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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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한국 장편소설의 미래를 열자

 

대담: 창조적 장편의 시대를 대망한다

 

 

ⓒ이영균

ⓒ이영균

 

최원식

문학평론가, 인하대 교수. 저서로 『문학의 귀환』 『생산적 대화를 위하여』 『한국근대소설사론』 등이 있다.

서영채

문학평론가, 한신대 교수. 저서로 『문학의 윤리』 『사랑의 문법』 『소설의 운명』이 있다.

 

 

때: 2007년 4월 26일 오후 1시

곳: 세교연구소 회의실

 

 

徐榮彩현재 생산되는 새로운 양상의 소설들은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지금은 사회 속에 뛰어들어서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여지가 현저하게 줄어들고 있습니다. 작가들이 한국의 특수한 정치상황으로 인한 문학적 후광 없이 출발하기 때문에 오히려 다양한 가능성과 새로운 상상의 지평이 열려 있습니다.

徐榮彩 현재 생산되는 새로운 양상의 소설들은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지금은 사회 속에 뛰어들어서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여지가 현저하게 줄어들고 있습니다. 작가들이 한국의 특수한 정치상황으로 인한 문학적 후광 없이 출발하기 때문에 오히려 다양한 가능성과 새로운 상상의 지평이 열려 있습니다.

서영채 『창작과비평』 편집진으로부터 한국 장편소설의 현황과 전망에 대해서 짚어보자는 얘기를 듣고 의미있는 일이겠다 싶었습니다. 올해 2007년은 대선이 있는 해입니다. 87년 민주항쟁으로부터 벌써 20년이 지났고, 4명의 대통령이 바뀌는 것을 보았습니다. 1987년을 시발점으로 본다면, 문화적 정황은 그로부터 최소한 두차례 정도의 변곡점(變曲點)을 거친 게 아닌가 합니다. 꼭 맞아떨어지는 것은 아니겠지만 10년 정도를 단위로 해서요. 최선생님은 싸르트르를 인용해서, 정치적 부자유야말로 문학에는 자양일 수 있었다는 취지의 말씀도 하셨죠?87년 이후 점진적으로 이루어진 정치적 자유가 문학에는 오히려 질곡일 수 있다는 이야기를 90년대에 많이들 했었고, 이제는 그로부터도 또 한 시기를 보낸 것 같습니다. 97년을 2007년과 견주면 뭐가 그렇게 달라졌나 싶기도 한데, 87년과 2007년을 견주어보면 바뀐 것이 너무 많더라구요. 대표적인 예로, 요새 고등학교에서 제2외국어로 다수를 점하고 있는 게 중국어하고 일본어더군요. 77년은 말할 것도 없고 87년까지만 하더라도 압도적 다수가 독일어와 프랑스어였습니다. 일본어와 중국어의 부상이 동아시아담론의 측면에서 긍정적인 면도 있겠지만, 또다른 측면에서는 현재의 사회문화적 풍토와 연관되어 있는 게 아닌가 생각됩니다. 교양주의 혹은 교양의 쇠퇴와 몰락 그리고 신자유주의로 포괄할 수 있는 실용주의의 대두라고 규정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이런 추세를 짚어가며 우리 장편소설의 현황과 장래를 살펴보면 어떨까 싶습니다.

崔元植지금의 우리 장편은 이중과제를 안고 있습니다. 한편으로 19세기적인, 고전적 장편을 성취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고전을 넘어 현대성이든지 탈현대성이든지 오늘의 시대를 같이 잡아내서 쓰지 않으면 안됩니다. 장편소설사는 끊임없이 갱신하는 역사입니다. 그런 점에서 지금 새로운 이야기틀이 필요합니다.

崔元植 지금의 우리 장편은 이중과제를 안고 있습니다. 한편으로 19세기적인, 고전적 장편을 성취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고전을 넘어 현대성이든지 탈현대성이든지 오늘의 시대를 같이 잡아내서 쓰지 않으면 안됩니다. 장편소설사는 끊임없이 갱신하는 역사입니다. 그런 점에서 지금 새로운 이야기틀이 필요합니다.

최원식 2007년을 1997년과 비교해서 얘기하니까 우리가 어느 틈에 21세기를 살고 있다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되네요. 그런데 오늘의 주제와 관련해 말하자면 한국에‘창조적 장편의 시대’가 도래했는가 하면, 아직 그런 시대에 진입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창조적 장편의 시대라고 하면, 제대로 된 작품이 어쩌다가 아니라 지속적으로 나오는 것, 다시 말하면 장편작가들이 종적으로 또는 횡적으로 대오를 지어 읽을 만한 장편들을 안정적으로 생산해내는 시대겠죠. 그런 면에서 보자면 지금 우리가 그러한 장편시대 안에 있지는 않은 거 같아요. 이 점에서 현재 우리 장편소설이 어떤 지점에 와 있는지 점검해보면서, 여러 변곡점들 중에서, 달라진 지형 속에서 어떤 장편이 가능한 것인지 검토하는 작업이 절실하다고 생각돼요.

서영채 창조적 장편의 시대가 아직 도래하지 않았다고 생각하시는군요. 좋은 시대는 아껴놓는 게 좋을 수도 있죠. 이미 와버렸다고 생각하면 허탈해지니까요.(웃음) 그렇게 생각하시는 근거에 대해 좀더 말씀해주시겠습니까?

 

한국 장편소설의 이중적 과제

 

최원식 장편소설이 근대문학의 챔피언이라는 사실은 누구나 인정하는 바입니다. 장편시대란, 따라서 그 사회 근대성의 성숙 여부를 판별하는 가장 중요한 지표의 하나입니다. 그런데 뛰어난 장편은 근대의 자식이면서 동시에 근대 이후를 머금은 이야기 아닙니까? 서구 또는 일본의 근대를 번역하는 이식의 과정을 통해 성립한 한국의 근대는 식민지와 분단이라는 조건과 부딪치면서 혈투를 벌여왔습니다. 그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이만한 규모의 현대문학을 창조해온 우리 문학에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지만, 좀더 냉정한 눈으로 점검할 때 우리 장편의 역사는 아직도 가난하다고 판단됩니다. 장편의 시대, 그것도 창조적 장편의 시대의 도래는 우리에게 생생하게 살아 있는 실천적 과제라고 하겠습니다.

그런 장편의 시대가 출현하는 것을 제약하는 조건들을 우리 소설 안으로 좁혀서 보면, 첫째 긴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전통이 두텁지 않아요. 근대 이전에도 중국이나 일본은 대작들을 많이 냈어요. 우리 문학과 체질은 달라도 일본 역시 일찍이 『겐지모노가따리(源氏物語)』를 생산했지 않습니까? 우리의 『춘향전』 『흥부전』은 양적인 규모가 작아요. 근대 이후 중국이나 일본 장편을 읽다 보면 저는 그들이 가진 서사능력의 전통을 실감하곤 합니다. 긴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전통의 축적이 풍요롭지 못한 조건이 우리 근현대소설을 제한합니다. 비평가 김동석(金東錫)은 소설가와 만날 때 먼저 체격을 보았어요.‘위대한 소설적 체력’, 제가 지침으로 삼고 있는 김동석 비평의 핵심어 중 하나입니다. 장편작가는 체력이 좋아야 해요. 발자끄처럼 덩치가 커야죠.(웃음) 일리가 있어요. 소설적 체력의 전통 탓인지 우리 단편에서는 좋은 작품들이 많이 나와, 그야말로 명작들의 행진이 중단된 적이 없었던 데 비해 장편은 그렇지 못합니다.

또 하나는 이야기의 규모와 연동된 사회적 두께입니다. 인간에 대한 극진한 파악력이야말로 사회적 두께에서 나오는 것인데, 한 사회의 상층-중간층-하층 전체를 통괄할 수 있는 눈이 우리 작가들에게 부족한 것 같아요. 우리 소설은 좌우파를 막론하고 하층민을 잘 그려요. 민중문학을 반대하는 김동리(金東里)도 하층을 생생하게 잡아내거든요. 그런데 오히려 지배층은 못 그려요. 지식인에 대해서도 그렇구요. 우리 장편에서 그게 제일 문제 같아요. 그래서 지배계급이 아주 희화화되고 지식인들이 매우 우스꽝스런 모습으로 나오곤 해요. 사회 전체의 맥락 속에서 인간들을 파악하는 능력의 부족이 장편시대의 출현을 제약합니다.

우리 근대소설사를 돌아보건대 일단 19세기적 의미의 근대소설(노블)을 만들어내는 게 과제였습니다. 그런데 우리 근대소설은 20세기를 살았잖아요. 알다시피 20세기 소설은 19세기 리얼리즘 장편에 대한 도전입니다. 그것은 두 방향에서 이루어지는데, 하나는 모더니즘의 해체고 또 하나는 사회주의리얼리즘의 변혁입니다. 그러니까 한국의 근대소설가는 한편으로는 19세기적인 장편을 성취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19세기를 넘어서는 20세기의 현재성을 잡아내야 하는 이중의 긴장 속에 있었어요. 두가지 과제를 동시에 추진하다 보니까 진짜 힘든 일이죠.

우리 근대소설사에서 중요한 작품들을 보면 이중적이에요. 우리 근대소설의 진정한 효시라고 할 염상섭(廉想涉)의 『만세전』도 그래요. 처음에 이 작품을 보고 놀랐어요. 아내가 위독하다는 전보를 받고, 까페에서 여급들과 농탕질치는 등 귀국을 지연하는 주인공의 행태는 근대적이기보다는 현대적이었기 때문입니다. 엄마의 사망소식을 듣고 밍기적거리는 뫼르쏘와 비슷했어요. 그래서 저는 까뮈의 『이방인』의 영향을 받았구나 짐작했는데 『이방인』이 한참 뒤의 작품인 거예요. 이처럼 한국근대소설은 19세기와 20세기의 긴장을 자기 안에서 진지하게 대면한 고투 속에서 나왔습니다. 요즘 소설가들은 더욱 곤경에 처했지요. 19세기, 20세기와 21세기를 함께 안고 씨름해야 하니까요.

 

시장의 아들, 장편소설

 

서영채 저는 2007년 얘기를 했는데, 선생님은 19세기, 더 올라가서 『겐지모노가따리』 시대까지 언급하십니다.(웃음) 장편 혹은 긴 이야기의 전통이 우리에게 부족한 것 같다고 하셨는데, 장편소설, 근대의 노블이란 것이 자본주의시대의 산물이고 근대예술의 대표주자인데, 그것과 미감(美感)이 달랐던 시대의 결락에 대해 말하는 건 좀 다른 차원의 이야기가 아닌가 싶습니다. 예컨대 성리학적 미의식이 가지고 있는 소박주의 같은 것, 한중일 삼국만 놓고 보더라도 유독 성리학적 세계상이나 미의식이 지배하던 시기가 우리는 좀 길지 않았나 합니다. 한문 전기소설 같은 경우만 하더라도, 주절주절 긴 이야기를 쓸 필요가 있나 핵심만 짚어서 쓰면 되지 하는, 어떤 직관주의나 본질주의, 소박주의도 있지 않습니까. 그 시대하고 지금 자본주의 근대는 좀 다른 이야기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최원식 물론 성리학 또는 유교의 문제도 있지만 그보다는 시장의 문제가 소설의 발생·발전에 관건적이라는 겁니다. 우리나라 소설이 전통시대에도 상대적으로 빈곤한 원인은 시장이 빈약했다는 점에 있거든요. 소설과 시장은 함께 갑니다.

서영채 자본주의사회에서 말이지요?

최원식 근대 이후는 물론이고 전근대에도 그래요. 장바닥에 떠도는 유언비어들이 소설의 원시적 형태이니 소설은 시장에서 태어난 거지요. 단일언어, 즉 지배계급의 언어를 지향하는 시에 반해서 소설의 언어는 다성적인 언어로서 그 단일언어를 해체하고 전복하는 반란의 언어입니다. 천민적 기원을 흔적으로 간직한 소설이라는 변두리 장르가 시장이 지배하는 근대에 들어서면서 시를 대신해 근대문학의 챔피언으로 등극한 것은 일종의 신분상승이죠. 하지만 근대 이후에도 뛰어난 소설은 시장의 아들임에도 불구하고 시장에 비판적이라는 점은 기억되어야 합니다. 하여튼 소설, 특히 장편의 발달은 근대 이전 이후를 막론하고 시장의 규모와 대체로 평행을 이룹니다. 장편시대의 징후를 보여준 1930년대나 한국 자본의 규모가 커진 요즘, 장편들이 쏟아져나오는 것을 봐도 장편과 시장은 긴밀합니다.

서영채 그렇게 말씀하시면 더 쉬울 것 같습니다. 전통의 문제, 아까 선생님께서 사회적 두께라는 표현을 쓰셨는데, 그 두께라는 말 안에 문화적 자본이라든지 문화적·사회적 성숙, 경제적 자유, 이런 것들이 다 어우러져 있겠다 싶은데요. 그런 개념이라면 많은 사람들이 동의할 수 있겠군요. 그런데 이야기가 예상과 빗나간 것 같습니다. 제가 교양주의의 몰락이라고 하면 선생님께서 신자유주의의 대두라고 맞장구쳐주실 거라 생각했었습니다.(웃음) 근자에 들어서도 이른바 문학의 죽음이라든지 문학의 종언, 문학뿐 아니라 인문학 전체를 포괄하는 위기담론들이 계속 생산되고 있는데요. 그런 담론이 좀 호들갑스럽지 않은가 싶습니다. 언제 문학이 위기가 아니었던 적이 있나, 늘 위기였는데, 새삼 그렇게 이야기하는 게, 마치 헤겔이 낭만주의를 놓고 근대예술의 종언을 말했던 것과 비슷하지 않나 싶습니다. 낭만주의가 근대예술의 정점이라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 안에는 수많은 변종이 있고 변주가 가능한 것처럼, 문학의 죽음이라고 얘기했을 때는 불편한 예술로서의 문학의 죽음, 편한 위안으로서의 엔터테인먼트 상품들과 맞선다는 의미에서의 문학의 죽음, 문학이 더이상 계몽적이고 계도적인 일을 할 수 없게 되었다 정도의 맥락으로는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위기담론이 지나치게 과대포장되어서 현재 우리 시대의 문학에 대한 사려없는 비판이 된다면 그건 바람직하지 않다고 봅니다.

 

소설의 위기는 곧 사회의 위기

 

최원식 저도 동감이에요. 유행처럼 번진 문학위기론이 문제에 정면으로 대항하는 것 같지가 않아요. 어떻게 보면 위기론을 즐긴다는 느낌이 많이 들었어요. 지금 계도성이라고 했는데 문학의 계도성, 잘 모르겠어요. 낮은 단계에서나 계도성이지 위대한 문학은 계도성 따위와는 거래를 안하거든요.‘진리는 그 자체로 강력한 전파력을 가진다’라는 말은 위대한 문학에 거의 그대로 적용될 겁니다. 한국문학의 위기론, 그 논조 아래 깔려 있는 것은 이제 민족문학 또는 민중문학은 끝났다가 아닐까요? 그걸 문학의 위기니 문학의 죽음이니 하는 거 같아요. 독재와 싸우면서 새로운 시대를 탐구했던 70년대 이후 한국소설의 중심적 흐름에 종언을 선언하고 싶은 거지요.

그런데 현재 우리가 맞은 국면은 좀더 특별하다는 생각입니다. 양극화가 부단히 의식되는 것에서 보듯이 최근 우리 사회가 달라진 것 같아요. 우리 속담에‘이랑이 고랑 되고 고랑이 이랑 된다’는 게 있어요. 신분변동의 가능성이 비교적 열려 있는 우리 사회를 잘 드러내는 말입니다. 신분제가 뚜렷했던 근대 이전에도 평등주의가 강한 사회였어요. 고르게 못살아서 그렇지만요.(웃음) 그런데 다시 생각해보면 천하가 어지러워서 그렇지 이런 나라가 꼭 나쁜 건 아니지요. 조선사회를 기획한 선비들은 농업에 기초한 작은 나라를 이상으로 삼았기에 욕망을 키우는 시장을 억제했고 그에 따라 긴 이야기도 발달하지 못했는데, 이렇게 보면 아까 서교수의 견해와 통하기도 해요. 뭐 그렇게 긴 이야기가 필요하냐, 짧은 이야기로 촌철살인하고 말지, 그게 유교적인 것과 무관하지는 않겠죠. 길고 복잡한 이야기를 소비하는 사회란 이미 욕망의 규모가 커져버린 사회를 전제하니, 발달이라 해도 악을 품은 발달이지요. 하여튼 한국사회는 악을 품은 발달을 이루었고 그 이룸에는 아까 말한 우리 사회의 유연성이 단단히 한몫을 했어요. 그런데 유연성이 고정성으로 대체되는 경향이 확대되어 이제는 도전이나 극복보다는 넘을 수 없는 벽이라고 체념하는 경향이 눈에 띕니다. 한마디로 모험이 어려워진 사회가 됐어요.

그런 점에서 보면 최근 소설들에 사회성이 없는 게 아니에요. 분명히 이런 현상에 대해 분노하지만 노여움으로 떨어지는 경향, 지레 체념하는 환멸이 최근 소설에 강하게 존재합니다. 양극화라는 것에 대해, 이렇게 굳어지는 게 좋다고 생각한다면 할 말이 없는데, 극복되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문제가 생기죠. 지금 소설의 위기는 한국사회의 위기이기도 합니다. 위대한 문학 또는 위대한까지 가지 않더라도 진정한 문학 또는 진정한 소설이라면 이런 현실을 그냥 승인하는 것으로 끝나서는 곤란해요. 왜냐하면 현실과 불화하면서 현실을 넘어서는 새로운 영토를 꿈꾸는 게 문학이고 그중에서도 특히 장편소설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에요.

 

‘새로운 중세’의 도래와 그 주인공들

 

서영채 장편소설이 자본주의시대의 대표적인 서사형식이라고 했을 때, 그 핵심에 놓여 있는 것은 출세하고자 하는 주인공들의 모습이 아닌가 합니다. 움베르또 에꼬의 책 제목이기도 했지만‘새로운 중세’라는 말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우리 사회도 이제는 재벌3세가 주인이 되는 시대가 되어가고 있죠. 70년대가 사회적인 유연성이나 신분변동의 가능성이라는 면에서 매우 개방되어 있는 공간이었다면, 80년대와 90년대를 지나면서는 상황이 매우 달라졌습니다. 부자는 예쁜 여자와 결혼해서 잘생긴 남자아이를 낳고, 돈 많고 잘생긴 남자아이는 더 예쁜 여자와 결혼해서 더 잘생긴 3세를 낳습니다. 3세인 재벌회장감은 잘생기고 품성도 좋고 문화적인 교양에다 능력까지 있는, 그야말로 새로운 귀족들이 탄생하고 있어요. 70년대만 하더라도 누구나 오퍼상을 차려서 재벌을 꿈꿔볼 수 있었는데, 그런 게 TV드라마 같은 대중적인 서사에도 반영이 되고 또 소설에도 반영이 돼 있었는데, 이제는 그런 유연성이나 변동가능성을 꿈꾸기 어려운 시대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에꼬의 맥락과는 무관하게, 새로운 중세라는 말을 이런 현상에 대해 쓸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만약 이런 방식으로 사회적 유연성이 크게 제한되고 양극화가 심해지고 신분변동의 가능성의 폭이 좁아지면, 그야말로 소설 주인공의 원초적인 모습이라 할 만한 출세를 꿈꾸는 인물, 스땅달의 『적과 흑』의 주인공처럼 신분상승을 꿈꾸거나 새로운 이상사회를 꿈꾸는, 항상 어떤 변동을 꿈꾸는 인물의 폭이 현저하게 협소해지고, 장편소설이 마땅히 생산함직한 이야기들의 폭도 줄어드는 게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야기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루카치가 이야기했던 길 찾기로서의 소설, 어른 되기나 출세하기를 욕망하는 주인공들의 이야기로서의 소설, 이런 패러다임만 다른 식으로 변화될 뿐이지 않은가, 새로운 양상의 소설들은 또다른 가능성들을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으로 저는 최근의 장편소설들을 보고 있습니다. 사회 속에 뛰어들어서 바꿀 수 있는 여지가 현저하게 줄어들고 있기 때문에, 골방에 틀어박히거나 아니면 새로운 세상을 공상하거나 하는…… 그래서 정서로서는 환멸, 페이소스, 작은 형태의 유머 같은 것들이 나오는 게 아닌가 합니다.

최원식 저는 루카치의 영향을 받았지만, 루카치 형의 소설만이 유일한 답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루카치의 소설론에도 네가지 유형이 나오잖아요. 도전하는 주인공만 나오는 건 아닙니다. 달라진 시대에 달라진 이야기가 나와야 하는 건 당연한 얘기겠지요. 21세기를 놓고 볼 때, 이미 말씀드렸듯이 우리 장편은 이중 또는 삼중 과제를 안고 있어요. 그런 점에서 저는 최근 작품들이 당연히 변모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옛날 것 재탕하면 식상하죠. 장편소설의 역사란 새로운 이야기의 제출사입니다. 새로운 이야기틀이 제시되어야 한다는 말이죠. 예컨대 『만세전』의 획기성은 지겨운 삼각관계 이야기틀로부터 여행하는 주인공의 도정을 따라 당대의 핵심적인 쟁점들이 토론되는 새로운 이야기틀을 제출한 데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최근 문학이 옛날 이야기틀을 그대로 반복한다면, 이거야말로 소설의 죽음이죠.

 

30년대 소설론이 오늘에 말해주는 것들

 

그런데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최근 소설이 보여주는 이같은 환멸을 본격적 화두로 삼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비평가들이 이런 현상에 대해 그냥 죽음이라고 편하게 이야기하면서 은근히 찬미하거나 또는 과거의 어떤 관점으로 그냥 비판만 하는 방식을 넘어 논의를 일으켜세웠으면 좋겠어요. 그래서 저는 30년대의 장편소설론들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이런 현상을 놓고 작가와 비평가 들이 모두 달려들어 고민해 새로운 작품이 나왔던 30년대와 달리 최근에는 이같은 경향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가 없는 것이 더욱 우려스럽습니다.

사실 30년대도 소설의 위기 속에서 장편논의가 본격화했거든요. 20년대는 물론 중간에 프로문학의 도발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리얼리즘소설이 정립되는 도정이었는데, 세계대공황을 모태로 태어난 30년대에 들어서면서 (사회주의)리얼리즘이 흔들립니다. 자본주의의 전반적 위기의 폭발로 보였던 대공황이 세계혁명 대신 자본의 부활로 귀결되는 역전 속에서 30년대 소설은, 임화(林和)가 날카롭게 진단했듯이 이상(李箱)의 심리소설과 박태원(朴泰遠)의 세태소설로 분열합니다. 말하려는 것과 그리려는 것, 즉 주관과 객관의 분리가 뚜렷해지면서 임화는 그 통일을 지향하는 본격소설의 건설을 대안으로 제시합니다. 저는 임화의 진단에는 동의하지만 그 처방은 너무 정통적이라고 생각해요. 이 점에서 오히려 김남천(金南天)의 작업이 중요하다고 봐요. 그는 새삼 예수를 배신한 유다를 진지하게 문제삼음으로써 맑스주의 자체를 대상화합니다. 임화와 달리 남천은 이론신앙으로 수용된 맑스주의를 신앙이 아니라 대결의 대상으로 봤어요. 30년대의 임화도 교조주의자가 결코 아니지만, 결국 사상의 모험을 최후까지 밀고 나가지 못했다는 점에서 남천의 작업이 중요하다 생각하고요.

서영채 김남천이라면 자기고발, 자기비판 같은 것, 작가 스스로의 자성을 촉구하는 게 중요하다는 말씀이신가요?

최원식 단순히 자기반성만은 아니고요, 핵심은 신앙처럼 받아들였던 맑스주의 자체를 요새 말로 하면 해체까지 해보자 하는 면이 남천에게는 있었죠. 그래서 30년대의 여러가지 이론작업들이 이와 맞물리면서, 다양한 소설론들이 토의되고 그에 기반한 새로운 장편들이 실험되었습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30년대의 이러한 이론적 노력과 그에 부응하는 창작적 실천들이, 해방이라는 조건 속에서 정치에 휩쓸려들어가면서 사라진 점입니다. 30년대의 고투 속에서 탐구됐던 이론적 모색이나 소설적 실험들이 일거에 무로 돌아가니, 그게 제일 아까워요.

한국사회는 이게 문제예요. 갑작스럽게 내습하는 정치 속에서 모든 중요한 싹들이 사라지는 것 말이죠. 그것이 다시 복원되기 시작한 것이 4월혁명이었죠. 그런데 70년대에는 바로 장편으로 못 갔어요. 그 대신 중편시대를 열었다는 게 흥미롭습니다. 단편 중심에서 중편으로 가는 한편, 연작소설도 나왔어요. 황석영의 「객지」나 「한씨연대기」 같은 중편, 이문구의 『관촌수필』,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같은 연작소설들…… 장편으로 가는 소설적 체력을 회복하는 중간단계가 70년대였죠. 80년대는 카프(KAPF)가 풍미한 20년대 후반 또는 해방 직후와 비슷한 점이 있다고 생각해요. 광주항쟁을 압살한 신군부의 등장과 함께 혁명적 낭만주의가 우리 문학을 휩쓸면서 진보문학을 통어하게 됨으로써 70년대의 새로운 실험적 싹들이 제대로 이어졌다고 보이지는 않아요. 당시 분위기를 말해주는 일화가 있어요. 일본 지식인들이 자기네는 맑스주의가 다 사라져가는데 한국에서 크게 번성한다는 것에 깜짝 놀라서 뭔가 있나 보다 하고 봤다는데, 그 실상이 거의 팸플릿 맑스주의, 교리문답식 맑스주의라는 것을 보고 한번 더 놀랐다고 해요.

서영채 이를테면 김영하의 장편 『빛의 제국』이 그런 걸 다루고 있는 거죠.

최원식 가만히 보니까 80년대를 휩쓴 혁명적 낭만주의라는 게 한편으로 해체적이었어요. 창비와 문지라는 계간지, 70년대 문학이라는 아버지를 신군부가 죽이면서 민중문학의 이름으로 탈중심적 해체가 작동하기 시작했다는 느낌도 들어요. 신군부정권은 정치적으로는 폭압적인데, 생활세계에서는 통금해제로 대표되듯이 해금을 단행했어요. 전두환이 좋아서 한 게 아니라 그러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라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박정희시대의 경제적 성공으로 생활세계의 재조직이 불가피한 시점에 도달해 더이상 구시대적 통제가 불가능한 때가 온 거죠. 일상의 혁명이 일어난 시대입니다. 컬러TV를 살지 말지 고민한 기억이 나네요. 컬러TV를 사는 것이 전두환을 승인하는 것이 되는 시절이었어요.(웃음) 80년대 정치적 급진주의의 겉을 벗기면 생활세계의 혁명적 변화에 연동되는 문화열(熱) 같은 게 용틀임치고 있었지 않은가 합니다. 그럼에도 80년대는 물론이고 90년대도 민주화가 문제였던 시기이기 때문에 문학에서도 이중과제에 대한 긴장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개혁정부의 연속이 오히려 정치적 환멸을 심화시키는 반어 속에서, 우리 장편소설이 급진주의의 귀결이 손잡기 쉬운 체념으로 경사하는 경향으로 자리잡게 된 것이 아닌가 합니다.

서영채 1930년대부터 80년대, 90년대까지‘진보문학’을 중심으로 말씀하셨는데요. 30년대만 하더라도, 김남천, 임화, 최재서(崔載瑞) 들이 어떻게 새로운 장편이 가능할 것인가라는 논의를 하고 있을 때에도, 작가들은 그냥 계속 쓰고 있었지요. 이런 논의를 하는 것도 나름대로 중요하지만, 그와 상관없이 그냥 나는 쓴다는 자세로, 이를테면 염상섭적인 자세로 써나가는 것 또한 중요하지 않나 싶습니다.

최원식 염상섭은 그냥 쓴 사람이 아니죠. 그는 근대성에 충실하면서도 현대성, 즉 자신이 딛고 사는 당대사회와 끊임없이 소통하려 했던 진정한 소설가입니다.

서영채 프로죠.

최원식 소설가는 남의 말을 그대로 믿으면 안되거든요. 어떤 것이든 자기가 나름대로 대결하지 않고서는 자기 것으로 삼지 않는 작가가 진짜 소설가거든요. 시인들은 감옥에 가도 소설가들은 안 간다구요.(웃음) 우리가 횡보(橫步)를 가지고 있었다는 건 정말 행운이에요. 그는 중간파에 철저했는데 아마 우리 작가 중에서 맑스주의에 대한 이해가 가장 깊었을걸요. 그런데 모더니즘 쪽은 아닌 것 같아요.

서영채 감수성이 다르다는 말씀이죠?

최원식 사회주의는 끊임없이 의식하는데, 모더니즘에 대해서는 무심해요. 모더니즘의 세례를 너무 받지 않은 게 횡보의 한계일지도 모릅니다. 리얼리즘 장편소설에 대한 두가지 도전에서 염상섭은 한쪽이 약해요. 두 도전 모두에 응전했다면 더 대단한 장편을 낼 수 있었을지도 몰라요.

 

최근 장편소설들의 몇가지 흐름들

 

서영채 이렇게 정리할 수도 있겠습니다. 환멸의 정조가 짙게 깔려 있던 때는 90년대 초중반 정도였고, 새로운 흐름이 나타나는 게 윤대녕, 신경숙, 은희경, 장정일 같은 작가들에게서가 아니었나 싶고요. 80년대까지는 새 세상을 만들어보자는 파토스가 아주 컸고, 어떤 방식으로든 그것을 직접적으로 소설에 드러내거나 아니면 우회하더라도 그것이 가장 중심적인 동력으로서 존재했다면, 90년대는 반대 극단으로 갔고 그것을 폭넓게 환멸의 정조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네요. 90년대 중반 이후로는 새 흐름이 나타나 그 연장에 있는 최근의 젊은 작가들에 의해 뚜렷해져 있습니다. 그게 아마 새로운 변곡점이 아닌가 싶은데요. 환멸이 아주 침중하고 무겁고 또 나름의 진지성을 가지고 있는 거라면, 거기서 한 층을 살짝 띄워놓은 게 최근의 소설적 경향이 아닌가 합니다.

이 새로운 경향을 다시 크게 세가닥 정도로 정리할 수 있지 않나 싶습니다. 우선 90년대의 정서와는 조금 다른 흐름을 보여주는, 새로운 시대의 감수성이라고 할 만한 작품들이 있습니다. 박민규의 『핑퐁』, 천명관의 『고래』, 조하형의 『키메라의 아침』, 김언수의 『캐비넷』 같은 작품을 예시할 수 있겠죠. 그리고 다른 하나는 탈냉전시대로 통칭될 수 있는 사회적·역사적 분위기를 반영하고 있는 소설들, 이를테면 김영하의 『빛의 제국』, 강영숙의 『리나』, 천운영의 『잘 가라, 서커스』 같은 작품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세번째 흐름으로는, 중요한 사회적 메씨지, 말하자면 문학의 죽음이라고 했을 때 가장 핵심적인 게 사회성의 상실이 아닌가 싶습니다만, 어떻든 단순한 엔터테인먼트만이 아니라 그 어떤 사회적 메씨지를 가지면서도 또한 동시에 독자들도 놓치지 않겠다는 태도를 보이는 일군의 소설들이 있습니다. 공지영의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박현욱의 『아내가 결혼했다』, 정이현의 『달콤한 나의 도시』 등이 그런 예가 아닐까 합니다.

그리고 이런 가닥과는 별도로, 새로운 스타일의 역사소설들이 대두된 것도 우리 시대를 이야기할 수 있는 중요한 지표가 아닌가 싶어요. 기왕의 역사소설들을 보면 크게 두가지 가닥일 텐데, 하나는 이른바 사담(史談)류로 역사 자체의 흥미를 보여주는 소설이 있었고요, 또 하나는 작가 자신의 이념이나 역사에 대한 전망이 역으로 투사되어서 비유적 혹은 알레고리적으로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가닥도 있었습니다. 이에 비해 최근에 등장한 새로운 스타일의 역사소설들은 이런 두 흐름과는 다른 모습을 지니고 있지요. 김훈의 『칼의 노래』에서부터 시작하여 황석영의 『심청』, 김영하의 『검은 꽃』, 성석제의 『인간의 힘』 등이 있고, 김연수와 신경숙까지 이런 흐름에 합류하고 있지요. 아마도 뉴에이지 역사소설이라 할 수 있을 텐데요, 역사가 이제는 이념이나 흥미의 차원이 아니라 서로 다른 스타일의 개성과 상상력의 차원에서 미적인 것으로 전유되고 있는 것이 흥미롭게 느껴집니다. 이런 흐름들을 놓고 구체적인 말씀을 나눠보도록 하겠습니다.

대담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김영하의 『빛의 제국』, 박민규의 『핑퐁』, 정이현의 『달콤한 나의 도시』 세 작품을 주로 논의하는 것으로 정리됐는데, 우선 『빛의 제국』은 어떻게 읽으셨는지요?

최원식 김영하의 전작 『검은 꽃』에 이어 『빛의 제국』도 잘 읽었어요. 저 정도 규모의 소설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긴장을 고르게 유지한 점을 높게 평가합니다. 잊혀진 스파이 김기영이 북으로 귀환명령을 받은 뒤 벌어진 하루 동안의 일을 그린 이 소설은 한국판 『율리씨즈』입니다. 그런데 겉으로 보면 사실적인 소설기법을 충실히 따르고 있는데, 실은 그게 아니더라고요. 세부를 정밀하게 재현하는 것을 통해서 재현 자체를 의심하는, 재현된 현실이야말로 환영에 불과하다는 것을 은밀히 환기하는 독특한 서사전략을 구사하고 있죠. 그 점에서 새로운데, 제목‘빛의 제국’이 가리키듯 르네 마그리뜨의 작업과 호응하는 것이라 낯설지 않기도 합니다.

 

한반도라는 매트릭스의 변화 가능성

 

이런 관점으로 남북의 현실을 해체하는데 재미있어요. 이중으로 살아가는 스파이 또는 간첩을 환영적 존재로 파악하니까 그럴듯해요. 남파공작원들을 교육하기 위해 평양 지하에 만들어놓은 거대한 남한거리 얘기와, 영화와 가곡을 너무 좋아하는 김정일이 북한 전체를 영화쎄트로 만들어버렸다는 지적 등, 작가는 북한과 북한사람들을 해체합니다. 남한도 예외가 아닙니다. 강남을 거대한 콘크리트 괴물이라고 지적하는 대목에서 작가는 남한도 사실은 자본으로 만들어놓은 압도적 환영에 불과하다는 메씨지를 전달합니다. 이 세상이라는 게, 단단하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 현실이라는 게 환영이고, 여기 사는 사람들도 유령적 존재라는 사실을 강하게 환기하고 있습니다. 매트릭스죠. 그런데 작가가 불교를 끌어들이는 게 흥미로워요. 아상(我相), 즉 이‘나’라는 상이라는 게 말짱 헛것이다라는 공관(空觀)과 연관짓습니다. 여기서 아쉬웠던 게 불교적 사유가 지극한 경지까지 나아가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사람들은 처음에 색계(色界), 즉 눈에 보이는 물질적 현실을 그대로 수용하는 세간의 경지에 매입니다. 그 색이 기실 비어 있다는 깨달음, 즉 공관에 투철하면 그다음 출세간(出世間)의 경지로 옮겨가는데, 이 작품은 거기에 머물렀어요. 그다음 단계인 출출세간(出出世間)의 경지, 색즉시공까지는 가지 못했어요. 세간의 유혹과 그 유혹을 부정하는 공관 사이의 긴장만 있지 또 한단계 도약하는 경지가 부족해요. 그러니까 겉으로는 분단을 다뤘는데, 분단을 빙자해서 사실은 뻔한 존재론적인 물음을 농하는 작품이라는 생각입니다. 무슨 통일교향곡으로 결말을 끌어가라는 것이 아니라 통합의 가능성에 절망하면서도 균열을 넘어서는 고투가 부족합니다.

이 소설이 자본주의의 일상으로 복귀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은 상징적입니다. “현미는 (…) 온몸을 비틀며 기지개를 켰다. 정신이 훨씬 맑아지면서 몸속 깊은 곳에서 솟구치는 강렬한 힘을 느꼈다. 걱정하지 마. 뭐든, 잘될 거야.”(391면) 그 딸아이의 독백은 고리오 영감을 묻고 안개에 잠긴 빠리 시내를 바라보면서 라스띠냐끄가 “이제는 빠리야, 너와 내가 대결해야 할 차례다!”라고 말하는 발자끄의 소설 대목을 연상시키는데, 그 희망의 메씨지는 소설을 끝내기 위한 포석이지 소설적 맥락의 자연스런 귀결에 의한 게 아니라고 보여요. 요컨대 낯설되 낯설지 않은 이 작품은 최근 소설의 곤경을 잘 보여줍니다. 「매트릭스」, 르네 마그리뜨, 「간첩 리철진」, 불교까지 동원된 이 장편은 그가 구사한 해체전략에도 불구하고 그 환영의 현실이 좀체 변화되지 않으리라는 체념을 드러냅니다. 작품 곳곳에 스멀거리는 환멸은 최근 소설을 먹어가고 있는 괴물입니다.

서영채 이 작품에는 세개의 시선이 계속 병치되고 있죠. 간첩의 시선과 아내의 시선, 딸아이의 시선이 나란히요. 만 하루 동안에 한사람의 존재가 거의 뒤집어질 듯한 사건이 있었는데, 종래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딸아이의 시선으로 보자면, 아빠와 엄마가 부부싸움이라도 한 모양이다,라는 정도로 끝나버리거든요. 여러가지 맥락에서 이야기할 점들이 많아 보입니다.

일차적으로 이 소설은 업그레이드된 후일담소설이 아닌가 싶었습니다. 제대로 주체사상 교육을 받은 간첩이 넘어와서 새롭게 남한식 주사파 교육을 받는 아이러니와 역설 들이 밑에 깔려 있고, 이제는 분단이라는 상황이, 형식적으로는 아직 분단상황에 있지만, 실질적으로는 문제되지 않는 그런 현실이 도래했다는 점이 부각되고 있지요. 주인공 간첩이 전철칸에서, 탈북해서 한국으로 들어온 초등학교 동창을 우연히 만나는 대목도 있는데, 그런 대목에서도 리얼리티가 느껴졌습니다. 아, 이럴 수도 있겠구나. 이제는 실질적으로는 분단이 문제가 되지 않는 그런 시대가 되어버렸다는 것이…… 그리고 또 하나는 이 소설이 표면적으로는 귀환명령을 받은 불쌍한 고정간첩 이야기이고, 그런 간첩의 이야기 자체는 「간첩 리철진」에도 비슷한 경우가 있었던 터라 그 자체로 새롭다 할 것은 없지만, 아까 최선생님도 존재론적이라는 표현을 쓰셨는데, 말하자면 이 소설을 관통하고 있는 것은 마치 시한부인생을 선고받은 한사람이 자기의 40년 넘은 인생을 쭉 회고하는 시점 같은 게 아닐까 싶어요. 그런 시점이 주는 서늘함이 소설의 배면에 깔려 있고요. 그것도 참 좋아 보였어요.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세상대로 요지부동으로 남아 있을 것이고 또 좋아질 거라고 생각하는 시선, 존재의 전복감을 경험하는 간첩과 아내 바깥에 있는, 말하자면 그들의 딸의 시선이나 작품 전체에서 풍기는 느낌이라 할 그런 시선의 존재가 흥미로웠습니다. 그런 게 뭐가 중요해, 무슨 문제가 있어, 중요한 건 일상이고 앞으로 나아가야 할 길이 남아 있을 뿐이야,라는 식으로 끝나는 것에 대해서도 상당히 공감할 수 있었습니다. 소재적인 측면에서 80년대라면 생각하기 어려웠을, 90년대에도 제대로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이야기들이 전개되고 있다는 점에서도 이 작품의 가치를 평가할 수 있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이영균

ⓒ이영균

 

또 이런 맥락에서라면, 탈북한 여자아이가 구체적인 지명은 밝혀져 있지 않지만 태국이나 중국쯤 되는 곳에서 고생하는 이야기를 다룬 강영숙의 『리나』 같은 장편이나, 연변에서 한국으로 시집와 비극적 운명에 처하게 되는 여성을 다룬 천운영의 『잘 가라, 써커스』 같은 소설도 함께 이야기할 수 있지 싶은데, 이런 소설들이 아마도 2000년대 소설의 새로운 서사적 지평 하나를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박민규의 『핑퐁』도 같이 이야기하면 좋지 않을까요? 박민규가 참 괴물 같은 작가인데, 『핑퐁』이라는 소설이 왕따 이야기잖아요. 얼마 전 미국에서 총기난사 사건이 있었지요? 그래선지 대담을 위해 다시 읽으면서 이 소설이 더욱 새로운 감각으로 다가왔는데요. 선생님은 어떻게 읽으셨나요?

최원식 서교수부터 말씀해보시죠.(웃음)

 

구원의 가능성을 탐문하는 경쾌한 상상

 

서영채 저야 물론 재밌게 잘 읽었지요.(웃음) 김영하의 『빛의 제국』에 나왔던 딸아이의 시선은 환멸적인 정서의 무거움에서 벗어나 있습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니 당연하겠지요. 비록 3분의 1이긴 하지만, 요는 그런 시선을 배치해놓은 작가의 의중이 중요한 게 아닌가 합니다. 환멸이 없으니 냉소 같은 것도 있기 어려운데, 최근에 제가 읽은 어떤 글에서는 『핑퐁』이 냉소가 지나치다, 이런 건 문제다,라고 말하는데, 그렇게 보는 것은 좀 지나치다 싶어요. 냉소라기보다는 짙은 페이소스라 해야 하지 않을까요. 인류 대표와 탁구를 쳐서 결과에 따라 여태까지 인류를 발생시켰던 프로그램을 언인스톨할 수도 있다는, 말도 안되는 이야기를 말이 되게 서사적으로 풀어내는, 이런 유형의 소설들이 가지고 있는 발랄함과 경쾌함 같은 것이 새로운 감수성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이런 감수성에 입각한 소설들이 『핑퐁』뿐 아니라 천명관의 『고래』나 조하형의 『키메라의 아침』, 최근에 나온 김언수의 『캐비닛』 등이 아닐까 싶은데, 그런 점이 저는 흥미로웠습니다.

최원식 저도 재밌게 봤어요. 김영하의 『빛의 제국』이 겉으로는 사실적 기법에 충실한 것처럼 보이는 것에 비하면 박민규의 『핑퐁』은 대놓고 사실주의적 기율에서 자유롭죠. 그런데 이 작품이 겉으로는 냉소적인 듯해도 속으로는 굉장히 진지해요. 『빛의 제국』에 이런 진술이 나오죠, 자본주의의 엄혹함을 깨닫고 그 세계로 기꺼이 투항했다. 『핑퐁』은 세상을 끌고 나가는 것은 2%의 인간이다,라고 말합니다. 대중과 엘리뜨의 분리가 이미 고정된 이런 세계의 변경이 가능한가, 이 작품은 그 문제를 집요하게 사유합니다. 탁구나 탁구계나‘랠리’라는 가게를 통해서 구원의 가능성을 실험하는데 구원의 불가능성에 대한 차디찬 체념만은 아닌 것 같아요.

작년에 강동호(康棟皓)라는 대산대학문학상 평론상 받은 젊은 친구가 재미있는 지적을 했는데, 박민규 소설에서 처음으로 두 사람이 주인공이래요. 탁구를 대화로 파악하는 대목이나 세끄라탱이 주인인‘랠리’역시 뭔가 새로운 사회의 구상이거든요. 이 작품이 기존의 박민규 소설과 다른 새로운 사회성 또는 새로운 기획을 향해 움직이고 있다는 점을 평가하고 싶어요. 그렇긴 한데, 이 작품에 들어 있는 존 메이슨의 「방사능 낙지」라는 소설 속 소설은 좀 부적절해요. 소설 뒤표지에 실린 백낙청의 지적이 재미있어요. “줄거리로만 연결된 작품도 아니려니와 줄거리를 떠나 입심으로만 끌고 가는 소설도 아니”다. 이 소설은 확실히 줄거리를 중시하는 전통 사실주의를 해체하고 있는데, 전체적으로 보면 줄거리가 아주 없는 것도 아니거든요. 그럼에도 결국에는 입담이 줄거리를 이겨내는 소설이죠. 줄거리소설로 돌아가라고 주문할 수 있지만 그렇게 주문한다고 해서 그렇게 가지도 않으려니와 그게 또 우리 소설의 새로움을 개척하는 일이라는 생각도 안 들어요. 그러나 이런 생각은 들어요. 이 작가가 이런 식으로 다음 소설을 또 쓸 수 있을까, 그렇게 보면 결국은, 입담과 줄거리의 균열을 마주보면서도 우리 시대의 한국사회에 걸맞은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내야 하지 않을까.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낸다는 것은 구원의 가능성을, 구원의 문제를 새롭게 구성할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와 관련이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서영채 김영하의 간첩이 결국 남한을 벗어날 수 없었던 것처럼, 『핑퐁』을 읽으면서 감정이입이 되어 안타까웠던 것은, 왕따당하는 두 중학생이 계속 얻어맞으면서, 오히려 맞는 것을 즐기는 것처럼, 학교폭력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상태를 소설이 끝날 때까지 시종일관하고 있다는 것, 그냥 망치에 얻어맞는 못처럼 이렇게 시종일관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큰 틀에서 이야기하자면 현실적 정황에 대한 반영이 아닐까 싶습니다. 만약에 거기서 벗어나는 영웅이 된다든지, 곤경에 빠져버린 고정간첩이 제3의 새로운 가능성을 찾아내 새로운 세계를 보여준다든지 하는 것은, 말하자면 소설이 아니라 서사시적인 환각이 아니겠나 싶어요. 앞에서 양극화가 고착된다거나 한국사회 신분변동의 탄력성이 줄어들고 있다고 했던 것과 같은 맥락이지요.

장편소설이 가지고 있는 두가지 요처(要處)가 있다면, 하나는 서사의 육체를 어디서 끌어오느냐 하는 설득력있는 디테일의 문제이고, 또 하나는 서사의 큰 틀을 만들어내는 힘의 문제일 텐데, 후자는 아마 세계관의 차원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런 측면에서 본다면 『핑퐁』의 서사적 육체는 학교폭력의 문제고, 그 얻어맞는 이야기가 참 딱하지요. 이렇게까지 얻어맞아야 되니, 좀 벗어날 수는 없겠니,라는 느낌이 들 정도로요. 여기까지가 디테일의 차원이라면, 그럼 어떻게 할 것인가, 이런 물음에 대답하는 것이 세계관의 문제이겠습니다.

그런데 『빛의 제국』도 그렇고 『핑퐁』도 그렇고 다루는 소재에 비해 분위기가 훨씬 더 가볍지요. 어둡고 칙칙하고 괴롭기보다는 산뜻한 쪽에 가깝고 어떤 데서는 명랑하기까지 합니다. 마조히즘의 활기가 느껴질 정도로. 너무 맞았다, 이거 진짜 아팠다 하는 식의 피학적인 유머까지도 발휘되곤 하는데, 거기 깔려 있는 짙은 페이소스가 결국은 양극화로 고정되어가는 한국사회의 실상에 대한 반영이지 않을까 해요. 어떻게 다음 세계로 나아갈 것인가에 대한 대답은 고사하고 질문에 대한 탐색의 동력조차 쉽게 찾아낼 수 없다는 작가의 짙은 페이소스가 스며 있는 것이죠. 김영하는 김영하의 방식대로, 박민규는 박민규의 방식대로. 말하자면 그런 운명과 더불어, 그렇다고 괴로워하고 절망하며 환멸의 분위기 속에 갇혀 있을 수는 없고, 그래서 그런 힘들과 더불어서 유쾌하게 댄스를 한판 추는, 그런 소설이 『핑퐁』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작가 입장이라고 해도 결론은 이 정도가 최선이지 않을까 싶어요. 확 세상을 완전히 갈아엎읍시다, 이게 불가능하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세상을 언인스톨하는 공상과 더불어서 이런 정도로 변죽을 울리면서, 현실과 한판 춤을 춰주는 것이 현재의 장편서사의 현실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런 점에서 저는 두 작품 모두 굉장히 좋게 읽었습니다.

최원식 저도 그 부분은 대단한 성과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모아이가 부잣집 아이잖아요? 못은 가난한 집의 아이이고요. 그 조합이 재밌어요. 톰 쏘여와 허클베리 핀의 결합을 상기시키는 모아이와 못의 조합은‘난쏘공’의 분위기와 중첩되기도 하는데 뭔가 이 작가가 새로운 지점에 와 있다는 느낌이 들어요. 다음 작품이 궁금해요.

 

사회적 모럴을 질문하는 소설들

 

서영채 『핑퐁』을 읽으면서 또 하나 흥미로웠던 것은, 최소한 90년대 중반까지는 소설이 말하자면 교양적인 읽을거리로서 혹은 청소년들을 위한 철학교과서나 역사교과서로서, 사회성을 환기하고 문제들을 제기해주는 역할을 해왔지요. 지금도 여전히 이런 역할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문학교육 현장에서 책을 권하거나 읽힐 때는 단순히 재미있는 이야기로는 곤란하고, 뭔가 의미있는 이야기라고 말해줄 수 있어야 하지요. 요컨대 박민규의 영리함은 학교폭력이라는 테마를 끌고 나왔다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그런 면에서 보자면 우리 사회가 가지고 있는 여러가지 구체적인 문제들에 대한 형상화, 현행 씨스템의 변혁 가능성에 대해서 꿈꾸기보다는 그 안에 존재하는 마이너리티의 문제를 제기하는 것도 나름의 의미를 가질 것이고, 이런 측면에서 보자면 독자들을 도외시하지 않으면서, 또 한편으로는 사회적으로 제기할 수 있는 주제의식이나 메씨지의 측면도 잃지 않는다는 게 중요하지 않을까 합니다.

정이현의 『달콤한 나의 도시』나 박현욱의 『아내가 결혼했다』 같은 작품들도 단순한 세태소설이 아니라 사회적 모럴의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 작품이라 할 수 있고, 공지영의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처럼 사형제 폐지 같은 사회적 문제들을 제기하면서도 또 한편으로 독자들과 함께 간다는 측면에서 서사적인 흥미나 감동의 드라마도 놓치지 않는 경향들도 중요하지 않을까 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달콤한 나의 도시』 같은 작품을 볼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최원식 그렇긴 해도 『핑퐁』이 단순히 마이너리티의 문제만은 아닌 것 같아요. 학교폭력을 통해서 지금 세상의 완강함을, 탁구를 통해서는 새 세상의 가능성을 묻어두고 있잖아요. 학교폭력이나 탁구라는 작은 소재에서 세계 전체에 대한 해석 가능성을 암시하고 있어요. 좋은 소설이란 가장 비천한 현실 속에서도 가장 고결한 인간적 진리를 끌어올리잖아요? 아주 일상적인 것, 아주 자잘한 것 속에서 새로운 세상도 보아내는 것이니까요. 아무리 시대가 달라져도 뛰어난 작품들이 짚어내는 지점들은 공유적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정이현의 『달콤한 나의 도시』를 읽기 전에는 이 소설에 굉장히 파격적인 뭔가가 나오는 줄 알았어요. 그런데 뜻밖에도 매우 낯익은 소설이더군요. 이번에 다룬 세 장편들도 대체로 그 새로움이라는 게 조금 과장된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어요. 물론 새롭지만 앞시대와 완전히 단절되어 있는 것 같지는 않고, 특히 『달콤한 나의 도시』는 소설기법으로는 전통적인 사실주의 기율에 가장 가까운 소설로 보여요. 다루는 주제도 결국은 연애와 결혼과 가족이라는 문제예요. 아주 낯익은 구도죠. 박완서 장편 『휘청거리는 오후』가 세 딸들 얘기라면 이 작품은 세 여중동창들 이야기니까 상통하지요.

 

도시적 감수성 속에 존재하는 우회의 전술

 

물론 새로운 면이 있어요. 젊은 여성들의 연애와 결혼의 어려움을 통해서 연옥 같은 도시적 삶에 포획된 젊은이들의 생태가 아주 생생하게 드러나요. 연옥에 기꺼이 뛰어들게 만드는 도시적 삶의 마성, 그 거부할 수 없는 매력, 도시적 모험이 몸에 밴 그들은 과연 그 마성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작가는 이 문제를 잡아내고 있습니다. 만만치 않은 주제인데 결말은 이 즐겁고도 지겨운 모험을 지속할 수밖에 없다는 거지요.

그런데 은수의 결혼상대자 김영수의 설정이 너무 작위적인 거예요. 결혼을 안 시키려고 작정한 설정이죠. 박경리의 『토지』를 보면 정상적인 부부가 하나도 없잖아요. 그것처럼 작가 정이현은 의도적으로 어떤 결말을 만들어놓고 김영수를 작위적으로 설정했는데, 그 부분이 억지스러웠어요. 그래서 결국 모두 결혼에서 자유로워진 세 여성이 종작없이 떠드는 마지막장에 이르면 명랑소설처럼 되어버려서 안타까워요. 결혼이나 가족이라는 문제를 이처럼 회피해서는 곤란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무지스럽게 얘기하면 정면으로 맞서야 한다는 겁니다. 물론 좋은 세상에는 가족이 없다잖아요? 가족이 사유재산의 기원이라는 점에서 이상사회에는 결혼도 없고, 따라서 가족도 없죠. 그렇지만 그전에는 결혼이나 가족이라는 문제를 회피할 수 없어요. 가족의 대안적 형태는 무엇이며 어떠한 결혼을 꿈꿀 수 있는가 하는 문제를 진정으로 대면하고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요?

서영채 작품 속에 존재하는 어떤 회피의 지점에 대해서 말씀하셨는데 저도 공감합니다. 저는 이 작품을 한 호흡에 죽 읽었습니다. 읽다 보니 또 슬쩍 감정이입이 되어서, 주인공이 좋은 남편감과 결혼 잘해서 좀 잘살았으면 좋겠다 싶었습니다. 세가지 선택사양이 있죠. 장래성은 없지만 낭만적인 나이 어린 애인. 오은수 같은 영리한 주인공이라면 절대로 잡지 않을 테죠. 다음은, 늘 곁에 있지만 결코 배우자가 될 수는 없는 그냥 친구 같은 남자. 그리고 좀 감각이 처지긴 하지만 진짜 괜찮은 신랑감 김영수. 그런데 계속 복선이 깔렸죠, 뭔가 좀 이상한 사람이라고. 그래서 저는 김영수가 게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었어요. 막판에 가면, 굉장한 전과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변성명을 하며 사회생활을 하는 부적격 인간이라고 나왔는데, 그 점이 좀 부자연스럽다는 점에 저도 동감입니다.

그런데 재밌는 것은, 이 소설과 유사한 발상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박현욱의 『아내가 결혼했다』 또는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같은 작품들도 어떤 회피의 지점을 지니고 있다는 거였습니다. 예술로서의 소설이라면 독자들은 불편하게 만들어야 하거든요. 그런데 독자들에게 불편함을 준다는 것은 문제의 핵심에 정면으로 돌입하는 방식일 텐데, 그런 방식이라면 서사의 어떤 균형감각을 깨버려야 하거든요.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의 경우, 사형선고를 받은 죄수가 있는데, 만약 예술로서의 소설, 사람을 불편하게 만드는 소설이라면, 악의 근원에 대해서,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절대적 타자로서 존재하는, 그래서 사형으로 격리할 수밖에 없는 어떤 악의 근원에 대해 추급해야 하는 거죠. 악의 근원은 무엇인가, 저는 사실 그게 궁금했거든요. 그런데 작가는 우회하는 길을 선택합니다. 이 사람이 사형수가 된 것은 개인적인 사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사정은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이를테면 나쁜 짓을 하다가 개심하고 결혼을 했는데 아내가 임신중독증이다, 수술비가 필요했다, 그래서 마지막 한건 하려다가 사고가 난 것이다,라는 식으로 처리되어 있거든요. 소설을 읽으면서 내가 원하는 것은 이런 게 아니다 싶었지만, 그런데 소설의 큰 얼개에서 보면, 가령 사형제 폐지라는 테마를 놓고 얘기한다면, 가장 핵심적인 것은 잘못된 판결의 가능성이라는 문제일 테고, 독자들에게도 제일 설득력있는 이야기가 되겠죠. 어떤 형태로건 한 인간을 죽일 권리가 있느냐 하는 것은 좀더 본원적인 문제이죠. 더 본질적으로 들어가자면 악이란 무엇인가, 우리가 절대적 타자로 규정하는 악이란 무엇인가 하는 단계까지 가는데 이 단계까지 간다면 굉장한 거죠. 그러나 공지영은 거기까지 가지 않습니다. 그리고 박현욱의 『아내가 결혼했다』에서도 한 여자와 두 남자의 새로운 결혼관계를 제시하는데, 이게 어떻게 한국사회에서 가능한 것이냐는 반문에 부딪히죠. 결국 소설에서는 이민을 보내거든요. 회피해버린 것이지요.

정이현 소설에서도 비슷합니다. 서른한두살이 된, 대충 직장생활을 하고 있는 처녀가 결혼을 한다면 김영수 같은 남자가 그래도 괜찮은 신랑감이겠지만, 여기서 결혼과 가족의 모럴을 본원적으로 문제삼는다면 사실은 이것도 아니지요. 다른 방식으로 처리를 해야지요. 그럴 수 없다는 게 이런 소설의 한계가 아닐까요. 말하자면 그런 회피의 지점이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은, 독자들과 눈높이를 맞추어나가면서 사회적으로 다시 한번 생각해봄직한 문제들을 환기하고 그런 방식의 메씨지를 전달하려고 하는 소설들에 본원적으로 부여된 일종의 장르적 한계이지 않을까 합니다.

 

작가와 독자, 길항하는 동반자

 

최원식 요새 작가들은 독자를 뺏기고 있기 때문인지 독자를 굉장히 의식하는 것 같아요. 장르의 기율도 기율이지만, 독자를 의식하는 데서 오는 제한도 함께 있는 것 같아요.

서영채 프로작가라면 마땅히 그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예술가라면 자기가 하고 싶은 얘기를 하는 것이지만, 만약에 프로 이야기꾼이라면 내가 하고 싶은 얘기보다는 독자들이 원하는 얘기들을, 그 수준과 층위가 다양하겠지만, 어느 수준의 독자가 어느 수준으로 원하는 것이냐를 의식해야겠지요. 어느정도까지는 독자들의 눈높이를 배려하고 그에 맞춰나가면서 얘기를 하는 것 또한 중요한 일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독자의 요구란 사회의 요구이기도 하니까요.

최원식 물론 당연히 그래야 하는데, 현실 독자들에게 맞춘다는 게 소설에 상처를 줄 수도 있죠. 본원적인 문제제기를 하는 작품이 더 독자들을 잡을 수도 있다는 점에 대해서도 생각해야지요.

서영채 90년대까지만 해도‘2만 독자’라는 개념이 있었다고 합니다. 90년대의 대표적인 작가 몇몇에 대한 독자들을 두고 했던 말이었는데, 문지 시인선이 아주 활발하게 살아 있었을 때 그 시집을 샀던 독자들이라고도 합니다. 그런데 그 2만 독자나 2만부 작가라는 개념이 이제는 해체되어버렸다고 합니다. 고유한 문학독자라고 할 수 있었던 독자그룹들이 해체되어버린 게 2007년의 현실이 아닌가 합니다. 출판계 쪽에서는 한국문학에 대해, 우리 독자들을 계속해서 다른 데 뺏기고 있다, 일본소설에 영화에 잠식당한다, 이런 말이 나오기도 하는데, 제 생각으로는 그런 발상은 좀 아닌 것 같습니다. 문제가 되는 건 수준이지, 장르나 국적은 아니라는 거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의 입장에서라면 어떤 방식으로건, 자기 독자들을 상정하고 이 독자들을 끌고 나가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작품의 수준을 잡아가는 게 중요하지 않은가 합니다.

최원식 최근 장편들에서 뭔가 2% 부족한 점을 느끼게 되는데, 그중에는 감동의 결여도 있어요. 제가 옛날식인지는 몰라도 좀체 감동의 기회가 없어요. 좋은 문학작품이 제공하는 선물의 하나는 우리 일상 속에서 갈가리 분해되고 분열된 지리멸렬한 시간에 아주 집중적인, 통합적 경험을 부여함으로써 시간을, 아니 현재의 순간순간을 충만하게 의식하게 만드는 것이지요. 그 핵에 바로 감동이 있죠. 물론 이 감동이 찌르르한 것만을 뜻하는 건 아닙니다. 아까 말씀하신 대로 독자들을 불편하게 만든다는 것도 감동의 또다른 표현일 수 있어요. 일상의 시간이 정지되는 그곳에서 새로운 시간, 새로운 장소, 새로운 사회, 새로운 영토를 꿈꾸게 됩니다. 요새 70년대의 동일방직 노조사건을 다룬 다큐멘터리 「우리는 정의파다」를 봤는데 참으로 오랜만에 깊이 감동했어요. 사실 처음에는 큰 기대를 가지지 않았거든요. 이제는 중년이 된 당시 여성노동자들을 인터뷰함으로써 굴욕을 딛고 인간적 자각에 집합적으로 이르는 과정을 그녀들 스스로 말하게 하는 이 다큐를 보면서 솔직히 우리 소설가들은 뭐하고 있나 하는 의문을 감출 수 없었어요. 우리가 다룬 세 작품은 공통적으로 그런 감동의 기회가 거의 없어요. 요새 말로 쿨해서 그런 건지 모르겠는데, 그렇다고 옛날로 돌아가자는 건 아니지만, 쿨하면서도 뭔가 새로운 층위가 개척되지 않으면 안되겠다 싶어요.

서영채 좀더 육중하고 무겁게 독자들의 마음에 척 하고 와닿는 그런 느낌이 부족하다는 말씀이신가요?

최원식 작품 속에서 어떤 문제를 설정했으면 그걸 끝까지 추적해야 하거든요. 인물들이 비록 파멸에 이를지라도 자기의 운명을 끝까지 살면서, 그렇게 끝까지 갈 때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던 문제들이 명료한 꼴을 갖춰 그것에 직면하게 되고, 새롭게 생각하게 되고, 그러면서 새로운 삶을 꿈꾸게 되는 것 아니겠어요? 때로 독자들을 치는 것이 독자들을 존중하는 것이 될 수도 있습니다.

서영채 작가들의 개성이나 취향이 다 제각각이기 때문에, 어떤 사람은 발본적으로‘독자놈들’신경쓰지 않는다, 내 길을 간다는 식으로 쓰는 사람도 있고, 또 어떤 사람들은 난 독자들과 어깨동무하고 같이 가겠어,라는 자세로 쓰는 사람도 있듯이 다 나름의 몫이 있는 게 아닌가 합니다.

최원식 현실 독자 또는 자기 독자를 의식하느냐 여부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우리 시대의 거대한 잠재독자들을 독해하는 일입니다. 주로 영화를 통해 표출되는 대중의 신비로운 출현, 그 정치적 무의식을 비판적으로 전유함으로써 소설을 새롭게 갱신할 방법을 강구하는 작가들이 기다려집니다.

 

‘뉴에이지’역사소설의 이념성과 탈이념성

 

서영채 새로운 역사소설들의 가능성에 대해서도 주목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요. 2000년대에 들어와서 뚜렷한 성과라고 할 만한 뉴에이지 역사소설들이 나왔고 앞으로도 계속 씌어질 것 같습니다. 최근에는 이기호 같은 젊은 작가도 이광수 이야기를 가지고 연재를 시작했는데 첫편을 보고 참 흥미롭기도 했습니다. 보통 역사소설이라고 하면 사담이거나 이념이 강하게 투여된 작품들이거나 했는데, 새로운 긴장의 처소를 보여준다는 점, 새로운 장편서사의 영역들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의미있는 시도들로 보입니다.

최원식 전통적인 형태의 역사소설이든 새로운 형태의 역사소설이든, 최근 역사소설들이 족출(簇出)한다는 것은 역사 또는 시간이 새로이 문제가 되는 시기라는 뜻이겠지요. 과거사문제를 둘러싼 한국 안의 내전에서 보듯이, 민주화 이후 역사 또는 과거를 보는 눈이 균열하고 있습니다. 역사가 대중적 소비의 대상으로 하방하면서 계급과 젠더, 지역과 지방, 그리고 개인마다 다른 과거를 보는 형국입니다. 아마도 지금 우리 사회가 전과 다르게 급속히 전환하는 중이라는 점을 가리키는지도 모릅니다. 새로운 사회의 출현 전야는 필연적으로 역사 전체를 다시 보게 만들어주니까요. 왕성한 실험에 들어선 최근 역사소설의 경향에 대해서 저도 흥미를 가지고 있지만 이전의 좋은 역사소설도 단지 이념적인 것만은 아니었어요. 가령 홍명희(洪命憙)의 『임꺽정』을 봅시다. 이 소설이 출판 민주화 도정에 남한에서 출간되었을 때, 『임꺽정』이 혁명소설인 줄 알았더니‘화적’편에는 두목의 오입 얘기밖에 안 나온다고 실망했다는 독자들의 반응이 재밌었어요. 임화는 『임꺽정』에도 세태소설의 독약이 어느 틈에 침투했다고도 비판했는데 상통하는 얘깁니다. 저는 좀 생각이 달라요. 임꺽정은 의적입니다. 의적도 도둑인데 도둑은 새로운 사회를 건설할 주체가 아니에요. 홉스봄이 『의적의 사회사』에서 지적했듯이 의적이란 벼랑에 몰린 농민들의 자기구원의 한 형태지, 프로그램을 가지고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는 실천적 기획자가 아닌 거죠. 벽초(碧初)는 임꺽정을 혁명가로 그리지 않고 그 한계를 날카롭게 봤어요. 혁명을 꿈꾸었다가 도둑소굴에 들어가면서 서서히 변질되어버리는 모습을 정확하게 보여줬어요. 그럼에도 이 작품이 미완으로 남은 것은 해방 이후 맞이한 벽초의 고민을 오히려 암시합니다. 이전의 역사소설도 반드시 이념을 겉으로 내세운 것이 아니듯 최근 역사소설도 꼭 탈이념적이라고 구분할 일도 아닙니다.

 

한국 장편문학의 재도약을 위해

 

서영채 제가 좋은 것만 보고 싶어하는 사람이라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좋은 가능성을 지니고 있는 작가들이 많습니다. 한국 장편소설의 희망적인 미래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도 중요하지 않을까 합니다. 문학이 한계지점에 도달했다, 문학은 끝이다,라고 얘기할 때야말로 문학이 발본적으로, 아무런 후광도 없는 근원적인 지점에서부터 새로 출발할 수 있는 가능성들이 열려 있는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90년대 초중반까지는 한국의 특수한 정치상황 때문에 문학이 역설적으로 후광을 가질 수 있었지만, 이제는 그런 후광 없이 출발하는 것이기 때문에, 작가들에게는 오히려 다양한 가능성과 새로운 상상의 지평이 열려 있는 것이고, 또 그런 지점을 평론가들은 잘 들여다보고 읽어줄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평론가의 입장이란 곧 독자의 입장이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그렇게 될 수 있다면 한국문학을 위해 좋은 일이 아닌가 합니다.

최원식 좋고 나쁨을 솔직히 토로하는 것이 비평이 할 몫이라고 믿지만, 한국어로 씌어진 훌륭한 작품을 만나는 것을 큰 기쁨으로 여기는 독자로서 저 역시 서교수 말씀에 기본적으로 동감해요. 2000년대 장편소설의 성과들을 돌아봐도 사회성의 단순한 일탈이라고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탈사회성도 사회성의 표출이지만, 이 장편들은 그렇기는커녕 최근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핵심적 쟁점을 다루고 있습니다. 앞시기와 비연속이기보다는 연속입니다. 다만 후광이 훨씬 더 사라진 시대라 맨몸으로 부딪혀야 되는 시기라는 지적에도 공감해요. 자본의 포섭이 점점 더 강화되어가는 세계 속에서 작가들이 직면하는 고민들을 충분히 이해합니다. 그런데 장편이 장편다우려면‘가짜 예언’과‘비상구 없음’사이에 틈을 내야 합니다. 세계사적인 시각으로 한반도를 보고 한반도의 시각으로 세계사를 보는, 이런 상호소통적인 시각으로 우리 사회의 변화 가능성을 예의 검토하고 관찰하는 자세를 가져야 되지 않을까 합니다. 게다가 목하 분단의 변경 가능성이 커졌어요. 북한이 붕괴하든 평화통일을 하든 남북이 공생으로 나아가든, 변화는 필연 아니겠어요. 이건 세계사적인 사건이잖아요. 한국전쟁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브리태니커사전을 보면‘한국’보다‘한국전쟁’이 더 길어요. 그런데도 아직 한국전쟁을 제대로 다룬 우리 장편이 많지 않아요. 점점 강화되는 자본의 포섭을 냉철하게 응시하고 있긴 하지만, 그 너머를, 그 이후를 고민하는 작가들은 많지 않아요. 민족문학과 탈민족문학적 요구의 균열을 21세기 서사의 도가니에서 녹여 새로운 서사로 길어올리는, 욕심이 큰 장편들이 속출하기를 기대합니다.

한가지 더 욕심을 내자면, 동아시아 서사의 가능성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는 거죠. 중남미문학이 인디오의 전통 속에서 매직리얼리즘을 구성하여 세계문학에 진출했듯이, 우리도 서구에서 기원한 서사형태만이 유일한 모델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근대 이전의 우리 서사나 중국 서사의 풍요로운 전통에 주목해야 합니다. 중국의 전통서사는 동아시아 공통의 문명적 자산에 가깝거든요. 홍명희의 『임꺽정』이나 심훈(沈熏)의 『직녀성』이 그 맹아입니다. 서구소설에 중독된 임화는 『임꺽정』을 세태소설로 비판했는데 그 눈에는 이 소설이 지리멸렬한 서사의 해체로 보이겠죠. 그런데 다른 눈으로 보면 이 소설은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이라는 서양손님들 너머 오히려 새로운 서사의 가능성으로 우뚝합니다. 우리 작가들이 좀더 큰 눈으로 한반도 현실의 미묘한 변화 가능성에 주목하여 그 변화와 함께할 서사전략이 무엇일지 고민하면서 그 창조적 결합을 시도한다면 창조적 장편의 시대로 진입하는 것도 시간문제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