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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정용섭 『설교의 절망과 희망』 대한기독교서회 2008
그의 비평에는 설교자만 보인다
김진호
목사,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연구실장 kjh55940@dreamwiz.com
기독교 신자가 자기가 다니는 교회에 대한 자부심을 말할 때 가장 먼저 드는 것은 필경 담임목사의‘설교’일 것이다. 또 어떤 이가 교회를 새로 선택할 때 가장 관심을 갖는 것 역시 설교겠다. 한편 개신교 목회자들을 대상으로 한 어느 설문에 따르면, 응답자 거의 전부(98.3%)가 설교를 목회의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대답했다.(『목회와 신학』 2007년 4월호) 개신교 신앙에서 설교는 목회자와 신자 모두에게 교회활동에서 결정적인 요소인 셈이다.
그러나 과연 그런가. 교인들은 거의 매주일 같은 목사의 설교를 접한다. 또 주중에는 수많은 다른 예배들이 있다. 많은 교인들이 한주에 둘 이상의 예배에 참석한다. 이 모든 설교들을 변함없이 경청하는 교인이 얼마나 될까. 아마도 설교내용을 예배 밖, 삶의 공간에서까지 기억하는 경우는 아주 제한적일 것이다. 마찬가지로 목회자는 수련과정부터 수없이 많은 설교를, 심지어 한주에 열번 이상 설교를 하면서 성장한다. 요컨대 대개의 목회자들은 준비가 충분하지 않은 상태에서도 설교를 하는 게 일찍부터 몸에 배어 있다. 그런데도 설교가 그렇게 압도적으로 목회활동의 중심이라는 게 사실일까. 또 교인들에게 설교는 신앙생활에서 정말 결정적인 중요성을 갖는 것일까. 실제로는 아무래도 그럴 법하지 않지만 목회자나 신도나 자신들의 생각 속에선 그렇다고 믿는 것, 이게 바로 설교다.
최근 이른바‘설교비평’이라는 말이 유행어가 됐다. 이 표현이 새로운 것은 아니지만, 그 말이 기독교 신자대중 사이에서 폭넓게 회자된 것은 예리한 논객이자 잡지 기획자인 한종호 월간 『기독교사상』 편집주간의 공이 크다. 이제까지의 설교비평들과 달리 그는 비평하고자 하는 텍스트에 담긴 신앙적 요소를 사회적 공공성의 차원과 대면시키며 논평을 했고, 이를 목회자나 신학자가 아닌 대중에게 타전했다는 점에서 좀더 진정한 의미의 비평영역을 개척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저서 『전병욱 비판적 읽기』에서 시작하여(2001), 『기독교사상』에서 심포지엄‘한국교회 16인의 설교를 말한다’를 기획하면서(2004) 같은 제목의 좀더 본격적인 설교비판서를 출간하는 데 견인차 역할을 했고(2006), 이 심포지엄 발표자였던 정용섭(鄭容燮)에게 2003년 10월호부터 2007년 12월호까지 무려 38편의 설교비평을 연재하도록 지면을 내주었다.
정용섭의 저 유명한 설교비평서 세권(1권 『속 빈 설교 꽉 찬 설교』, 2006; 2권 『설교와 선동 사이에서』, 2007; 3권 『설교의 절망과 희망』, 2008)은 거의 이 연재물을 묶어놓은 것이다. 이 책들에는 한국의 대표적인 개신교 목사와 몇몇 서양 설교자 등 39명에 대한 설교비평이 수록되어 있으며, 특히 3권에는 그의 비평에 대한 다른 이들의 답글 5편도 수록되어 있다. 그가 다룬 설교자들 대부분은 한국의 초대형교회 목사들이며, 그는 이들을 논평하기 위해 수십에서 수백편에 이르는 설교를 검토했다. 그의 글은 대단한 파장을 일으켰으니, 2007년 설교학회가 주관한 심포지엄‘한국교회를 위한 설교비평’은 바로 정용섭을 논평하기 위한 설교학자들의 학술마당이었다. 그러나 그의 글을 더욱 열광적으로 수용한 것은 신학 전문가가 아니라 기독교 안팎의 대중이었다.
대개의 목사들에게 설교는 비평의 대상이 아니다. 그런데 작금의 설교비평은 그러한 설교자들의 자기인식에 대한 대중의 불만과 불신을 반영한다. 나아가 그들이 주도하는 교회에 대한 문제의식을 담고 있다. 그것은 앞에서 말한 것처럼, 설교가 목회자와 평신도 모두에게 매우 중요한 것이라는 믿음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통용되는 설교가 그다지 완성도 높은 텍스트가 되지 못하는 상황과 관련이 있다. 요컨대 설교는 목사들과 교회들의‘약한 고리’인 셈이다.
정용섭의 설교비평은 다른 사람이 따라갈 수 없을 만큼 놀라운 열정을 함축하고 있으며 독자를 잡아끄는 파토스가 넘친다. 하지만 더욱 주목할 것은 격한 비판의 문체다. 그의 설교비평이 설교자들과 교회에 대한 대중의 불신이나 불만의 정서와 만나 시장에서 소비되기 때문이다. 그의 설교비평이 예외없이 인물비평인 것은 이런 소비상황에 안성맞춤이다. 이는 그의 비평이 설교들의 텍스트성에 주목해 수용자에게서 어떻게 해석되는지를 살피기보다는, 설교자들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이며 그것이 얼마나 적절한지 밝히려는, 곧 저자성(authorship) 자체에만 몰두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더구나 그 저자성은 특정 설교자의 모든 설교 텍스트를 꿰뚫고 있는‘불변의 주체인 저자’를 가리키고 있다.
생산자의 관점에서 비평을 하는 정용섭은 그런 점에서 늘 계몽적 입장을 취한다. 특히 생산자가 성서를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것을 비판한다. 그에게서 바른 성서해석의 출발점은 언제나 역사비평학이다. 물론 그는 성서학자가 아니며 역사학에도 정통하지 못하다. 해서 그가 말하는 역사비평학적 기준이란 늘 불안정하다. 편의에 따라 어떤 때는 실증주의적으로, 어떤 때는 포스트역사주의적으로 사용된다. 그럼에도 그가 어떤 역사관을 통해 비판을 수행하든 결론은 계몽주의적으로 돌아가고, 독자들은 비판의 대상인 설교자들의 전근대적이거나 몰근대적인 단순이분법적 성서관, 신앙관, 세계관을 발견하기에 이른다.
그의 설교비평은 대중의 열광적인 소비를 낳았고, 설교와 신앙을 그가 생각하는 사회적 공공성의 차원과 대면시키는 신앙적 인식의 준거 역할을 한다. 하지만 이는 그의 약점이기도 한데, 무엇보다 설교의 생산자에게만 비판적 시선을 집중시킬 뿐 독자인 대중에게 자기성찰의 계기가 되기에는 한계가 있는 것이다. 설교자가 의도하지 못했던 의미가 수용자인 청중 혹은 독자에게서 발현될 수 있는 가능성을 그의 비평에서는 도무지 발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려면 하나하나의 텍스트가 위치한 사회역사적·문화적·심리적 컨텍스트에 대한 정교한 분석이 필요한데, 설교자 한 사람의 전체를 통째로 읽어내는 방식에서 그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앞서 말했듯이 목회자는 어린 시절부터 설교 한편을 정교하게 구성하는 능력을 학습하기보다는 다양한 목회기술을 체득하는 훈련을 받으며 성장한다. 따라서 설교 텍스트들을 꿰뚫는 깊은 사상적 일관성보다는 한편 한편의 임의적인 목적의식이 더 강하여, 설교는 다른 텍스트보다 임의성이 더 강한 것일 가능성이 크다. 그런 점에서 정용섭의 설교비평은 설교라는 장르에 대한 좀더 적절한 비평이라 하기에는 한계를 갖는다. 하지만 그의 인물비평적 설교비평은, 다 동의할 수는 없지만, 현재 한국교회와 지도자들의 문제를 효과적으로 드러내고 아래로부터의 개혁의지에 활력을 불어넣는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의가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