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창작과비평

정기구독 회원 전용 콘텐츠

『창작과비평』을 정기구독하시면 모든 글의 전문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구독 중이신 회원은 로그인 후 이용 가능합니다.

특집 | 한국 장편소설의 미래를 열자

 

장편소설과 그 적들

 

 

최재봉 崔在鳳

한겨레신문 문학전문기자. 저서 『역사와 만나는 문학기행』 『간이역에서 사이버스페이스까지』 『최재봉 기자의 글마을통신』 등이 있음. bong@hani.co.kr

 

 

1

 

이 글은 한겨레신문 2007년 1월 1일자에 실린 최아무개의 기명 칼럼 「한국소설, 장편으로 진화하라」에서부터 비롯되었다. 한국소설의 지나친 단편 편향을 지적하고 장편 위주로 소설문단을 재편해야 한다는 취지를 담은 그 칼럼에 대해 주변에서 대체로 동의한다는 반응을 보였고, 그 결과 지금 이 글을 쓰기에 이른 것으로 나는 이해한다.

한국소설의 단편 편향에 대한 지적이 새삼스러운 것은 아니다. 내 칼럼 역시 결코 독창적이거나 남들이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창의적인 내용을 담은 것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누구나 알고 있고 공감하던 문제를 공론의 장으로 끌어냄으로써 생산적인 논의를 촉발시킨 정도의 구실은 한 것이라 자부한다. 그 칼럼이 나간 뒤 문단 안팎에서 만난 이들은 한결같이 칼럼의 취지에 동감하면서 그 주제에 관해 이런저런 조언을 들려주었다. 작가와 평론가, 독자가 두루 망라된 그들의 조언이 장편소설에 관한 내 생각을 좀더 발전시키는 데 도움을 주었다. 이 글은 한겨레신문에 실린 내 칼럼에 바탕을 두되 그에 대한 주변의 반응을 참조하여 보완한 것이다. 한국문단의 제도적 현실이 어떻게 장편보다는 단편에 쏠려 있는지 비판적으로 점검하고 나아가서, 가능하다면, 그에 대한 대안을 제시해보려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이다.

 

 

2

 

한국에서 소설가로 등단하는 대표적인 방식은 신춘문예나 잡지의 신인상에 당선하는 것이다. 그리고 신춘문예나 잡지 신인상의 소설 당선작은 단편 일색이며 간혹 중편이 포함되는 정도다. 물론 신인을 대상으로 한 장편소설 공모가 없지 않고 최근 들어서는 점차 증가하는 것이 사실이다. 아울러 서구의 경우처럼 출판사에 투고한 장편소설이 바로 단행본으로 출간됨으로써 소설가로 등단하는 사례도 드물지만 발견된다. 그러나 제도권 내에서 소설가로 받아들여지는 주된 방식은 여전히 신춘문예나 잡지의 신인상 당선이라 할 수 있다. 그러니까 소설가가 되기 위해서는 우선 단편을 잘 써야 한다는 등식이 성립한다. 그러다 보니 대학 문예창작과나 문화쎈터의 소설창작반에서는 심사위원의 마음에 들 만한 단편을 쓰는 훈련에 치중하게 마련이다. 소설가 지망생들은 짧게는 1, 2년에서 길게는 4년 남짓 동안‘잘 짜인’단편소설을 쓰는 훈련을 거치게 되며 그 과정에서, 재능과 노력이 따라줄 경우, 뛰어난 단편작가로 성장하게 된다(흔히‘신춘문예용’이라고 비아냥조로 불리는, 천편일률적인 스타일의 당선작들이 지니는 문제는 이 글의 논지와는 맥락을 달리하는 것이므로 여기서는 상론하지 않는다).

알다시피 단편은 같은 소설이라고는 해도 장편과 태생부터 다르다. 단편이 단일한 주인공과 사건, 갈등을 촘촘하게 짜나가는 반면 장편은 복수의 주연급 인물들을 등장시켜 복잡다기한 사건의 연쇄를 유장하게 이어간다. 단편이 문체와 상징 같은 언어미학을 좀더 추구하는 반면, 장편은 흥미진진한 이야기 전개와 깊은 주제의식으로써 승부를 보고자 한다. 우리는 두 장르를 단지 길이의 장단에 따라 구분할 따름이지만, 가령 영어에서는‘novel’(장편)과‘short story’(단편)로 명칭부터 다르다. 명칭의 차이는 그 두 장르의 관계에 관한 무의식을 반영하는 것일 수도 있다. 우리가 단편과 장편의 차이란 단지 길이에만 있다고 보는 반면, 영어권 등 서구에서는 두 장르를 아예 다른 종류에 속하는 것으로 판단한다는 뜻일 수도 있는 것이다.

단편과 장편의 관계에 관한 이런 두가지 태도 가운데 어느 쪽이 더 진실에 가까울지에 대해서는 별도의 검토가 필요할 것이다. 여기서는 논의의 필요상 단편과 장편이, 적어도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동질성보다는 차이를 지니는 별개의 장르라는 쪽에 무게를 두어 얘기해보고자 한다. 왜냐하면 우리네 창작수련 과정에서는‘단편을 쓰다 보면 자연스럽게 장편 역시 쓰게 된다’는 식의 태도가 암암리에 통용되고 있는 것 같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뛰어난 단편작가가 곧 뛰어난 장편을 쓴다고 장담할 수 없는 것이 엄연한 사실이다. 실명을 거론해서 민망하지만, 한국 현대문학을 대표하는 미학주의적 단편작가들인 김승옥(金承鈺)과 오정희(吳貞姬)가 단편의 성가(聲價)에 어울리는 장편을 내놓지 못하고 있음을 기억할 일이다. 단편은 흠잡을 데가 없는데 장편은 어딘지 허술하고 불안한 작가들도 적지 않다(순전히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신경숙-『외딴 방』은 제외하고-과 윤대녕 전경린 같은 작가들은 장편보다 단편에서 더욱 재능을 발휘하는 경우로 보인다). 논의의 공정성을 위해서라면, 그런 불균형의 작가들뿐 아니라 단편과 장편을 아울러 잘 쓰는 작가들도 많다는 사실을 밝히고 넘어가야 할 것이다(단편보다 장편에 치중하는 작가들 역시 없지 않다. 아니, 최근 들어서는 그 숫자가 점차 늘고 있는 추세다. 이들에 대해서는 이 글의 논지 내에서 특별히 비판적으로 지적할 까닭이 없으므로 더이상 언급하지 않는다).

여기서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단편을 잘 쓴다고 해서 장편 또한 잘 쓰리라는 보장이 없다는 것이다. 좋은 장편을 쓰기 위해서는 처음부터 장편 위주의 창작수련이 필요할 것이라 생각된다. 그러나 대학 문예창작과나 문화쎈터 소설창작반 같은 곳에서 장편 창작을 지도한다는 말은 들은 적이 없다. 그것은 창작수업을 제한된 시간 안에 마무리해야 한다는 사정과 함께, 문단 등용문을 통과하기 위해서는 장편보다 단편 실력이 요구된다는 사정에도 기인할 것이다(처음부터 장편에 주력하는 작가들은 대체로 국내외 장편소설들을 열심히 읽음으로써 창작수련을 대신하는 것으로 파악된다). 앞에서 신경숙, 윤대녕, 전경린을 언급했지만, 사실 이들의 문제는 한국 소설가들 대부분의 문제일 수 있다. 단편 위주의 창작수업기를 거치다 보니 단편만큼의 완성도를 지닌 장편을 쓰는 데 애를 먹는 것일 수 있다는 뜻이다. 흔히 장편을 쓰기 위한 훈련으로서 단편을 쓴다고도 하는데, 그 말이 꼭 맞지는 않다. 단편 쓰기에 길드는 동안 장편을 쓰는 데 필요한 리듬과 정력을 소진할 수도 있다. 유난히 조로(早老)의 전통이 두드러진 우리 문단에서 등단 이후 소설집 두어권 분량의 단편을 쓰는 5, 6년 동안 소설 쓰기의 재능과 열정을 거의 탕진하다시피 하다가 정작 장편을 쓸 차례가 되어서는 더이상 의미있는 작업을 하지 못하는 작가들의 사례는 그 얼마나 많았던가.

오해해서는 곤란하다. 나는 지금 장편에 비해 단편이 열등하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단편은 장편과 다른 독자적인 매력과 장점을 지닌 장르다. 앞서 국내의 미학적 단편작가들을 몇 거론했지만, 외국의 경우에도 장편이 아닌 뛰어난 단편으로 인정받는 작가들이 없지 않다. 무라까미 하루끼(村上春樹)가 일본어 번역을 맡았다고 해서 더욱 유명해진 미국 작가 레이먼드 카버(R. Carver), 카버의 선배격인 「마지막 잎새」의 오 헨리(O. Henry), 그리고 「마지막 수업」의 알퐁스 도데(A. Daudet) 등이 대표적이다.

 

 

3

 

이제 등단 이후의 문제를 살펴볼 차례다. 신춘문예나 잡지 신인상 등을 통해 일단 등단의 관문을 뚫은 소설가는 거의 전적으로 문예지에 발표공간을 의지한다. 다시 말하자면 한국문단은 거의 전적으로 월간지나 계간지 같은 문예지의 지배를 받고 있다. 문예지는 시인, 소설가 들의 신작을 싣고 그에 대한 평을 게재하며 특정 시기 문단의 흐름을 정리하고 쟁점을 부각시키는 등의 일을 한다. 문제는 대부분의 문예지가 장편보다 단편이나 중편을 선호한다는 점이다(단편에 비한다면 중편 역시 그다지 환영받지 못하는 현실이다). 그것은 짧게는 한달에서 길게는 석달에 이르는 잡지 발행주기에도 기인하는 문제일 것이다. 어쨌든 잡지들은 한 호에서 완결되는 단편이나 중편을 선호하며 장편 전재 또는 분재에는 상대적으로 인색한 편이다. 한국문학에서 조세희(趙世熙)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나 윤흥길(尹興吉)의 『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 김소진(金昭晋)의 『장석조네 사람들』 같은 연작소설이 발달한 것은 이러한 잡지의 생리와 무관하지 않다고 나는 생각한다. 물론 작가 쪽의 사정도 없지는 않을 것이다. 작가들은 다른 수입이 생기는 일을 작파하고 짧게는 몇달에서 길게는 몇년이 걸리는 장편 집필에만 매달릴 시간적·경제적 여유가 없고, 잡지는 잡지대로 장편을 분재하기보다는 연작의 일부이지만 독립적인 단편으로도 성립 가능한 연작단편을 선호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다 양대 월간지 『현대문학』과 『문학사상』이 주관하는 권위의 현대문학상과 이상문학상이 수상 대상을 단편 내지는 중편으로 제한하고 있는 것도 단편 위주 풍토를 조장한다. 이 두 상 말고도 황순원문학상과 이효석문학상 역시 대상을 중단편으로 한정하고 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작가들은 막상 장편소설을 쓰려다가도 잡지에서 단편 청탁이 오면 거절하기 어렵게 된다. 문단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지닌 잡지 편집위원들의 심경을 거슬렀다가는 그나마의 청탁도 끊어질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한편에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중단편에 주어지는 주요 문학상의 상금과 명예가 눈앞에 어른거리기 때문이다. 한때 마찬가지로 중단편에 주어졌던 동인문학상이 대상을 소설집과 장편을 아우르는 단행본으로 전환했으며, 한국일보문학상 역시 기존의 단편소설과 함께 단행본 소설집과 장편소설을 심사대상에 포함하기로 한 것은 그런 점에서 바람직한 일이다. 물론 단편 문학상도 있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 경우에는 주요 문학상의 단편 치중이 지나친 감이 있다. 그에 비한다면 장편‘만’을 대상으로 하는 문학상은 사실상 없는 것과 매일반이다. 앞서 언급한 동인문학상과 한국일보문학상을 비롯해 만해문학상, 대산문학상, 이산문학상 그리고 한국문화예술위원회에서 주관하는‘올해의 예술상’역시 단행본이 대상이기는 하지만 장편과 중단편집을 아우르고 있는 것이다.

 

 

4

 

장편소설에 주어지는 상이 없다는 말에 의아해하는 이들이 있을 법하다. 문학동네소설상, 한겨레문학상, 세계문학상, 오늘의 작가상, 삼성문학상을 비롯한 장편 공모가 있지 않느냐고 말이다. 여기에다가 이 글이 실리는 『창작과비평』 역시‘창비장편소설상’을 신설해서 작품을 공모하고 있다. 그러나 이 상들이 출간된 장편소설을 대상으로 하는 게 아니라, 신인(급 작가)의 장편소설 원고를 대상으로 한다는 점을 분명히해야 한다. 이 상들은 모두가 단행본 출간을 목표로 그것을 위한 원고를 모집하는 성격이 강하다. 이미 단행본으로 출간된 장편소설을 대상으로 하는 상이 아니라는 말이다. 당연히 신인 내지 신인급 작가들이 주로 응모하게 마련이다. 그런 의미에서 사실상‘신인상’이라 불러 마땅하다.

그러니까, 다시 말하자면, 장편에 대한 별도의 상은 없는 셈이다. 현재 장편소설로써 인세 이외의 지원을 받을 수 있는 것으로는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예술창작 및 표현활동 지원’과 문학나눔사업추진위원회의‘문예지 게재 우수작품 지원’이 있다. 양자 모두 장편‘만’을 대상으로 하는 지원은 아니며, 다른 장르들과 함께 장편소설이 포함되어 있는 정도다. 전자의 경우는 건당 1200만원, 후자는 건당 600만원으로 지원금이 책정되어 있다. 후자, 그러니까‘문예지 게재 우수작품 지원’에 대해서는 추가 설명이 필요하다. 이 사업에서 장편은 잡지 분재의 마지막 회분을 대상으로 한다. 단편이 300만원인 데 비하면 장편에 주어지는 600만원이 큰돈으로 느껴질 법도 하다. 그러나 속단하긴 이르다. 지난해의 경우를 보자. 소설에서는 장편과 단편을 가리지 않고 편당 400만원씩의 지원금이 주어졌다. 전체 지원작품은 144편이었고, 이 가운데 장편은 김인숙(金仁淑)의 『봉지』, 강영숙(姜英淑)의 『리나』, 박민규(朴玟奎)의 『핑퐁』 단 세편뿐이었다. 그러니까 141 대 3이다. 물론 문예지에 연재 또는 분재되는 장편의 숫자가 중단편에 비해 그만큼 적었다는 방증일 수도 있다. 올해의 경우 중단편에는 300만원씩 179편이 지원대상으로 책정되어 있지만, 장편 지원대상은 아직 편수가 나와 있지 않다. 담당자의 말로는 심사대상 자체가 많아야 10편 내지 12편 정도가 아니겠느냐고 한다.

문학나눔사업추진위원회의‘문예지 게재 우수작품 지원’사업은‘우수문학도서 선정 보급’사업과 함께 불황에 시달리는 문학계의 가뭄 해소에 큰몫을 하고 있다. 그러나 이 글의 논지와 관련해서 뜯어보면, 사업방식을 바꿀 필요가 있어 보인다. 특히‘문예지 게재 우수작품 지원’은 그렇잖아도 단편 위주인 한국소설의 풍토를 더욱 고착화할 소지가 있다. 문예지들이 장편보다 단편을 선호하는 것이 뻔한 상황에서 잡지에 게재된 작품 가운데 우수한 것을 골라 지원한다면, 작가들은 그만큼 더 단편 창작에 매달릴 수밖에 없다. 현대문학상과 이상문학상, 황순원문학상 같은 단편 대상 문학상 말고도 단편을 써야 할 또 하나의 이유가 생긴 것이다. 사실 단편집은 물론 장편소설조차 팔리지 않는 시장 풍토에서 작가들이 단편 하나를 써서 원고료와 별도로 받는 300~400만원의 지원금은 큰돈이 아닐 수 없다. 판매에 관한 확실한 전망 없이 장편 쓰기에 매달리느니 짧은 시간에 집중적으로 단편 몇편을 써서‘원고료+지원금’을 받는 게 타산이 맞는다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문예지 게재 우수작품 지원’의 경우 1년 동안 한 작가가 단편 기준으로 세번까지 지원금을 받을 수 있도록 되어 있다. 1편에 300만원씩이니까, 연간 최대 900만원을 받을 수 있다는 뜻이다(장편의 경우에는 금액 기준으로‘단편 3편’그러니까 900만원을 넘지 않도록 되어 있다. 따라서 어느 작가가 장편 1편에 대한 지원금 600만원을 받는다면, 그것 이외에는 단편 1편에 해당하는 300만원만을 추가로 지원받을 수 있는 것이다).

구차하게(?) 돈 얘기를 하고 있자니 적이 민망하다. 장편소설에 대한 지원이 필요하다는 말을 하기 위해 이토록 장황하게 현실을 까발린 것이다. 지금으로서는 문예지가 단편을 줄이고 장편 연재나 분재를 획기적으로 늘릴 가능성이 그다지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문학나눔사업추진위원회의 우수작품 지원사업은 무턱대고 문예지에 실린 작품만을 대상으로 삼아서는 곤란하다고 본다. 장편소설 원고(또는 집필 계획)에 대한 과감한 지원이 필요하다. 작가들의 말을 들어보면 그 필요성은 더욱 절실해 보인다. 물론 장편소설을 출간할 경우 판매분에 따른 인세를 출판사로부터 받지만, 그것만으로는 단편의 유혹을 뿌리치고 장편소설에 매달릴 동기로서 충분하지 않다는 것이다. 인세에 더해서 잡지의 장편 분재에 해당하는 원고료 및‘문예지 우수작품 지원’에 해당하는 별도 지원이 있어야 그나마 장편 집필에 필요한 최소한의 물적 토대가 마련된다는 것이 작가들의 변이다. 이와 관련해서, 기존의 단편 위주 문예지가 아닌 장편 위주 문예지도 생각해봄직하다. 중단편을 배제하고 철저히 장편만을 전재 또는 분재하는 잡지가 나온다면, 단편 위주의 한국문단에 신선한 자극이 될 수 있지 않을까.

 

 

5

 

왜 이렇게까지 장편에 집착하느냐며 의아해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노파심에서 다시 강조하지만, 내 얘기는 단편을 그만두고 이제 모두가 장편을 쓰자는 뜻은 결코 아니다. 단편은 단편대로 쓰되, 지금보다는 장편 쪽의 비중을 늘려야 한다는 말이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한국소설이 독자와 더불어 호흡하는 데 단편보다는 장편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독자들이 단편보다 장편을 선호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단편을 선호하는 독자들이 물론 없진 않겠지만, 장편에 비해 폭이 좁다고 보아야 한다. 출판사들이 엄연히 단편을 모은 책을 내놓으면서 표지에다‘아무개 소설집’이 아닌‘아무개 소설’식으로 모호한 표현을 써버릇한 게 벌써 오래되었다. 출판사들은 독자들이 단편보다는 장편을 선호한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것이다.

한국소설이 더불어 호흡해야 할 독자가 국내에만 있는 것도 아니다. 한국소설을 해외에 소개할 때도 단편 위주의 현실은 심각한 장애로 작용한다. 그 사실을 우리는 2005년 프랑크푸르트도서전 주빈국 행사를 치르면서 새삼스럽게 확인했다. 해외 출판사나 저작권 에이전씨에서 한국문학에 관심을 가지고 작가를 찾을 때 흔히 드는 조건이‘장편소설을 다섯권 이상 냈을 것’이라고 한다. 한두권의 장편만으로는 작가의 역량을 정확히 확인하기에 불충분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국내 작가들 가운데 이 조건을 충족하는 이들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 여기에다가‘젊고 유망한’이라는 조건을 덧붙이면 내로라하는 작가들조차 기준 미달에 걸려 나가떨어지게 되어 있다. 내가 몸담고 있는 신문에서 공지영(孔枝泳)과 일본 작가 쯔지 히또나리(ᄲᅭ仁成)의 합동소설을 연재한 적이 있다. 그때 쯔지의 작업 스타일을 살짝 들여다보고‘기절초풍’했던 게 생각난다. 그는 한꺼번에 대여섯편의 장편소설을 여러 매체에 동시에 연재하고 있었다. 또 소설만 쓰는 것도 아니어서, 록가수로서 노래도 부르고 영화감독으로도 일하는 등 다양한 활동을 펼치고 있었다. 그는 웬만한 일본 작가들이 자신과 비슷한 작업 스타일을 가지고 있다고 말해서 나를 두번 놀라게 만들었다. 미안한 얘기지만, 그런 일본 작가들에 비해 우리 작가들의 생산성은 크게 떨어지는 것 같다(나는 얼마 전에 우리 신문에 쓴 또다른 칼럼에서‘일본소설은 한국문학의 미래가 아니다’라며 목소리를 높인 바 있다. 일본소설의 얄팍함에 대한 경계였다. 일본 작가들의 놀라운 생산성이 그런 얄팍함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라 본다. 그렇다면 나는 한입으로 두말하고 있는 것인가? 일본소설의 한계는 그것대로 분명히 인식하되, 그들의 철저한 프로정신만은 본받을 바가 있다는 뜻으로 헤아려달라).

해외로 내보낼 국내 장편소설들이 일단 수적으로 열세를 면치 못하는 것과는 반대로, 해외 일급작가들의 야심작들은 거의 실시간으로 국내에 번역 출간되고 있어서 상황을 더욱 악화시킨다. 장편이 제공하는 규모있는 이야기와 깊은 문제의식에 목말라하던 독자들은 큰 고민 없이 국내소설을 버리고 번역소설로 몰리고 있다(국내에 소개되는 해외소설들의 태반이 장편이라는 점을 보아도 단편이 아닌 장편으로 해외독자들을 겨냥해야 한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외국문학 쪽으로 몰려간 독자들을 다시 한국문학으로 불러들이기 위해서라도 작가들은 장편소설에 주력해야 한다. 다행히 최근 작가들과 문학출판계 내에서 장편의 중요성과 필요성에 대한 공감대가 넓어지고 있는 점은 고무적이다. 직접 만나본 젊은 작가들 역시 전에 비해 장편소설을 쓰겠다는 의욕을 더 강하게 보이고 있었다. 물론 장편이라는 게 하루아침에 써지는 것은 아니기에 시간이 필요하겠지만, 작가들과 출판사들이 앞장서서 한국소설의 체질을 단편 위주에서 장편 위주로 바꾸어간다면 언젠가 잃었던 독자들을 되찾고 세계문학계에서도 한국문학의 위상을 한층 높일 것으로 기대한다.

 

 

6

 

대중독자들이 장편을 선호하는 것과는 달리 평론가들은 여전히 단편에 집착하는 듯한 인상을 준다. 그 점은 그들이 주요 문예지의 편집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사정과도 무관하지 않다. 작품 게재 결정과 그에 대한 비평,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문학상 심사에 이르기까지 문예지 편집위원인 평론가들의 영향력은 막강하기 짝이 없다. 그것은 어느새‘권력’이라고 불릴 정도가 되어 있다. 제 논에 물 대기일지 모르지만, 단편 위주에서 장편 위주로 한국소설의 체질을 바꾸자는 제안은 현재의 문예지 중심 문단권력 구조의 변화로도 이어질 것이라고 나는 전망한다. 창작자 및 대중독자들과 평론가들 사이의 알력은 세계적으로도 유구한 역사를 지니고 있는 것이지만, 그런 점을 감안하더라도 한국문학에서 평론가들의 지위와 영향력은 비정상적으로 높은 것 같다. 주례사비평이니 비평의 출판자본에의 복무와 같은 불건강성이 그와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단편이 평론가들의 평가에 크게 의존하는 데 비해 장편은 상대적으로 평론가들보다는 독자대중의 선택과 판단에 더 좌우되는 장르라 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평론가들의 개입 여지는 그만큼 줄어들며, 주례사비평 같은 건강하지 않은 문단권력의 문제점도 어느정도 개선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말을, 소설의 운명을 온전히 시장논리에 맡기자는 뜻으로 받아들이지 않았으면 한다. 시장이란 물론 자연스러운 만큼 위험스럽기도 한 곳이다. 내 말은 한국소설의 지나친 단편 편향이 평론가들을 중심으로 한 왜곡된 문예지 및 문학상 문화와 무관하지 않다는 것, 따라서 평론가들의 과도한 개입을 줄이고 작가와 독자대중 사이의 직접 소통을 늘리는 쪽으로 판을 다시 짜야 한다는 뜻이다. 하다 보니 평론가들에게 욕먹을 소리로 글을 마무리하게 되었는데, 한국소설에 대한 나름의 충정에서 나온 고언이라 혜량들 해주셨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