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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평론
뒤로 가는 소설들
심진경
문학평론가. 저서로 『여성, 문학을 가로지르다』 『한국문학과 섹슈얼리티』 등이 있음. sexology@hanmail.net
1. 프리모던인가 포스트모던인가
소설이 달라졌다고 한다. 둘러보니 그런 듯도 하다. ‘소설’이라는 레떼르가 붙지 않았다면 과연 이게 소설일까 싶은 작품들이 나오고 있다. 교과서에서는 인물·사건·배경을 소설의 3요소라 가르쳤지만, 지금 소설은 인물·사건·배경 없이 관념의 조각과 단상만 떠다녀도 자기가 소설이라고 우긴다. 거꾸로 인물·사건·배경 모두를 갖추었지만 소설 같지 않은 소설도 있다. 그리고 통념상 소설이라기보다 에쎄이나 꽁뜨, 재담(才談), 일기 등에 더 가까운 작품들이 소설이라는 이름으로 나오고 있다. 그밖에도 흥미를 돋우는 온갖 잡다한 요소를 끌어들여, 읽을 때는 재미있을지 몰라도 다 읽고 나면 의외로 아무 의미를 찾을 수 없는 소설도 부지기수다. 바야흐로 이런 식으로, 의미가 있건 없건 세간의 수다(數多)한 장르는 모두 소설로 향하고 있다. 아니, 소설은 모든 장르를 제 영역으로 끌어당기고 있다. 소설이 지금 위기라는데, 오히려 소설은 이처럼 자신의 영토를 더욱 넓혀나가고 소설과 소설 아닌 것의 경계를 허물면서 다채로운 모습으로 변신하고 있다.
그런데 돌아보면 이런 현상이 비단 오늘만의 일은 아니다. 소설은 애초 다양한 (비)문학적 잡동사니들, 예컨대 편지·일기·고백록·법조문·정치팸플릿 등의 수사학과 형식을 모방하고 조롱하거나 뒤섞고 교차시키면서 스스로를 단일한 형식이나 내용에 귀속되지 않는 유연하고 유동적인 장르로 만들어왔다. 다른 문학장르와 달리 유독 소설이 끊임없이 변화하는, 그래서 불안정하고 불완전한 근대를 대표하는 장르가 될 수 있었던 연원도 바로 거기에 있다. 그러니 소설이야말로 이 세계의 본성과 가장 흡사한, 그리하여 현실의 변화를 더욱 깊이있고 민감하게 반영할 수 있는 장르였던 것이다. 그렇게 보면 지금 다른 장르들과 몸을 섞으면서 소설과 소설 아닌 것의 경계를 흐려버리는 소위 ‘새로운’ 소설의 등장은 사실 그렇게 낯설거나 새로운 현상이 아닐지도 모른다. 소설은 원래 ‘무규칙 이종’ 장르가 아니었던가. 즉 끊임없이 경계를 허물고 이동하고 뒤섞는 혼종성과 비규범성이야말로 오히려 소설장르의 독특한 성격으로 작용해오지 않았던가.
그러나 이즈음 소설이 보여주는 변화의 이면에는 그렇게 생각하고 넘겨버릴 수만은 없는, 그와는 차원이 다른 무언가 중요한 문제가 존재한다. 그런 맥락에서 “현자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최근 발간한 소설집에 ‘자정의 픽션’이라는 다소 감당하기 힘들어 보이는 제목을 붙인 박형서(朴馨瑞)의 얘기에 우선 주목할 필요가 있다.
내가 생각하는 ‘자정’이란 카라따니 코오진이 그리워하는 ‘요란했던 근대’ 이후의 시간이다. 동시에 서사문학이라는 대가족 안에서 소설이 태동하던, 태아처럼 웅크린 채 자신의 미래에 대해 홀로 자문해보던 근대 이전의 저 먼 ‘새벽’을 의미하기도 한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자정’은 사람들이 저마다의 얕은 꿈을 꾸거나 혹은 잠을 이루지 못해 고단하게 중얼거리는 시간이다. 어느 쪽이든, 아침은 바로 거기서 시작된다고 믿는다.1
문제는 두가지로 요약된다. 하나는 박형서 자신을 포함한 지금 젊은 작가들의 작품이 새로운 소설의 시대를 열게 될 것이라는 예측, 다른 하나는 그들이 지향하는 미래의 소설이 근대 이전의 유사소설과 근친적 관계라는 암시이다. 어쩌면 소설의 위기와 종언을 운운하는 바로 이때야말로 새로운 소설의 아침을 열 수 있는 시간이리라는 믿음은 그럴 수 있다손 치더라도, 그 새로운 소설이 (근대)소설로 태동하기 이전의 다양한 허구물의 모양새를 닮았을 것이라는 주장은 쉽게 수긍하기 어려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소설의 새로운 미래를 과거에서 찾을 수 있다는 믿음은 비단 박형서만의 것이 아니다. 새로움의 근거를 근대 이전의 먼 과거에서 구하는 현상은 지금 젊은 작가들의 소설에서 의외로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일례로 ‘새로운 소설’의 대표주자로 각광받는 김애란(金愛爛)과 한유주(韓裕周) 소설의 화자를 “근대적 서술자보다는 구술 연행적인 존재들에 가까운 이야기꾼과 음유시인”2으로 각각 규정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최근의 논의도 거기에 힘을 보태는 듯하다. 지금 일부 젊은 소설가와 비평가 들은 의식적이건 그렇지 않건 간에 미래의 소설의 근거를 소설의 과거에서 찾으려고 한다. 그들은 목하, 뒤로 가는 중이다.
여기서 우리가 따져보아야 하는 것은 왜 하필 소설의 새로운 변화가 과거의 양식과 공모하게 되는가이다. 문제는 지금 젊은 작가들의 소설이 얼마나 새로운지, 또 왜 새로운지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소설과 소설 아닌 것의 경계를 허물며 변태해가는 지금의 젊은 소설이 새로운 소설의 가능성으로 이어질지, 아니면 소설을 결국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들어버릴지 묻는 일이다. 소설이 과거로 역행하는 현상은 이 지점에서 대체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인가. 다시 말하자면, 왜 지금 그들에게 ‘새로운’ 소설은 ‘포스트모던 노블’(post-modern novel)이 아닌 ‘프리모던 스토리’(pre-modern story)여야 하는가?
2. 과거로, 탐색 없는 폐쇄적 탐색담
먼저 한유주가 있다.3 한유주의 등단작 「달로」는 ‘달로 간 사람의 이야기’이다. 창작집의 제목이기도 한 ‘달로’는 한유주 소설의 어떤 지향성을 나타내는데, 그런 점에서 ‘달로’라는 제목은 의미심장하다. 그런데 왜 달일까? 「달로」에서 달은 “사람들을 매혹시킨 가장 오래된 이야기”이자 “기억나지 않는 최초의 순간들”(26면)을 상징한다. ‘달로’라는 표현은 바로 이 태초의 말씀의 순간, 그 음성들, 옛날이야기로 돌아가려는 화자-작가의 의지를 드러내는 것이다. 소설에 따르면 세계의 모든 이야기는 이미 어디선가 들은 “지겨운 이야기들”(13면)이며, 인류의 역사는 “구부정한 나선”(15면)의 궤적을 그리며 최초의 순간들을 지루하게 반복할 뿐이다. 그리하여 화자는 “슬픈 일들이 무수히 일어”(30면)나는 이 세계를 떠나 ‘달로’, 즉 “먼 옛날의 이야기”가 숨어들어간 세계의 뒷면을 향해 여행을 떠난다. 「달로」가 타락한 비극적 현재를 지우고 기원을 찾아 떠나는 서사시적 탐색담을 연상케 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달로, 달로, 먼 옛날이야기로, 어느 왕들의 무덤은 무수한 바위를 깎아 만들어졌고, 그 안에는 끝이 없는 미로와 바닥이 없는 함정이 있다는, ……그런, 비정한 고대의 시간처럼, 달의 뒷면에는 어느 바다가 있고, 그곳에 발을 담그기 위해서는 비정한 긴긴 시간을 거꾸로 헤엄쳐서, ……, 그는 몸을 세워 일으켰고, 장대를 손에 쥐었다. (…) 그의 장대는 몽상을 걷고, 백일몽을 걷고, 환영을 걷고, 기억나지 않는 꿈들과 희미한 이야기들을 걷고, ……, 허공을 한 아름 휘돌다가, 땅으로 떨어진다.(28면)
소설에서 화자가 “비정한 긴긴 시간을 거꾸로 헤엄”치기, 즉 시간 거스르기를 통해 도달하는 곳은 “어느 악사의 하프가, 옛 영웅의 커다란 칼이, 반인반수의 등줄기가”(「죽음의 푸가」, 56면) 존재하는 신화와 전설의 세계다. 그러나 신화와 전설은 이미 그 빛을 잃었다. 이제는 어느 누구도 별들의 움직임을 읽으면서 길을 찾아가지 않는다. 우리는 신들의 땅에서 너무나 멀리 벗어난 것이다. 그러니 이제 우리의 귀는 옛날이야기를 듣지 못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그 태초의 이야기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해 듣고 만다면 결국에는 “공포와 전율과 격렬함”(「세이렌 99」, 93면)에 떨다가 미쳐버리거나 죽어버릴지도 모른다. 다소 난해한 독백들로 채워진 「세이렌 99」는 이런 맥락에서 치명적일 정도로 매혹적인 태초의 옛날이야기인, ‘세이렌’을 찾아 떠나는 실패한 오디쎄우스의 탐색담이라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사라진 호수’를 찾아 떠나는 독서의 여정을 다루는 「지옥은 어디일까」 또한 이러한 탐색담의 변형이다.
그런데 왜 한유주 소설의 화자들은 앞으로 똑바로 나아가지 않고 이렇게 뒤로 거꾸로 거슬러가려고 하는 것인가? 우선 화자의 진술을 통해 유추하자면 그것은 이 세계가 죄악으로 가득한 타락한 곳이기 때문이다. “세계의 사진첩”에는 “슬픈 일들”만 가득하다. 히로시마의 원자폭탄, 아우슈비츠의 공포, 어느 시인의 자살, 애인의 죽음, 혹은 아이히만의 후손인 베를린의 스킨헤드족 등등. 「죽음의 푸가」에서 화자는 상상 속에서 자발적인 희생양의 제의를 통해 이 세계의 죄악을 씻어내고자 하지만, 이러한 묵시록적 기록이 죽은자들을 망각의 강에서 건져올리지 못할 것임을 안다. 이렇게 “자음의 폭력”(42면)이 횡행하는 이 야만스러운 문명세계에 대한 환멸과 그러한 세계가 이미 변경 불가능한 “견고한 체계”(89면)가 되었다는 절망은 한유주 소설의 화자에게 “과거를 향해 움직”(17면)이도록, 시간을 거슬러올라가도록 부추긴다.
우리가 삶을 지속할 수 있는 것은 보통 현재가 미래를 향해 전진한다는 경험적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그럴 때 삶은 완성이 아니라 미완성, 고정이 아니라 변화의 상태가 된다. 그리하여 현재는 이 미완의 변화무쌍한 세계 속에서 미지의 시간을 향해 운동한다. 근대적 의미의 소설은 바로 이러한 현재와 접촉함으로써, 형성중인 미완의 세계와 결합된다. 소설의 현재성과 당대성은 바로 이 순간 획득된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현재의 시간은 물론 아직 다가오지 않은 미래를 불완전하게나마 경험하게 한다. 그러나 한유주 소설의 화자에게 지금 여기는 ‘흔해 빠진 문장’과 ‘뻔한 이야기’ 들만 되풀이되는 “화면 안의 똑같은 장면”(96면)에 불과하다. 한유주 소설에서 자주 반복되는 ‘액자’와 ‘화면’의 이미지는 세계를 정지시키고, 그 순간 시간은 물론 흐르지 않는다. 현재는 미래로부터 단절된다. 한유주 소설의 화자는 바로 그 단절된 시간과 공간에 거주한다.
한유주 소설이 탐색담의 구조를 띠면서도 폐쇄적인 인상을 주는 것은 그 때문이다. 대개 탐색담의 주인공이 세계를 향해 바깥으로 나아간다면, 한유주 소설의 화자는 거꾸로 “어두운 방 한구석” “좁다란 페이지들 안”(「그리고 음악」, 99~100면)에 스스로를 유폐시킨다. 그들에게 세계는 더이상 모험할 가치가 있는 낯설고 흥미로운 곳이 아니다. 세계는 이미 진부해졌고 지루해졌다. 그리하여 그들은 앞으로, 밖으로 나아가는 대신 뒤로, 안으로 숨어들어간다. 그리고 닥치는 대로 읽고 본다. 한유주 소설의 화자들은 종종 말과 글, 영화와 사진, 죄와 벌, 전쟁과 죽음 등에 대한 텍스트와 그것에서 촉발된 단상을 통해 지금의 인류와 문명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에 대해 개괄한다. 한유주 소설의 조망적 시점은 그렇게 해서 획득된 것이다. 역설적으로 들릴지도 모르지만 그것은 자폐적이기 때문에 더욱 얻기 쉬운 관점이다.4
한유주 소설에서 인물들이 증발되어버리는 것도 그 때문이다. ‘너와 나’, 즉 ‘우리’가 함께 떠난 베를린에서 “너는 사라졌다”(「베를린·북극·꿈」, 141면). 익명의 화자가 내뱉는 묵시록적 독백으로만 채워진 다른 작품들과는 달리 희미하나마 인물-화자가 등장하고 인물들간의 갈등과 사건이 일어나는 「그리고 음악」 「베를린·북극·꿈」 「죽음에 이르는 병」 「지옥은 어디일까」에서조차 결국 모든 인물들은 사라져버리고 발화주체인 인물-화자만 덩그라니 남는다. 이렇게 보면 한유주의 탐색담은 결국 내면으로의 여정이라고 할 수 있는 것 아닌가?
그러나 한유주 소설에서 내면은 더이상 내면으로서의 가치와 의미를 갖지 못한다.5 근대소설에서 내면성은 속물적인 세계에 저항하는 진실한 거점의 역할을 자임했지만, 지금 한유주 소설에서 내면은 더이상의 변화가 불가능한 폐쇄적인 세계를 단순히 반영하고 반복하는 거울에 불과한 것이 되었다. 이제 내면은 뒤집힌 외면에 불과하게 된 것이다. 한유주 소설의 익명적 화자는 더이상 내면이라는 성소(聖所)조차 가지지 못한, 세계에 점령된 자아다. 이때 세계란 물론 한유주 소설의 화자가 극구 부정해 마지않는 오염된 현실세계가 아니다. 그것은 닥치는 대로 읽기만 한, 그래서 문장들을 “삼키지도, 내뱉지도 못한 채, 백치가 되었고, 벌레가”(197~98면) 된 존재들이 참조하는 텍스트에 의해 매개된 세계이다. 세계는 인터넷, 텔레비전, 활자 등으로 나타나는 파편화된 텍스트 조각들로 환원되고 ‘나’의 내면은 이제 그것과 구별 불가능한 것이 되어버린다. ‘나’는 그렇게 세계를 유령화할 뿐만 아니라 스스로를 유령화한다. 그것은 내면적 동기가 더이상 아무런 무게도 지니지 못하게 될 만큼 외부적 결정이 압도적인 것이 되어버린 세계에서 개인이 택할 수 있는, 매우 세련되지만 역으로 그만큼 손쉬운 선택이다. 세상 밖으로 나가지 못하면서 내면조차 갖지 못한 존재들은 그렇게 유령이 되어 텍스트와 활자들 사이를 유영한다. 과거로 거슬러올라가는, 이야기의 기원에 대한 탐색 없는 탐색은 그렇게 시작되는 것이다.
3. 믿거나 말거나, 패설(稗說)
박형서 소설에서도 옛날이야기는 중요한 관심의 대상이다. 박형서의 소설론 혹은 소설로 쓴 창작방법론이라 할 수 있는 「날개」는 한유주 소설과 마찬가지로 신화와 전설과 로망스의 세계를 흥미로운 상상력의 원천으로 설정한다. 이 소설은 흔한 끌리셰(cliché)의 하나인 ‘상상의 날개’라는 표현에서부터 출발한다. ‘상상의 날개’라는 메타포는 광고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카피이자 이미지다. “상상만 하면 돼!”라는 광고 속 카피는 소설 「날개」의 주제이자 소설의 방법론으로 그대로 옮겨간다. 소설은 일종의 액자형태로 구성되어 있다. 액자 바깥의 화자인 ‘나’는 2005년 어느날 심심한 나머지 “눈을 감고 원하는 만큼의 시간을 헤아”(「날개」, 54면)리기 시작한다. 그렇게 해서 상상한 것이 바로 액자 안의 이야기다. 소설은 그렇게 ‘나’가 실제로 겪거나 들은 이야기를 상상 속에서 가공하여 하나의 허구적인 이야기로 만드는 과정을 제시한다. 그렇게 만들어진 허구 속에서 ‘나’의 친구 성범수는 “알레한드르라고 불리는 맘씨 좋은 사나이”(70면)가 되기도 하고, 친구 K가 죽었을 때 “어린 계집아이를 데리고 영안실에 찾아와 한바탕 곡을”(53면) 하면서 난리를 친 ‘못되게 생긴 노파’는 여자에게 사기를 쳐서 돈을 뜯어내는 뻔뻔한 노파로 분장해 등장한다. 사실 액자 속 이야기의 세세한 내용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그렇게 현실의 경험들이 상상이라는 일련의 공정을 거쳐 허구로 거듭난다는 바로 그 사실이고, 상상하면 무엇이든 이룰 수 있다는 식의 상상의 권능에 대한 강조이다.
그렇게, 나는 170년 후의 미래를 본다. 미래를 본다는 게 이상한가? 뭐가? 그건 그다지 특별한 일이 아니다. 누구라도 원한다면 어느 장소든 어느 시대든 갈 수 있다. 정말로 간절히 원한다면 말이다. 눈을 감고, 팔을 벌리고, 간절히.(54면)
상상의 위력을 강조하는 이 구절은 ‘나’가 현실을 토대로 가공한 허구의 이야기 속에서 그대로 반복된다. 액자 안의 이야기에서 여자가 사랑한 거인의 클론인 아이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다리가 아파서, 집에 가고 싶다, 엄마한테 가고 싶다 하고 생각했어요. 눈을 감고 그렇게 간절히 생각하는데, 몸이 둥둥 떠오르는 거예요. 그렇게 하늘을 날아서 집으로 왔어요.”(75면) ‘눈을 감고, 간절히’ 원하기만 한다면 누구라도 어디든 갈 수 있다는 ‘나’의 전언은 그대로 상상 속 이야기에서 하늘을 나는 거인과 아이의 형상을 통해 구현된다. ‘상상만 하면’ 안되는 일이 없다는 것이다.
「날개」에서 “정확한 과학적 사실만을 가르치는 여자”(57면)는 “신화와 전설과 로망스와 백일몽”(63면)은 비현실적이고 아무런 가치없는 “엉뚱하고 쓸모없는 상상” 혹은 ‘허무맹랑한 이야기’에 불과할 뿐이라고 항변하지만, 박형서에게는 그와같은 허황된 거짓말이야말로 소설의 원형이다. 한유주에게 그런 옛날이야기들이 모든 이야기들의 기원인 것처럼 말이다. 물론 박형서 소설의 옛날이야기는 한유주 소설에서처럼 진지하게 추구되는 대상은 아니다. 오히려 그에게 옛날이야기들은 ‘새빨간 거짓말’의 원천이자 모든 것들을 자기 영역으로 끌어당기려는 근대소설 초창기의 잡동사니적 모습과 흡사하다. 박형서는 그런 허무맹랑한 이야기야말로 진짜 소설이라고 주장하는 듯하다. 그래서 그의 소설은 점점 더 뻔뻔스러울 정도로 황당해진다. 이 세상에는 망자들이 저승으로 넘어가는 ‘길’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발상에서 출발한 「노란 육교」나 “머리에서 하루 이백만배럴의 원유에 해당하는 고농축 유분이 흘러나오”(219면)는 사람에 대한 상상에서 비롯된 「두유전쟁」은 마치 패관(稗官)이 농담이나 소문처럼 거리에 떠도는 설화나 야담을 주워 모아 이리저리 짜맞춰낸 ‘패설’에 가깝다. 그것은 카라따니 코오진(柄谷行人)이 근대소설의 특징으로 지목한 “이야기(허구)이지만 그것이 리얼한 것처럼 보이도록 하”6는 리얼리즘적 방식을 거부하고 거꾸로 이야기의 허구성을 강조한다. 그래서 그것은 아직 소설이 되지 못한 소설의 전신(前身)이라고 할 법하지만, 박형서는 그것도 소설이라고, 아니 그것이야말로 소설이라고 주장하는 듯하다.
사정이 그러하니 박형서 소설의 황당한 결말에 당황할 필요는 없다. 두유(頭油)청년 성범수를 둘러싼 한미간의 숨막히는(?) 첩보전과 추격전을 장황하게 다루던 「두유전쟁」은 다음과 같이 끝난다. “그렇게 거대한 불의 아가리는 모두를 깨끗이 삼키고는 하늘나라로 보내버렸다. 하늘나라에 난리가 났다.”(262면) 소설은 아무런 감흥도 주제의식도 전해주지 않은 채, 그렇게 갑작스럽게 종결된다. 대개 통상적인 삶의 감각에서 벗어나 삶에 대한 새로운 통찰에 이르게 하거나 정서적 여운을 안겨주는 전통적인 단편소설의 기능은 박형서 소설에서 그런 방식으로 삭제된다. 대신 “세상에 이런 일이!” 같은 감탄이나 “뻥이야?” 같은 허탈함만이 남는다. 물론 그것은 작가의 의도다. 그런데 왜?
박형서의 「「사랑손님과 어머니」의 음란성 연구」를 보면 대충 그 의도를 짐작할 수 있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소설은 대표적인 서정소설로 알려진 주요섭의 「사랑손님과 어머니」를 논문의 형식을 빌려와 “성교를 중심으로 세계의 원리와 끝없는 갱신을 해명하고자 한 알레고리 소설”(164면)로 재해석하는 과정을 주요 내용으로 하고 있다. 화자는 소설 초반에 “멋진 문학작품의 의미가 왜곡되거나 편협한 해석만이 유령처럼 배회”(135면)하는 한국문학의 연구풍토에 짐짓 분노와 우려를 표명하면서 텍스트의 ‘진정한 이해’를 위해 형식주의, 구조주의, 기호학, 심지어 영양학까지 동원한다. 그러나 이러한 이론적 논의틀은 구체적인 텍스트 이해과정에서는 전혀 중요하게 작용하지 않고 또 실제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대신 화자는 그 자신이 비판하는 “왜곡되거나 편협한 해석” 방법을 또다른 희화적인 방식으로 의도적으로 활용한다. 예컨대 “남근중심적 사고에서 벗어나 불알중심적 사고로 옮겨가야 할 것이다”(150면) 같은 경우가 그렇다. 논의를 진전시키기 위해 화자에게 필요한 것은 “약간의 상상”(155면)과 비상식적인 ‘생활의 지혜’와 속신(俗信)과 논리적 비약뿐이다. 어차피 이 소설은 “가상의 인물이 벌이는 가상의 사건에 관한 이야기”(153면)일 따름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당연한 말이지만 이 소설을 부족의 여자를 교환하는 족외혼을 통해 유지되는 부계혈통의 허구성을 까발리고 ‘사랑손님’으로 상징되는 이방인과의 ‘달걀 먹기’ 놀이를 통해 유지되는 모계가족사회의 음란한 이면을 폭로한 문제작으로 읽는 것은 작가의 의도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작가가 소설에서 그런 결론이 도출되는 과정의 허구성과 비합리성을 노골적으로 표출함으로써 「사랑손님과 어머니」를 재해석한 자신의 소설조차 그저 농담과 잡담에 불과한 것으로 만들어버린다는 점이다. 자신의 소설조차 ‘믿거나 말거나’ 식의 가담(街談)과 항설(巷說)로 만들면서까지 작가는 소설의 범주와 경계를 규정하는 기존의 문학적 엄숙주의에서 벗어나려는 것이다.
박형서 소설은 그렇게 소설이 소설에 부과된 규범을 조롱하고 희화화하는, 그리고 그 과정에서 자기 자신마저도 한낱 우스꽝스러운 농담에 불과한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광경을 보여준다. “도덕”과 “선량한 욕망”(164면)을 소설에서 배제하는 데서 더 나아가, 그럼으로써 그저 황당하고 또 그래서 더욱 흥미로운 패설 혹은 가벼운 읽을거리로 자임하는 듯하다. 박형서 소설은 그렇게 스스로 문학이 허무맹랑하되 재미있는 오락임을 자처한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그런 박형서 소설의 근저에 놓인 상상에 대한 강조가 상투적인 광고카피의 전언과 의외로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여기서 다시 덧붙일 필요는 없을 것이다. 문제는 이것을 우리는 과연 소설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인가이다. 그래야만 할 필연성은 대체 어디에 있는 것인가?
4. 이야기, 누군가에게 읽어주는
필연성에 관해서라면 이기호(李起昊)도 할 말이 있을 것이다. 이기호는 자전소설 「갈팡질팡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에서 인생이란 게 논리적으로 설명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우연으로 점철되어 있는데, 어떻게 소설의 세계는 논리적이고 필연적이어야 하느냐고 항변한다. 게다가 그에 따르면 이 세상은 “누가, 무엇을, 언제, 어디에서, 왜, 어떻게……”(275면)라는 육하원칙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그냥’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우연적인 사건으로 가득하다. 그런데 왜 소설만은 우연을 배제하고 필연성의 논리를 구축해야 하는가,라고 그는 반문한다. 그러니 그에게 “근대소설은 우연으로 시작해 필연으로 끝나는 장르”(268면)라는 ‘은사님들의 가르침’은 너무 버겁다. 오히려 그는 우연으로 시작해 우연으로 끝나는 “이전 소설들”의 태도가 훨씬 더 현실적이라고 생각한다. 그 때문일까. 그는 인물과 사건을 내적 필연성으로 몰아가려고 낑낑대다가도 어느 순간 “에라이, 뿅”(같은 면) 하고 소설을 끝내버린다. ‘갈팡질팡’하다가 우연히 소설가의 길에 들어선 그의 자전적인 이야기를 들어보면 그런 것도 같다. 현실이 갈팡질팡하는데 소설만은 왜 필연적이고 합리적이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은, 그대로 근대소설의 내적 논리에 대한 비판과 맞닿는다. 이기호의 「나쁜 소설」은 바로 이러한 근대소설에 대한 비판을 음독(音讀)에 대한 옹호를 통해 전면에 드러낸 소설이다.
소설이라는 게 원래 그랬잖아요. 누군가의 목소리를 타고 흘러나오는 이야기, 들려주는 사람에 따라 끊임없이 변형되고 각색되는 이야기. 그게 소설의 진정한 참맛이잖아요. 이 소설도 읽어주는 사람에 따라, 그의 맘에 따라, 계속 변하고 뒤바뀌고 출렁거려, 누가 진짜 이 소설의 원작자인지 모를 지경까지 흘러가길 원합니다. 나는 그런 것엔 하나도 서운하지 않으니까요.(9~10면)
‘누군가 누군가에게 소리내어 읽어주는 이야기’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나쁜 소설」은 두가지 점에서 의식적으로 근대소설을 배반한다. 우선 그것은 작가-화자가 음독하기를 권유하는 소설이라는 점에서, 다른 하나는 ‘각색’, 즉 이본(異本)을 만들 수도 있음을 표방하는 소설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첫번째 문제. 카라따니도 지적하고 있듯이,7 근대소설은 음성을 없앴을 때 비로소 성립한다. 근대소설이 성립하기 전에 대부분의 독자들은 전기수(傳奇ᄣᅥᆺ)나 구연자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귀로 들었지만, 근대의 독자는 철저히 고립되어 말없이 눈으로 책을 읽는다. 설령 도서관처럼 많은 사람과 함께 있는 곳이라고 하더라도 우리는 결코 소리내어 읽어서는 안된다. 음독이 공동체적-전근대적 독서라고 한다면, 묵독은 개인적-근대적 독서다. 근대소설의 내면성은 바로 이러한 고독한 묵독의 과정과 연동되어 있는 것이다. 이기호가 「나쁜 소설」에서 특히 ‘윤대녕(尹大寧)’ 소설을 지목하면서 이탈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이런 근대적 소설 읽기의 관습이다.
그렇다면 왜 윤대녕인가. 윤대녕 소설은 물론 특정한 소설 읽기의 관습과 경험을 통해 현실에서의 무기력한 고립을 부추기는, 근대적 내면성의 소설이 지닌 문제점을 보여주는 상징으로 호출되는 것이다. 화자에 따르면 ‘윤대녕’ 소설을 읽은 독자는 대개 “어떤 몽롱함, 어떤 쓸쓸함과 애잔함”(25면)을 느낀다. 윤대녕 소설을 읽을 때 솟아나는 그런 감정은 다른 사람들과는 공유할 수 없는, 고립된 개인만의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비참한 현실과는 무관한 곳에서 내면의 성소를 만들거나 그곳에서 위안을 얻는다고 하더라도 결국 우리의 현실은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다. 아니, 실제로 달라지지 않았다고 화자는 말한다. 「나쁜 소설」의 주인공인 ‘당신’ 또한 결국에는 “이 현실이, ‘윤대녕’ 소설에서 그려지는 세계보다 더 소설 같고, 더 사막 같다는 생각”(33면) 때문에 ‘윤대녕’ 소설에서 멀어졌다는 것이다. 이처럼 이기호는 화자의 입을 빌려 ‘고독한 묵독’을 강요하는 내면성의 소설이 그렇게 현실을 외면하게 함으로써 독자들에게서 고립되어왔다고 주장한다. 그런 점에서 작가는 “오디오용 소설”(9면)을 표방하는 「나쁜 소설」을 통해 스스로 구술적 이야기임을 내세워 근대소설의 고립과 침묵에 대한 자의식적인 저항의 제스처를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두번째 문제. 앞의 인용문에서도 알 수 있는 것처럼 「나쁜 소설」의 화자는 이 소설이 “들려주는 사람에 따라 끊임없이 변형되고 각색되는 이야기”, 그래서 소설의 원작자가 누구인지조차 알 수 없는 이야기가 되기를 바란다. 이런 화자의 발언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는 않는다 해도, 소설에 대한 작가의 자의식이 그와 무관하다고는 할 수 없다. 이기호가 소설 속에 의도적으로 가상의 독자를 끌어들여 수시로 말을 건네고 소설의 구성에 능동적으로 개입할 것을 요구하는 것도 그런 맥락이라고 볼 수 있다. 작가는 “그저 당신에게 몇가지 경우의 수만 던져줄 뿐” 구체적인 소설의 몸, 즉 “골격을 골라, 그 안에 힘줄을 잇고, 신경을 만들고, 살을 붙이고, 피부를 입히”(31면)는 일은 독자인 ‘당신’이 해야 한다는 것이다. 「누구나 손쉽게 만들어 먹을 수 있는 가정식 야채볶음흙」에서도 화자는 가상의 독자에게 말을 건네면서 “남들이 일방적으로 주입한 상상을, 멍청하게 받아먹”(48~49면)지 말고 상상력을 발휘해서 자기 입맛에 맞는 작품으로 만들어 읽을 것을 요구한다. 이는 스스로 소설을 근대소설 이전의 구연적 상황으로 되돌리는 것이며, 창조자로서 작가의 전능한 권위와 소유권을 반납하는 제스처다.
실제로 이기호 소설에 자주 등장하는 “어때요”라든가 “제발 ~해주세요” 같은 동의와 기원의 화법은 화자-구연자가 마치 청중을 앞에 두고 이야기하고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그런 이기호 소설의 화법과 구조는 작가와 독자가 더이상 일방향적인 전달이 아니라 이야기를 들려주고 들어줌으로써 서로 자리를 바꾸고 상호소통하는 상황에 놓이게 되는 효과를 유도한다. 「할머니, 이젠 걱정 마세요」는 작가와 독자 혹은 화자와 청자의 그런 자리바꿈이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지는가를 형식적인 장치를 통해 좀더 분명하게 보여준다. 작품에서 소설가인 ‘나’는 “몹쓸 병에 걸려 이제는 한가지 이야기 안에만 머무는 할머니를”(250면) 위로해주기 위해 할머니에게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러나 어느 순간 이야기를 듣던 할머니는 자신의 이야기를 ‘나’의 이야기 위에 포개놓으면서 화자가 되고, 원래 이야기의 화자였던 ‘나’는 할머니의 이야기 속 등장인물인 ‘덕용이 아저씨’가 된다. 화자와 청자가 슬그머니 자리바꿈을 하는 동안, ‘나’는 내 안에 들어 있는 다른 존재들의 목소리, 예컨대 “할머니의 목소리이기도 했고, 화로와 벽장과 요강이 내는 소리이기도”(253면) 한 다양한 목소리를 듣는다. 그렇게 할머니의 이야기 속으로 빠져들어가던 ‘나’는 급기야 할머니 이야기 속의 덕용이 아저씨가 되어 그가 들어갔던 장롱과 벽 틈에 들어가보려다가 다리가 끼어 옴짝달싹 못하게 된다. 이야기의 화자였던 ‘나’는 거꾸로 청자의 이야기에 홀려 자발적으로 그 이야기를 재연해보려다가 “우스꽝스러운 모습”(261면)이 된 것이다. 그 순간 이야기를 통해 누군가를 위로하려던 이야기의 주체인 ‘나’는 위로와 도움을 필요로 하는 대상으로 역전된다.
이기호 소설의 화자는 그렇게 청자와의 자리바꿈을 통해 작가로서의 권위를 반납하고 자발적으로 독자 혹은 인물의 자리로 걸어들어간다. 물론 소설의 형식적 층위에서 이루어진 화자와 청자의 그런 이동이 창조자로서의 작가의 권위를 전적으로 반납한 것을 의미한다고는 볼 수 없다. 오히려 작가는 몇몇 소설에서 수시로 “상상 좀 해라”라고 독자에게 강권하는데, 이는 어느 측면에서 판소리계 소설이나 전(傳) 등에서 흔히 보이는 계몽적 논평을 연상시킨다. 즉 이기호의 소설은 구성의 차원에서는 소설을 독자지향적인 것으로 열어놓고 있는 듯하지만, 실은 상상력에 대한 계몽적 전언을 전달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이기호의 소설은 독자지향적인 소통구조를 취하면서도 작가적 전언을 포기하지 않는다. 문제는 그 전언과 메씨지가 단순하고 소박한 차원에 머물러 있다는 것일 텐데, 그런 측면에서 이기호 소설에서 형식적 차원에서의 일탈이 새로운 인식적 충격의 효과로 이어지는 것이라고는 할 수 없다.8 오히려 상상 혹은 허구에 대한 일면 계몽적인 강조와 연결되어 있는 그런 형식적 과거회귀는 어떤 측면에서 소설가로서의 자기증명을 위한 노력에 가깝다고 하는 것이 옳다. 그렇다면 지금 그에게 소설-소설가란 무엇이며 그런 자기증명의 요구는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인가?
5. ‘아직 아닌’ 혹은 ‘더이상 아닌’ 소설
이기호 소설 「수인(囚人)」에서 소설가는 작가로서의 자기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곡괭이를 든 노동자’가 된다. ‘대형자동차 운전면허 소지자’‘정보처리기능사’‘숙련된 배관기술자’‘병아리 감별사’가 아닌 소설가는 오로지 육체노동을 통해서만 자신을 증명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소설가는 이제 극단적으로 실용성과 효용성을 추구하는 우리 사회에서 아무런 의미나 가치도 부여받지 못하는 존재가 되었다. 문제는 소설의 독자가 줄었다는 데 있지 않다. 중요한 것은 소설과 소설가가 더이상 이 세계와 인간에 대한 의미있는 질문을 던지지 못할 뿐만 아니라, 독자들도 소설가에게 그러한 사회적·정신적 역할을 요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니 작가가 자신의 권위를 내세운다는 것은 오늘날 어불성설이라고 할밖에. 따라서 스스로를 노동자로 호명하고 작가의 권위를 반납하는 듯한 제스처를 취하면서 화자와 청자의 자리를 수시로 바꾸며 이동하는 이기호 소설의 자의식에는 바로 이런 상황인식에서 나올 수밖에 없는 씁쓸한 자조가 숨어 있다.
한유주와 박형서의 경우도 내용과 형태만 다를 뿐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다. 한유주와 박형서에게 이 세계는 더이상의 새로운 탐색이나 성찰이 불필요한, 낡고 빤한 이야기들만이 넘치도록 반복되는 진부한 곳에 불과하다. 한유주가 이야기의 기원을 찾아 떠나고 박형서가 거리에 떠도는 기담을 채록하는 데 의미를 찾는 것은 그런 인식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의 현실이 과연 그들이 생각하는 대로 그렇기만 한 것일까? 그것은 현실에 대한 또 하나의 고정관념을 반성 없이 반복함으로써 현실에 대한 무관심, 소설과 현실의 관계맺음에 대한 근본적 성찰의 허약함을 은폐하는 데 기여하고 있지는 않은가.
이기호를 포함한 젊은 작가들은 그렇게 자의건 타의건, 근대 이전의 먼 옛날로 가고 있다. 그들의 행보에 우리는 어떤 수식어를 붙여주어야 할까? 그들의 소설은 ‘아직 아닌’ 소설인가, 아니면 ‘더이상 아닌’ 소설인가? 어찌됐건 분명한 것은 지금의 많은 젊은 소설들이 비록 형식적으로는 새로워 보이기는 하지만, 의외로 현재 우리의 삶에 실존적·존재론적 물음을 던지거나 인간과 세계에 관한 새로운 인식적 통찰에 이르기보다는 일면 현실에 대한 통념을 반복하면서 독아론(獨我論)적 물음이나 유희에 몰두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소설이 소설로서 새롭고 진보적이려면 세계의 진보를 역행해야 한다. 그런 측면에서 소설의 이런 과거지향성은 언뜻 세계의 진보를 거스르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세계가 진부하고 닫힌 체계에 불과하다는, 그러니 성찰이 불가능한 시대에 문학은 그저 한갓 농담이나 유희, 잡담이나 사적 기록에 불과하다는, 그런 상황에서 작가의 권위를 주장하는 것은 말도 안된다는 등의 인식은 세계의 뜻에 반(反)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거꾸로 지금 문학의 위기를 주장하는 대다수 사람들의 뜻에 순(順)하는 것처럼 보인다. 밀란 쿤데라의 말처럼 만약 소설이 정녕 사라져야 할 것이라면, 어쩌면 그것은 소설의 힘이 다해서가 아니라 소설이 이 세계를 더이상 자신의 거주지로 삼지 않아서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보면 지금 소설이 자신의 과거인 ‘이야기’로 역(퇴)행하는 것은 새로운 소설을 위한 자극이나 가능성으로 기능하기보다는 아직 끝나지 않은 소설의 가능성을 차단하는 부정적 효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 소설의 가능성은 아직 고갈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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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형서「작가의 말」,『 자정의 픽션』, 문학과지성사 2006, 281면.↩
- 허윤진「소노그램 아카이브 시리얼 넘버 6002」,『 세계의 문학』2006년 겨울호, 67면.↩
- 이 글에서 다루는 소설은 다음과 같다. 한유주『달로』, 문학과지성사 2006; 박형서『자정의 픽션』; 이기호『갈팡질팡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 문학동네 2006. 작품을 인용할 때는 본문에 면수를 적는다.↩
- 한유주 소설이 문명비판적 혹은 문명사적 시각을 보여준다는 최근 일군의 젊은 비평가들의 평가는 그런 점에서 착시이거나 과장이다. 한유주 소설에서 인류 문명에 대한 비판적 서술은 그에 대한 관심이나 나름의 성찰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런 현실적인 문제에 무관심한, 그와는 상관없이 자폐적인‘자기’에 몰두하는 과정에서 제시되는 상식적이고 감상적인 요약의 수준에 머물기 때문이다.↩
- 이는 비단 한유주에게만 해당하는 문제는 아닌데, 이에 대해서는 2000년대 소설의 탈내면성에 대한 김영찬(金永贊)의 지적을 참고할 수 있다. 김영찬은 탈내면의 미학의 역설적 가능성에 주목하지만, 거기에는 가능성만큼이나 위험과 문제점도 엄연히 존재한다. 김영희·김영찬·박형준·이장욱 좌담「우리 문학의 현장에서 진로를 묻다」,『 창작과비평』2006년 겨울호 참조.↩
- 카라따니 코오진 지음, 조영일 옮김『근대문학의 종언』, 도서출판 b 2006, 59면.↩
- 카라따니 코오진, 앞의 책 57면 참조.↩
- 이에 대해서는 졸고「소설의 재구성, 소설을 이야기하는 소설들」,『 문예중앙』2006년 가을호, 55~56면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