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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문학이란 무엇인가

 

감각적인 것의 분배

2000년대의 시에 대하여

 

진은영 陳恩英

시인. 시집으로 『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 『우리는 매일매일』이 있음. dicht1@hanmail.net

 

 

1. ‘새로운 노래, 더 나은 노래’

 

하프 켜는 소녀가 노래 불렀다.

진실된 감정과 잘못된 음조로,

하지만 난 그녀의 연주에

무척 감동받았다.

 

하이네(H. Heine)의 『독일. 겨울동화』(홍성광 옮김, 창비 1994)의 한 연을 읽으며 나는 웃었다.‘그래, 그런 시들이 있었지. 소박하지만 진실된 감정으로 나를 울리고 웃게 했던 시들이……’내가 혼잣말을 하면서 떠올린 것은 대단한 스타일 실험은 없었으나 삶의 생생한 진상으로 스무살 무렵의 나를 흔들어놓았던 시들이었다. 박노해나 백무산 또는 그들을 열심히 흉내내던 문청들의 어설프지만 열정에 가득 찬 시들.

그러나 다음 연으로 넘어가자 이런 상념이 엉뚱한 것임이 밝혀졌다.

 

사랑과 사랑의 아픔,

희생과 모든 고통이 사라지는

저 위, 보다 나은 저 세상에서의

다시 만남을 노래했다.

(…)

그녀는 오래된 체념의 노래를,

거대한 패거리인 민중이

울고 보챌 때 얼러 잠재우는

하늘의 자장가를 불렀다.

 

나는 그런 방식, 그런 텍스트를 알고 있어,

지은이들도 알고 있어.

그들이 몰래 술 마시며 남 앞에선

물을 마시라고 설교한 것을 알고 있어.

 

새로운 노래, 더 나은 노래를,

오, 벗들이여, 그대들에게 지어주겠노라!

우리는 여기 지상에서

하늘나라를 벌써 세우려고 한다.

 

우린 지상에서 행복을 희구하며,

더이상 궁핍함을 원치 않는다.

부지런한 손이 번 것을

게으른 배가 탕진해서는 안된다.

-『독일. 겨울동화』 제1장 부분1

 

왜 나는 엉뚱하게도 하프 켜는 소녀의 노래로 80년대 민중시들을 떠올렸던 것일까?

나는 그 시들에 깊이 공감했고 그 시대에 그 시들의 존재 자체를 사랑했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그렇게 쓸 수가 없었다. 지상에서 하늘나라를 세우는 일에 이의가 없을뿐더러, 그 일을 위해 새로운 노래, 더 나은 노래를 짓는 것이야말로 진심으로 희망하는 일이지만, 막상 펜을 들면 지금도 이 일만큼 힘들게 느껴지는 것이 없다. 이주노동자와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을 지지하며 성명서에 이름을 올리거나 지지 방문을 하고 정치적 이슈를 다루는 논문을 쓸 수도 있지만, 이상하게도 그것을 시로 표현하는 것은 쉽지가 않다. 사회참여와 참여시 사이에서의 분열, 이것은 창작과정에서 늘 나를 괴롭히던 문제이다. 나는 이 난감함이 많은 시인들이 진실된 감정과 자신의 독특한 음조로 새로운 노래를 찾아가려고 할 때 겪는 필연적 과정일 거라고 믿고 싶다.

많은 이들이 입을 모아 2000년대 들어서 낯선 감각과 새로운 어법으로 무장한 젊은 시인들이‘집단적’으로 출현했다고 말한다. 이들의 출현에 대한 반응, 이 집단에 대한 정의는 다양하다. 소통불능의 자폐적이고 이기적인 문학이라는 신랄한 비판이나 조금만 더 자아 밖으로 나오라는 애정어린 충고에서부터, 여러분이야말로‘도래’할 문학적 민중이 될 거라는 뜨거운 격려에 이르기까지, 상이한 반응들의 폭발에 정작 시인들은 당황했다. 새로운 시들을 둘러싼 이 논의들은 여러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겠지만, 적어도 내게는 나를 난감하게 만드는 문제, 즉 문학과 윤리 또는 미학과 정치의 관계에 대해 영원 회귀하는 질문들 그리고 그 대답들로 느껴진다.

그래서인지 얼마 전 신간 서적들 가운데 ‘미학과 정치’라는 부제가 붙은 자끄 랑씨에르(Jacques Rancière)의 『감성의 분할』2을 발견했을 때 나는 먼 친척 아저씨가 보내온 달콤한 과자상자를 받아든 아이처럼 설레었다. 혹시 이 상자 속에는 나의 오랜 허기와 미각을 동시에 만족시켜줄 것이 들어 있지 않을까?

 

 

2. 감각적인 것의 분배

 

미학과 감성론

사실‘미학’으로 번역되는 독일어 Ästhetik는 넓은 의미에서(칸트적인 의미에서)‘감각의 수용능력을 다루는 학’이며 곧 감성론이다. 그러나 우리는 일반적으로‘미학’이라는 용어를 훨씬 더 좁은 의미로 받아들여, 주로 미적 판단과 미적 감수성의 문제를 다룸으로써 예술을 독자적인 성찰과 연구의 대상으로 삼는 학문활동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이러한 이해에는 이미 예술이나 문학에 대한 특수한 관념이 전제되어 있다. 우리는 예술이나 미학이 좀더 넓은 의미의‘감각의 수용능력’과 관련된 것이라기보다는‘주관적 정서나 감정적 변양(modification)’을 다루는 자율적이고 독립적인 영역이라고 전제한다. 그리고 거기에는 암암리에 예술은 다른 인간활동들에서 분리시켜 다루는 것이 가능한 단독적 활동이라는 견해가 수반된다.

랑씨에르의 작업은 바로 이런 관념에 문제를 제기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그는 문학을 비롯해 예술 전반을 독립적이고 자율적인 영역으로 상정하는 것, 즉 예술을 단독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것을 지난 “두 세기 동안에만 존재했던” 근대적 현상으로 보면서, 근대예술에 대한 성찰을 통해 예술에 대한 고정관념과 그로부터 발생하는 문제들을 검토한다. 국내의 몇몇 연구자들은 랑씨에르의 이런 문제의식을 정확하게 반영하기 위해 책 제목에 대한 새로운 번역을 제안한 적이 있다. 그 책의 부제 ‘Esthétique et Politique’는‘미학과 정치’보다는‘감성론과 정치’로 번역되어야 하며, ‘le sensible’은 감수성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일 수 있는‘감성’보다는 좀더 넓은 의미의‘감각적인 것’으로 번역되어야 한다는 것이다.3 랑씨에르의 결론부터 먼저 말하자면, 문학을 비롯한 예술 전반의 문제는‘감각적인 것을 분배하는’문제이며 그런 한에서 예술은 필연적으로 ‘정치’와 관계한다-책제목‘감각적인 것의 분배: 감성론과 정치’라는 말 자체에 이미 그의 문제의식과 결론이 압축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랑씨에르는 근대적 예술을‘미학적-감성적’예술체제의 시작으로 규정하면서, 역사에서 그전부터 있어온 다른 예술체제들, 윤리적 체제, 시학적-재현적 체제와 구별한다. 예술의 이 세가지 주요 체제들은 역사적으로 등장한 것이긴 하지만, “새로운 체계의 가능성이 앞선 체계의 불가능성과 일치한다는 그러한 방식으로 하나의 체계에서 다른 하나의 체계로 도약한다는 것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 어떤 일정한 시점에, 여러 체제들이 작품들 그 자체 내에서 공존하고 혼합된다.”(67~68면;50면) 나는 랑씨에르의 구분이 보여주는 예술에 대한 상이한 관점들이 실제로 2000년대 이후에 등장한 새로운 시의 흐름들에 대한 비평적 시선들과 예술에 대한 시인들의 자의식에 전제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이 새로운 시들과 이 시들에 대한 비평이 근거하고 있는 다양한 입장들을 랑씨에르의 분류법에 따라 살펴보는 것은, 비록 단순화의 위험이 있기는 하지만 우리 시대 새로운 시들의 미래를 전망하는 데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윤리적 예술체제

가장 오랜 전통을 가진 예술체제는 윤리적 체제이다. “이 체제에서는 이미지들의 존재양태가 개인들과 공동체들의 존재양태, 즉 에토스(ethos)에 어떤 식으로 영향을 미치는지 아는 것이 관건이다.”(27면;21면) 이 체제는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플라톤에 의해 매우 명료하게 표명되었다. 플라톤에게 예술작품은 이미지, 즉 모상이다. 그것은 모방활동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그의 철학에서는 존재하는 것들이 여러 등급으로 구분된다. 절대적이고 영원한 관념, 즉 이데아가 완전한 존재이다. 기술자들에 의해 제작되어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인공적 사물들은 이데아의 모방물이다. 그리고 화가나 시인의 작품은 이 모방물들을 다시 모방하여 만든 것이다. 고야(Goya)의 그림에서 마야가 누워 있는 침대는 존재의 가장 낮은 등급에 속한다. 그 그림을 그리기 위해 고야가 마야를 눕혀놓은 실제의 침대는 그보다는 윗등급에 속하지만, 여전히 가구장이가 침대의 이데아를 모방하여 만든 모방물에 지나지 않는다. 최상의 존재는 이데아로서의 침대이다.

이런 사유체제에서 예술의 가치는 그 자체로 식별될 수 없고, 예술은 자신만의 자율적 영역도 갖지 않는다. 존재론적 모방물의 모방물인 침대 그림은 사실상 존재한다고 말할 수조차 없는 환영, 일종의 씨뮬라크라(simulacra)이다. “흔히 말해지는 바와 같이, 플라톤은 예술을 정치에 종속시키지 않는다. 이러한 구별 자체가 그에게는 의미가 없다. 그에게 있어서 예술이란 존재하지 않고, 단지 행동과 제작 방식들로서의 기술들만이 존재한다.”(26면;21면)4 따라서 모방적 기술로서의 예술은 독자적인 존재의의를 가질 수 없고, 단지 그것이 제작된 목적에 따라서 구별되고 위계를 가질 뿐이다. 그중에서 진정하고 훌륭한 기술이란 아이들과 시민을 교육하는 데 기여하고 폴리스의 업무를 분배하는 데 적합한 것이다. 그렇지 못할 경우 그 기술은 이상(理想)국가에서 사라져야만 한다. 이 점은 플라톤의 『법률』에 분명하게 나타난다. “오르페우스의 노래보다 더 고운 목소리를 내는 사람이 있더라도 법률 수호관의 심사에서 인정을 받지 못한 시가는 누구를 막론하고 노래할 수가 없으며, 오직 신성한 심사를 거쳐 (…) 정당하다고 인정되는 가요만을 노래할 수 있게 할 일입니다.”5

이러한 플라톤의 엄포는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다. 검열과 금지라는 극단적인 발상과는 구별된다 할지라도, 문학의 본질을 에토스, 즉 일종의 윤리성과 교육성에서 찾고 그 기초로서 공동체 내에서의 소통 가능성에 호소하면서 작품들을 평가하고 비평할 때 사실상 그것은 플라톤주의적 음색을 띠게 된다. 이러한 시도들은 “아이들의 마음씨를, 법도에 거역하여 기쁨과 슬픔을 느끼는 폐단이 없이, 법도에 따라서 동일한 일에 성인들과 함께 나누도록 습관을 붙이도록 하기 위해, 가곡(歌曲)이 제정되어, 우리가 말하는 조화를 이루도록 유도해야 합니다”6라는 플라톤의 말처럼, 한 사회의 공통감각(common sense)에 의거해서 진정성있는 것으로 판명될 수 있는 정서들에 기여하는 한에서만 쾌와 불쾌의 유통을 허용하려고 한다. 이러한 예술론에 입각해서 플라톤이 새로운 시인들에게 선고를 내린다면?‘나가주시오!’

 

시학적-재현적 예술체제

플라톤의 윤리적 체제에서 벗어나 예술의 새로운 식별체제를 확립하려는 시도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으로 나타났다. 플라톤과 마찬가지로 아리스토텔레스에게도 문학은 미메시스, 즉 모방이다. 그러나 『시학』에 나타나는 미메시스의 원리는 실재를 진실하게 복제해야 한다는 규범적 원리로부터 자유롭다. 예술적인 모방물들은 더이상 목적이나 용도에 따라 평가되지 않는다. 이 시학적 체제는 “모방물들이 어떤 예술에 고유하게 속하는 것으로서 인정될 수 있고 그 틀 속에서 좋거나 나쁜, 적합하거나 부적합한 모방물로서 평가될 수 있게 하는 조건들(…)을 정의하는 규범성의 형태들”로 전개된다.(28면;22면) 다시 말해 이 체제에서 예술은 현실에서 자유로운 예술적 재현의 고유한 법칙을 갖는다. 플라톤에게서 예술은 기술들에 종속됨으로써 독자적 영역을 갖지 않았고, 그런 의미에서 삶과 예술이 일치했지만,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예술은 삶으로부터 분리되어 자율성을 갖기 시작한다.

그러나 재현적 체제는 이 자율성을 행동과 제작의 방식 및 업무들의 일반 질서에 연결시킨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 9장에서 시인의 임무를 실제로 일어난 일을 이야기(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개연성과 필연성의 법칙에 따라 일어날 수 있는 가능적 사건을 이야기하는 것이며 이러한 점에서 시가 경험적 사실들을 탐구하는 역사보다 훨씬‘보편적’임을 강조했다는 점을 상기한다면, 예술의 재현적 자율성은 분명 세계의 일반 질서를 유비하는 것이다. 이 유비를 가장 훌륭하게 수행하는 예술인 비극은 잘 짜여진 통일적인 플롯을 통해 사람들에게 카타르시스를 제공하는 긍정적 효과를 낳는다. 따라서 예술은 실제로 존재하는 경험적이고 개별적인 사건에 종속되지는 않지만, 여전히 가능적 세계의 정확한 모방과 유비라는 실용적 원리 아래서 관리되어야 한다.

이러한 실용적 원리에 입각해 본다면 폴리스 시민들 대다수에게 카타르시스를 제공하지 못하는 2000년대 젊은 시인들의 시는 비극적이지 못하다고 할 수 있다. 무릇 “비극은 진지하고 일정한 크기를 가진 완결된 행동을 모방하며, 쾌적한 장식을 한 언어를 사용하되 각종의 장식은 작품의 상이한 재부분에 따로 따로 삽입”되는 것인데7 이 새로운 시들은 진지하다고 말하기 힘들고, 일정한 길이도 없이 장황하며, 도무지 쾌적한 장식의 언어를 찾아볼 수 없다. 그러므로 세계의 본질적 질서를 표현하지 못하고 있다는 판결을 받는다. 윤리적 체제뿐 아니라 시학적-재현적 체제 아래서도 새로운 시들은 시민권을 얻을 수 없다. 그렇다면 이들이 예술적 권리를 획득할 가능성은 어디에 있을까?

 

미학적-감성적 예술체제

감성적 체제의 출현과 더불어 예술은 고유한 감각적 존재양태의 유무에 따라 식별된다. 즉 어떤 것이 예술이려면 예술에 속하는 특수한 존재양태를 가져야 한다. 감성적 체제는 “예술의 절대적 특이성을 주장하는 동시에, 이 특이성을 격리시키는 모든 실용주의적 기준을 파괴한다.”(31면;23면) 시학적-재현적 체제는 예술에 자율적 영역을 보장하지만, 이때 예술의 자율성은 세계의 “이해 가능한 구조를 정교하게 다듬는” 한에서만 허용되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주장하듯 시는 “경험적 무질서에 따라 사건들을 현시하지 않을 수 없는 역사와 달리, 사건들의 배치에 인과적 논리를 주는”(49면;36면) 우월함을 가지고 있다. 다시 말해 문학은 사실이 아니라 허구다. 그러나 그것은 거짓이 아니며 “어떤 한정된 시-공간 안에서 수행되는 인식의 유희”(48면;36면)를 의미하는 위대한 허구이다. 그렇다면 이런 예술의 자율성과 구별해서, 감성적 체제에서 강조되는 예술의 특이성이란 무엇일까?

랑씨에르에 따르면 그것은 “현실에서 분리된 언어의 자기목적주의(autotelism)를 신성화하는 것이 아니다. 정확히 그 반대이다.”(49면;36면) 감성적 체제에서 예술은 필연성과 개연성을 따르는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인과적 배치와 다른 동시에, 언어의 외로운 자기지시성(self-referentiality)과도 전혀 다르다. 왜냐하면 이런 식의 절대적 자율성은 카나리아의 노래에 불과할 것이기 때문이다. 마음껏 노래하라. 카나리아여. 목이 쉬도록, 그러나 오직 황금 새장 안에서! 감성적 체제는 예술작품에 고유한 감각적 존재양태를 요구하는 것이 분명하지만, 이 고유한 허구적 구성은 “상황을 철저하게 뒤집는다.”(51면;37면) 다시 말해 허구적 구성은 허구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삶에서 실현됨으로써 삶을 잠식한다.

예술은 제한된 감성적 새장 안에서 활동의 최대치를 갖는 자율성을 벗어나, “생산과 재생산 및 복종의 자연적 주기들에 순응하는 몸짓들과 리듬들의 기능성을 손상시킴으로써 감각적인 것의 지도를 바꿔놓는다”(54면;39면)는 의미에서 현실로부터 자율적이지만 현실을 변형하는 허구들을 만들어낸다. 그것이 랑씨에르가 말하는 예술의 특이성, 다시 말해 감성적 자율성(예술의 자율성이 아닌)이다. 따라서 그것은 세계의 낡은 감각적 분배를 파괴하고 다른 종류의 분배로 변환시킴으로써 삶의 새로운 형태들의 발명을 동반한다. 이런 의미에서 랑씨에르는 감성적 체제에서 예술로 식별되는 활동을 정치와 조우시킨다. 그에게 정치는 감성적인 것을 새롭게 분배하는 활동, 즉 감성적 혁명을 가져오는 활동에 다름아니기 때문이다.

 

내가 이해하기로‘감성적’혁명이란 공동체의 상징적 공간에(또는 외부에), 즉 생산과 재생산의‘사적’영역에 노동자들의 자리를 지정하는 식의 감각적인 것의 분배를 전복시키는 것이다. 내가 『프롤레타리아의 밤』에서 연구했던 것은 바로 19세기 프랑스 노동자들 사이에서 일어난 사회적 해방의 발단들에 대한 것이었다. (…) 이 노동자들에게 해방이란 낮을 노동자들이 노동하는 시간으로, 밤을 그들이 휴식하는 시간으로 한정하는 감각적인 것의 분배를 파괴하는 것을 의미했다. 해방의 단초는 밤 시간을 더 많이 활용하기로 한 그들의 결정이었다. 잠자는 대신 쓰고 읽고 생각하고 토론하기! 처음에 해방은 노동자들 자신의 실존을 다시 구성함을, 즉 노동자로서의 정체성, 노동자의 문화, 노동자의 시간과 공간과 절연함을 의미했다.8

 

새로운 감성적 분배에 참여함으로써 낡은 분배형태와 불일치하고 그와 맞서 싸우는 한에서, 예술은 정치적인 것이 된다. 미학과 정치, 문학과 윤리의 관계를 둘러싼 현재적 논쟁이 발생할 수 있는 지점은 여기다. 새로운 감성적 분배를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서 한 예술작품의 정치성과 윤리성에 대한 평가가 상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랑씨에르의 관점에 따르면, 어떤 작품이 전통과 결별하여 모험적인 실험을 시도했다는 사실만으로 새로운 감성적 분배에 참여했다고 할 수는 없다. 다시 말해 미학적-감성적 체제에서는 시도되는 모든 새로운 실험들이 감성적 특이성을 지닌 것이 아니다. 예술의 정치적 잠재성은 이미 말했듯이 예술의 자율성이 아니라 감성적 경험의 자율성에 의해 규정된다. 랑씨에르는 추상화가인 폴록(J. Pollock)과 말레비치(K. Malevich)를 비교함으로써 이 점을 언급한다. “폴록을 말레비치와 비교하면 후자가 새로운 사회적 형식과 삶의 새로운 역동성의 발명의 문제를 제기한 것이 확실합니다. 그리고 폴록은 그것과 확실하게 다릅니다. 폴록은 행동주의 예술 안에서 어떤 형식의 종말이었으며, 1930년대 미국에서 아주 강하게 작용했던 사회적 실천 안에서 예술적 개입의 종말이었습니다.”9 폴록은 새로운 삶의 형식을 창조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 오히려 미국 예술계는 냉전체제하에서 소련의 이데올로기나 맑스주의와 경쟁하기 위해 폴록의 추상주의에 주목했다.10 그런 의미에서 폴록의 작품은 네거티브한 방식으로 정치적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랑씨에르가 말하는 정치성이란 기존의 지배적 담론체계에서 특정한 이데올로기를 옹호하거나 공격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그 지배적 담론체계를 파열시켜 새로운 종류의 감성적 분배를 가져올 삶의 형식을 만들어내는 데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폴록의 작품은 현실의 감각체계와 불화를 일으키는‘정치’의 논리보다는‘치안’의 논리에 가깝다.11 새로운 실험의 정치성이란 다른 삶의 실천영역들과의 상호 관계 속에서 감각체계의 변화를 가져오느냐 여부에 따라 식별될 수 있을 뿐이다.

동시에 예술의 정치성은 정치영역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참여예술과 동일시되는 것도 아니다. “어떤 방식으로든 정치는 자신의 미학이 있고 미학은 자신의 정치가 있다.”(88면;62면) 그래서 예술의 정치성은 특정 변혁주체에 대해 언급하거나 사회적 부정의를 고발하는 작품들에 국한되지 않는다. 랑씨에르는 19세기 루이-필리쁘(Louis-Philippe)가 통치하던 시절 노동자 시인들의 시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오히려 열쇠는-그리고 거기에서 기존 질서의 위기가 시작되는데-인민의 삶을 감성화하는(esthétiser) 것이다. 노동자의 시는 그것이 묘사하는 내용이나 요구하는 바 때문에 사회적인 작품이 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그런 시가 존재한다는 순수한 사실, 그 시가 구두수선공이나 소목장이에게는 권리상 접근 불가능한 것으로 여겨지던 뮤즈〔詩神〕에게 호소하는 순수한 도취 때문에 사회적으로 된다. 이 시가 말하는 것은 비참도 아니요 노동자 투쟁도 아닌, 오히려 인민이 가진 감성적 능력이다.”12

예술작품의 감성적 재분배 능력을 결정하는 것은 객관적 정치현장에 대한 재현의 직접성이 아니다. 랑씨에르는‘참여’예술이 가질 수 있는 문제점을 지적하며 이를 분명히한다.‘참여’예술은 이미 특정한 방식으로 분배되어 있는 정치세력의 장 안에서 하나의 세력을 재현하는 방식을 택하는 경향이 있다. 이미 서술의 가능성을 지니고 존재하는 주체들, 즉 글로 씌어질 수 있는 가능성의 장 안에 기입된 주체들의 관계를 재현하는 데 머무르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누군가 어떤 주장을 피력하고자 글을 쓴다거나 귀족, 부르주아들이 아니라 노동자들 또는 서민에 대해 말한다는 사실만으로는 불충분하다. 물론 노동자들이 혹은 노동자에 대해 말함으로써 글쓰기의 장에 부재했던 자리를 만들어내고 이를 통해 감성적 몫을 새롭게 분배했던 시기가 우리 문학사에 존재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노동자라는 특정 주체를 재현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낡은 감성적 장에 불일치하는 문학적 사건을 발생시켰기 때문이다.

이런 점들을 고려할 때 미학(감성론)의 정치와 정치의 미학(감성론) 사이의 적절한 상관성을 정립하기 위한 기준이 없다는 점을 분명히 인식할 필요가 있다. 물론 이는 예술과 정치가 뒤섞여서는 안된다는 주장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우리는 예술작품의 정치성에 대한 어떤 완고한 비평적 기준을 전제함으로써 오히려 다양한 방식으로 감성적 불일치(dissensus)를 구성하는 창조적 실천들을 위축시킬 수 있는 위험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이런 맥락에서 랑씨에르는 다음과 같이 덧붙인다. “예술작품들의 정치적 평가를 위한 기준들에 따라 질문을 제기하는 일을 피해야 한다. (…) 문제가 통상적으로 정식화되는 방식을 역전시킬 필요가 있다. 예술적 실천에 의해 생산되는 표현양식들이나, 설명적 계기를 정립하는 수단을 자기식으로 적절하게 사용하기 위해 전유하는 것은 정치의 다양한 형식들이지, 그 반대가 아니다.”(92면;64~65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미학적 실험은 예술과 정치라는 서로 이종적인 것들을 결합하는 다양한 방식에 대한 상상이라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랑씨에르의 견해는 예술가를 자유롭게 하는 동시에 새로운 구속을 부과하는 듯 보인다. 예술가는 기존의 방식으로 예술과 정치의 일치를 추구할 필요는 없다는 점에서 정치로부터 해방되지만, 다른 한편으로 미학적-감성적 자율성을 실현하기 위해 예술작품에 사회의 감성적 지도에 변화를 가져올 방식들을 상상하고 고민해야 할 임무가 부여된다는 점에서 예술작품은 정치적인 것에 구속된다.

 

 

3. 새로운 정치시를 위하여

 

“사실, 저는 시를 쓰기는 썼습니다. (…) 발표했는데, 아무도 그게 현시국과 관련된 시라는 걸 모르더라고요.”13

 

어떻게 감성적 불일치를 구성할 것인가? 많은 시인들의 문학적 고민은 여기에 있다. 시인은 이 세계의 풍경들로부터 다양한 자극을 받는다. 시인은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사안들에 대해 발언하고 싶어한다. 그런데 그것을 항상 특정한 재현의 방식으로, 예컨대 명확한 내러티브를 구성하거나 선명한 메시지를 직접적으로 표현하는 방식으로만 수행해야 하는 것일까? 사회의 감성적 매트릭스를 해체하고 새롭게 조직화하는 다른 방식은 없을까? 도처에 편재하는 빈자들, 고통받는 비인간들-동물들과 나무들, 바위들-도 작품에 기입할 줄 아는 선량한 영혼의 목소리로 노래하는 것, 그래서 다른 영혼들에 아름다운 동요(動搖)를 만들어내는 데 만족하는 것 이상의 방법은 없는 것일까?

이렇게 질문하는 시인이 꿈꾸는 것은 “사실 어떤 메시지의 언표를 매개체로 사용하지 않고서도 가시적인 것, 말할 수 있는 것 그리고 사유할 수 있는 것 사이의 관계를 전복시키는” 것이다. “실상 정치적 예술은 세계의 상태에 대한‘자각’으로 이끄는 의미있는 스펙터클이라는 단순한 형태로 작용할 수는 없다. 적절한 정치적 예술은 단번에 이중의 효과-정치적 의미작용의 가독성, 그리고 반대로 기괴함(uncanny), 즉 의미작용에 저항하는 것에 의해 야기된 감성적 또는 지각적 충격-의 생산을 보장한다.”(90면;63면, 강조는 인용자)

미학적-감성적 체제하에서 모든 시는 정치시가 되기를 희망한다. 시인은 (통상적인 분류법대로) 정치적인 주제를 다룰 수도 있고 비정치적인 주제를 다룰 수도 있지만, 어떤 주제든 그 시가 가장 정치적인 방식으로, 즉 비가시성을 가시화하고 들리지 않는 것을 들리게 함으로써 감성의 지각변동을 가져오는 그런 방식으로 씌어지길 희망한다.

유아론적 주체의 자폐적인 언어일 뿐이라는 비판이 새로운 시인들 머리 위로 빗물처럼 쏟아진 걸 보면, 이 정치적 시도는 크게 성공적이었다고 볼 수는 없을 듯하다. 시인은 지나가는 소나기를 바라보며 자책한다.‘기묘한 감성적 충격을 생산하는 데 몰두했던 시들에서는 정치적 의미의 가독성이 사라지고 정치적 의미의 가독성을 최대화한 시들에서는 기묘함이 실종되는구나!’이중효과의 적절한 생산은커녕 견디기 힘들 만큼 어정쩡한 상황이 발생하는 것이다.

이런 곤경에 대처하는 한가지 방식으로 시인은 의미의 가독성을 의도적으로 포기하거나 부정하고 기묘함을 극단화함으로써 오히려 그로부터 새로운 정치적 의미를 획득하려고 시도할 수 있다. 특히 모든 감각적인 것의 분배를 자본의 논리에 따라 재배치하는 자본주의의 의미망을 철저히 피하는 것을 미학적 원리로 채택하는 예술론-랑씨에르는 아도르노(T. Adorno)에게서 이런 이론을 발견한다-은 이러한 시도를 뒷받침한다. 그러나 랑씨에르는 네거티브한 시도들은 그 정치적 의도를 완벽하게 관철시키기 어렵다고 지적한다. “제 생각에 예술적 실천은, 상품화되어서는 안된다는 식의 부정적인 토대를 근거로 정의하기는 상당히 힘듭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은 상품화될 수 있거든요. 1970년대에 개념예술가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이 오브제를 만들지 않는다면 결국 시장을 위해 아무것도 만들지 않는 것이고 따라서 그것은 정치적 전복이다. 우린 개념미술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압니다. 그렇죠? 그들은 오브제를 팔지 않았고 아이디어를 팔았습니다! 이것이 자본주의 씨스템의 완벽함이고 그것을 파열하는 것과는 하등 관련이 없습니다.”14 문학에서도 사정은 다르지 않다. 그의 말대로 일종의 전복을 의미했던 초현실주의는 단어 사이의 기묘한 연결이라는 속성 때문에 오히려 오늘날 수많은 광고문구에 사용되고 있다.

가까스로 그것을 피해간 예술적 실천들은 의도하지 않았던 또다른 결과, 예술의 위기를 낳았을 뿐이다. 많은 사람들이 우려하는 “이른바‘예술의 위기’는 단순한 모더니즘적 패러다임의 압도적인 실패이다. 모더니즘은 예술의 현대적 형식들에 내재된 수많은 정치적 가능성뿐 아니라 장르혼합과 매체혼합으로부터도 언제나 멀리 떨어져 있다.”(35면;26면, 강조는 인용자) 그러나 랑씨에르가 강조하듯 모더니즘에는 또다른 변종이 존재한다. 그것은 세계를 변화시키는 의지이며 삶의 형식을 예술적 실천과 연결시키는 형식으로서의 모더니즘이다. 매체혼합과 장르혼합을 비롯해 다양한 방식으로 정치적 상상력을 작동시키는 모더니즘이야말로 오늘날 예술적 아방가르드를 자임하는 예술가들에게 열려 있는 길이다.

 

한국시에 등장한 새로운 어법, 새로운 감수성의 탄생과 발명은 이전 것들을 격렬히 부정하며 감성적 불일치를 추구했지만, 어떤 의미에서 그것은 충분히 격렬한 것이 아니었다. 이 실험들은 “문자적 정착”(이현우)에 머물렀고 “페이지에서 뛰쳐나와 미디어에 대한 진지한 고민”(오은)으로까지 나아가지 못했다. 문학적 발명품들이 풍부한 매체적 상상력을 통해 더욱 새로워져서 정치적 전복으로까지 이행할 가능성은, 전통의 부정만을 강조하는 상투적 의미의 미학적 실험만으로 보장되는 것이 아니다. 주목해야 할 것은 “텍스트가 어떤 공간에 위치하느냐뿐만 아니라 텍스트와 텍스트가 어떻게 서로 얽히면서 의미를 직조해내느냐”(심보선)이다.15 텍스트들간의 얽힘과 직조를 만들어내는 것은 문학 텍스트와 다른 사회적 텍스트의 끊임없는 접합이다. 이 이질적 접합의 지속적 가능성을 예술가가 자신의 삶 속에 마련해두지 않는 한, 문학적 발명이 충분히 새로워질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치안질서 내에서는 설명되지 않는 자들,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자들과 직접 조우하는 것, 의회민주주의의 형식으로부터 무질서하게 삐져나오는 정치적 열정의 공간에서 함께 어울리며 엉뚱하고 다채로운 상상력을 발동시켜보는 것. 예술활동의 모든 시간이 이것들로 환원되는 것은 아니지만 이것들 없이는, 의미작용을 하는 감성적 조직을 교란시키는 계기를 포착하기 힘들다는 점을 기억하라는 것이 랑씨에르의 전언이다. 삶과 정치가 실험되지 않는 한 문학은 실험될 수 없다. 이것을 망각할 때 문학은 필연적으로 에밀 씨오랑(Emile Cioran)이 말한 기만의 상황에 빠진다. “미적 언어의 기만: 평범한 슬픔을 기이하게 표현한다. 사소한 불행을 미화한다. 공허를 치장한다. 한숨 혹은 빈정거림을 미사여구로 꾸며서, 언어를 통해서 존재한다.”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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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독일. 겨울동화』 12~13면.
  2. Jacques Rancière, Le Partage du Sensible: Esthétique et Politique, La Fabrique-Éditions 2000. 이 글의 번역은 『감성의 분할』(오윤성 옮김, 도서출판b 2008)과 The Politics of Aesthetics(trans. Gabriel Rockhill, Continuum 2004) 두 번역본을 참고했다. 본문에서는 (국역본;영역본)으로 면수를 표기한다. 자끄 랑씨에르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고하라. 진태원 「평등의 원리에 대한 옹호」, 『대학신문』2007.11.10.
  3. 양창렬 「민주주의에 대한 증오에 맞서라」, 『교수신문』 2008.3.10.
  4. 영어와 프랑스어‘art’의 어원은‘기술’에 해당되는 라틴어‘아르스’(ars)이며, 아르스는 그리스어‘테크네’(τέχνη)를 직역한 것이다. 그리스어 테크네는 예술이라는 의미와 함께 기술이라는 이중의 의미를 갖는다.
  5. 플라톤 지음, 최민홍 옮김 『법률』, 상서각 1983, 249면.
  6. 같은 책 659면, 663면.
  7. 아리스토텔레스 지음, 천병희 옮김 『시학』, 문예출판사 2002, 49면.
  8. M. Blechman, A. Chari, and R. Hasan, “Democracy, Dissensus and the Aesthetics of Class Struggle: An Exchange with Jacques Rancière,” in Historical Materialism, Vol.13, No.4, 293면; 자끄 랑씨에르 지음, 양창렬 옮김 『정치적인 것의 가장자리』, 길 2008, 119면 역주 12 참조.
  9. 「자끄 랑씨에르와 Chto delat대담: 폭발을 기대해선 안돼요」, 『공공도큐멘트』, 미디어버스 2008, 128면.
  10. 장 끌레르(Jean Clair)가 지적했듯 “아무도 불편하게 하지 않는 청교도적 스타일 덕분에 행위적 추상파는 다국적기업의 공식 예술로 될 모든 요건을 지니고 있다.” 앙뚜안 꽁빠뇽 지음, 이재룡 옮김 『모더니티의 다섯개 역설』, 현대문학 2008, 158면.
  11. 최원 「‘불화’(mésentente)의 철학자, 랑씨에르」, 『공공도큐멘트』 148~50면 참조. 랑씨에르는 고대 그리스어‘폴리테이아’(politeia)의 번역어가‘정치’(politique)일 뿐 아니라‘경찰’(police)이기도 하다는 점에 주목한다. 그는 사람들이 통상적으로‘정치’라고 인식하는‘분배’, 예를 들어 집단들의 결집이나 합의가 달성되는 절차들, 권력의 조직화뿐 아니라 사람들에게 장소와 역할을 특정한 방식으로만 분배하는 체계가 경찰의 일, 즉 치안이라고 규정한다. 이와 달리 정치는 항상 기존의 감각공간을 다시 분할하는 실천이며 사건이다.
  12. Jacques Rancière, “Ronds de fumée (les poètes ouvriers dans la France de Louis-Philippe),” Revenue des Sciences Humaines, No.190, Presses de l’université Lille III 1983, 46면; 『정치적인 것의 가장자리』 118면, 역주 12에서 재인용.
  13. 촛불정국에 대한 시가 있었냐는 질문에 대한 오은의 대답, 심보선·이현우·오은·이문재 좌담 「‘촛불’은 질문이다」, 『문학동네』 2008년 가을호 42면.
  14. 「자끄 랑씨에르와 Chto delat대담: 폭발을 기대해선 안돼요」 131면.
  15. 「‘촛불’은 질문이다」, 인용 순서대로 44면, 43면, 45면.
  16. 에밀 씨오랑 지음, 김정숙 옮김 『독설의 팡세』, 문학동네 2004, 24면, 강조는 원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