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창작과비평

정기구독 회원 전용 콘텐츠

『창작과비평』을 정기구독하시면 모든 글의 전문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구독 중이신 회원은 로그인 후 이용 가능합니다.

특집 | 한국문학, 세계와 소통하는 길

 

해외작가에게 듣는다


하나이며 여럿인 세계문학

 

 

한샤오꿍 韓少功

중국의 소설가. 저서로 『마교사전(馬橋辭典)』 『암시(暗示)』 등이 있음.

 

 

위장 민족주의와 젖먹이 세계주의

 

중국인이 자신을 서양인으로 바꾸려고 할 때 부딪히게 되는 큰 장애는 아마도 위장(胃腸)에서 올 것이다. 어릴 때부터 양식(洋食)에 단련된 상태가 아닌 바에야 다 큰 뒤 두부를 버리고 치즈를 즐기거나 생강과 파, 민물 게를 버리고 덜 익은 소고기 요리를 가까이하기란 거의 괴로운 형벌을 받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세계 각지의 차이나타운에 있는 무수한 중국식당들은 바로 이러한 음식전통의 유력한 증거이다. 때문에 세계문명의 일체화 문제가 식탁 이외의 측면에서는 대대적으로 논의되곤 하더라도, 양복을 걸치고 버터 바른 듯 혀를 능란하게 굴려대는, 겉은 노랗지만 속은 하얀‘바나나인간’도 일단 공복 때가 되면 중국 군침을 흘리고 중국 트림을 하면서 서양인과 달리 중국 음식을 마음껏 즐길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곳곳에서 볼 수 있다.

물론 모든 사람의 위장이 민족주의적인 것은 아니다. 혹은 적어도 이러한‘위장 민족주의’가 그리 절대적이고 영원하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나는 가끔 간단한 문화실험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즉 아무나 어떤 사람을 잡아와서 사흘 동안 굶기면 어떻게 될지 보는 것이다. 만약 굶어서 눈이 뒤집힌 중국인에게는 치즈를 주고, 서양인에게는 두부를 준다면 그 음식 맛이 어떻게 느껴질까? 음식문화의 특성이 이 사람들 몸에서 여전히 영향을 미칠 수 있을까?

결과는 말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아마도 미친 듯 게걸스럽게 먹을 테고 그러고 나면 두부와 치즈는 아무런 맛을 느낄 수 없는 열량으로 바뀔 것이다. 말 그대로, 배고픈 마당에 찬밥 더운밥 가릴 여유가 어디 있단 말인가. 요컨대 배가 고플 때에는 맛을 분별할 수 없고 문화를 구별해낼 수 없다는 것이다. 모종의 생리적 요구가 극한에 임박했을 때, 예컨대 어떤 사람이 거의 굶어 죽어가는 지경에 이르면 예전에 지극히 선명하고 위대했던 문화적 특성 역시 옅어지고 서서히 사라지며, 심지어는 완전히 없어지고 만다.

이렇게 본다면 문화 차이란 배부른 자에게 해당하는 일일 뿐 배고픈 사람과는 별 관계가 없다. 그것은 배불리 먹고 마신 사람만이 진실로 느끼고 맛을 음미하며 사고하고 논란을 벌이고 탐구할 수 있는 것이고 또한 수많은 대작들과 형형색색의 유파가 생길 수 있는 것이지, 일단 배고픔에 맞닥뜨리게 되면 문화 차이란 것은 어쩔 수 없이 별다른 의미를 갖지 못한다. 바꿔 말하면 사람이 배불리 먹게 되면 사는 것이 퍽 문화적이 되고 못 먹어 굶으면 사는 것이 자연적이 되는 것이다. 배불리 먹게 되면 사는 것에 차이가 발생하게 되고 못 먹어 굶으면 사는 것이 비슷해진다는 말이다.

일반적으로 말해 나는 문화다원주의자이기도 하고 문화보편주의자이기도 하다. 그런데 내가 어떤 태도를 취하느냐는 내가 어떤 대화 상대와 마주하고 있는지, 예컨대 상대방이 방금 아침을 먹은 사람인지 아닌지에 따라 결정된다.

사실, 문화 차이란 그저 어른들의 일이기도 하다. 어른들은 동양의 가족주의나 서양의 개인주의를 고민할 수 있지만, 어린 아이들은 콧물을 훔치고 공을 빼앗고 진흙에서 뛰놀면서 검은 머리, 하얀 머리, 노란 머리에 상관없이 모두 똑같은 덕성을 갖추고 있다. 문화 차이는 또한 그저 건강한 사람의 일이다. 건강한 사람은 동양인의 경험주의나 서양인의 공리주의를 고민할 수 있지만, 폐암 같은 병에 걸리면 피차간에 동병상련(同病相憐)을 느끼게 되며, 병상에서 내는 신음에는 어떤 민족의 흔적도 찾아볼 수 없다. 문화 차이가 안전한 자의 일이라는 것도 말할 필요가 없다. 취권(醉拳)과 야구의 구별도 유교와 기독교의 구별도 그리고 중화문명과 지중해문명의 구별도 마찬가지이다. 그 모두가 그것을 논하는 사람이 버젓이 살아 있음을 전제로 한다. 이들이 대지진이나 항공사고를 당했다든지 흉악한 강도를 만났다고 생각해보라. 목숨이 위태로운 생사의 갈림길에서 그들 사이에는 차이가 더 많을까 공통점이 더 많을까? 도망치거나 맞서 싸움, 또는 비겁하거나 용감함 따위의 그들의 대처방식이란 것이, 어떤 민족이나 국가의 문화적 꼬리표를 붙일 수 있는 성질의 것인가? 어떤 한 민족국가의 전매특허가 될 수 있는 것인가? 중국인은 용감한 것을 영예라고 보는데 서양인들은 용감한 것을 수치라고 여길 것인가? 그런 상황에서 중국인은 살고 싶어하는데 서양인은 기어이 죽고 싶어한단 말인가?

그들이 도망치거나 맞서 싸울 때 어떤 사람에게는 야구의 영향이 보이고 어떤 사람에게는 취권의 영향이 보이더라도, 이러한 형식상의 차이가 생사의 길목에서조차 여전히 남아 있다고 하더라도, 죽고 사는 문제에서 여전히‘다원(多元)’적일 수 있을 것인가? 만약‘다원’적일 수 없다면 생명을 보존하고 지속하게 하는 일체의 관념과 의식, 제도, 정신은 공통적 특징을 더욱 잘 드러낼 수 있는 것인가? 아니면 이러한 일체의 관념, 의식, 제도, 정신이란 것들은 문화 토론의 테이블 위에 올리지 말아야 하는가?

목숨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문화가 어찌 가능할 수 있겠는가. 사람은 오직 하나의 목숨만을 가지고 있고 하나의 머리, 하나의 생식기가 있을 뿐으로, 이는 중국이든 서구든 다르지 않다. 그리고 이것들로 인해 발생한 문화는 큰 차이가 없다. 예로부터 전세계 각 민족에서 아기가 엄마를 부르는 언어는‘마마’(mama) 하나이다. 이러한‘영아(嬰兒) 지구화’와‘젖먹이 세계주의’는 중요한 문화적 상징이다. 이는 용감함이 미덕이지 추태가 아니라는 점이 모든 문화전통에서 똑같이 긍정되고 존중받으며 여기에는 어떠한 차이도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한편 사람은 당연히 종족과 성별이라는 생리적 소속이 있으며 계급, 직업, 공동체, 국가, 지리, 역사 등의 생존환경에서도 벗어날 수 없다. 이 모든 것은 예전부터 지금까지 매우 다르고 차이가 존재해왔으며 이로 인해 형성된 문화는 실은 그다지 공통된 것이 없다. 특히나 기아에서 멀어지고 불치병에서, 위험에서, 어린이다움에서, 반(半)동물상태에서 멀어지면서, 다시 말해 모종의 생리적·자연적 극한에서 멀어지면서 사람들은 완전하게 각자 자기 주장대로 하고 각자 자기가 있는 자리에서 살 수 있다. 이른바 문화란 바로 이러한 제한된 범위에서 비로소 다원적일 수 있는 것이고 비로소 오색찬란하게 백화제방(百花齊放)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들은 다르면 다른 대로, 충돌하면 충돌하는 대로 백명의 헌팅턴(S. Huntington)이나 백명의 싸이드(E. Said)를 내놓아도 온전히 떳떳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잊어서는 안될 것, 문화 토론에 참여하는 높으신 분들이 잊어서는 안될 것은 우리가 사흘 동안 굶주림을 참을 수 없는 것처럼 어떤 명제라도 제한된 범위라는 한계에 직면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문화의 특성을 논할 때의 중요한 경계이기도 하다. 이러한 경계를 경시하면 어떠한 참된 지식도 오류일 수 있다. 이러한 경계를 경시한 문학 토론은, 그것이 같음을 지향하든 다름을 지향하든, 한쪽 다리만으로 먼 길을 떠나려 하는 것과 같다.

 

세계문학이란 무엇인가

 

나는 모든 우수한 문학은 전세계 독자를 잠재적인 소통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교통, 통신, 번역, 시장 등의 장벽으로 인해 그러한 소통이 충분하게 실현되지 못하거나 소통과정 가운데 어떠한 선별과 손실 더 나아가서는 오해가 발생할 수도 있다. 내가 좋아하는 셰익스피어나 카프카 같은 외국작가들의 경우에도 그들의 원래 모습과 비교해보면 이미 원래와는 다른 변형과 변조가 분명히 존재한다. 그들은 모두 특정한 문화전통의 산물인데 우리가 그러한 전통을 전부 이해할 수 없는 이상 어떻게 원래 진정한 의미의 셰익스피어와 카프카를 이해한다고 단정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이것은 전혀 문제될 것이 없다. 이해라는 것에는 원래 한계가 있는 법이어서, 가령 자기 민족의 작가에 대한 이해도, 가족이나 이웃에 대한 이해도 마찬가지이다. 우수한 문학작품은 보편적인 인성의 경험, 즉 모든 독자들이 그것을 조우할 때 일어나는 마음의 떨림을 제공해주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에 대해 어느정도 개방성을 지니기 마련이다. 나의 장편소설 『마교사전(馬橋辭典)』은 이미 세 종류의 영문 판본으로 출간되었다. 일부 서구 독자들은 책을 읽으면서 심지어 이것이 중국소설이라고 느끼지도 못했으며 마치 그들 주변에서 일어난 일처럼 여겨졌다고 내게 말한 적이 있다. 이는 그들이 이 책 속의 느낌과 사상을 전부 이해했기 때문인가? 당연히 그렇지 않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 적이 없다. 어떤 작가도 자국 독자이건 외국 독자이건 독자에게 자신과 완전히 똑같은 사람으로 변할 것을 요구할 권리는 없다. 어떤 작가도 지구화시대의 엄청난 수의 해외 독자를 포함하여 특정한 잠재적 독자에 영합하려고 진력할 필요가 없다. 이렇게 추측하고 영합하려는 투기는 오로지 글을 구속할 뿐이며 혼란스럽게, 심지어 거짓으로 만들어버릴 뿐이다. 반대로 작가가 글을 쓸 때에는 기술적으로 표현의 정확성과 명료함에 주의하는 일 외에는 오로지 스스로의 진실한 마음을 대면해야만 자기 자신을 세계 전부로 삼을 수 있게 될 것이다. 그가 성실하게 이 은밀한 세계에 빠져들 때 전세계 독자들이 각기 저 나름대로 이해할 가장 큰 가능성을 얻게 될 것이다.

문화의 동질화와 차별화는 영원히 병립하면서도 모순되지 않는 하나의 과정이다. 괴테 이전, 세계문학이 중요한 차이점을 지녔던 것은 지리적 요인 때문이다. 교통과 통신수단이 낙후되었던 것이다. 예컨대 한국과 중국의 문화는 서로 달랐으며 아시아와 유럽의 문화는 무척이나 달랐다. 괴테가 말한‘세계문학’은 이러한 관점에서 말하자면 아마도 의의가 없진 않을 것이다. 그러나 지리공간은 단지 문화 차이를 제약하는 요소 가운데 하나이지 그 전부는 아니다. 종교, 정치, 경제, 기술, 연령, 성별 등도 차이를 만들어낸다. 만약 자본 주도의 전지구화가 어떠한 차이와 충돌을 격화시킨다면 새로운 형태의 분열은 마찬가지로 피할 수 없는 일일 것이다. 루슈디(S. Rushdie)의 『악마의 시』는 다른 종교집단들이 모두 받아들일 수 있는‘세계문학’인가? 해리포터 씨리즈는 서로 다른 연령대 모두가 열광하는‘세계문학’인가? 어떤 지리적 장애도 이제 특별히 중요하지 않게 되었는데, 그러면 세계는 이제 하나의 세계가 된 것인가? 지리 이외의 측면에서 말하자면 괴테 또한 비교적 천진한 노인네인 듯하다. 아마도 괴테는 자신이 말하는‘세계문학’이란 다양성과 충돌을 수용하는 것이며 결코 동질화된 문학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면 그의 예측은 아무런 의미도 없게 되는데 왜냐하면 문학은 원래부터 그러하기 때문이다. 그보다 한참 이전에도 세계의 문학은 바로 이러한‘세계문학’, 즉 같기도 하고 또 다르기도 한 문학, 공자가 말한 대로‘타고난 것은 서로 비슷한데 습관으로 인해 서로 멀어진’문학, 지금 말로 하면 인성은 서로 통하나 문화적으로 차이를 지닌 문학이었다. 그리스, 이집트, 인도, 아랍의 문학 등은 이처럼 줄곧 조용히 세계와 대륙의 지각판을 뛰어넘었고 결코 어떤 특정지역의 집단에 독점되지 않았다. 당시 그들 문학이 세계에 전파될 수 없었던 것은 전파기술이 낙후한 탓이지 문학 자체와는 결코 관계가 없다.

김하림 옮김

 

 


왜 일본語문학이냐

 

 

김석범 金石範

재일조선인 소설가. 장편소설 『화산도(火山島)』로 마이니찌예술상(每日藝術賞)을 수상함.

 

 

‘세계문학’에 대해 한마디

 

문학이 언어예술인만큼‘세계문학’과는 언어, 그것도 세계 모든 언어가 아니라 일정한 언어가 매개되어 있는 실정이다. 현재의 세계문학은 영어 아니면 영어에 준하는 프랑스어, 독일어 등과 연결되어 있다. 소위 세계언어로 통하는 영어는 따로 번역이 필요없는 1차적 조건을 차지하고 있어 다른 언어권에 장애와 불평등을 낳고 있다. 영어가 아닌 기타 언어권의 문학은 우선‘세계’에 읽혀야 하므로 영어 등으로의 번역이 대전제가 된다.‘세계문학’적 내용이 갖춰져 있다 하더라도 알려지지 않으면 안 보이는 것이고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서구 근대(국민)국가 및 시민사회의 성립과 더불어 국민문학(national literature), 근대문학이 일어났다. 유럽대륙의 지리적 통일성 등에 따른 교통망의 발달로 각 나라 사이에 교역·교류가 왕성해지면서, 국민문학간의 교류가 이루어지고 국민문학이 국경을 넘는 문화적 조건이 성숙되었다. 게다가 세계제국주의 국가인 영국의 언어가 보편성을 얻게 되고 서구 언어간의 유사성, 공통성이 바탕이 되어 국민문학간의 테두리를 넘어서는 문학 개념이 생긴 것이며, 처음부터 외따로 세계문학이 존재했던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서구중심의 세계관이 세계문학 개념의 밑바닥에 깔려 있는 것이다. 즉 제국주의 국가로 이어지는 근대 국민국가 형성이 세계문학 개념을 낳은 것이고‘국민문학’‘지역문학’이 진정 훌륭하다면 그것이 곧 국경을 넘는‘세계문학’이 되는 법이다.

‘어떻게 하면 세계문학의 수준 내지 차원에 도달할 수 있느냐, 그 길은 무엇이냐’라는 물음은 여기서는 논외의 문제이며 그 전에 어떻게 하면 좋은 작품을 쓸 수 있는가가 문제이다.

 

왜 ‘일본語문학’이냐

 

일본처럼‘단일민족’국가의 경우 일본문학-국문학(國文學)은 일본국, 일본어, 일본국민의 삼위일체로 이뤄진다. 근대 일본은 제국주의의 계단을 서둘러 올라가는 과정에서 국민국가로 형태를 갖추며 문학도 그 뒤꽁무니를 (근대국가 형성의 이데올로기적 역할을 분담하면서) 따르게 된다.

일제시대에 식민지 조선은 일본제국의 일부분이었으며, 1920년대부터 나타나기 시작한 재일조선인문학(이 명칭은 해방후에 지어졌다)은 응당 하위문학으로서의 일본문학의 일부였고 동화, 섭취 대상이었다. 그런데 일본이 패망한 해방후에도 오랫동안 재일조선인문학은 (사소설私小說이 주류인) 일본문학이었으며, 일본문학에 순응하는 일이 당연한 것으로 간주되어왔다.

재일조선인문학은 일본어로 씌어 있지만 작가는 일본국민도 일본인도 아니다. 일본문학을 구성하는 3요소 중 공유하는 것은 문학 형성의 근간인 언어, 일본어뿐이다. 그러니 일본어를 사용한다고 하여 재일문학을 일본문학이라고 봐서는 안된다. 이것은 편파적인 언어속문주의(言語屬文主義)이다.

재일조선인은 일본의 조선에 대한 식민지배 때문에 조국을 멀리하게 된 디아스포라이며, 그 디아스포라에 의한 문학이 재일조선인문학이고 세대를 거쳐 변용(變容)되면서 지금에 이르고 있는 것이다. 나는 재일조선인문학은 일본문학이 아니라‘일본語문학’이라고 주장하는데, 내 주장의 골자는 재일조선인문학이 과거 식민지 지배자의 언어인 일본어로 작품활동을 하면서도 조선인 작가로서의 (문학적) 자유를 자기의 것으로 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결론은 할 수 있다는 것인데, 문학은 다른 예술분야와 달리 언어로 성립되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문학은 언어에 의하여 언어(일본어의 구속)를 초월하는 것이다. 이때 언어는‘국가어-국어’의 틀을 개별적(민족적) 형식이 아닌 언어의 내재적인 것(예컨대 번역할 수 있는 측면)을 통해 초월한다. 틀에서 벗어나는 이 초월이 바로 보편성에 이르는 것인데 그것을 가능케 하는 요인, 힘이 바로 상상력이다.

 

일단 상상력에 의해 공중으로 쏘아올린 허구(fiction), 내가 원하는 것은 사소설적이 아닌, 완벽에 가까운 허구, 건축물과도 같은 공간을 이루는 허구이다. (…) 허구의 세계에서 말이 변질되어 말 그 자신이면서도 그렇지 않은 관계가 생긴다. 그러나 이때 말의 개별적(민족적 형식에 의한) 구속이 그 속에 내재하는 보편적 인자로 인해 풀어지는 순간의 지속이 나타난다. 일본어에 의해 환기된 이미지의 세계는 이미 일본어가 아니더라도 만들 수 있는 이미지의 세계로 연결된다. 그곳에서 생성된 일종의 가역적(可逆的)인 공간은 일본어의 절대적 지배에서 벗어날 수 있는 새로운 공간일 것이다. 분명히 상상력에 의해 부정되어 자기를 초월한 허구의 언어가, 스스로 열린 세계가 된 것이다.(졸고 「재일조선인문학(在日朝鮮人文學)」, 『岩波講座: 文學』)

 

간추려 말해서 이것이 재일조선인문학이 일본문학이 아니라 일본어문학이라는 나의 주장의 근거이며, 동시에 일본어의 주박(呪縛)을 풀어내는 나의 작가적 자유의 근거이기도 하다. 재일조선인문학이 (적어도 『화산도火山島』를 비롯한 김석범 문학이) 일본문학이 아니라 일본어문학이라고 여기서 새삼스레 말하는 것은, 그것이 일본의‘국민문학’의 틀을 넘어서 보편적 세계에 이르는 길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요즘 한국에서는 일본문학 연구와 더불어 재일조선인문학에 대한 관심과 연구가 깊어지면서 많은 연구성과가 나오고 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한국의 일본문학 연구에서 재일조선인문학을 일본문학으로 보는 관점이 아직도 여전하지 않은가 싶다. 종래와 같이 재일조선인문학을 일본문학으로 보는 관점에서는 재일문학이 객관적으로 독자성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기 어렵다. 과연 200자 원고지로 2만 2천매가 넘는 장편 『화산도』가 일본문학이겠는가? 나는 일본문학계에 씁쓸한 대답을 던져본다, 일본문학이 아니라 일본어문학이라고. 원래‘국’문학인 일본문학도, 새로 나오는 일본어문학까지도 통틀어서 높은 단계의 일본어문학 개념을 세우는 것이‘국민문학’의 틀을 벗어나 세계문학으로 나아가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한국문학계에서도 재일문학을 일본문학으로 간주한다면 그것은 일본의‘국민문학’의 테두리에 갇혀서 재일문학을 객관적으로 보는 시각을 마비시키는 것이며 이는 나아가 한국문학 자체가‘국민문학’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계로 작용할 것이다.

문학은 국경을 넘는 것이며, 언어에 의거하되 언어를 초월하는 것이다. 그것이 문학의 보편성이며, 구체적(개별적)이고도 보편적인 예술 일반의 본질과 맞먹는 것이다.

 

 

 


세계문학과 몽골문학

 

 

롭상도르찌 을지터그스 Ulziitugs Luvsandorj

몽골의 시인이자 소설가. 시집 『처녀시집』 『외로움의 연습』, 소설집 『안경 속에 남은 그림』등이 있으며, 시집 『나뭇잎이 나를 잎사귀라 생각할 때까지』가 우리말로 번역되어 있다.

 

 

세계문학과 나의 문학

 

단순히 나 자신의 문학만이 아니라 몽골문학은 항상 세계에 열려 있다. 우리 몽골 문학인들은 해외문학의 흐름에 늘 관심을 가지고 주목해왔다. 유목민은 전통적으로 개방적이며 자유로운 정서를 갖고 있다. 또 지리에 관한 지식에 해박하며, 인접한 나라뿐 아니라 멀리 있는 나라의 문화에 대해서도 가능한 한 잘 이해하고 올바른 정보를 가지려고 애쓴다.

사회주의의 폐쇄적인 시대에도 몽골 문학인들은 러시아어를 통해 뛰어난 서구 작가들의 작품과 접촉하고 있었으며, 몽골 독자들은 그러한 작품들을 잘 알고 있었다. 20세기 몽골 독자들은 헤밍웨이, 오 헨리를 똘스또이나 체호프 못지않게 잘 알고 있었다. 단떼, 쎄르반떼스, 셰익스피어 등의 작품들이 모두 반세기 전에 몽골어로 완역되어 나왔다. 이처럼 몽골 작가들은 자신들이 결코 세계문학에서 별도로 분리되어 있다고 생각지 않았다. 가르시아 마르께스의 『백년 동안의 고독』은 1980년대에 세계 여러 나라에 소개되었지만 몽골 작가들은 이 경이로운 소설을 이미 1970년대에 접했다. 나는 대부분의 몽골 작가와 마찬가지로 문학이 단순히 한 나라의 국민적 범주, 해당 언어권 내에서만 성장·발전하는 것이라고 생각지 않는다. 나 자신도 늘 외국의 우수한 문학과 접하기 위해 노력하고, 내 작품이 가능하면 다른 언어권의 독자들에게 소개되기를 희망한다.

주의해 살펴보면, 대개의 경우 작가들의 정신적 수준이 높아질수록 사고의 틀이 자국에 고착되지 않고 자신의 범주를 뛰어넘는 현상을 많이 볼 수 있다. 회화에서 흔히 나타나는데, 앙리 마띠스(Henri Matisse)의 경우 그의 작품세계에 아시아 예술이 매우 큰 영향을 끼쳤다. 문학의 예를 들어 말한다면, 처음에 중남미 작가들 사이에서 큰 힘을 지녔던‘마술적 리얼리즘’은 이미 중남미라는 국지적인 영역을 넘어 세계 모든 나라의 작가들이 즐겨 사용하는 창작기법이 되고 있다.

나의 문학세계에 특별히 영향을 미친 것은 러시아문학이라 할 수 있다. 똘스또이, 도스또옙스끼, 아흐마또바(A. Akhmatova), 쯔베따예바(M. Tsvetaeva), 블로끄(A. Blok) 등의 작가·시인들은 문학적 사고가 형성될 시기에 내게 매우 큰 영향을 준 사람들이다. 한편 사후 1세기 뒤 한 몽골 작가에게 영향을 미친 그들도 생존시에는 자신의 문학적 영감을 다른 나라의 문학에서 얻었다. 다시 말해 러시아 작가들에게 프랑스문학이 적잖은 영향을 미쳤으며, 프랑스 예술에 러시아 예술이 큰 추동력을 준 경우도 많다. 러시아 작가들뿐 아니라 내 작품에 영향을 준 다른 나라 작가들도 적지 않다. 나는 중남미문학을 좋아한다. 그 대표적인 예로 보르헤스, 꼬르따사르(J. Cortázar)의 작품을 들 수 있다.

사회주의 시절 러시아문학의 한 흐름인 사회주의 리얼리즘은 몽골 대부분의 작가들에게 특별히 지대한 영향을 주었으며, 그들이 이 사조에 치우친 작품들을 주로 생산해냈다는 것은 숨길 수 없는 사실이다. 이것은 한 세대를 지배했던 현상이며, 당시 사회주의 리얼리즘은 유일한 사조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1990년대 몽골의 민주혁명 이후 이같은 편향된 주의가 제거되고, 이제 몽골의 작가·시인들은 어떤 한 사조에 경도되지 않고 자신의 취향과 사고에 따라 작품을 창작하게 되었는데, 이것은 매우 바람직한 현상이다. 오늘날 몽골인들은 가능한 모든 장르와 창작기법을 활용하여 자유롭게 창작활동을 한다. 이러한 상황은 때때로 상당히 혼란스런 형태를 띠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이면에는 나름대로 창작방법을 모색하는 긍정적인 측면이 있다.

한가지 중요한 점을 언급한다면, 몽골인들은 세계문학에 관심을 갖고 주목하고 있으나 대다수의 몽골 작가들은 민족문학의 전통에 기초하여 작품을 창작하는 것을 매우 중시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현대의 몽골 작가들 대부분은 몽골인의 정서적인 특징이 자신의 문학 안에 깊이 표현되어야 한다는 점에서 일치된 견해를 보인다.

일반적으로 작가는 (만약 그가 진정한 작가라면) 어떤 한가지 사조를 위해 작품을 창작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작품을 연구하는 비평가나 연구자 들은 후에 어떤 한가지 사조에 관련지어 작가의 작품을 설명하는 경향이 있다. 도스또옙스끼가 작품에 근거가 되는 철학적 사조를 미리 생각하고 작품을 쓰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찌 되었든 우리는 20세기 지성의 세계에 도스또옙스끼가 끼친 영향을 익히 알고 있다. 그러나 작가는 결코 이러한 영향력과 사조를 미리 예상하고 의식적으로 창작행위를 하지는 않는다.

나는 작품을 창작할 때 외국의 독자들을 유념해서, 다시 말해 세계의 어느 한 나라를 의식해서 그 나라 독자들의 바람과 욕구를 충족시킬 목적으로 글을 쓰지는 않는다. 내 몇편의 시가 10여개국의 언어로 번역되어 소개되었지만, 어느 한 나라에서 많은 독자층을 확보했다고 다시 그 나라 독자층의 기호에 맞추는 식으로 글을 쓰지는 않는다. 일반적으로 어느 누구도 그런 태도로 작품을 쓴다고 생각할 수는 없다.

나는‘경향 또는 사조’라는 단어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지는 않는다. 이것은 작가에게 부차적인 문제이다. 우리 작가들의 주된 목적은 “끊임없이 쓰고 또 쓰면서 가장 진실하고 진정한 작품을 창작하는 것”이다.

 

세계문학에 대한 생각

 

세계문학에 대한 문제는 보편성과 특수성에 관련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민족마다 서로 다른 풍습, 특수한 문화와 정서를 가지고 있다. 그 모든 것을 제거하고‘세계’라는 주소를 가진 공통의 문학을 이루려고 한다면, 이것은 모든 것 가운데 가장 이루기 힘든 일이며 또한 무의미한 일이 될 것이 자명하다. 한가지 예를 들면 좀더 쉽게 이해될 것이다. 똘스또이의 『전쟁과 평화』가‘세계적인 소설’이라는 데에는 누구나 동의할 것이다. 이 작품에는 러시아의 삶이 아주 깊숙이 자리하고 있다. 작가가 이 작품에서 러시아인의 삶을 통해 인류가 직면한 문제점에 심도있게 접근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그의 작품이 세계문학의 보고(寶庫)에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셰익스피어의 극예술 중 중국인이나 한국인 들에게 이해될 수 없는 것은 없다. 셰익스피어가 세계적인 시민이어서가 아니라 작품에서 보편적인 인간의 마음, 즉 인간 내면의 세계를 적실하게 조망하고 보여주었기 때문에 오늘날 그가 세계시민처럼 보이는 것이 아니겠는가?

사람들에게는 저마다 지적인 수준의 차이가 있다. 그러나 민족이 다르다는 것은 그러한 인간적 차이가 아니라 언어와 풍습, 문화적 범주의 문제이다. 인간의 문제를 다루는 문학에서 언어·문화적 경계라는 것을 특별히 강조해 이야기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진정한 예술작품이라면 이러한 것들은 그다지 큰 문제가 아닐 것이다. 문학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인간의 본질을 작가가 어떻게 표현해내느냐 하는 것이며, 독자들은 그 점을 잘 이해하고 파악하는 것이 필요하다. 예컨대 팔레스타인 사람은 어떻게 음식을 만들고 마다가스카르섬에서는 어떻게 결혼을 하는지에 대한 지식을 문학을 통해 얻으려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것은 저널리즘 혹은 어쩌면 인식의 낮은 단계의 문제일 것이다.

내가 주목한 바로는 문학의 형태는 시대마다 변하지만 그 이면의 문학적 본질은 변하지 않는 것이다. 여기서 형태란 사조, 새롭다고 일컬어지는 여러가지 경향들, 사상성을 지닌 추구와 탐색 등을 내포한다. 원래 인간은 이 세상에 와서 늘 무언가를 추구하며 살아가는 존재이며, 이러한 본질은 문학과 예술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그 시대와 사회의 다양한 변화·발전에 따르는 모든 현상들이 문학에서 다양한 추구와 새로운 경향 또는 유형으로 나타난다.

문학은 그 나라, 그 시대, 그 사회의 가장 높은 수준의 정신적 표현이므로, 자신을 새롭게 개혁하고 전진해나가는 과정이 그 속에서 이루어지고 발전하는 법칙을 갖는다. 이러한 발전법칙은 또한 세계문학과의 상호 관련 속에서 한층 더 높은 발전을 이루는 속성을 지닌다고 하겠다. 문학이 정치적 도구로서가 아니라 인간의 본질을 문제삼는 본연의 자리를 지킨다면, 문학은 어떠한 외적인 힘에도 종속되지 않을 것이다.

 

세계문학적 성취와 국민문학

 

나는 내가 좋아하는 작가를 예로 들어 세계문학적 성취와 국민문학의 관계를 말하고 싶다. 가르시아 마르께스는 중남미의 작가인가 세계 작가인가? 밀로라드 빠비치(Milorad Pavic)의 조국 쎄르비아공화국은 작은 나라라고 할 수 있지만, 그는 오늘날 21세기 최고 소설가의 한사람으로 평가받는다. 내가 흠모하는 작가 중 하나인 포크너(W. Faulkner)는 미국 미씨씨피 지역의 작은 마을에 사는 몇명의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썼다. 그러나 그의 소설은 가족에 관한 이야기의 차원을 넘어선 인류의 역사이며, 어쩌면 가장 아름답고 가장 흥미진진한 역사일지도 모른다.

내 삶과 문학세계에서 가장 기본적이고도 중요한 점은 내가 몽골인이며 몽골어로 글을 쓴다는 사실이다. 만일 내가 몽골인으로서 자국어를 완벽하게 사용해 창작할 수 있다면, 그 자체가 세계적 수준의 문학이 될 것이다. 만일 내가 최고의 역량을 발휘하여 우리 민족문학을 새롭게 한 차원 높이 끌어올릴 수 있다면, 이것은 곧 나의 문학, 더 나아가 몽골문학이 세계적 수준으로 향상된다는 것과 같은 의미를 지닌다고 생각한다.

모든 새로운 작품들은 본래 자기 민족의 문학적 토양에서 원천을 얻은 것들이다. 이러한 작품들은 오랜 세월을 거쳐 잘 준비된 토양 위에서 자라난 아주 파릇파릇하고 싱싱한 나뭇잎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어느 나라의 민중문학이든 그 속에는 그 민족의 정신적 자양분과 민족적 정서에 고유한 표현들이 흡수되어 있다. 그러한 이유로 그 나라 민중문학에서 그 민족에 존재하는 최선의 것, 가장 좋은 것들을 찾아볼 수 있다. 민족문학에 기초하여 현대의 아주 새롭고 참신한 작품을 창작한 놀라운 예를 우리는 가르시아 마르께스의 작품에서 볼 수 있다. 이와같이 어느 나라 작가든 자신의 민족문화와 그 특성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 창작을 하는 데 매우 중요한 일이 아닐까 싶다.

세계문학을 공부했다면 그만큼 우리는 세계의 보편적인 성향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은‘자신의 문화에만 의존한다’는 편협한 사고에서 벗어나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문학이라는 것은 서로 다른 언어로 씌어진 세계사이자 인간사이다. 나는‘몽골 작가’이기를 원하지만, 이것은 단순히 몽골인들만 이해할 수 있는 작품을 쓴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또 나는 세계 작가가 되기를 희망하지만 이것은 단순히 어느 나라 사람들이 읽어도 곧바로 이해할 수 있는 세계화된 또는 보편적인 사상을 담은 책을 쓰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는 말도 아니다.

일반적으로‘세계화’라는 것은 현대의 정치·경제적 사고의 범주에서 보면 매우 새로운 관점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지구화, 즉 경계 없는 사고는 문학의 범주에 본래부터 존재했으며, 인간이라는 하나의 큰 문제의식을 지닌 문학의 측면에서는 그렇게 새로운 말도 새로운 관점도 아니다. 진정한 세계화는 민족이 저마다 자신의 고유성을 갖고 스스로 존재하고 살아갈 권리를 갖는다는 의미라고 본다.

 

한국문학에 대한 생각

 

시인 한용운(韓龍雲)의 「알 수 없어요」는 내가 읽은 한국시 가운데서 첫번째로 깜짝 놀란 작품이었다. 울란바타르대학 이안나 교수가 번역한 『한국의 명시 50선』이라는 책에서 나는 이 시를 읽었다. 동양인이 썼다는 것을 분명히 느끼게 하는, 매우 심오하면서도 깨달음을 기조로 하는 문학성 풍부한 이 시에서 나는 한국문학의 높은 발전수준과 아주 먼 미래를 예감할 수 있었다. 또 올여름에는 황지우의 『나는 너다』라는 시집이 체렝호를러(Tserenkhorloo)의 번역으로 나왔다. 이 시집의 몇몇 시는 한국문학의 색조와, 한국의 과거와 현재의 삶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시 이외에 소설로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 번역되어 나온 것으로 알고 있다.

이런 몇권의 책이 나오기는 했지만 일반적으로 몽골 문학인이나 독자 들은 한국문학에 대해 그리 잘 알지 못하는 것이 사실이다. 최근 한국과 몽골 두 나라의 관계가 활기를 띠면서 이제 조금씩 그 결실이 나타나고 있으며, 이처럼 문학서들이 번역되고 있는 것은 매우 고무적인 일이라 하겠다. 그러나 작품의 의의가 적은 책들도 적지 않게 나오고 있다는 점도 주목된다. 문학작품이 다른 나라에 소개될 때 가장 먼저 생각해야 할 점은 문학적 가치가 있는 작품을 올바로 선정하는 일이 아닌가 한다. 실제로 번역 소개되는 어느 한사람에 의해 그 나라의 문학에 대한 개괄적인 사항을 이해하고 알게 되기 때문에 이 점은 매우 신중하게 접근해야 할 문제라고 본다.

몇년 전부터 나는 소설가이자 시인인 남편과 함께 『몽골 명시선집』 『몽골 우수단편소설집』 『몽골 우수중편소설집』이라는 통시적인 몽골문학선집을 출간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한국어로 창작된 가장 우수한 시들, 가장 우수한 단편소설들을 먼저 번역한다면 한국문학을 몽골이나 그밖의 나라에 소개하는 데 큰 실효를 거둘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이와같은 작업을 기획하여 진행한다면 이에 적극적으로 동참하고 함께 작업할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다. 양국 문학을 알리는 가장 중요하고 가장 결실있는 작업이 좋은 책을 번역하고 소개하는 일임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문학의 공동활동이라는 것은 단순히 두 나라 문학인들의 우호적·지적 교류뿐 아니라 두 나라 독자들의 좀더 폭넓은 관계가 있을 때 가능하다고 본다. 세계화라는 단어는 바로 이렇게, 좀더 분명히 말하면, 서로를 인식하고 서로에게서 배우고 발전하는 공동의 활동이 있을 때 비로소 쓰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올해 8월 나는 속초에서 열린‘아시아 시낭송회’에 참석하여 한국 시인들을 만날 기회를 가졌다. 이런 행사는 일회적이긴 했지만 서로에 대한 관심을 넓히고 두 나라의 문학을 교류하는 좋은 만남의 장이었다고 생각한다. 이런 기회가 더 자주 있었으면 한다. 이런 기회의 연장선상에서 10월말 『나뭇잎이 나를 잎사귀라 생각할 때까지』라는 내 시선집과 남편 아요르잔(Ayurzana)의 단편소설집 『눈의 전설』이 동시에 출간되었다. 앞으로 두 나라 간에 문인뿐 아니라 작품을 통한 교류가 한층 활기있게 이루어지기를 바란다.

이안나 옮김

 

 

 

 


탈 아파르트헤이트 시대의 남아공문학

 

 

멕 쌔뮤얼슨 Meg Samuelson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문학평론가. 스텔런보시대 영문과에서 교편을 잡고 있다. 저서로 『국가를 추억하고, 여성을 망각하기?-남아공 변혁운동 이야기』(Remembering the Nation, Dismembering Women?: Stories of the South African Transition) 등이 있다.

 

 

이 글에서 나는 세계문학과의 연관 속에서 남아프리카공화국 민족문학의 기능을 소략하게 탐구해보려고 한다. 나는 이처럼 큰 주제를 다소 소박하게 접근하려 하는데, 이는 남아공문학을‘인도양 세계’의 문화적 영역으로 끌어들임을 의미한다.

20세기 인종차별의 대표적 상징으로 전세계에 각인된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는 역설적으로 남아공문학을 세계문학의 정전으로 부각시키는 데 중차대한 역할을 담당했다. 이는 국내외 출판사들로 하여금 남아공 내에 산적한 다양한 문제들 중 특정한 문제에 반복적으로 관심을 기울이고 집착을 갖도록 유도했다. 이를 통해 남아공의 작가들은 영어권 국가의 작가들을 대상으로 수여하는 문학상 중 가장 권위있는 맨 부커(Man Booker)상 후보에 여러번 이름을 올렸다. 이러한 관심과 집착이 희미해져갈 무렵, 남아공 작가들은 타자의 역사와 전통에 내밀한 관심을 쏟음으로써 좀더 새로운 방식으로 남아공을 외부세계와 연결하고자 했다. 내가 이 글에서 특별하게 언급하고 있는‘인도양 세계’가 바로 그곳이다. 남아공문학은 바로 이곳에서 돌파구를 찾고 있다.

근자에 이사벨 호프메이어(Isabel Hofmeyr)가 지적한 것처럼, 문학과 문화의 세계화 및 초국가주의를 둘러싼 학문적 논의는 일반적으로 남과 북의 관계에만 집중되고 있다. 인도양을 다소 느슨한 개념의 문화판으로 인식하게 되면, 남부 아프리카에 위치한 남아공의 작가와 학자 들은 새로운 학문적 방향과 지침을 제공받을 수 있다. 대서양과 인도양, 두 대양 사이에 낀 남아공의 지리적 위치는 지구적 소통과 교환으로 지금까지 수행되어왔고 또 수행될 수 있는 모든 형식을 새롭게 일신하는 계기를 제공할 것이다. 남아공문학이‘대서양’담론이나 시학(詩學)과의 관계 속에서 어떤 방식으로 기능했는지는 이미 소상히 밝혀져 있다(이와 관련한 대표적인 학자가 호프메이어이다). 그러나 인도양의 경우는 전혀 다르다. 남아공과 인도양의 관계는 비교적 드물게 연구되어온 편이다.

남아공의 근대사는 인도양 세계와 떼려야 뗄 수 없다. 중국인과 인도인 그리고 인도네시아인과 기타 인종들이 (거개는 노예나 범법자로) 케이프(Cape) 지역에 끌려왔다. 이는 네덜란드가 인도양의 섬들에 동인도회사의 거점을 운영하던 17세기 중엽부터 시작된 일이다. 1860년 이후부터는 인도인들이 대거 식민지 나탈(Natal) 지역에 노동자로 편입되기 시작했다. 오늘날 남아공에 그 어떤 남아시아인보다 인도인 이주자들이 많은 이유이다. 특히 남부 아프리카에 유럽인들이 정착하기 아주 오래전부터 아프리카의 동해안은 인도양의 핵심지역으로서 항상 물건을 사고파는 아프리카인들과 아랍인들 그리고 인도인들로 북적거렸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부통령 품질레 음람보-응쿠카(Pumzile Mlambo-Ngcuka)도 최근에 언급했듯이, “마풍구베(Mapungupwe, 식민지 이전의 주요 도시국가)라는 고고학적 유적지에서 중국의 도자기 유물이 발견되었는데, 이는 중국이 남아공과 수천년 전부터 무역거래를 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인도양 세계는 남아공의 국가적 전통의 핵심이다. 반(反)아파르트헤이트 투쟁의 갈급한 필요성 때문에 과거에는 관심의 대상에서 소외되었던 지역이다. 이 지역은 남아공 민족문학과 세계문학에 관한 새로운 해석틀을 제공할 것임에 틀림없다. 민주적인 첫 선거를 치르고 넬슨 만델라가 대통령으로 취임한, 그리하여 마침내 아파르트헤이트가 공식적으로 종료된 1994년 이후로 남아공 민족문화의 일부를 구성하는 인도양 항로를 재추적하는 문학의 출현이 가속화되었다. 곧 출간될 「인도양 끝머리에 집짓기-남아공문학의 위치 조정」이라는 글에서 나는 이러한 기획을 실행할 목적으로 아파르트헤이트 이후에 출판된 소설과 가족 수기 등 8권의 텍스트를 동원해 상세한 분석을 시도하고 있다.

나는 이를 통해 남아공문화가 인도양 항로를 가로지르며 구성한 다양성을 개략적으로 드러내고자 한다. 인도양 항로를 재추적하려는 운동과 그에 충실한 문학텍스트들은 과거 대서양 패러다임에 밀린 인도양 패러다임을 남아공의 문화연구에 소개함으로써, (자국의 위치에 따라) 북이나 서구와의 곤혹스런 관계만을 고민하던 사람들의 관심을 돌려세워 소위 탈식민화하는 세계에 좀더 풍성한 문화적 생산물들을 제공해줄 것이다. 과거 백인중심의 남아공이라는 배타적 해양에 닻을 내렸던 항로들은, 그것들이 항해사적인 의미이건 혹은 문학적인 의미이건 간에, 외국인 공포증에 대처하는 분석틀을 정교화했으며, 동시에 아파르트헤이트식의 인종차별주의를 처음으로 명확히했다(이는 아프리카인들을 제 땅에서‘이방인’으로 만들었으며, 아시아인들을 언젠가는 추방해야 할 외국인으로 간주케 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는 대륙 내의 아프리카인들과 아시아인들에 대한 적대감으로 전환되어 탈아파르트헤이트 시대인 오늘날까지도 그 흉악한 머리를 쳐들고 있다.

오늘날 인도양으로 눈을 돌리는 일은 고향과 소속감 그리고 아프리카성을 둘러싼 일련의 문제들을 다시 생각하게 함으로써 부패한 과거의 전제정치의 종말을 극복하게 함은 물론, 국가 나아가 민족문학을 상상하는 태도를 획기적으로 바꾸는 데 일조할 것이다. 이는 더이상‘닫힌 체계’로서의 국가 혹은 고향의 은유가 의미를 지닐 수 없음을 드러낸다. 오히려 인도양 세계라는 유연한 경계에 위치한, 다양한 지역을 아우르는 항구를 향해 가는 배가 되어야 할 것이다. 인도양을 가로지르고 재영토화하는 행위는 남-남 연대와 상호간의 호혜적 관계, 나아가‘민족주의와 보편주의’의 혼융을 구축하는 데 예지를 제공할 것이다. 이를 통해 반제국주의 전선이 조성될 것이고, 아울러 새로운 국가의 집터가 축조될 것이다. 탈아파르트헤이트 시대인 이즈음, 이는 북과 서구로 가는 길목을 가로질러 새로운 출로를 제시할 것이고, 이를 통해 남아공문학을 민족적인 것과 지구적인 것 사이에 유연하게 위치시킴으로써 새로운 대안적 모습을 탄생시킬 것이다.

국가를 새롭고 도전적인 방식으로 이해함으로써 지구촌 남부의 전도양양한 문화적 지향을 열어젖히는 일, 이것이 세계문학(들)을 신선하게 이해하는 일이며, 그것은 곧 이런 모습 속에서만 가능하다.

이석호 옮김

 

 

 


폭력의 유산

 

 

르끌레지오 Jean-Marie Gustave Le Clézio

프랑스의 소설가. 장편소설 『조서』 『대홍수』 『혁명』, 단편집 『발열』, 평론집 『물질적 황홀』 등이 있다.

 

 

무엇보다도 폭력성에 대해서 이야기해야 할 것 같다. 폭력에는 여러 종류가 있다. 문학, 영화, 음악 속의 폭력. 그런데 이 모두가 실제 삶의 폭력성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폭력은 현대의 문화에 편재(遍在)한다. 언어적 폭력, 난폭한 감정, 정치적 폭력 등 온갖 형태로 우리의 삶에 존재한다. 왜 폭력이 발생하는지에 대해 정확한 원인을 파악하기는 어렵다. 아마도 세계적인 문제인 전쟁 같은 것에서 기인한 것이 아닌가 싶다. 전쟁 하면 일반적으로 1914년과 1939년에 전세계를 포화로 몰아넣은 두차례 세계대전을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보다도 국지전이면서 각국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민족해방전쟁, 한국전, 베트남전, 알제리전, 그리고 최근의 아프가니스탄전과 이라크전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전쟁과 우리 현대의 폭력성은 어떤 관계가 있는 걸까? 내 생각에는 이중의 연관이 있다. 물리적인 폭력에서 정신적인 폭력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이 폭력에 일반 시민이 감염되고, 그렇게 되면 도덕의 기본마저 흔들리게 되는 것이다. 도스또옙스끼의 『죄와 벌』에서 라스꼴리니꼬프가 던진 “신이 부재한다면 어떤 행동이라도 용납이 되는가” 하는 식의 개인 차원의 형이상학적인 질문과는 무관한 상황이 된다. 오히려 무력이 유일한 진리라면, 또 군대의 힘이 국가를 넘어선다면 우리의 삶은 어떻게 되는가, 어떻게 하면 요행에만 의지해야 하는 행복이 아니라 진정한 행복이 가능해질까 등 집단의 운명에 대한 질문을 해보게 된다. 또 한편으로는 문학(또한 예술 전반)은 문학만을 위해 존재할 수 없으며, 예술가들은 보편적인 아름다움을 보여준다고 더이상 주장할 수 없게 된다. 그들은 슬픔과 고독과 혼돈을 전달하게 될 것이다. 현대의 삶의 환경은 유럽, 러시아, 아시아 그리고 아프리카에서 폐허 위에 구축된 것이다.

 

프랑스와 한국은 모두 폭력이라는 유산을 물려받았다. 양국은 유사한 국토 면적, 동질적 문화라는 공통점뿐만 아니라 전쟁, 잔인한 외국 점령군의 체험, 국토분단이라는 경험을 공유하고 있다. 그리고 몇십년의 간격을 두고 서로 다른 배경의 역사를 바탕으로 리얼리즘을 탄생시켰다. 점령과 전쟁을 겪으면서 한국문학과 프랑스문학은 이 폭력성의 위급함을 표현해야 할 필요를 느꼈던 것이다.

문학에서 흔히 19세기말에 디킨스, 졸라, 고골, 모빠쌍에 의해서 리얼리즘이 등장했다고 이야기된다. 그러나 20세기 초반에 세계를 뒤흔든 전쟁들이야말로 더욱더 폭력적이었다. 멕시코에서는 1910년에 혁명으로 독재를 타파하는데 이 과정에서 1백만의 사상자가 발생한다. 이것이 바로 러시아의 볼셰비끼혁명과 공산당정권의 전조이다. 바로 이런 피바다 속에서 리얼리즘, 오늘날 존재하는 진정한 리얼리즘이 탄생했다고 본다. 한국의 근현대 작가들인 김유정(金裕貞), 황석영(黃晳暎)의 작품에서 읽히는 씨니즘과 씁쓸함은 멕시코의 후안 룰포, 꼴롬비아의 가르시아 마르께스, 미국의 공황시대 작가들인 스타인벡이나 어스킨 콜드웰(Erskine Caldwell)을 생각하게 한다. 프랑스에서는 2차대전 이후에 작가들이 사회와 결별하는데 그것은 도르줄레스(Dorgelès)처럼 이제는 기억에서 사라진 작가들이 제기한 우파 이데올로기의 팽창보다는 파시즘과 유대인 학살에 대한 혐오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한국도 프랑스처럼 분노와 치욕의 시대를 경험한 바 있다. 한국전 이후에도 분단의 시련, 이데올로기 분쟁, 불가능해 보이던 화해를 경험했다. 한국의 대표적인 리얼리즘 작가들은 모두 저마다의 방식으로 파괴, 상처 그리고 그 뒤에 따르는 공허함을 다뤘다. 이상, 김유정은 룰포와 유사한 작품을 통해서 일상적으로 폭력에 노출되어 약육강식의 세상을 사는 서민의 삶을 그린다. 황석영의 「삼포 가는 길」에서도 유랑자, 무법자의 삶이 영감어리게 표현되어 있으며, 아주 아름다운 단편인 「잡초」, 그리고 이유없이 전쟁에 참가하여 정체성을 잃고 정신적 외상에 시달리다 귀환하는 베트남 파병 군인의 이야기를 다룬 「낙타누깔」 등에도 잘 드러나 있다. 전후 세상의 폭력은 이승우(李承雨)의 『식물들의 사생활』에서 최고조에 이른다. 특히 불구가 된 아들을 업고 연꽃시장에서 창녀를 찾아 헤매는 어머니의 모습이나, 기현으로 하여금 이룰 수 없는 사랑을 꿈꾸게 하는, 타락한 세상을 살아가는 젊고 청순한 순미라는 낯선 인물 속에서도 폭력은 역시 등장한다. 이 작품의 화자는 이란 영화감독 압바스 끼아로스따미의 「체리 향기」에 나오는 자신을 묻어줄 사람을 찾아나서는 주인공과 자신을 동일시하기도 한다. 「황색의 개」에서 이제하(李祭夏)는 전쟁의 상흔으로 성불구가 되어 자살을 시도하는 절망에 찬 사람을 등장시킴으로써 독재시대의 비인간적인 조건에 대한 메타포를 제시한다. 이청준(李淸俊)의 『예언자』에서 인간은 미래도 없고 온기를 모르며, 술 취한 자들과 창녀들만이 집거하는 거대하고 낮은 도시와 같은 존재로 그려져 있다.

 

앞에서 이미 2차대전 이후의 폐허에서 탄생한 프랑스의 참여문학에 대해서 이야기한 바 있다. 장-뽈 싸르트르의 단편소설과 희곡, 까뮈의 비관적인 작품들, 앙드레 말로의 빛나는 모험기, 쎌린느(Céline)의 비인간적인 리얼리즘 작품들이 바로 첫 참여문학 작품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오늘날 프랑스에서 참여문학은 진부한 것이 되었다. 요즘의 프랑스 젊은이들은 정치투쟁이나 이원론적 시각에 대해서도, 또는 모라스(Maurras), 바레스(Barrès), 도르줄레스 같은 작가의 글에 드러난 파시즘의 팽창에 대해서도 이해하지 못한다. 참여라는 말 자체가 오류나 배반의 동의어처럼 되어 경멸적인 의미를 포함하게 되었다. 알제리 태생인 까뮈는 알제리전쟁시에 자신의 사상보다는 알제리에 남아 있던 어머니가 소중하다고 말한 바 있고, 싸르트르나 한나 아렌트도 팔레스타인에서 발생한 비극에 대해서 침묵을 지킨 바 있지 않은가? 바로 이런 일련의 환멸, 상상력과 현실 사이의 단절로 인해서 현대 프랑스 작가들이 참여문학에 대해 흥미를 잃게 되었고 오늘날 내면의 탐구와 미학적 추구가 프랑스문학의 주류가 되었다고 여겨진다.

한국에서는 남미와 유사하게 작가들이 계속해서 과감하게 참여의 방향으로 문학을 지속해왔다. 온통 폐허가 된 나라에서 정신적인 피폐가 더욱 심했기 때문에 참여문학의 필요가 더욱더 강했을지도 모른다. 한국의 예술에서 폭력성이 표현되는 것은 과거 러시아 리얼리즘 작가들이나 드레퓌스사건 때 졸라의 참여 이유와 연결되어 있다. 한국의 참여문학은 실존하는 상태, 일상에서 인지되는 현실을 작품화한 것이다. 이제하의 단편소설을 읽어보면 비웃음, 공포, 폭력 그리고 가장 인간적인 감정들이 운명론적인 실패와 조롱에 혼합되어 있다. 지방정치에 대한 풍자적인 시각을 보여주는 「초식(草食)」은 후안 룰포의 단편들이나 가르시아 마르께스의 『백년 동안의 고독』을 연상케 한다. 또 이승우의 소설이나 황석영의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도 우리 시대의 위대한 영웅들이라기보다는 가난함과 폭력적인 환경에서 자신의 운명을 모른 채 살아가는 보통 사람들일 뿐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삶의 조건을 그대로 감수하고 있으며, 시련을 극복하는 데 무기력하다.

현재 한국영화는 이창동 감독의 경우처럼 문학작품과 깊이 연관되어 있는데, 등장인물들은 인간조건에 필수적인 덕목이며 미래를 견지하게 하는 인간의 명증(明證), 바로 오스카 와일드(Oscar Wilde)의 표현에 따르면 “절망의 예의”1)인 유머가 없다면 영원히 폭력 속에 갇혀 비관의 나락에 빠졌을 것이다. 인간의 미래는 별로 기대할 만한 것이 없다고 이제하의 흔들리는 주인공들은 말하는 것 같다. 「비」라는 이제하의 단편에서 파괴의 분노에 사로잡힌 작중인물들은 무엇보다도 자신들의 과거를 파괴하고자 한다. 가여운 여주인공 난이는 부드러운 몸짓, 비둘기에게 모이 주는 모습 등으로 독자의 기억에 남는다. 이 이미지들은 비오는 날 손가락으로 유리창에 그린 그림만큼이나 순간적이며 무의미하다. 그런데 이런 방랑은 특히 먹고사는 문제 때문인 것 같다. 황석영의 단편소설 속 여주인공처럼 지구상의 여성들의 노정은 바로 더 나은 삶을 찾기 위한 시도로 그 어떤 시적인 감미로움도 들어설 자리가 없는 것 같다. 그래서 마치 그런 감미로움은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든다.

이런 비관주의는 숨막히고 폐쇄적이며 출구가 없어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현대문학은 자유의 사상으로 출구를 연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짓밟힌 자들의 막강한 무기라 할 수 있는 스스로에 대한 조롱을 통해서이다. 앞에서 말한 대부분의 문학작품에서 익살, 웃음거리, 비웃음이 비극적인 요소에 혼합되어 있고 그래서 수용이 가능해진다. 김유정의 단편소설에서 우리는 주인공들의 익살스런 모험을 공유하게 된다. 등장인물들은 거칠고 못되고 폭력적이지만 그들은 생각이 워낙 굼뜨기 때문에 피해자들, 특히 탐욕의 대상이자 돈벌이가 될 만한 대상으로 여겨지는 여성들은 출구를 찾을 수 있게 된다. 「산골 나그네」에서 우리는 시골에서 불행한 여정을 겪는 헐벗은 한 여성의 이야기를 읽을 수 있는데, 결말부에 이르면 재미있는 악당소설 같은 느낌이 든다. 폭력적인 남성들이 오히려 여성에게 갈취당하는 것을 보면 여주인공이 꾀를 내어 어려운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황석영의 「삼포 가는 길」에서도 그러하지만, 특히 「장사의 꿈」에서 목욕탕 때밀이의 역사가 나오는데, 힘은 장사이지만 정신적으로 미숙한 주인공은 생계를 꾸려나가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그 일을 하고 있다. 그의 시선으로 보면 서민들의 삶은 예측 불허한 여러가지 사건으로 가득 차 있다. 전쟁의 가장 비극적인 순간에 대한 묘사가 있고, 폭격을 피해 피난을 떠나면서도 술 마시고 재미를 보는 사람들의 삶에 대한 이야기가 열정적으로 그려진다. 채플린의 영화에서처럼 희극적 요소가 바로 마지막 구원의 수단인 것이다.

한국의 리얼리즘 소설과 현대 단편들의 가장 큰 특징이라 할 수 있는 것은 단합의 힘, 공유의 느낌, 바로‘정(情)’이라는 단어로 표현되는, 프랑스어에는 대응어가 없는, 그래서‘가족정신’(esprit de famille)이라고 부를 수 있는 어떤 것이 아닌가 싶다. 가장 비극적인 상황에서조차 바로 이‘정’이 인간을 연결하고 응집하게 유도하고 모욕에 대해 저항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이승우의 『식물들의 사생활』에서 기현이 형에 대해 품는 사랑은 모든 감정을 초월하는 것이다. 증오, 질투, 삶의 원한 등 모든 것이 바로 이 감정에 포함되어 있고 그것을 파괴하기보다는 오히려 강화한다. 황석영의 「한씨연대기」와 『손님』에서는 재회의 우수(憂愁)가 해결 불가능한 지정학적인 문제를 대신한다. 한국문학의 가장 큰 힘은 바로 이러한 복합성에서 나온다. 폭력적인 맥락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여전히 의심에 가득 찬 유약한 존재로서 매순간 최선만큼이나 최악의 행동도 할 수 있으며, 서구문학에서의 주인공들(또는 반영웅적 주인공들)과 달리 완전히 혼자인 순간은 결코 없다.

한국문학은 누구도 완전히 안전하다고 생각하기 어려운 현대 도시사회를 끈기있게 관찰하며 동시대의 모습을 보여준다. 도시의 필수적인 폭력에서 아름다움이 태어난다. 서울이라고 하는 도시처럼 그 아름다움은 깨어진 거울과 같다. 그 거울의 독특한 광채는 우리로 하여금 미래의 천변만화(千變萬化)하는 이미지에 섞여 있는 과거의 오래된 그림을 일별하게 한다.

최미경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