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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양해기 楊海基
1965년 경북 달성 출생. 2006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azalea@hanwha.co.kr
지렁이 집
길음동 재개발 철거지역, 부엌문과 문이 마주한 흙마당엔 실개울이 흐른다 5학년 영은이가 저녁밥을 안치는지 쌀뜨물이 실개울에 걸쳐 늘어진 지렁이의 몸을 타고 희미하게 넘어간다 아홉 가구가 나무젓가락처럼 붙어사는 집은 보기보다 단단한 벌집구조다 언젠가 돌산 꼭대기에 올라 우리가 사는 방들을 내려다본 적이 있다 옆으로만 길게 누운 게 꼭 늘어진 채 수축하지 않는 저 지렁이 검은 기름종이 위에 미끌미끌한 비닐을 덮은 털 없는 환형동물을 닮았다는 생각을 했다 늘 젖어 보이는 시멘트벽이 신문지 한장으로 담이 되고 마디가 되는 집
지금, 기우뚱 어긋난 나무문이 힘없이 비켜서고 늦은 가장들의 노동이 흙마당에 부어진다 부엌마다 희뿌연 물이 마당으로 일제히 쏟아져나와 지렁이는 아홉 가구를 끌고 어디론가 가고 있다
지렁이는 분명 사각형의 반듯한 집을 땅속 깊이 파놓았을 것이다
개구리 부처
12월 초
도선사 숲속에 웅크린
누군가가
나를 바라보고 있다
두꺼운 코트와 내복을 입은 나와
눈이 마주친다
겨울잠에 들지 못한 개구리가
사람의 눈망울을 가진 개구리가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개구리가
겹겹이 옷을 껴입고도 추위에 떨고 있는 내게
통장과 집과 가족을 가지고도
사업이 더 잘되게 해달라고
100일 기도회에 참석한 내게
이 추운 겨울
동면에 들어야 할 것들은
내가 아니라 바로 너희들이라고
움찔움찔 몸을 움직이며
뼈저린 가르침을 준다
털 한올 없는
맨들맨들한 한겹 살가죽만 가지고
뙤약볕에서, 눈밭에서
일년 내내 뒹굴던
여리디여린 부처님이
나의 탐욕, 나의 이기심
나의 집, 나의 통장을
맨몸으로 질타해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