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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김시업 『정선의 아라리』, 성균관대 대동문화연구원 2004
정선아라리로 우리 소리의 부활을 꿈꾸다
김헌선 金憲宣
경기대 한국동양어문학부 교수 y3k@kyonggi.ac.kr
말이 갖는 생명력은 소리에서 찾을 수 있다. 노래라고도 일컫는 소리는 토박이의 정체성을 증명하는 긴요한 민족음악의 금은보화이다. 사투리가 있듯이 독자적인 음악어법인 ‘토리’에 의해서 부르는 소리는 든든한 민족문화의 자산이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고 환경이 달라지면서 더이상 이 소리는 불러지지 않고 획일화된 대중음악이 그 자리를 비집고 앉아 터줏대감 노릇을 하고 있는 것이 역전 불가능한 현실이다.
각 고을과 마을을 가보면, 그 고장을 대표하는 소리가 있게 마련이다. 정선고장의 특산물이 곧 정선아라리이다. 정선아라리에는 긴아라리와 엮음아라리가 있다. 긴아라리는 두 줄로 각기 ‘안짝’과 ‘밧짝’이 되어서 소리의 말이 완결되는 독자적인 음악이자 문학적 형식이라는 점에서 빼어난 미학성을 보인다. 정선 사람들이 이 형식을 누대에 걸쳐서 깁고 보태 오늘날의 형태로 가다듬은 소리가 긴아라리이다.‘봄철인지 갈철인지 나는 몰렀더니/뒷동산 행화야 춘절이 날 알궈주네’라고 하는 것이 긴아라리의 예가 된다. 이와는 다르게 엮음아라리는 사설은 촘촘하게 메기고 장단은 바쁘게 가다가 다시 원래의 아라리조로 돌아오는 형식을 일컫는다.
다른 고장에서 찾기 힘든 소리의 틀은 정선아라리의 중요성을 거듭 일깨운다. 이 정선아라리를 4반세기에 걸쳐서 답사하고 체계적으로 정리해 그 문화적 자산을 살리는 결정적 계기가 된 것이 곧 김시업(金時쨈)의 『정선의 아라리』이다. 이 책은 정선고을 한 곳을 택해 20년에 걸쳐서 지속적이고 집약적으로 작업을 진행한 결과이고, 정선아라리뿐만 아니라 우리 소리 연구의 길잡이 노릇을 할 획기적인 저작이다. 저자가 머리말에서 말했듯이 이제 이 소리전승 자체가 심각한 단절위기에 이르렀으므로 이 책은 현장감을 살린 유일한 자료로 남게 되는 셈이다.
이 저작은 두 가지 관점에서 탁월한 면모를 드러내고 있다. 우선 소리에 접근하는 체계적 작업방식인데 이는 성균관대 국어국문학과의 전통적 작업방식이 온축된 것이다. 일찍이 1960년대 중반부터 민요조사의 방법과 정리를 고민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연장선상에서 이러한 체계적 작업이 진행된 듯하다. 우선 소리판을 중시했고, 제보자의 아라리 자료를 중시했으며, 제보자의 아라리에 관한 생각을 중시했다. 소리는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소리꾼과 청중이 역동적으로 작용하는 소리판의 신명 속에서 생성되고 전달되며 수용된다는 점을 이 책은 보여주고 있다. 인공적인 조건 속에서도 이 점을 밝혀 소리판을 연상할 수 있도록 정리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탁월한 제보자를 선정하고서 이들을 중심으로 시간과 판을 달리해서 거듭 채록함으로써 전승의 고정성과 비고정성을 비교·검토할 수 있도록 했다. 아마도 단형의 시가(詩歌) 형식인 아라리를 이러한 방식으로 천착해서 접근한 사례는 없으리라 판단된다. 말로 소리를 어떻게 짓고 전달하는가 하는 것을 알 수 있게 함으로써 글로 쓰는 시와 말로 짓는 시를 비교·연구하는 디딤돌을 놓았다고 할 수 있겠다. 구비시(口碑詩, oral poetry)와 기록시(記錄詩, written poetry)를 비교·연구할 때 우리는 적절한 교과서 하나를 가지게 되었다고 해도 지나친 평가는 아니다. 말이 지니는 신이(神異)한 힘이 있는데 그것을 중시하고 조사한 특장이 있다.
게다가 소리를 하는 인물에 대한 상세한 대담이 실려 있어서 정선아라리에 대한 토박이 현지 사람의 소리관을 정리할 수 있도록 했다. 구비생애사와 소리에 관한 생각을 비롯해서 어떻게 소리가 제보자의 삶속에 용해되어 있는가를 ‘날것’ 그 자체로 보여줄 뿐 아니라 소리를 두고 벌이는 다단(多端)한 가치론적 논쟁까지도 보여주고 있다. 기존에는 필요한 소리만 조사하고 나머지 자료는 모두 방기했다. 이제는 연구의 심화와 중요성을 강조하는 점이 달라짐에 따라서 입체적이고 다면적인 접근이 요구되는데 선구적으로 이 저작은 다른 후발연구에 일정한 지침을 제공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연구의 새로운 가능성을 예고하는 것이라고 보아도 좋을 듯하다.
정선의 아라리 자료 수집이 앞으로 이렇게 확장되었으면 하는 희망적 제안을 이 기회에 하고자 한다. 소리의 자료수집과 연구 및 조사가 한층 열렬하게 전국적인 차원으로 확장되어야 한다. 우리는 20세기 전체를 우리 소리를 위시한 구비전승의 문화적 자산을 돌보지 않는 잘못으로 일관했음을 숨길 수 없다. 우리 삶을 행복하게 하고 기억의 유산을 풍부하게 유지하던 전통을 쉽사리 생매장했다. 이제 정작 그 중요성을 재인식하자 모든 전통이 일거에 사라지고 말았다. 보존하고자 하는 콘텐츠의 자료가 멸절되었다고 하겠다.
아직 기억에 남아 있는 자료를 찾아서 조사와 연구를 해야 마땅하다. 소리가 왜 중요한가? 이 말에 대답할 대안을 우리는 갖고 있지 않다. 보여줄 것이 없고 들려줄 자원이 없는 사실이 괴로울 따름이다. 아픈 기억으로 되살아나는 이 잘못의 참회를 위해서라도 후대에 이 소리가 진정한 소리였노라고 말하기 위해서라도 이 작업을 체계적으로 진행해야 한다. 우리는 소리를 보관하는 아카이브(archive) 하나 마련하지 못하고 있다. 연구의 훌륭한 관점을 예시한 이 업적이 헛되지 않아야 하겠다.
나는 학교수업이나 방송매체에서 우리 소리가 거듭 되살아나기를 바란다. 초등학교 수업시간에 할아버지나 할머니를 모셔서 우리네 삶이 이러했고, 그때 소리를 이렇게 하고 살았으며 아이들과 어떤 놀이를 했다고 들려주는 진정한 만남을 이룩했으면 싶다. 참다운 삶이 망각되고 획일적인 문화를 주입하는 문화적 말살정책을 언제까지 지켜보아야 하는지 참으로 개탄스럽다고 하겠다. 영어를 익히고 싸이버 세계의 가치가 중요하다는 헛된 망상이 제발 한때의 미망이었노라고 말하게 할 임무가 전통문화 연구자에게 있으며 이를 실현할 정책과 사회적 인식전환이 시급히 요청된다. 이 저서는 그 깨달음에 이르게 하는 방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