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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간평 │ 소설
‘이후’의 시간과 소설의 고독
정홍수 鄭弘樹
문학평론가. 주요 평론으로 「진정성의 깊이가 찾아낸 결핍의 형식」 「불가능의 역설을 사는 소설의 운명」 등이 있음. myosu02@hanmail.net
1. 고독을 감싸는 자연의 리듬
「제비를 기르다」(『문예중앙』 2006년 가을호)는 윤대녕(尹大寧)의 인장이 너무도 뚜렷한 작품이다. 우선 시원 회귀의 꿈을 부르는 은어의 자리에는 매년 음력 삼월 삼짇날 찾아왔다 9월 9일이면 강남으로 돌아가는 제비의 항해지도가 놓여 있다. 하면서 예사로운 철새의 생태로부터 인간 영혼의 지리지를 세련되게 전경화(前景化)하는 작가 특유의 상상력과 장인적 솜씨는 일견 시대착오가 아닌가 싶게 낡아 보이는 ‘여자의 일생’ 이야기를 자연스런 소설의 리듬으로 감싼다. 삼월 삼짇날 아침에 태어나 평생 제비를 그리워하며 운명처럼 고독을 앓았던 강화도 여인, 소설 화자 ‘나’의 어머니가 그 주인공인데, 매년 첫눈 내릴 무렵의 불가사의한 출분처럼 이해받기 힘든 그녀의 일생이란 제비에 대한 그리움을 통해 너무도 일찍 ‘영원의 나라’를 보아버린 자의 자기처벌의 시간이었던 것. 이 설명할 수 없는 세계를 강화도 드넓은 가능포 들판에 세워둔 채, 소설은 윤대녕의 저 유려한 연애담의 세계로 달려간다. 물론 이 두 세계는 원환처럼 맞물려 있으며, 그 원환은 닮고 반복되는 운명의 형식으로 소설에서 드러난다. 왜 그렇지 않겠는가. 어머니가 어린 화자에게 들려준 말, “여자는 영원의 나라를 왕래하는 철새 같은 존재”라는 주문이 절대적으로 전제되어 있는 바에야.
그 맞물린 원환의 모습은 구체적으로 어떠한가. 어머니를 한편에 두고 두명의 여자가 등장한다. 이문희와 서문희. 작가의 장편 『미란』(문학과지성사 2001)이 두명의 미란(지명까지 포함하면 셋) 사이의 이야기인 것과 흡사하다. 하긴 누구나 언젠가 한번은 알 수 없는 그리움에 영혼을 놓아버릴 운명들이라면 씨는 다를지언정 이름이 같다고 무엇이 이상하랴. 게다가 우연의 개시는 윤대녕의 인물들이 합리와 계산가능성으로 틀지어진 지금의 세계를 벗어나는 거의 유일한 출구가 아니던가. 이문희는 화자의 고향인 강화 읍내 시장통의 작부집 여인. 어머니로 인해 또다른 고독병을 앓던 아버지의 여자들 가운데 한명이었으며, 어린 화자에게 여자의 분 냄새를 알게 한 인물. 서문희는 소설 화자가 군에서 제대하던 날 서울행 버스에서 ‘우연히’ 말문을 트게 된 여대생. 남자친구의 면회를 왔다가 헛걸음을 하고 돌아가는 길이었다. 이 우연이며 운명적인 만남으로부터 20년에 걸쳐 펼쳐지는 두 사람의 긴 인연담과 서문희의 곡절 많은 인생살이를 마음의 흐름을 좇아 세월을 잇고 건너뛰며 요약해내는 윤대녕의 솜씨는 가히 천의무봉에 가깝다. 사실상 서문희의 ‘여자의 일생’인 셈이다.
그런데 서문희는 어쩌다 “영혼을 잃어버리고”는 두 남자 사이에서 방황하고 두번이나 이혼하면서 평탄치 못한 삶을 살 수밖에 없었는가. 자신의 말처럼 강화도 가능포 들판에 몰려와 있던 제비떼를 보았기 때문일까. 그러니까 그 순간 서문희도 화자의 어머니처럼 저 먼 강남에 있다는 영원의 나라를 보아버린 것이고, 이제 전처럼 살아간다는 것은 불가능하게 된 것일까. 이 질문에 긍정과 부정의 두가지 대답이 모두 가능하다는 점에 「제비를 기르다」의 소설적 힘이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무슨 이야긴가. 서문희와 소설 화자의 만남과 사랑의 실랑이는 냉정하게 들여다보면 장삼이사의 사람들이 겪는 행로와 그다지 다르지 않다. 첫사랑을 찾아간 결혼이 실패하고 서른 나이에 “한물간 시골 술집의 작부”처럼 변한 서문희와 5년 만에 마주한 화자가 “우리는 춘천발 서울행 버스에 함께 타지 말았어야 했고 학교로 찾아가지도 말았어야 했고 (…) 또 그랬더라도 거리를 두고 조금씩 알아가면서 가까워졌어야 했는데 처음부터 모든 걸 한꺼번에 빼앗겠다고 달려들었지. 무책임하고 이기적으로 말야” 하고 사랑의 미숙을 유치하게 자책할 때, 이 연애담의 실상은 오히려 확연해진다. 누구나 부딪치는 곤경에 불과했던 것. 그러지 않으려면 “영원의 나라에서 생을 거듭하지 말고 그냥 오래 머무”는 방법밖에 없을 테니까. 두 사람이 제비가 돌아간다는 강남, 그러니까 태국으로 동반 여행을 떠나 기나긴 사랑을 나누고 온통 금박으로 뒤덮인 왓 찰롱 사원의 지붕 위에 몰려와 있는 한 무리의 황홀한 제비떼를 보았다고 해서 사정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한갓 철새의 생태에 불과한 제비의 항로와는 무관하게 진행되는 현실의 구속이 있는 법. 작가는 제비 신앙의 사제격인 “어머니의 예언”을 짐짓 심각하게 말하기도 하지만, 두 사람의 헤어짐과 서문희의 결혼이 파탄에 이르게 된 과정의 비속함은 또 그것대로 보여주는 걸 잊지 않는다. 요컨대 작가는 초월적 지평과 비속한 일상 사이의 거리 혹은 아이러니를 충분히 의식하고 있다. 가령 “진흙 같은 고독” “가마솥 뚜껑이 열린 것처럼 하늘이 공허해 보였다” “썩어가는 감자처럼 마음이 점차 병들어가고 있었다” “오징어 먹물 같은 어둠 속” “단지 우물에 빠져 외치는 소리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야말로 가관이었다” 등등의 부러 다듬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말들이 불쑥불쑥 소설의 기본 어조를 조롱하는 듯한 지점도 이 거리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중간중간 연극투의 대화가 자아내는 묘한 소격효과도 덧붙여 언급할 수 있을 것이다. 하면서도 이 모두는 제비에서 비롯된 이야기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소설은 도저히 부인할 수 없게 감동적으로 보여준다.
그후 문희는 학교를 그만두고 아이가 일곱살이 될 때까지 내게 연락을 해오지 않았다. 그러다 올해 4월 25일 오후에 내게 전화를 걸어와, 작년에 복구공사가 끝난 청계천에 그제야 처음 구경을 나갔다가 제비떼를 보았노라고 했다. 그해 강화도 저녁 들판에서 보았던 것만큼이나 많은 제비들이 청계천 하늘에 몰려와 있었다고 했다. 문희의 목소리는 어느덧 흐름의 끝에 다다른 강물처럼 잠잠해져 있었다. 그 강물 속의 돌들도 더이상 울부짖는 기척이 없었다.
춘천발 서울행 버스에서 문희를 만난 지 20년이 흐른 뒤다. 첫 결혼이 실패한 뒤 강원도 대관령 아래 성산에서 “바윗돌이 물속에서 굴러가는 소리를” 이명(耳鳴)으로 들으며 술집 작부처럼 주저앉아 있던 때로부터도 15년이 흘렀다. 그새 문희는 두번 더 결혼했고, 세번째 결혼 때는 태국의 푸껫으로 신혼여행을 떠났다고 했다. 푸껫에서는 제비를 보았을까. “흐름의 끝에 다다른 강물처럼 잠잠해”진 목소리란 어떤 것일까. 알 수 없지만 그것이 시간의 힘으로 도달한 지점이란 점만은 뚜렷하게 느낄 수 있다. 20년 전 문희와 함께 찾았던 강화 시장통 술집 ‘문희’의 문앞에서 그녀는 문을 두드리는 화자를 다급한 목소리로 제지하며 “마치 늙음의 문 앞에 서 있는 여자처럼 떨고 있”지 않았던가. 이제 그녀도 그 문으로 들어서고 있는 것일까. 이 막막한 삶의 풍경에 호응해줄 수 있는 것으로 청계천 하늘을 물들인 제비떼의 귀환만한 것이 달리 있으랴. 강남 갔던 제비 백마리 중 돌아오는 것은 겨우 다섯마리뿐이며, 새끼의 귀환 확률은 1퍼센트에 불과하다는 것. 그렇다면 나머지 제비들은? “일부는 생을 다해 죽고, 그 나머지 제비들은 또다른 곳으로.” 화자의 기억에 의하면 서울 하늘에 제비가 돌아온 것은 30년 만의 일이었다. 이른바 자연의 질서다. 이런저런 굴곡과 함께 진행되는 인간사의 잡답(雜沓)도 어느 수준에서는 이 질서와 만날 수밖에 없다. 문희의 방황이 강화도 가능포 들판의 제비떼와 무관하지 않다면 이 지점에서 그러하리라.
윤대녕의 「제비를 기르다」는 제비떼의 그것처럼 순환하고 반복되는 시간의 원무 속에 있다. 여대생 문희가 작부집 늙은 문희가 되고, 이 둘은 고향 강화에서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어머니의 일생에 다시 포개진다. 해서는 셋이 하나가 되는 ‘여자의 일생’. 그런데 그이들은 과연 영원의 나라를 왕래하는 철새들일까. 어쩌면 이 모두는 소설 화자 ‘나’의 고독이 빚어낸 환각은 아닐 것인가. 작부집 늙은 문희의 품에 안겨 울음을 쏟아낸 뒤, 스르르 잠이 들었던 화자가 깨어났을 때의 상황은 다분히 암시적이다. 소설의 마지막 대목. “그리고 어찌 된 일인지 어두운 방 안에는 나 혼자뿐이었다.” 환각에 대한 자각이 아니라면 굳이 ‘어찌 된 일인지’란 표현을 쓸 필요가 있었을까. 제비를 기른 것도 제비를 기린 것도 그러고 보면 ‘나’였던 셈이다.
2. 시간을 거스른 고독의 귀환
고독은 발견되는 것인가. 은희경(殷熙耕)의 「고독의 발견」(『문학판』 2006년 가을호)은 그렇다고 말한다. 그런데 그 대답의 소설적 무게는 단연 발견의 형식에 있다. 소설의 주인공이자 화자인 ‘나’는 서른여덟살 먹은 고시생. 고지식하게 모범생의 길만을 밟아오면서 공부 외에는 할 줄 아는 게 없는 처지가 되었고, 그렇게 시작한 고시생활이 길어지면서 이제는 가족도 기대를 접어가는 상황. 10년 넘게 사귄 여자친구도 화자의 고지식함에 질려 떠나버렸다. 작가는 의식과 무의식의 차원 모두를 끌어들여 이 인물의 자의식이 마침내 고독의 기원에 이르는 순간으로 소설을, 아니 시간을 접고 또 접어간다. 이른바 발견의 형식이다.
시간을 접는다고 했거니와, 이 소설에는 두가지 시간축이 있다. 화자 ‘나’의 서른여덟살 생일날 오후 어느 찻집에서 흘러가는 시간과 여자친구 S의 생일날 저녁 두 사람이 함께했던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흘러가는 시간. 1부터 8까지 장(章)처럼 번호가 붙어 있는 이 소설에서 1부터 7까지가 앞의 시간축이고 뒤의 시간축은 소설의 마지막이기도 한 8 하나뿐이다. 여자친구와는 헤어진 상황이므로 후자가 선행하는 시간임은 분명하다. 그러니까 쉽게는, 난쟁이처럼 키가 작은 여자 종업원의 어깨에 기대 흐느끼는 악기 연주자의 모습에 자신의 모습을 겹쳐 보았던 소설의 마지막 8의 상황이 앞서 있었고, 그 뒤 자신의 생일날 혼자 찻집에 앉아 과거 대학시절 같이 하숙하던 동료의 방문을 받는 꿈을 꾸는 것으로 1에서 7의 서사를 정리하면 될 것이다. 요컨대 화자의 무의식에 강렬하게 남아 있던 키 작은 여자 종업원이 꿈의 ‘잠재 내용’이라면 화자가 W시에서 만나게 되는 난쟁이 여자는 ‘꿈 작업’이 가해져 변형된 꿈의 ‘발현 내용’으로 보면 되지 않겠는가. 그러나 당연하게도 이 소설은 그런 쉬운 해석으로는 해소되지 않는 형식을 품고 있다. 그것은 검은 코트 남자의 등장과 이어지는 W시 방문, 그리고 외면하고 있던 과거 진실과의 대면이 이어지는 앞의 시간이 화자의 꿈인 듯하면서도, 동시에 시간상으로 그 이전에 일어났던 소설의 마지막 장의 사건에 소급적으로 개입해 그 사건을 다시 써나가는 듯한 효과를 불러일으킨다는 점이다. 무슨 말인가.
소설 화자 ‘나’에게 ‘몸을 가볍게 만드는 일’은 융통성없이 “지겹도록 하나의 삶을 살아온” 자신의 인생에서 탄식의 주문(呪文)처럼 찾아낸 유일한 처방이었다. 그러나 자아를 여러개로 나누는 분신술(이 분신술 혹은 자아연기술은 은희경 소설의 주요 모티브이기도 하다. 이로부터 소설쓰기에 대한 작가의 자의식을 음미하는 일은 또다른 즐거움일 수 있겠다)을 통해 하나의 자아에 가해지는 현실의 중압을 이겨보려 했던 난쟁이 여자의 놀이가 안타까운 공상일 수밖에 없듯이, 현실에서 그런 주문이 실현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성격이나 심리의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자아연기술의 하나로 이 주문을 본다 해도 그런 일이 쉬울 이치가 없다. 그러기에 강가의 바위 위에 앉아 있던 난쟁이 여자가 “거짓말!” “다 거짓말이에요”(그러니까, 고지식하기 짝이 없던 화자가 처음으로 거짓말을 한 것인가?) 하고 말하면서 깔깔거리는 웃음소리와 함께 허공으로 날아오르고, 뒤이어 ‘나’ 역시 그녀의 치맛자락을 붙들고 떠오르는 장면이 꿈/현실의 경계와 무관하게 그 불가능의 역설로 감동을 자아내는 것일 터이다. 그리고 이 순간 화자는 “몸을 가볍게 만드는 연구가 드디어 완성되었어” 하고 중얼거린다. 그런데 이 ‘완성’이 없었다면 소설 결말부의 “나로부터 나누어진 내 몸의 일부가 가볍게 허공을 날아올라 악기 연주자에게 옮겨가”는 일이 가능했을까. 원래는 레스토랑에 앉아 키 작은 여자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 채 흐느끼는 남자를 보는 장면만이 있지 않았을까. 그후 꿈이든 환각이든 강가에서의 그 날아오름이 완성되면서 레스토랑의 그 장면은 뒤늦게 숨어 있던 지점을 드러냈다고 보는 게 합당한 읽기가 아닐까. 적어도 이 소설은 시간을 거스르는 그런 독법의 여지를 열어놓고 있는 것은 아닌가. 두개의 시간축이 서로를 향해 접혀들어가는 듯한 느낌을 준다고 말할 수 있는 것도 그래서다. 그리고 그 둘의 접힘이 마침내 만나는 곳이란 미래를 품고 과거로 가득 찬 생생한 현재, 시간의 주름이 어느 방향으로도 삶의 유로와 만나는 진정한 기원의 지점이 아닐까. 그 생생한 현재의 풍경은 이렇다. 소설의 마지막이다.
난쟁이 여자의 옆자리에 가서 앉은 나는 여자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고 흐느끼기 시작했다. 미안해. 나는 계속해서 중얼거렸다. 미안해, 난 쓸모없는 놈이야. 미안해. 눈물은 쉽게 그칠 것 같지 않았다.
몸을 나누어 공중으로 날아오르는 오랜 염원이 이루어진 순간, 화자는 자책하고 고백하며 울고 있다. 그는 이제 어디로 갈 것인가. 아마도 그는 그날로부터 얼마 뒤 여자친구와 헤어지게 될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생일날 어느 찻집에 홀로 앉아 이월의 햇살을 느끼며 「사람들은 모두가 낯선 존재다」라는 도어즈의 노래를 듣고 있을 것이다. 그러다 꿈결인 듯, 검은 코트를 입은 낯선 사내의 방문을 받고 자신을 지칭하는 것 같은 K라는 모호한 인물의 15년 전 대학시절 이야기를 듣게 될 것이다. 그리고 한달쯤 뒤에는 그 낯선 사내의 권유에 따라 W시로 가서 옛날 하숙집 여주인이 운영했다는 비어 있는 여관에 묵고 난쟁이 여자를 만나 자신의 몸을 여러개로 나누는 분신술의 공상에 대해 듣게 될 것이다. 밤늦게 여자가 일하는 레스토랑으로 찾아와서는 여자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고 “미안해, 난 쓸모없는 놈이야”라고 중얼거리며 흐느끼던 기타 연주자에 대해서도 듣게 될 것이다. 다음날 두 사람은 배를 타고 들어가는 절이 있다는 강가로 갈 것이다. 그 절은 화자가 15년 전 하숙집 동료들과 함께 놀러 왔던 곳. 배를 타고 가다 강물 속으로 뛰어들기도 했다. 그러나 도착해보니 기억과는 달리 그곳은 섬이 아니다. 절터만 남아 있을 뿐, 절도 원래부터 없었다고 한다. 꿈을 꾸고 있는 것일까. 기억 전체가 잘못된 것일까. 그는 거기서 고백하게 될 것이다. 하숙생들은 모두 자신을 싫어했으며, 그들이 자신을 강물 속으로 떠밀어 빠뜨렸다는 것을. 그리고 바위 위에서 두 발을 흔들고 있던 난쟁이 여자는 허공으로 날아오르고, 그도 그녀의 프릴 달린 원피스 자락을 붙들고 함께 떠오르게 될 것이다. 드디어 몸을 가볍게 만드는 연구가 완성되었다고 중얼거리며. 그리고, 다시 여자친구 S의 생일날이 과거로부터 도착할 것이다. 프릴 달린 스커트를 입고 짧은 두 발을 허공에서 대롱거리고 있던 키 작은 여자와 그녀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흐느끼는 지친 악사와 함께.
결론을 맺자. 화자인 ‘나’는 자신이 그것을 해야 할 시간과 공간에서 고백하고 울지 못했다. 그 시간과 공간은 지나가버렸다. 그러나 그는 그 이후의 시간으로 가서 고백의 시간과 공간을 찾아내고, 그 순간 과거는 다시 도착한다. 이 두번째 반복에서 그는 마침내 고백하고 울 수 있게 된다. 이제 그가 얼굴을 파묻은 곳은 난쟁이 여자의 어깨이되, 동시에 떠나간 S의 어깨이다. 시간은 그렇게 접히고 만나면서 옛지도 속의 W시처럼 “검은 구멍”이자 중심, 원점에 뒤늦게 “닳고 해어져서” 이른다. 그 구멍은 고독의 기원이며, 원점이다. 고독은 치유되거나 메워지는 게 아니라 그렇게 다만 ‘발견’될 뿐이다. 은희경의 이번 소설은 돌이킬 수 없는 시간을 돌이키면서 그 점을 아프게 환기한다.
3. 혼자 건너는 강
이혜경(李惠敬)의 「한갓되이 풀잎만」(『세계의 문학』 2006년 가을호)은 가곡 「동심초」의 한구절을 소설의 제목으로 삼고 있다. 「동심초」는 당나라 여류시인 설도(薛濤)의 오언절구 「춘망사(春望詞)」 가운데 3연을 개사해 만든 노래로 알려져 있다. 그러니까 소설 제목은 “무어라 맘과 맘은 맺지 못하고(不結同心人)/한갓되이 풀잎만 맺으려는고(空結同心草)” 하는 가사를 자연스럽게 불러낸다. 왜 마음과 마음은 하나로 맺어지지 못하는가. 이제 우리는 윤대녕, 은희경의 소설과는 또다른 지점에서 산다는 것의 “그 고독한 행사”(윤대녕)와 맞닥뜨린 셈이다.
소설의 주인공 김기혜의 직업은 속기사다. 몰래 녹음된 테이프를 의뢰인들로부터 건네받아 녹취록을 만드는 게 그녀의 주된 업무다. 대부분 상습적인 가정폭력 현장이나 간통 현장 등을 담고 있는 그 녹취록은 이혼 법정의 증거물로 제출될 것이다. 한때 사랑의 서약으로 맺어졌던 부부들은 그 녹취록의 세상에서 서로에 대해 가장 야비한 폭력을 행사하고 가장 야비한 말들을 쏟아낸다. 그 말들을 다시 듣고 기록하는 직업속기사 김기혜의 자리에서 보면 말은 절대 공기중에 흩어지는 게 아니다. 입밖에 나오는 순간 새롭게 살아난 말은 듣는이의 가슴에 “때로는 못으로 박혀 파상풍을 일으키기도 한다.”
소설은 가슴에 그런 못이 박혀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엄마의 가출과 이어진 아버지의 죽음으로 어렵게 고등학교를 마치고 컴퓨터학원에서 경리로 일하고 있던 김기혜에게 명문 공대를 나온 학원강사 M이 나타난다. 거절해야 할 일이라는 걸 알았지만 “거울에도 비치지 않는 그녀의 허기”를 알아내고 건넨 M의 도넛은 너무 달콤했다. 순식간에 M은 그녀의 영혼을 가득 채워버렸다. 아마도 그 순간 그녀는 가장 순수한 의미에서 영혼의 자발성에 도달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식초나 락스로도 지워지지 않는 냄새가 있는 법. 그녀는 결혼 혹은 연애 시장의 형편없는 약자에 불과했다. M의 배신도 감당하기 힘들었지만 “그냥 외로운 처지인 그녀가 안돼 보여서 친절하게 대한 것뿐”이라던 M의 목소리는 그녀의 가슴에 대못으로 박혔다. 긴 유폐 끝에 그녀가 택한 속기사란 직업은 배신과 거짓으로 가득 찬 세상의 하수구에 익숙해지는 시간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가슴에 못을 박고도 사람들은 살아가야 한다는 점일 텐데, 이 ‘이후’의 풍경에서 이혜경 소설은 무서우리만치 섬세한 언어로 다시 한번 인간 진실의 쓸쓸한 국면을 열어 보인다. 아내의 간통 녹취록을 의뢰한 S라는 남자. 여자가 남편의 성적(性的) 무능을 조롱하는 대목에서 김기혜는 말없음표를 택했다. 그것이 아내가 바람피운 사실보다 더 큰 못으로 남자의 가슴에 박히리란 걸 알았기 때문이리라. 이 일을 계기로 두 사람은 ‘이후’의 시간에서 만난다. 그러나 김기혜와 S는 “저마다 혼자 건너야 할 강”을 이미 보아버린 사람들이 아닌가. 그들은 마음의 바닥에서 만났던 것이다. 그 풍경은 어떠할까. “이따금 설악산이나 남해 금산이라고 허물어진 목소리로 전화하는 S. 퇴근하자마자, 다음날 출근시간에 대려면 밤새 달려와야 할 길을 달려가는 S의 마음을 그녀는 알지 못한다. 이따금 그녀가 네이버 검색창에 M의 이름을 쳐보는 것을 S가 알지 못하듯.” 잠든 S의 모습에서 김기혜는 혼자 망각의 강을 건너가고 있는 처연한 배 한척을 본다. 그러나 그녀 역시 그 옆에서 그렇게 떠가고 있기는 마찬가지 아닌가. “문득 등이 시려온다. 등줄기로 찬물이 흐르는 듯하다.” 이 순간 뒤늦게 진실이 도착한다. 녹취록 작업을 마치면 컴퓨터 프로그램은 묻곤 했다. 이제 무엇을 하겠느냐고. 사실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저장하거나 저장하지 않거나. “그때, 그녀에겐 선택의 여지가 그리 많지 않았다. 사랑하거나 사랑하지 않거나.” 삶이나 사랑이 많은 가능성 속에 열려 있다고 믿는 시간이 있다. 그때 사람들은 꿈이라는 걸 갖는다. 무용학원의 수상 축하 현수막에 걸려 있는 꿈들. 그러나 프리마돈나를 꿈꾸던 아이들은 도금이 벗겨진 조악한 메달을 간직한 채 대개는 장삼이사가 되어야 한다. 더 가혹하게는, “어쩌다 배신당하지 않고 그 꿈을 이루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그러나 이루어진 꿈은 이미 빛을 잃은 채 일상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아마 그들의 가슴에도 크든 작든 못 하나씩은 남아 있으리라. 역설적으로 ‘맹목’이 삶의 현실로 수긍되어야 하는 것도 바로 이 지점이다. 그때 그녀에겐 선택의 여지가 “그리 많지 않았”다기보다 없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지금은 어떠할까.
혼자 강을 건너고 있는 S 옆에서, 그녀는 이제 같은 질문 앞에 돌아와 있다. “이제 무엇을 하시겠습니까?” 지금도 “사랑하거나 사랑하지 않거나”의 선택지뿐인가. 소설은 거기에 대해 말이 없다. 그러나 이혜경 소설이 늘 그렇듯, 그 침묵 너머로 깊은 울림 속에 들려오는 이야기가 있다. 윤대녕 소설의 문희나 은희경 소설의 K처럼 강에 이르러 들려주는 이야기. 이혜경 소설의 그녀는 지금 혼자 떠가야 할 강 위에 누워 있다. 옆에 잠들어 있는 S가 어디쯤 떠가고 있는지 알지 못하는 채로. 그 풍경은 쓸쓸하긴 해도 “사랑하거나 사랑하지 않거나”의 조급함으로부터는 조금은 물러나 있다. 지금 그녀는 그 선택지 너머를 보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렇다면 그 너머, ‘사랑’ 없는 만남과 관계의 풍경은 어떠할까. 풀잎의 맺어짐이 그 자체로 아름다운 곳, 거기서 사람들은 상처와 모욕을 주고받지 않고도 만나고 잠들 수 있을까. 안타깝게도 우리는 그 풍경을 볼 수 없다. 소설은 다시 한번 여기에서 멎어 있으며 우리가 느낄 수 있는 것은 그곳을 향한 그녀의 간절한 시선뿐이다.
4. 소설의 고독
최근 황종연은 「문학의 묵시록 이후—가라타니 고진의 『근대문학의 종언』을 읽고」(『현대문학』 2006년 8월호)라는 글에서 카라따니의 종언론에 대해 “문학의 존재이유를 좀더 깊이 생각하라는 도전으로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는 입장을 밝힌 바 있다. 언뜻 쉬워 보이는 황종연의 이런 응답이 카라따니의 선언에 담긴 역사철학적 맥락을 정치하게 검토하면서 나왔다는 점, 또 거기에 한국문학의 현재와 미래에 대한 나름의 숙고가 놓여 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면, “묵시록의 픽션에서 벗어나 문학을 생각”하자는 이 제안은 좀더 오래 한국문학의 불편한 자의식으로 남아 있어도 좋지 않을까. 그러니까 “근대문학 이후에도 문학이 존재할 이유를 생각하는 일”, 그것은 카라따니의 종언론만큼이나 문학의 운명을 절박하고 절실하게 묻는 일이 되지 않겠는가.
윤대녕, 은희경, 이혜경의 소설을 ‘근대문학’이 추구했던 전체성의 감각에서 읽는 일은 쉽지 않다. 그러나 자연의 리듬으로 인간 운명의 고독을 감싸는 윤대녕의 상상력이나 근대적 시간의 서사를 돌이켜 고독의 기원으로 다가가는 은희경의 소설, 그리고 관계의 심연에 드리운 이혜경 소설의 응시에 부재와 결핍으로 접혀 있는 조화로운 시간의 음화가 없는 것은 아니다. 굳이 여기서 불가피한 우회로를 말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마도 지금 한국소설이 겪고 있는 변화의 진폭은 좀더 다른 차원의 것일지도 모른다. 사회역사적 지평도, 자율성의 신화도 더이상 원군이 되어주지 못하는 세계에서의 소설쓰기. 이 지점에서는 인간 자체가 아포리아가 되지 않겠는가. 윤대녕, 은희경, 이혜경의 소설은 그렇게 ‘이후’의 시간에서 한국소설의 ‘고독’을 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