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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문인수 文寅洙
1945년 경북 성주 출생. 1985년 『심상』으로 등단. 시집 『늪이 늪에 젖듯이』 『뿔』 『홰치는 산』 『동강의 높은 새』 등이 있음. insu3987@hanmail.net
낡은 피아노의 봄밤
누가 이 피아노를 한번 힘껏 눌렀겠다.
아이들이 자라 스무살이 훨씬 넘는 동안 또 몇년
뚜껑 한번 열린 적 없을 것이다. 피아노 속은 지금
콩나물 대가리가 다시 수북하게 자란 저녁일까 누가
이 피아노를 한번 힘껏 눌렀겠다. 언제나
거실 한쪽 벽면을 차지한 채 저도 헌집, 무겁게 내려앉은 피아노는
컴컴한 벽돌조 양옥 같다. 문턱처럼 걸리거나
저녁노을처럼 걸리는 감정들은 뜰에, 저 서너 개
큰 독에다 묻었겠다. 잘 삭혔을까 누가
이 피아노를 한번 힘껏 눌렀겠다. 어두워진 것처럼 꽉 다문 입,
속은 구린내나겠지만
흉금이란 그러나 노후에도, 노후해도 썩지 않고 영롱하게 글썽이는 것,
반짝반짝 올라가 하염없이 공중에 쌓인 소리,
뚜껑 밤하늘엔 별 총총 수심도 많겠다. 명멸, 명멸, 명멸,
사소하게 일일이 다 접으며 또 그렇게
겨울 보냈으리 누가
이 피아노를 한번 힘껏 눌렀겠다. 기나긴 눈보라 주먹만한 눈발,
피아노는 폭설 창고일까 기쁨이거나 슬픔,
저 목련 폭발 환한 야음이다. 야반도주처럼 훨 훨,
봄날은 또 사정없이 날새누나. 두 팔 벌려 무너지듯
누가 이 피아노를 한번 힘껏 눌렀겠다.
얼룩말 가죽
신호등 빨간 불빛에도 아랑곳없이
다 꼬부라진 할머니 한분이 무인지경의 횡단보도에 들어선다. 이곳
법원 앞 횡단보도 도색은 늘
새것처럼 엄연하다. 흑, 백, 흑, 백의 무늬가 얼룩말가죽, 호피 같다. 법이 실감난다. 이걸 깔고 앉으면 치외법권,
산적두목 같을까, 내 마음의 바닥도 때로 느닷없는 뿔처럼
험악한 수괴가 되고 싶다. 물 水와 갈 去,
세상의 이치가 물 흐르듯 해야 한다는 의미로 法이라는데 나는, 이 거대한 늑골 같은 데를 지날 때마다 법에
덜커덕, 덜커덕 걸리는 느낌이다. 인간이 참 제풀에 얼룩덜룩한 것 같다.
법 따위 무시하고 살아온 사람이나 법 없이도 살 사람에게 똑같이 ‘무법자’란 별칭을 붙일 수 있다면
저 할머니 또한 이제
법이란 법 다 졸업한 무법자일까. 주상절리,
보행자 통금의 장면에 할머니는
강 건너듯 골똘하게 6차선 도로를 횡단해 간다. 이 도시의 막바지 가파른 계단을, 하늘로 올라가는 튼튼한 사닥다리를 밟아오르는 것 같기도 하고 지금, 거센 물너울에 부대끼는 것 같기도 하다. 하긴
흑, 백, 흑, 백, 생사의 숱한 기로가 이제
침침하게 미끄럽게 거의 다 지워져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중일 수도 있겠다. 정지선 앞에 선 사람들도 어떤 운전자도 그만
씨익 웃는다. 어려 보이는 한 교통경찰이 냉큼 쫓아가
할머니를 부축해 정성껏 마저 건네간다. 빨래판처럼 덜컹거리는 법감정이, 시꺼먼 길바닥이 문득 흰 젖 먹은 듯 잠시
고요히 흐르는 저, 母法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