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머리에
2007년을 한반도 선진사회 건설의 전환점으로
정해년(丁亥年) 새해를 맞은 동아시아 각국은 저마다 미래전략을 가다듬느라 분주히 움직이고 있다.
중국에서는 10월경 공산당 17차대회가 열린다. 향후의 지도체제 변화가능성도 관심거리지만, 더 중요한 것은 뻬이징정부가 21세기 강대국을 향해 다방면에서 준비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지난 연말에 폭발적 인기를 끈 CCTV 다큐멘터리 「대국굴기(大國챍起)」가 탐색해낸 세계사 속 ‘대국’들의 공통된 비결, 곧 국민자질과 쏘프트파워 및 제도개혁에서 중국이 과연 어떤 성과를 낼지 세계가 주시하고 있다. 한편 지난해 출범한 일본의 아베정권은 평화헌법이 시행된 지 60년째인 올해를 젊은 세대가 ‘자신과 자랑’을 느낄 수 있는 ‘아름다운 국가’ 만들기 원년으로 삼겠다고 공언했다. 지금 그 비전의 핵심인 헌법개정을 위해 매진하는 중인데, 7월의 참의원선거 결과가 그 속도를 결정할 것이다.
중국과 일본의 미래전략은 모두 냉전 이후 불안정한 동아시아 질서 속에서 강대국 지향을 통해 자국민의 지지와 통합을 확보하는 한편, 지역질서를 주도적으로 재편하려는 의도를 밑에 깔고 있다. 동아시아에서 목하 진행중인 이러한 동향에 능동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우리도 나름의 미래구상을 시급히 마련해야 한다. 특히 6자회담의 진전과 더불어 한반도의 미래를 결정지을 평화협정까지 거론되는 지금이야말로 북핵문제 해결이라는 단기적 과제를 넘어 한반도적 차원의 중장기적 발전모델을 창안해낼 호기가 아닐 수 없다.
이러한 측면에서 오는 12월에 치러지는 제17대 대통령선거의 의미를 짚어볼 필요가 있다. 선거의 해를 맞아, 본지는 우리 사회가 키워온 민주화 역량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새로운 한반도 발전모델의 개발을 통해 이번 대선이 한반도는 물론 동아시아 전체의 미래에도 긍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기회가 되도록 이끄는 데 최선을 다하고자 한다.
대선을 앞두고 우리 사회에서는 보수세력과 진보개혁세력 사이에 첨예한 대립이 벌어지는 동시에, 진보개혁세력 내부에서도 분화가 일어나는 중이다. 현재까지는 노무현정부의 실정과 맞물려 진보개혁세력이 침체에 빠진 데 비해 보수세력의 대선 예비주자들이 압도적인 우세를 보이고 있다. ‘반민주세력’의 집권 가능성이 높아짐에 따라 진보개혁세력 일각에서는 범민주진영의 단결을 꾀하려는 움직임도 태동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이 추진하는 정치활동이 여권의 분열과 정계개편으로 어지러운 현재의 정치판에 어떤 영향을 끼칠지, 또 어떤 청사진을 가지고 있는지 아직은 불확실하다. 그들의 시도를 권력상실에 대한 두려움을 동원한 대동단결 주장에 불과하다고 비판하는 소리가 나올 법도 한 것이다.
그런데 더 나아가, 설령 이번 선거에서 진보개혁세력이 패배한다 해도 장기적으로는 스스로의 역량을 더 강하게 단련하는 기회가 될 것이라면서 보수세력의 (재)집권을 거의 당연시하는 듯한 주장까지 나오는 상황은 자못 우려스럽다. 언뜻 대선의 승패를 떠나 중장기적 전망을 유연하게 제시한 것처럼 보일 수도 있으나, 실은 ‘잃어버린 10년’을 되찾겠다는 세력의 실상을 실사구시적으로 따지지도 않은 채 현실적 이해득실로부터 초연한 관찰자로 자족하는 무책임한 발언일 수 있기 때문이다.
진정한 진보개혁세력이라면 범민주세력 대동단결론, 이합집산을 거친 신당창출론, 진보정당 대망론 중에 그 어느 것을 지지하든지 참여정부 비판에 자족하기보다는 그 성과와 한계를 진지하게 점검하며 앞으로 나아갈 청사진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특히 대선에 임하는 정치지도자들이 그들의 미래구상에 한반도적 시각을 담아내기를, 다시 말해 대한민국의 현상황을 남북관계의 불가피한 변화와 연동시킴으로써 한반도 전체로 시야를 넓힌 발전전략을 구상하기를 간곡히 주문하고자 한다.
지금 우리에게 절실한 미래전략의 요체를 창비식 표현으로 압축하면 ‘한반도 선진사회’ 건설이 된다. 한반도에서 진행되는 남북의 점진적 통합과정과 연계된 총체적 개혁을 남과 북이 각각 실천하며 변화하는 과정에서 기존의 단일형 국민국가에 집착함 없이 한반도 현실에 맞는 새로운 국가형태를 창안해내는 시대의 요청에 동참할 것을 제안하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6·15선언에서 합의된 남북연합을 주도적으로 추진해 그 틀 속에서 비핵화, 체계적 남북협력 등을 제도화하는 길이 본격적으로 논의되어야 한다.
돌이켜보면 1987년 직선제 부활 이래 치러진 네차례의 대선은 항상 예측하기 어려운 극적인 상황을 연출해왔다. 그 경험에 비춰본다면 이번 선거의 결과도 현시점에서 쉽게 예단할 일은 아니지 싶다. 이러한 현상은 이웃 중국이나 일본의 정치에서는 도무지 상상할 수 없는 우리 사회의 역동성의 소산일 터이다.
이번호의 특집 ‘2007, 한국사회의 미래전략’은 이와같은 본지의 이론적·실천적 관심을 밑바탕에 깔고 있다.
먼저 서동만은 한반도적 시각에서 남북한이 직면한 내부사정과 남북관계의 추이를 분석하면서 이번 대선의 시대적 의미를 읽어낸다. 남한의 차기정권이 주도력을 발휘해 남과 북이 각각의 내부변화와 맞물려 서로의 과제를 함께 풀어가는 남북관계의 새로운 시발점을 만들어내고, 북한 역시 올해와 내년에 걸쳐 핵문제를 타결해낸다면 한반도는 명실공히 ‘2008년체제’라 할 만한 획기적 시대로 진입할 것이다. 물론 ‘2008년체제론’이 아직 시론 수준에서 제기된 단계이지만 앞으로 생산적 토론을 이끌 것으로 기대한다.
최태욱은 한미FTA를 넘어선 대안적 개방전략인 한국형 발전모델, 곧 사회통합형 내지 사회적 자본에 기초한 정보산업형 발전모델을 제창한다. 이것의 실현을 위해서는 정당구조의 개혁과 함께, 북한의 참여를 포함한 동아시아 지역주의의 발전에 힘써 그로부터 동력을 확보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반도적 시각이 녹아 있는 또다른 글이 ‘남북환경공동체’의 가능성을 정책 차원에서 논의한 손기웅의 노작이다. 환경 분야의 실질적 교류협력에 수반되는 법적 조치 및 기구 설치 같은 단기적 과제를 바탕으로 단일한 제도적 환경공동체라는 중장기적 과제의 달성에 이르는 과정이 상세히 제시되어 있다.
안병진은 시야를 남한에 한정해 보수와 혁신의 다양한 정치담론들을 냉정하게 논평하는데, 올해가 ‘레짐(regime) 체인지’, 곧 사회모델 전환의 서막을 여는 한 해가 될 것으로 예상하고 선진적인 사회모델의 방향을 탐구한 점에서 이번 특집의 취지와 통한다 하겠다. 김현미는 온전한 사회발전 전략에 불가결한 일상문화의 영역에 관심을 환기시키면서, 특히 기존 젠더관계가 조성해온 삶의 왜곡과 무력감을 넘어서 긍정의 윤리에 기반한 희망과 기쁨의 정치학을 수행하자고 제안한다. 이러한 시각은 우리 사회의 주변으로 존재하는 (새터민과 국제결혼 이주여성 등) 소수자들의 역할을 통해 선진사회를 새롭게 조명하는 데도 기여할 것이다.
이번호 특집의 문제의식을 맞춤맞게 살려준 또하나의 읽을거리로, 이일영이 인터뷰한 도시설계가 김석철의 한반도 공간전략이 있다. 도시와 농촌을 소통시키면서 세계와도 연결되는 ‘통합신도시’와 ‘황해도시공동체’ 구상 등이 다채롭게 펼쳐지는데 꼭 이 분야의 전문가가 아니어도 흥미롭게 접근할 수 있다. 심각한 부동산문제나 경부운하계획으로 공간전략이 사회적 쟁점이 되고 있는 때인만큼 시의적절한 논의라 하겠다.
특집과 더불어 주목할 만한 또하나의 논의 축은 (탈)근대와 (탈)민족주의에 대한 비판적이고 심층적인 문제제기이다. 김성보는 한국사회를 (근대에서 탈근대로가 아닌) 특수근대에서 보편근대로 넘어가는 과도기에 처한 것으로 보는 입장에서 우리 근현대사에 대한 수정주의적 시각의 화제작들을 비판적으로 검토한 뒤, 도전에 직면한 민족사학·민중사학의 생명력을 ‘민주적 역사학’으로 되살리자고 제안한다. 하정일은 이태준과 이광수의 작품에 대한 재해석을 통해 모든 민족주의를 등가적으로 보는 수정주의적 시각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민족주의 내부의 차이에 주목할 것과 민족주의가 역사의 특정한 맥락에서 대중의 욕구를 반영한 적실성을 띤 것임을 역설한다. 두 필자가 근대적 과제와 민족주의의 적실성을 비교적 강조하는 데 비해, 유재건은 세계사에 기여할 지역적·민족적 과제를 소홀히 다루는 탈민족주의야말로 진정한 탈근대에 크게 기여하지 못하는 것이라는 식으로 발본적인 문제제기를 한다.
그리고 문학평론으로 본지의 지난호 문학특집의 글들을 ‘실감’의 차원과 ‘국민국가의 바깥’에 대한 관심을 기준으로 재론한 고봉준, 한유주·박형서·이기호 등 최근 주목받는 젊은 소설가들의 작품을 ‘근대 이후’로의 진화가 아니라 ‘근대 이전’으로의 퇴행이라는 관점에서 비판적으로 접근한 심진경의 옥고도 주목에 값한다. 귀한 작품을 기고해주신 열두 분의 시인과 네 분의 소설가, 그리고 핵심을 찌르는 촌평과 뮤지컬에 대한 현장평을 해주신 필자들의 값진 글을 제대로 소개하지 못해 민망한데, 이 자리를 빌려 한분 한분의 노고에 깊이 감사드린다.
끝으로 독자들께 알려드릴 일이 있다. 먼저 편집위원진의 변화인데, 이번호부터 김영희 교수가 상임위원직을, 해외연수중인 한기욱·이일영 교수와 새로 합류한 최태욱 교수가 비상임위원직을 맡았다. 그리고 올해부터는 대산대학문학상 수상작들을 별권에서 본문으로 옮겨 싣는다. 이미 높은 평가를 받은 이 상의 젊은 수상자들이 문학판에 활력을 불러일으키리라 믿는다. 그 바람에 이번호가 두터워졌다. 신춘을 맞는 독자들에게 좋은 선물이 되길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다.
白永瑞