 사내 ‘자본’을 수없이 자살에 이르게 하(고 싶어하)는 이야기 제작자인 ‘나’, 시인의 살해욕망을 가리키기도 한다. 그런데 자살상태에 이른 것은 정작 ‘자본’이 아니라, “머리에서 발끝까지 모든 털구멍에서 피와 오물을 흘리면서 이 세상에 나온” 자본의 진면목을 파헤친 『자본론』이며 『자본론』이 지향한 세계(관)이다. 자본주의의 역습은, 내용의 타당성 여부를 떠나, 자본주의를 해부하는 행위와 시각 자체를 향해서도 “숨 붙은 것들”은 “모조리 잡아 죽일” 태세로 감행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김진완이 21세기의 어느 하루에 불현듯 “펼쳐 뒤적이”는 것은 『자본론』 자체가 아닌, 『자본론』을 타깃 또는 희생양의 하나로 삼아 “걸거침이 없이” 전개되어온 자본주의 역사의 전생과 현생과 후생인 것이다.
3. 노동시의 가능한 미래들
최근 우리 시에서 ‘노동’이 형상화되는 일반적인 형식은 에피쏘드라고 할 수 있다. 시인이 직·간접적으로 경험한 노동의 단편적 장면들이 삶의 에피쏘드의 하나로 시 속에 삽입되는 것은 요즘 젊은 시인들이 자신들의 삶을 시적으로 조형해나가는 방법론의 하나로 채택되는 듯이 보인다. 몇가지 예를 들면, “스무 살 공장에서 내가 조립한 수천 개의 전구엔 밤마다 불이 들어오고 있을까”(김경주 「오르페우스에게서 온 한통의 엽서」, 『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 랜덤하우스중앙 2006) “운이 좋으면 어머니는 이번 달엔 사내에서 보험왕이 될 것이다 그리고 옵션으로 옥브라를 타오실 것이다”(김경주 「인형증후군 전말기」, 같은 책) “틈만 나면 살고 싶었다/(…)/백짓장 같은 날들,/사내는 후들거리며/벽돌을 지고/일어서고 있었다”(윤성택 「홀씨의 나날」, 『리트머스』, 문학동네 2006), “서울헤라시보리(헤라시보리는 금형기술의 일종이며 서울헤라시보리는 상호이다—인용자)는 분명한 추상도 아니고 不變의 현실도 아니지만 나의 빈틈을 통과하는 불빛 막 사라졌다가 태어나는 저 환한 감옥”(장석원 「내 마음의 아나키」, 『아나키스트』, 문학과지성사 2006) 같은 진술에서 그 편린을 엿볼 수 있다. 노동을 소재나 모티브로 한 시는 적지 않지만, 노동시는 많지 않으며, 노동시인 역시 드문 것은 노동이 삶의 에피쏘드로 변주되는 이러한 시적 형상화의 미학적 트렌드와 적잖은 상관관계를 맺고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노동과 자본의 관계에 대한 비판적인 의식을 시의 전면에 드러내는 유홍준과 김진완이 노동시의 현재적 생명력을 증거하는 예외적인 경우로 채택되는 것은 상대적 효과의 측면이 크다고 할 수 있다.
상황이 이러하다면, 노동시의 함의를 새롭게 구성하는 것은 시대적 요청에 의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노동시는 1980년대에만 통용된 장르가 아니므로, 노동시의 개념을 80년대의 노동의 세계관에 붙박아두는 것은 시대착오적이며 비생산적인 일이다. 서정과 서정시의 함의가 시대의 변화에 따라 계속 바뀌는 것처럼, 노동과 노동시의 함의도 새로운 시대에 맞게 수정되고 재구성되어야 한다. 현재 우리 사회가 직면한 급변하는 노동환경의 예로, 착취의 새로운 형태인 비정규직 노동자 수가 2006년 현재 850만에 이르는 현실(노동계 발표 기준. 통계의 묘를 악용한 정부의 발표수치는 550만이다)은 그 수정체계에 반드시 들어가야 할 중대 사안의 하나이다. 이처럼 우리의 정체성과 실존을 전면적으로 압박해오는 노동의 문제를 적극 인식하고 시화(詩化)하는 것은 최근 젊은 시인들이 열정적으로 투신하는, 개인의 내면세계와 감각과 미학을 추구하는 일과 대립하지 않는다. 오히려 첨예한 접점에서 만나는데, 앞서 언급한 것처럼 최근 젊은 시인들의 미학적 모험은 자본주의 씨스템이 양산하는 감각과 질서에 대한 무의식적 저항의 속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형태로든 한사람의 노동자로 살아가야 할 이들의 편에서 볼 때도, 더불어 이들이 추구하는 진정으로 새로운 감각과 미학의 성취를 위해서도 ‘노동’을 경유하는 것은 미학적으로 그리고 현실적으로 분명 필요한 일이다. 자본주의가 강요하는 ‘얼굴 없는 노동’의 담당자들이 주체적인 감각과 미학의 소유자가 될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기 때문이다.
거의 대부분의 경우 육체노동에 고착되어 지체현상을 보이는 오늘의 노동시와는 달리, 미래의 노동시는 비물질노동(글쓰기로 이루어지는 문학행위가 바로 대표적 표본이다)에 대한 본격적인 탐색을 벌여나가야 할 것이다. 자본주의의 무차별·무제한 습격에 맞서 노동의 주체가 되는 것, 그리하여 삶의 주체로 살아가는 것은 자본과 일대일로 교환되지 않는 ‘초과’나 ‘미달’의 방식의 노동을 통해 확보될 수 있다. 이러한 결론에 도달한 이 글 역시 그러한 ‘초과’나 ‘미달’의 노동을 지향하며 퍼스널 컴퓨터 화면의 활자와 스페이스의 간격을 메우며 씌어지고 있다. 부단히, 가까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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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다른 방법은 주체에게 일어나는 실시간의 사건, 즉 혼돈의 세계에서 끊임없이 이합집산하며 ‘얼굴’을 바꾸는 주체의 변전과정을 끈질기게 추적하는 것이다. 이는 무정형/미정형의 복수와 미완의 주체로 거듭나면서 무의식까지를 가로지르는 내면의 모험이자 감각적·미학적 투쟁의 길이 된다. 최근 각광받는 젊은 시인들, 황병승, 김행숙, 이민하, 김근, 김민정, 장석원 등의 지향점이 바로 여기에 있다. 이들이 감각을 자산으로 삼는 까닭은, 주체의 변형과정에서 주체가 주체로서 최후까지 소유하는 것이 감각이며 최초로 발산하는 것 역시 감각이기 때문이다. 자본주의가 인간의 감각을 향해 총공세를 펼치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라짜라또는 현대사회에서 표현되고 실효화되는 주체성들, 즉 감각적인 것의 창조와 실현은 경제적 생산에 선행하며, 현재 지구적 규모로 수행되는 경제 전쟁은 사실상 ‘미학적 전쟁’이라고 말한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최근 젊은 시인들이 생산하는 낯선 감각과 미학은 자본주의의 ‘미학적 전쟁’에 대한 참전 혹은 응전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의 존재와 주체성을 스스로 확보하고자 하는 이 의연한 개인들은 ‘감각과 미학의 1인 게릴라전’을 펼치고 있는 셈이다. 이처럼 파편화·개인화·감각화·미학화한 ‘포스트 민중시대’의 개별자들은 집단의 이념과 멀어진 곳에서 역설적으로 하나의 집단을 형성해가고 있다.↩
- 동일화의 전략에 의한 자본주의의 역습의 참상은 예컨대 이런 것이었다. 부(富)는 착취와 부정의 부끄러운 증거에서 능력과 행운의 부러운 전리품이 되었다. 자본은 그 자체로는 비난받을 이유가 없는 가치중립적 존재이며, 자본주의가 발명한 최상의 합리적 가치라는 의식이 사회 전반에 확산되었다(이 심리적 면죄부의 발행자는 처음에는 ‘그’에서 점차 ‘우리’와 ‘나’가 되었다). 문학계의 경우, ‘문학작품 역시 자본주의 씨스템 속에서 유통되는 상품’이라는 사실을 다양한 방식으로 긍정해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