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창작과비평

정기구독 회원 전용 콘텐츠

『창작과비평』을 정기구독하시면 모든 글의 전문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구독 중이신 회원은 로그인 후 이용 가능합니다.

 

허연 許然

1966년 서울 출생. 1991년 『현대시세계』 신인상으로 등단. 시집 『불온한 검은 피』가 있음. kebir@naver.com

 

 

 

슬픈 빙하시대 4

 

 

나에게 월급을 주는 빌딩 뒤에는 타임캡슐이 묻혀 있다. 콘돔이며 뭐 이런 것들이 묻혀 있단다. 기념이란다. 난 그래도 학생 때와 마찬가지로 끝까지 간 사람을 존경할 줄은 안다. 그나마 다행이다. 난 때로는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 말하기도 하고, 말할 수 있는 것에 대해 침묵하기도 한다. 따라서 나는 매우 실존적인 잡놈이다.

 

착각은 오류를 따지지 않는 법. 오늘도 나는 시내로 돈을 벌러간다. 돈 벌러 온 놈들이 잔뜩 몰려 있는 곳으로 15년째. 시내는 세상의 중심이다. 물론 착각으로 판명날 게 뻔하다. 개구멍에라도 빛이 들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나는 또 하루를 썩힌다. 욕을 내뱉으며 엘리베이터 앞에 선다.

 

가끔은 토할 것 같다. 돈 버는 곳에선 아무도 진실하지 않지만 아무도 무심하지 않다. 난 천성이 도 닦을 놈은 못 된다. 버틸 뿐이다.

 

밤마다 내가 사나운 백상아리가 되는 꿈을 꾼다.

 

 

 

슬픈 빙하시대 5

 

 

살길은 늘 스스로 있었구나.

 

3부 리그 축구팀의 수비수가 날 울릴 때가 있다. 얼마나 더 살겠다고 MRI 찍는 통 속의 고독을 견디는 구순의 노인이 날 울릴 때가 있다. 쓰러지기 전 거품 문 투우의 마지막 진실 같은 거. 그게 날 울릴 때가 있다.

 

누군가와 일요일 아침 식은 밥을 물에 말아먹고 싶다고, 겨우내 촌스러운 화장을 하는 여자. 카운트는 끝나가는데 더이상 힘이 들어가지 않는 다리를 곧추세우려는 실패한 복서의 눈빛 같은 거. 절대고독 안에 뒹굴고 있는 입석들의 폐허다. 인생은

 

떨어지기 전, 떨어지기 전, 그 간들거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