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2007, 한국사회의 미래전략
남북이 함께하는 ‘2008년체제’
서동만 徐東晩
상지대 교수, 정치학. 저서로 『북조선사회주의 체제성립사 1945~1961』 『한반도 평화보고서』(공저), 역서로 『한국전쟁』 등이 있음. suhdm12@sangji.ac.kr
1. 남북관계 속의 ‘2008년체제’
북조선 핵문제와 분단국가로서의 자기인식
북조선의 핵보유 선언 및 핵실험은 북조선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증대하기도 했지만, 동시에 우리 입장에서는 일상적으로 잊혀지기 쉬운 분단체제, 분단국가로서의 자기인식을 새롭게 하는 계기가 되고 있다. 2005년 6·15선언 5주년을 계기로 북조선이 91년 한반도비핵화 공동선언을 재확인하고 이를 토대로 9·19합의가 이루어진 것은, 북핵문제도 비록 북미관계가 근본원인이긴 하지만 분단을 떠나서는 발생할 수 없는 성격을 지녔다는 데 남북이 견해를 같이했음을 뜻한다.
나아가 9·19합의에 한반도 평화체제를 위한 관련국회의 개최가 명기된 것도 북조선 핵문제가 국제적으로 한반도 냉전에 대한 인식을 새삼 환기시켜준 덕분일 것이다. 이는 북핵문제의 해법이 그 원인인 한반도 냉전체제 해소로 이어질 수밖에 없음을 남북은 물론 4개 참가국이 인정한 것이다.
이러한 인식은 남북 양측이 일국적 자기발전에 매몰되어 있다가는 발전이 아니라 오히려 퇴보할 수도 있음을 인식하는 수준까지 높아져야 한다. 또한 남북 양측은 북핵문제를 한반도평화뿐 아니라 통일을 염두에 둔 각각의 발전방향을 구상해가기 위한 계기로 살려나가는 지혜가 절실히 필요하다.
87년체제, 98년체제, 2008년체제
민주화 이후 남한의 정치·경제·사회적 변화를 총체적으로 평가하기 위한 시대구획으로 이른바 ‘87년체제’가 활발히 논의되고 있다.1 이는 단순히 권력구조 차원의 개헌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87년 이후 민주화를 진전시켜온 남한의 정치·경제체제가 올해 대선을 앞두고 전환기를 맞이하고 있다는 인식에서 나온 것이다. 나아가 이 ‘87년체제’에는 97년 금융위기를 겪으면서 경제체제적 국면이 결합되기도 했다. 따라서 이번 대선에서 이러한 전환기적 시대인식에 국민적 합의가 성립하여 새로운 정권이 탄생한다면, 김대중(金大中)·노무현(盧武鉉) 두 정부를 거쳐 이 체제와 국면이 총결산되고 아울러 새롭게 ‘2008년체제’가 등장하게 될지도 모른다. 물론 이것이 체제로 정착하지 못하고 혼돈 속에서 과도기가 지속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이와 대비되는 북조선의 변화는 91년의 사회주의권 붕괴와 더불어 나타난다. 이후 북조선이 직면한 경제위기와 대외적 위기는 ‘91년위기’라 할 만큼 결정적이었다. 그러나 김일성(金日成) 주석 사망, 자연재해에 이은 ‘고난의 행군’을 거쳐 98년에 김정일(金正日) 총비서가 권력승계를 공식적으로 마무리하면서 선군정치(先軍政治)의 국방위원회체제가 성립한다. 이는 북조선의 시대구획으로서 ‘98년체제’ 내지는 ‘선군체제’라 부를 수 있을 것이며, 이 체제하에서 2002년 7·1조치로 시장화의 움직임이 본격화되면서 그 성격은 다르지만 남한의 97년국면과 대비될 만한 변화가 일어났다.
그동안 남북관계는 91년 남북기본합의서 채택이라는 획기적 계기가 있었으나, 제1차 북핵위기로 유명무실화된 바 있다. 이후 제1차 위기는 94년 제네바 기본합의가 타결되며 어느정도 해소된다. 그리고 제네바합의는 비록 완전히 이행되지 못했으나 북미관계의 기본틀로 한동안 유지되었다. 북조선 대외관계에서 ‘94년국면’이라 부를 만한 이 합의는 2000년 남북정상회담에 이은 북미공동꼬뮈니께와 함께 최종적으로 타결될 듯했으나, 부시정부 출범과 함께 무효화되고 말았다. 따라서 6·15정상회담으로 상징되는 ‘6·15시대’는 아직 남북관계, 남북 각각의 내부 및 국제적 차원에서 확고하게 자리잡지는 못했다고 볼 수 있다.
북조선의 대외관계는 제2차 북핵위기로 다시 위기국면을 맞았고 2006년 북조선의 핵실험으로 그 절정에 이르렀다. 다만 북미관계가 타협국면에 들어섬에 따라 6자회담이 재개되어 잠정적 타협의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2007~8년을 거치면서 관련국들이 6자회담을 중심으로 양자·다자협상을 통해 북핵문제를 타개해간다면, 북조선도 대내외적으로 92~93년 제1차 핵위기 이래의 긴 터널을 지나 ‘2008년체제’라 할 만한 일대 전환기를 맞이할 가능성이 크다. 이는 남한의 ‘87년체제’ ‘2008년체제’를 모두 합친 정도의 획기적 의미를 지닌다.
남북의 엇갈린 변화와 그 해소
그러나 87년 남한 민주화, 80년대말 90년대초의 전세계적 냉전해체 이후 남북의 변화는 내적 변화와 외적 변화가 서로 엇갈린 동시성과 비동시성의 교차였다. 이 기간에 남북이 손을 맞잡고 지속적으로 만들어간 변화는 2000년 이후의 남북관계뿐이다. 더욱이 이 과정에서도 남북이 각각의 내부변화를 함께 풀어간 경우는 없었다고 할 수 있다. 북조선도 남한의 도움을 절실히 필요로 했지만, 2002년 7·1개혁조치는 남한이 아니라 중국과의 협력하에서 단행됐다. 물론 2000년 남북정상회담으로 남한으로부터의 안보위협이 일정정도 해소됨에 따라 이 조치가 실현된 점은 긍정적으로 평가해야 하지만, 남북이 협력하여 이루어낸 변화는 아닌 것이다.
이제 남북은 북조선의 핵문제나 대외관계, 남북관계 등 대외적 문제뿐 아니라 각각의 내부문제도 협력해서 해결해야 할 국면에 들어서고 있다. 실제로는 이미 80년대 후반 탈냉전상황이 도래함으로써 남북한은 상호보완적이거나 상호의존, 상호침투할 수 있는 분야마저 남북이 따로따로 추진하는 데 따른 기회비용을 심각히 고려해야 할 처지에 놓였다. 이러한 협력의 기회를 살리지 못한 채 거의 20년을 허송하며 현재에 이른 것이다.
91년 남북기본합의서에서 남북관계가 지속적으로 개선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되었으나, 이후 북미관계가 악화되고 핵위기가 시작되면서 노태우(盧泰愚)정부는 임기말에 들어 남북관계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했다. 93년 이후 김영삼(金泳三)정부는 대북정책에서 일관성을 잃으면서 북미관계의 타개라는 호기를 남북관계에 활용하지 못하고 거꾸로 미국의 대북정책의 발목만 잡았다. 이같은 북미관계와 남북관계의 엇갈림은 김대중정부에 와서 대북정책이 크게 전환됨에 따라 해소되었다. 그리고 김대중정부가 북미관계에서 ‘페리프로쎄스’(Perry Process)에 적극 관여한 데 힘입어 마침내 2000년에 6·15남북정상회담으로 귀결되었다.
그러나 김대중정부가 후기에 접어들어 북미관계 악화를 극복하지 못하면서 남북관계는 다시 정체상태에 빠진다. 북미관계와 남북관계의 불일치는 노무현정부 4년 내내 대북관계에 장애로 작용했다. 2005년 9·19합의로 일시적으로 타결국면을 맞는 듯했지만 결국 북미관계 악화에 가로막혀 남북관계는 진전을 보지 못하고 중단되는 지경에 이른다.
남북이 함께해야 할 ‘2008년체제’
그후 이라크전쟁으로 진퇴양난에 빠진 부시정부가 대북정책을 수정하기 시작하면서 북미관계는 남북관계와 조응할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북미 양자협상이 본격화함에 따라 남북관계에도 새로운 조짐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2 올해는 1991년, 2000년에 이어 세번째로 북미관계와 남북관계가 서로 호응할 수 있는 기회이다. 동시에 대선을 앞두고 차기정권의 향배에 따라 김영삼정부의 전철을 밟느냐 그렇지 않으면 김대중정부 전반기 이래의 흐름을 이어가느냐 하는 기로에 서 있기도 하다.
탈냉전기 남북관계의 역사를 뒤돌아보며 우선 새겨야 할 교훈은, 어떠한 정부가 들어서든지 적어도 북미관계 개선에도 불구하고 남한정부의 대북정책이 북미관계의 발목을 잡아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또한 여기에 그치지 말고 북미관계가 기복을 보인다면 남북관계를 통해 이를 추동하는 주도력을 발휘해야 한다. 나아가 남북관계가 남북 각각의 내부변화와 맞물려 각각의 과제를 함께 풀어가는 시발점이 되어야 한다. 그렇게 될 때 ‘2008년체제’라는 명칭에 걸맞은 적극적인 시대적 의미가 부여된다고 하겠다.
‘퍼주기’ 논란에서도 나타나듯이 그동안 남한의 대북지원이나 경제협력은 언제나 남한의 부담으로 인식되었고, 일방적인 시혜라는 시비도 있었다. 비록 핵실험국면으로 정체중이기는 하지만, 개성공단에 남한기업이 진출하거나 남북경공업협력이 협의되는 등 호혜적인 차원의 경협이 시도된 바도 있다. 이제는 이런 것들이, 남북경제공동체·남북경제통합·한반도경제론 등 일련의 논의에서 보이는 것처럼, 남북한의 현상황을 짚어보며 남북관계와 결부된 한반도 전체적 시야에서 논의될 때이다.
87년체제나 98년체제가 남북 각각에서 별개로 형성된 것이었다면, 2008년체제야말로 남북이 각각의 과제를 함께 풀어가는 시대에 서로가 함께하는 체제가 되어야 한다. 만약 2000년국면이 순항하여 북미·남북관계가 지속적으로 개선되어왔다면, 이같은 체제가 적어도 오륙년 전에 개시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는 2008년체제 속에는 6·15공동선언 제2항(통일조항)의 정신을 살려 국가연합의 실마리를 찾기 위한 남북 각각의 노력이 포함되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3 즉 2008년체제가 성립할 수 있다면, 이는 6·15시대가 각각의 내부와 남북관계에 확고하게 자리잡으며 이어지게 되는 것이고, 그럼으로써 남북 각각의 체제를 넘어 한반도 전체의 2008년체제가 되는 것이다.4
물론 현재 남북은 험난한 내부사정에 직면해 있으며 2008년체제를 함께 열어가기에는 만만치 않은 과제를 안고 있다. 여기에는 남북 서로가 탈냉전 이후 상황, 분단체제론의 표현에 따르자면 ‘흔들리는 분단체제’ 속에서 협력하기는커녕 복잡한 대외관계에 얽혀 대립해오면서, 조성되는 난국을 독자적으로 풀어온 데 따른 부담이 겹쳐 있기도 하다. 남북 각각이 처한 상황은 내부적으로 봐도 심각하지만, 서로 대비해보면 훨씬 심각하게 나타난다. 이런 점에서 87년체제나 98년체제가 과거에 대한 자리매김이라면, 2008년체제는 미래를 바라보는 당위이자 가능성의 영역인 셈이다.
2. 남한: 87년체제의 귀착점
냉전형 정치지형의 보수주의국가
한국 정도의 경제규모를 갖는 국가 중에 보수중심의 이념지형이 이토록 지배적인 국가는 드물 것이다. 보수언론이나 제1야당이 여당의 경제운영이나 통치스타일을 두고 좌파정권 운운하며 색깔론을 펴는 현실은 지극히 냉전시대적인 구태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분배와 성장의 균형을 말하거나 동반성장을 주장한다고 해서 ‘좌파정권’이라는 딱지를 붙이는 나라가 OECD국가 중에 또 있는지 의문이다. 이러한 정치지형에선 당연히 진보정당의 의회진출 여지가 매우 좁을 수밖에 없다.
72년부터 동방정책을 추진하며 90년 통일을 이룬 동서독의 사례가 엄연히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대북 화해·협력정책을 주장한다고 서슴없이 ‘빨갱이정권’이라 비난하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물론 이는 순전히 국내상황 탓만은 아니며, 남북 대치상황의 지속, 북미·북일간 대립 같은 국제적 냉전구조가 국내적으로 재생산되기 때문이기도 하다.
분단이라는 외적 조건 외에 이러한 풍토를 떠받치고 있는 물적 토대도 무시할 수 없다. 그 예로 인구 대비 군병력의 비율, 국가예산 중 국방비 비중은 세계 최고수준인 데 반해, 복지·문화부문은 다른 OECD국가들과 비교해 빈약하기 짝이 없다. 또한 남북관계 진전에 따라 ‘안보불감증’이 만연하고 있다는 보수층의 비판은 탈냉전상황, 남북 화해·협력의 진전에도 불구하고 뿌리깊게 유지되는 군사·안보부문의 ‘평화불감증’을 역설적으로 드러낸다.
안보 비대화의 안보취약국가
헌법상 군대를 보유할 수 없게 되어 있는 일본에서는 자위대의 합법적 지위를 인정하고 외교역량에 걸맞은 군사적 역할을 추구하자는 논리를 이른바 ‘정상국가론’이라고 말한다. 일본은 군사적으로 정상국가가 아니라는 주장이다. 그런데 이러한 논리를 보며 느끼는 것은 과연 군사적 측면에서 한국은 정상국가일까 하는 점이다.
60만 대군을 거느리며 국가예산에 비추어 막대한 군사비를 지출하는 한국은 거대한 ‘안보국가’이다. 대외관계, 경제력, 군사비 규모, 국방력 증강 추세 등 어떤 측면을 비교해보더라도 북조선에 대한 남한의 안보불안은 과장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5 하지만 주권국가로서 당연히 지녀야 할 전시작전지휘권을 미국이 돌려주겠다는데도 불안해서 받아들일 수 없다는 여론이 여전히 상당한 비중을 차지한다. 북조선보다 체제역량에서 압도적으로 우위에 있는 남한은 일방적이고 적대적인 안보개념에서 벗어나 ‘협력안보’로 가기 위한 준비조차 두려워하는 상황인 것이다.
경제규모 세계 10위권의 국가에서 한국만큼 이라크파병, 레바논파병을 손쉽게 단행할 수 있는 나라도 드물 것이다. 주한미군기지 이전협상에서 나타난 저자세, 사전협의 없이 주한미군의 한반도 외부 기동을 허용하는 전략적 유연성 인정 등은 남북의 군사적 대치하에서 미군 주둔에 매달리는 안보의존 심리 말고는 설명하기 힘든 현상이다. 안보가 비대화된 국가이면서도 만성적인 안보불안에 시달리며 더 많은 안보를 추구하지 않을 수 없는 ‘안보딜레마’에 갇혀 있는 것이 분단국가 남한의 현실이다.
내수와 분절된 ‘통상국가’
노무현정부가 제시한 ‘비전 2030’은 상당히 공들인 야심찬 기획이었다. 하지만 앞으로 20여년을 내다본다는 말이 무색하게도 그 속에는 북조선과의 연관이 전혀 포함되어 있지 않다. 그야말로 분단 국가 내지 체제로서 자기인식이 결여된 대표적인 예라 할 만하다. 노무현정부가 집권 후반기에 국가의 미래를 다 걸다시피 하며 추진하고 있는 한미FTA도 분단국가로서의 현상황을 그대로 두고 남한만의 자기발전을 꾀하는 발상의 대외적 표현이다. 정권 초기 동북아시대를 내걸고 그 속에서 한반도 전체의 평화와 번영을 지향한다던 비전과 포부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져버렸다.
경제구조 면에서 한국경제는 세계 10위권의 무역규모 국가로서 거의 80%에 가까운 대외의존도를 특징으로 하고 있다. ‘비전 2030’은 그 연장선상에서 국가발전을 도모한 외부지향적 발전구상의 일환이라 할 수 있다. 이는 세계화의 흐름 속에서 지속적으로 개방을 확대해야 한다는 대전제를 따르고 있지만, 농업이나 제조업의 상당부분을 희생해서라도 써비스업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산업구조를 재편하려는 ‘통상국가’를 염두에 둔 것이다.6 하지만 세계적인 무역대국 일본도 내수 비율이 80%에 육박하며 대외의존도는 20%를 넘지 않는다.
이같은 한국경제의 구조는 단기적으로 보면 97년 금융위기에 신자유주의적 처방을 수용해 대처한 데서 비롯하지만, 근본적으로는 4800만의 인구규모를 가지고 고성장시대의 관성으로 경제총량을 급속히 늘리려 했던 것의 결과일 수도 있다. 이제 수출이 늘어나 국민총생산이 증가해도 그 성과가 내수기반과 국민소득의 확대로 이어지지 않는 대내외부문 사이의 분절이 구조화되고 있다. 이러한 내수와 수출의 분절은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불균형, 새로운 계층분화와 연관되어 있다.
더욱이 이 구상은 남한에 한정해서 살펴보더라도 광범한 산지·농경지를 갖는 국토환경, 전통적 농업인구 등을 무시한 기형적 산업구조를 전제로 한다. 이에 따른 지리적·자연적 분업의 왜곡, 국토환경·생태계의 파괴는 경제효과만으로 계산할 수 없는 치명적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사회적 양극화 속의 ‘초토건국가’
현재 남한에는 400~500조원에 달하는 거대한 과잉자본이 떠돌고 있는데, 이 자본이 마땅한 투자처를 찾지 못해 부동산투기로 몰리는 상태다. 그런데 97년 금융위기 이후 급속히 진행된 사회적 양극화는 해결의 실마리조차 찾지 못하고 있다. 대기업과 중소기업, 정규직과 비정규직 노동자, 소득 상위계층과 하위계층의 양극분화는 완화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그 와중에 부동산가격 폭등에서 느끼는 국민 일반의 상대적 박탈감은 사회통합을 위협하는 수준에 이르고 있다.
더욱이 한국경제는 개발독재시대에 형성된 거대한 건설자본, 토건자본이 GDP의 20%에 달하는 세계적인 ‘초(超)토건국가’이기도 하다.7 그런데도 비대화된 건설·토목자본의 수익을 보장할 신도시·혁신도시·기업도시 계획이 줄을 잇고 있다. 이미 기형적으로 비대해진 수도권의 분산을 위하여 행정도시 건설을 단행하면서도 동시에 수도권에 또다른 신도시를 짓고 있다. 삼면의 바다를 놔두고 한 대선후보는 내륙운하 구상을 공약으로 발표한 실정이다.
도로공사, 토지공사, 주택공사, 농촌공사 등은 어마어마한 수익을 올리는 반면, 서민들의 주거조건은 나아지지 않고 부동산가격은 오르기만 한다. 이미 주택보급률은 100%를 넘어섰음에도 불구하고 주택을 소유한 가구의 비율은 60% 정도에 머물고 있다. 부동산과 토목, 건설에 국민생산의 20% 이상을 투여하며 복지·문화예산이 압박받는 상태를 방치하는 한 한국경제가 삶의 질이란 측면에서 결코 선진경제가 될 수 없다는 유럽 여러나라의 지적도 있다.
‘초토건국가’의 원인을 분단과 직접 연관짓는다면 분단환원주의라는 비판을 받을지 모른다. 그러나 수도권의 이상 집중과 비대화 등을 역사적으로 추적하면, 분단으로 인한 남북의 지리적 분업 단절, 한반도 자연공간의 기형화 등이 근저에 깔려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이러한 원인을 인정하기 싫다고 해도 초토건국가가 더이상 남한 내부에서 유지될 수 없음은 분명하다. 사실 좌초상태에 빠진 현대재벌의 금강산프로젝트는 국내에서 구조조정의 위기를 예상한 건설자본이 대북진출에서 그 활로를 찾으려는 자구책인 셈이었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노무현정부의 지방균형발전 계획으로 건설자본은 대북진출에서 유인을 찾을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3. 북조선: 98년체제의 현황
위기관리체제-선군정치
북조선은 90년대초 이래 지금까지 위기관리체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북조선이 국가발전에서 뒤처진 이유는 기본적으로는 체제 내부에 있을 테지만, 특히 미국과의 관계를 중심으로 한 대외관계가 냉전국면에서 벗어나지 못한 데 있기도 하다. 이미 70년대말, 80년대초에 개혁·개방노선을 채택한 중국, 베트남 등 다른 아시아 사회주의국가들이 대미관계에서 체제 안전보장문제를 해결했다는 점에서도 비교되는 대목이다.
당중심 체제하에서도 군사적 비중이 높았던 북조선은 김일성 주석 사후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후계체제로 재편되면서, ‘선군정치’를 내세우는 등 군사적 색채가 더욱 강화되었다. 이는 북미 대치상황의 장기화로 말미암은 대외적 위기, 만성적인 자원부족 및 공장가동률 저하에 따른 경제적 위기를 수습하기 위해 일종의 위기관리체제를 제도화한 것이다.8
선군정치는 만성적인 외교·경제적 위기상태에서 북조선 인민에게 체제유지의 안정감을 주는 효과를 거두고 있을 것으로 보인다. 대내적으로 선군체제는 시장화개혁이나 경제개발 단계에서 일종의 개발독재체제와 유사한 것이 될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폐쇄적인 북조선체제도 과거에 비해 상당부분 경제적으로 개방된 상태며, 식량 등을 국제사회의 지원으로 해결해야 하는 처지다. 앞으로 본격적인 시장화나 경제개발을 추진하기 위해서는 외부의 협력이 더욱 절실하다. 따라서 체제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하여 어느정도는 외부의 지지를 확보해야만 한다.
선군정치는 대미관계에서 정당성을 가질지 몰라도 대남관계 및 다른 비적대적 국가들과의 관계에서는 설득력을 얻기 힘들다. 특히 6·15시대를 선군정치와 함께 김정일 통치의 브랜드로 내세우고 있는 터라 이에 대한 남한 통일운동진영의 반응은 북조선 인민의 여론에도 무시할 수 없는 변수가 되고 있을 것이다.9 남한도 61년 5·16쿠데타 이래 전두환(全斗煥)정부 또는 노태우정부까지 30년 정도 군부정권이 통치한만큼, 북조선의 선군정치가 생소한 것만은 아니다. 그러나 오랜 기간 군부정권에 대항하며 87년 고난에 찬 민주화투쟁을 성공시킨 이래 탈권위주의를 진전시키고 있는 남한국민들에게 선군정치는 그 자체로 긍정적인 평가를 받기 어렵다. 비록 박정희(朴正熙)정권 예찬 씬드롬이 있다고는 하지만 그것은 경제적 성과에 국한된 것이지 군부독재까지 포함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에서도 그러하다.
빈곤한 핵보유국
북조선 핵문제의 근본원인은, 90년대초 냉전해소 당시 한소·한중수교, 남북한 유엔 동시가입이 이루어지고 남북간에 기본합의서가 채택되는 가운데 북미·북일관계가 답보상태에 머문 데 있다. 과연 북조선이 핵무기 카드를 외교문제 타개를 위해 활용한 것이 효과적이었는지는 검증하기 어려운 면이 있지만, 북조선이 핵카드를 꺼내든 의도가 북미 적대관계 해소에 있었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2000년 10월 북미공동꼬뮈니께로 북미관계는 역사적 화해의 실마리가 보였다가 부시정부 출범과 함께 이전의 합의가 무효화되어 제2차 북핵위기가 조성되었기 때문이다. 미국 내에서도 이 위기가 부시정부의 대북정책이 실패했기 때문에 일어났다는 비판이 일고 있다.
그러나 북조선의 핵무장이 불가피한 선택으로 일정정도 인정된다고 해도, 핵무장 자체가 외부에서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진다고 본다면 이는 대단한 오판이다. 국제사회나 남한의 다수여론은 북조선의 핵무기를 해결되어야 할 ‘문제상황’으로 여기지 정당한 수단으로 인정하는 것이 아니다. 무엇보다 만성적인 식량부족에 시달리며 국제사회의 인도주의적 지원에 의존해야 하는 북조선 형편을 감안하면, 외부의 눈에 핵무장이 인민의 삶을 도외시한 과도한 대응으로 비치는 것은 당연하다. 핵무기는 가공할 파괴력 때문에 외교수단으로 운용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국가역량을 필요로 한다. 주로 강대국들이 핵무기를 보유하게 된 것도 이러한 성격 때문이다.
물론 핵을 보유하지 않은 약소국 입장에서는 핵위협을 받는 불평등한 관계가 억울하기 짝이 없는 노릇이지만, 힘이 뒷받침되지 않은 상태에서 핵을 보유하게 되면 상당한 도덕적 부담을 안게 된다. 그 대표적인 이유가 북한의 핵보유가 중국을 비롯한 중재국이나 국제사회, 남한 시민사회의 평화여론과 상충된다는 것이다. 도덕적 정당성이 확보되지 못하는 한 그 부담은 체제내로 전이되어 체제안보에 부메랑이 될 수도 있다. 남한이나 일본, 대만이 핵무장의 길로 가는 핵도미노가 일어나지 않는 한 북조선의 핵무장은 동아시아지역에서 정당성을 확보할 수 없고, 이들의 협력을 필요로 하는 북조선 입장에서 그것이 국가발전에 질곡으로 작용하게 될 것은 분명하다.
고립 속의 시장화
북조선은 2002년 7·1조치로 시장화개혁에 한발을 내디뎠다. 90년대까지 북조선은 ‘선 북미·북일관계 정상화, 후 개혁’을 전략으로 내세웠지만, 북미·북일 대치가 장기화함에 따라 그 순서를 뒤바꾼 듯하다. 남북정상회담 이후 남한의 안보위협의 해소라는 최소한의 조건 아래 중국과 남한의 경제협력에 힘입어 내부 경제개혁에 나선 것이다.10
극심한 자원 고갈상태에 처한 북조선의 시장화개혁이 순조롭게 진전되기 위해서는 외부로부터의 대규모 자원투입이 필수적이다. 소비재나 생산재 전반에 걸쳐 만성적 결핍에 허덕이며 일종의 전시체제나 다름없는 상태에서 시장화조치는 극심한 인플레나 사회적 불균형을 초래하기 쉽다. 북조선경제가 개혁의 성과로 경제생활 전반에 활기를 띠고 있는 반면, 이러한 개혁의 부작용도 이미 확산되고 있다.
시장화개혁은 중단없는 후속조치를 필요로 하며 지속적인 성장을 수반해야 한다. 따라서 외부로부터의 막대한 투자 유입이 필요하다. 한때는 중국과의 경제협력으로 중국에의 식민화·종속화가 우려된다는 언론보도가 나왔지만 이는 상당부분 과장인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북조선은 여의치 않은 중국의 대북경협에 불만을 지닌 듯하며, 그것이 북조선의 핵실험에도 일정정도 영향을 미쳤다고 추측된다. 남한의 경제협력도 핵문제에 부딪혀 답보중이고 경공업협력도 군사문제 때문에 중단된 상태다.
이러한 대내외적 경제상황에 비추어볼 때, 북조선의 핵실험은 외부의 경제협력이 뒷받침되지 못한 상태에서 ‘고립 속의 시장화’라는 거의 실현 불가능한 시도를 감행해야 하는 불안감의 반작용일지 모른다. 북핵문제를 다룰 때 남한을 비롯한 관련국들이 유의해야 할 점은 북조선의 시장화개혁 역시 방치해서는 안되는 절박한 현안이라는 것이다.
4. 2008년을 어떻게 맞이할 것인가
생산적 선거과정
2008년이 새로운 체제로 나아가는 출발점이 될 수 있을지는 먼저 2007년 대선과정에서 후보, 정당, 시민사회 등 정치주체가 얼마나 생산적인 경쟁을 통해 현명한 선택을 하느냐에 달려 있다. 민주화 이후 87년, 92년, 97년, 2002년에 이은 다섯번째 대선을 치르는만큼, 한국의 선거문화도 성숙해져야 할 시점에 왔다. 국민 일반이나 각 정치주체가 그야말로 한국민주주의를 한단계 발전시켜야 한다는 역사적 인식을 갖고 선거에 임해야 한다. 특히 노무현정부는 극도로 낮은 국민지지도를 감안하여 과욕을 버리고 절제된 자세로 정도를 걷는다는 원칙을 견지하며 국정을 운영해야 한다.
이와 맞물려 북조선의 대응도 중요한 변수가 될 것이다. 북조선의 자세에서 중요한 것은 6·15정신에 입각하여 정책의 일관성을 말보다 행동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체제의 성격상 5년마다 대통령선거를 치러야 하는 남한에 비해 적어도 중단기적으로 정권교체의 ‘부담’이 없는 북조선이 남북관계에 가장 기여할 수 있는 것도 이 언저리에 있다. 북조선이 남한 대선에서 ‘평화세력’의 승리를 바라는 것에는 하등 잘못이 없다. 만약 김대중·노무현정부 10년의 성과가 차기정부에 들어 무효화된다면 그것이 북조선에 얼마나 위협이 될지는, 미국 부시정부 출범으로 북미관계가 백지화된 경험에 비추어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다. 그러나 북조선이 공식성명을 통해 특정정당의 패배를 선동하는 것은 남한 정치체제의 성격을 무시하는 것이며 7·4공동성명, 남북기본합의서, 6·15선언으로 이어지는 내정불간섭의 정신을 훼손하는 과잉행동으로 비칠 뿐이다.
남한의 바람직한 지향
우선 한미FTA는 시급히 협상을 중단하거나 종료하고 중장기적 과제로 돌려, 좀더 충분한 준비와 공론화과정을 거칠 필요가 있다. 그리고 동북아시아 지역협력으로 다시 눈을 돌려 한일·한중FTA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수순을 밟아야 한다. 무엇보다 그 토대가 되는 바람직한 한국경제의 미래상을 경제구조, 산업구조적 측면에서 찾아나가는 논의가 활발히 이루어져야 한다.
우선 개성공단, 금강산관광을 지속적으로 확대하면서 핵문제 타결에 맞추어 남북경제협력을 본궤도에 올리는 일이 시급하다. 이제는 남한경제의 내수기반 확대, 중소기업·농업의 활성화를 염두에 둔 남북경제협력을 구체적 로드맵을 가지고 실행에 옮길 수 있어야 한다. 특히 대통령선거나 새로운 정부 출범에 맞추어 노무현정부의 ‘평화와 번영’이라는 국정과제를 재검토하고, 나아가 ‘평화경제’ ‘평화경영’ ‘밥과 평화’ 등 기존 후보들의 정책이나 학계·시민단체 차원에서 제기하는 한반도경제, 한반도미래구상 등의 담론이 활성화되어야 한다.11
남한의 부동산문제도 철도·도로건설을 비롯한 북조선의 인프라건설에 대한 진출로 완화하거나 해결할 길이 없는지 진지한 조사와 자료에 근거한 논의가 필요하다. 부동산버블의 급격한 붕괴로 인한 제2의 경제위기를 막고 이를 연착륙시키기 위한 방도를 남북관계에서 모색하는 것은 전혀 새로운 모험이 아니다. 이는 현대재벌이 금강산프로젝트에서, 일본 자민당이 북일수교 교섭에서 이미 시도했던 것이다. 막대한 부동자금도 북조선개발펀드를 조성하는 등의 출구를 마련함으로써 수익모델을 만들어낼 수 없는지 전문적 검토가 있어야 한다. 뻬이징올림픽을 앞둔 중국의 대형 프로젝트, 고성장을 구가하는 베트남의 국유기업 민영화 등에 이미 국내 금융자본의 진출이 활발하다.
특히 안보분야에서 남북군사회담을 성사시켜 냉전시대의 일방적·적대적 안보에서 탈피하고 협력안보로 나아감으로써 안보딜레마를 해결할 수 있는 실마리를 찾아야 할 것이다. 북한의 핵무기가 남한의 재래식 군비증강의 부메랑이라는 경고를 가볍게 지나쳐서는 안된다. 남한의 경제역량과 북조선의 군사위협에 대한 정확한 평가를 바탕으로 중국·일본 등 주변국과의 관계 속에서 ‘적정안보’ 수준에 대한 국민적 합의를 이끌어내는 작업이 공론화되어야 한다.
이러한 정책대결이 중심이 된다면 선거제도 등 다른 해결과제가 있다고 해도 냉전형 대결구도에서 탈피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위에서 보수와 진보가 서로 노선을 경쟁함으로써 더욱 다양한 이념적 스펙트럼이 공존하는 정치지형이 형성되어갈 수 있을 것이다.
북조선의 지향
북조선의 핵보유는 장기화되어서는 안되며 조속히 비핵화의 방향으로 해결되어야 한다. 자칫 한국, 일본, 대만의 핵무장 도미노가 일어날 기미가 보이면, 미국과 중국은 이를 차단하기 위하여 북조선의 핵무기가 정당화되기 전에 강경책을 불사할 수 있다. 설령 미국과 중국이 이러한 강경책을 회피한 채로 핵도미노가 현실화된다면, 북조선의 핵무기는 협상카드로서 힘을 잃게 될 것이다. 북조선은 취약한 체제역량을 핵무기라는 극단적인 수단으로 메울 것이 아니라 경제력을 중심으로 체제역량 자체를 키우는 정도(正道)로 나아가야 한다. 북조선이 내부체제나 핵무기와 관련해서 취해야 할 담론전략은 최소한으로 절제되고 억제된 것이어야 한다. 어디까지나 대미관계에서의 체제 안전보장 등 외교협상 카드 차원으로 한정되는 것이 바람직하다.
선군체제가 변화하려면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군사지도자가 아니라 경제지도자로서 거듭나며 자기 위치를 확립하기 위한 행보에 적극 나서야 할 것이다. 우선 중국·남한의 경제협력을 적극적으로 확보함으로써 인민생활을 향상시키고, 시장화개혁과 아울러 본격적인 발전체제로 나아가는 토대를 쌓아야 한다. ‘선군’은 배후에 두고 ‘선경제’를 전면에 내걸어 국제사회의 신뢰를 확보해가는 것은 남한사회에서 대북경제협력에 대한 긍정적 여론을 이끌어내는 길이기도 하다.
북조선의 시장화개혁도 상당한 리스크를 수반하는만큼, 남한이나 중국과의 긴밀한 협력하에서 시장경제의 경험을 학습하는 것이 더 안전한 길이 될 것이다. 시장경제로의 이행에 요구되는 쏘프트웨어를 얻기 위해서는 주변국들의 협력이 필수적이다. 이는 고립 속의 시장화가 아니라 동북아지역의 정상국가로 다시 태어나는 과정의 일환으로 진행되어야 한다. 체제 안전보장문제는 북미관계에서 일정부분 해결된다고 해도, 개혁·개방을 본격화하는 도중에 남한과의 관계에서 부딪힐 또다른 새로운 문제가 될 수도 있다. 이와 관련한 체제 안전보장의 장치로서는 구심력이 강한 연방제보다는 남북의 독자성을 담보하는 국가연합이 더 효과적일 수 있음을 진지하게 고려해야 할 것이다.12
무엇보다도 북조선은 남북관계나 국제사회에서 자기 위상을 정확히 인식할 필요가 있으며 이를 위해서 자기 체제를 외부에 제대로 이해시키기 위한 노력을 배가해야 한다. 시장화개혁 등 외부에 긍정적으로 비칠 수 있는 변화를 정확히 전달하고 설명하기 위한 역량을 키우는 것도 중요하다. 핵무기, 빈곤, 아사, 탈북, 인권, 수용소, 위폐 등 악화될 대로 악화된 북조선의 국가이미지를 개선하는 것도 시급하다.
이러한 남북의 노력이 서로 맞물려 선순환과정에 들어서기 위한 실마리를 잡을 때, 2008년은 남한의 87년체제, 북조선의 98년체제의 부정적 유산을 극복하고 2000년의 6·15시대를 이어감과 아울러 한반도의 2008년체제를 열어가는 새로운 이정표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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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7년체제’에 관한 집중적인 논의로는 『창작과비평』 2005년 겨울호 특집 ‘87년체제의 극복을 위하여’, 이를 분단체제와 관련지은 글로는 이 가운데 김종엽 「분단체제와 87년체제」가 있으며, 남북경협 및 동아시아 협력과 관련해서는 이일영 「한국의 87년체제: 교착과 혁신」, 『창작과비평』 2005년 가을호 참조.↩
- 북조선 핵문제와 관련된 최근 상황에 관해서는 『프레시안』(www.pressian.com)에 연재된 「한반도브리핑」 참조.↩
- 국가연합의 현실적 필요성에 관해서는, 백낙청 『한반도식 통일, 현재진행형』(창비 2006)에서 적극적으로 제기되고 있다.↩
- ‘2008년체제’가 ‘6·15시대’와 이어지며 남북 각각을 넘어서 한반도 전체의 2008년체제가 된다는 시각은 백낙청 교수의 조언에서 많은 시사를 얻었다.↩
- 남북한의 군사력 비교를 통해 이 문제를 심층적으로 논의한 글로, 함택영·서재정 「북한의 군사력 및 남북한 군사력 균형」, 경남대북한대학원 엮음 『북한군사문제의 재조명』, 한울 2006.↩
- 통상국가에 대한 정부측 입장으로는 최낙균 외 『선진통상국가의 개념정립』, 대외경제정책연구원 2005, 한미FTA를 포함하여 이에 대한 비판적 논의로는 우석훈 『한미FTA 폭주를 멈춰라』, 녹색평론사 2006; 이해영 『낮선 식민지, 한미FTA』, 그린비 2006 참조.↩
- ‘초토건국가’란 개념은 우석훈의 조어이다. 우석훈 「부동산 파동과 ‘노무현 레짐’, 어떻게 청산할 것인가」, 『녹색평론』 2007년 1~2월호. 한국형 토건국가의 개념과 현황에 관해서는 홍성태 외 『개발공사와 토건국가』, 한울 2005.↩
- 선군정치에 관해서는 와다 하루끼 지음, 서동만·남기정 옮김 『북조선: 유격대국가에서 정규군국가로』, 돌베개 2002; 이대근 「당군관계와 선군정치」, 경남대북한대학원 엮음, 앞의 책 참조.↩
- 올해 1월 17일 북조선의 정부·정당·단체 연합회의에서 발표된 성명은 국내외의 통일운동단체들이 선군정치를 적극 지지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 북조선 시장개혁에 관한 연구로는 김연철·박순성 엮음 『북한경제개혁연구』, 후마니타스 2002 참조. ↩
- 한반도 전체를 염두에 둔 남북의 경제적 지향에 관한 최근의 연구로는, 한반도사회경제연구회 지음 『한반도경제론: 새로운 발전모델을 찾아서』, 창비 2007 참조. 아직은 체계화되지 않은 슬로건 차원이지만, ‘평화경제’는 정동영, ‘평화경영’은 손학규, ‘밥과 평화’는 김근태의 것이다. 다른 후보들도 이에 합류하여 대세가 형성되는 것이 바람직하다.↩
- 이미 6·15선언 제2항에서 북측은 기존의 연방제를 ‘낮은 단계의 연방제’로 하향조정하고 있다. 북조선의 체제 안전보장장치로서 국가연합이 갖는 효과에 관한 부분은 백낙청 교수의 조언에서 따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