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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 40주년에 부쳐 | 한국
문학과사회
‘창비’라는 늙음 혹은 젊음
이광호 李光鎬
『문학과사회』 편집동인 ever401@naver.com
『창작과비평』의 40주년을 축하드린다. 『창비』의 사십세는 공교롭게도 내 실존의 나이를 떠올리게 한다. 사십이라는 나이는 입사(入社)의 나이가 아니라, 늙음의 자의식에 진입하는 나이이다. 스무살의 방황은 아름답고, 서른살의 모험은 눈부실 것이다. 하지만 자신이 사십세임을 깨달아버린 사람은 무모한 열정으로부터 몸을 피한다. 언제나 시간은 너무 빠르거나 너무 느린 것이다.
80년대 초반 대학을 다닌 나는 당시 신군부에 의해 폐간된 『창비』로부터 문학과 사회의 관계를 배웠다. 선배들의 ‘오더’에 따라 『창비』의 70년대 글들을 읽었고, 무크지 형태로 나왔던 신작 비평집을 보면서 한국사회의 모순과 문학의 사회적 책무를 학습했다. 『창비』라는 ‘의식화’과정을 통해 나는 문학의 사회존재론을 사유할 수 있었다.
지난 20년간의 한국사회는 과잉의식화의 시대였다. 『창비』가 아니더라도 의식화 매체들은 넘쳐났고, 지나치게 의식화된 인터넷 대중들은 때로 다른 종교에 사로잡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창비』는 여전히 한국사회의 여러 문제들을 의식하려고 노력했다. 『창비』는 ‘민족문학 담론’ ‘분단체제 담론’ ‘동아시아 담론’ 등을 지속적으로 진지하게 의식화해왔다. 90년대 이후 새로 창간된 계간 문예지들이 ‘월간지 문화’로 돌아가거나 ‘문학청년’적인 문학주의로 회귀한 것과는 달리, 『창비』는 사회적 담론을 여전히 표나게 내세웠다.
이러한 ‘시대착오’는 그 자체로 정당한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한국사회에서 문학은 그 근원적인 의미에서 언제나 사회적인 것이었기 때문이다. 다만 그 사회적 의제들이 문학과 문화 영역에서의 새로운 움직임들과 살아있는 관계를 맺고 있는가 하는 질문을 던질 수는 있겠다. 『창비』의 의제들이 현재 한국사회에 대한 비판적 분석의 틀로서 얼마나 현실적인 유효성과 생산성을 가졌는가 하는 문제, 그리고 문화적인 영역에서의 새롭고도 진보적인 담론들의 코드와 화법을 얼마나 담아냈는가 하는 것 등은 생각해보아야 할 문제이다. 그것은 『창비』와 나란히, 그러나 ‘문학의 자율성’이라는 문제를 적극적으로 사유하면서 사회에 대한 문학의 반성적 질문법을 다듬어온 『문학과지성』—『문학과사회』에도 똑같이 해당되는 질문일 수 있다.
90년대 이후 문화산업의 물결이 문학을 산업으로 인식하게 만들면서 비판적 지성을 추구하는 계간지의 역할은 더욱 협소해졌다. 당대의 사회적 의제를 지속적으로 제기하면서 한편으로 새로운 문학적 감수성을 발굴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창비』가 젊은 작가들의 산실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이른바 ‘창비 독법’으로 발굴한 작가들이 한국문학을 근본적으로 갱신한 사례를 찾기는 쉽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창비 독법의 유연성을 높이거나 민족문학 개념의 외연을 넓히는 것은, 자칫 『창비』의 정체성을 유령화하는 것이 될 수도 있다. 자신의 태생적 존재의 자리를 새롭게 하면서 젊은 몸으로 거듭나는 일, 그것은 『창비』와 『문사』 앞에 가로놓인 이중의 과제이다.
김수영(金洙暎)은 「현대식 교량」이라는 시에서 젊음과 늙음의 경계에 대해 노래한다. “젊음과 늙음이 엇갈리는 순간/그러한 속력과 속력의 정돈 속에서/다리는 사랑을 배운다.” 다리에서 시인은 무자각적인 젊음과 늙고 더러운 다리의 역사를 모두 껴안는 시적 순간을 얻는다. 시인은 그 엇갈림의 순간에 새로운 역사와 사랑을 사유한다. 이제, 사십세의 『창비』가 다시 젊어지려 한다. 『창비』의 사십세가 ‘현대식 교량’에서의 그 ‘희한한’ 사랑을 얻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