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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다까하라 모또아끼 『한중일 인터넷세대가 서로 미워하는 진짜 이유』, 삼인 2007
동아시아의 젊은 ‘집합지성’이 온다
이병한 李炳翰
세교연구소 연구원 lbh7826@hanmail.net
“有朋自遠方來不亦樂乎”(벗이 있어 먼 곳에서 찾아오니 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 이웃나라 일본의 젊은 지성이 쓴 데뷔작을 읽으며 내가 떠올린 것은 아주 오래된 동아시아 고전의 한구절이었다. 뜻이 맞고 생각을 같이하는 벗을 먼 곳에서 발견했으니, 이 어찌 반갑지 않을 수 있으랴.
갓 서른을 넘긴 이 책의 저자 타까하라 모또아끼(高原基彰)는 한중일 세 나라의 내셔널리즘을 견주어보려 한다. 그 비교작업을 위한 축으로 착목한 것은 3국을 횡단하는 청년고용의 불안 문제이다. 동아시아의 젊은 내셔널리즘의 기저에는 고도성장이 불가능해진 시대의 고용 유동화가 자리잡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타국 젊은이들의 행위를 재해석하고 거기에 자국 사정을 비추어보면서 스스로의 위치를 반추하는, 말하자면 역지사지(易地思之)의 지혜를 발휘한다. 그리고 묵은 지혜의 현대적 실천으로 동아시아는 마침내‘동시성’을 획득한다. 동아시아라는 지역 개념을 각국의 국내 사정과 연결해서 파악하겠다는 저자의 야무진 출사표에, 평자 또한 깊이 공감하며 기꺼이 환대하는 바이다.
저자는‘개인형’ ‘불안형’내셔널리즘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제시하고 있다.(19면) 저자가 보기에, 세계화의 추세 속에서 중간층이 상하로 분해되는 현실은 젊은 세대의 동향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쳤다. 즉 유동적인 고용상황과 중간층의 양극 분화로‘불안한 개인’들이 젊은층에서 대거 등장했다는 것이다. 때문에 이들의 내셔널리즘은 중산층 확대라는 국가적 목표에 호응해오던 전후(戰後) 동아시아의‘고도성장형’내셔널리즘과 성격을 달리한다. 오늘날 젊은이들이 개발주의를 현상적으로 옹호하는‘보수’나 그‘개발주의로부터의 자유’를 추구해온‘진보’둘 다를 기득권으로 보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하여 기존의 좌우대립 틀 자체를 재구축하자고 주장하는데, 평자는 그에 대해 옳거니! 무릎을 치게 된다. 한국의‘민주정권 10년’을 이끌어온 개혁세력들과도 비판적 거리를 확보해야 한다는 것이 그간 평자의 생활실감이었기 때문이다.
고도성장이 불가능해진 시대에 등장한 불안형 내셔널리즘의 또다른 특징으로는 하위문화와의 접속을 들 수 있다. 인터넷을 비롯한 뉴미디어의 등장이 신생 내셔널리즘이 번성할 수 있는 숙주 역할을 한 셈이다. 실제로 90년대 이후 인터넷은 화장실 낙서와 대자보 문화를 대신하여 갖가지 새로운 하위문화의 전시장이 되었다. 포털과 블로그, 미니홈피에 진지를 구축한 젊은 네티즌들의‘취미화된 내셔널리즘’(121면)은 마치 게임을 즐기듯 인터넷 게시판에서 서로 유사-전쟁을 벌이며 현실사회에 대한 불만과 불안을 유희적으로 표출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러한 오따꾸화된 내셔널리즘(156면)의 정념이 비단 불안감 때문인지는 따져볼 일이다. 불안감에 못지않게 눈에 띄는 것은 자부심이라는 정반대의 측면이다. 이기적인‘소황제’라고 불리던 중국의 빠링후(80後) 세대가 올림픽 자원봉사에 적극 참여한다든지, 한국의 십대 여학생들이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를 흥얼거리며 촛불을 드는 모습에서, 우리는 동아시아의 젊은 세대가 자국에 대해 품고 있는 긍정성과 자부심의 일면을 엿볼 수 있다. 일장기와 태극기가 문신과 치마로 패션화되고, 애국가가 록버전으로 변용되는 것 또한 비슷한 예일 것이다.‘사적 불안감’과‘공적 자부심’이라는 모순적 감정의 기이한 공존이야말로 동시대 내셔널리즘의 적확한 묘사이지 않을까. 이는 동아시아가 미국과 유럽에 버금가는 세계체제의 삼각 축으로 상승했다는 사실과, 바로 그 시점에 세계체제 자체가 동요하는 이행기가 시작되었다는 교착국면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듯하다.
청년고용의 불안만으로 동아시아의 새로운 내셔널리즘을 온전히 설명할 수 없음은 대만 내셔널리즘을 보아도 알 수 있다. 민주화의 진전과 더불어 분출한‘대만의식’의 고양 또한 동시대의 도저한 흐름이다. 일각에서 제기되는 류우뀨우(琉球) 독립론은 또 어떠한가? 양자 모두 사회 유동화와는 결을 달리하는 동아시아 근현대사의 누적된 경험의 결과물이다. 새삼 이 두 현상을 거론하는 것은 저자가 청년문제에 집중한 나머지, 이들의 불안과 불만의 출로가 내셔널리즘으로 흐르고 마는 역사적 회로에 대해서는 등한시하고 있다는 인상 탓이다.
가장 아쉬운 대목은 모든 문제를 결국 개별 국가의‘국내문제’로 되돌리면서 애초에 제기한‘동아시아’라는 관점을 스스로 방기하는 역설이다. 동아시아의 내셔널리즘을 서로 견준 끝에 다시 국내로 유턴하고 마는 까닭은 식민과 냉전의 역사성에 대한 상대적 무관심과 함께, 여전히 내셔널리즘을 국(國)과 민(民) 사이에서 사고하는‘근대적 사유방식’에 있지 않나 싶다. 근대의 시민종교였던 내셔널리즘의 최대 교리이자 최고 율법인 사회계약론적 발상을 충실히 답습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내셔널리즘은 언제나 국가와 국가‘사이’의 문제일 수밖에 없으며, 이를 돌파하는 길은 國과 民의 수직적 관계로 회수되지 않는 民과 民 사이의 다양한 소통창구를 만들어내는 데 있다. 그간의‘국제(國際)’와는 또다른 층위의‘민제(民際)’확립으로 양자가 상호 진화하는 근대 너머의 정치문법을 창안해가야 하는 것이다.
기존의 좌우 대립구도가 허위적임에도 젊은 세대들이 새로운 언어와 실천방안을 발굴하지 못한 것 역시 일국 단위의 해결이 어려워진 현실적 조건 탓일지 모른다. 그 결여와 공백의 틈을 과거의 낡은 언어들이 한껏 메우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당대의 내셔널리즘이 저자의 주장처럼 유사적 의제이고 사이비 문젯거리라 하더라도, 이는 동아시아 각국 사이의 갈등이 미미해서가 아니다. 부재한 것은 새로운 정치적 언어이며, 부족한 것은 참신한 상상력이다. 그러하기에 더더욱 우리 세대는‘국내’로 복귀해서는 안된다. 지금이야말로 동아시아의 젊은 지성이 결집하여 과거와 현재의 중첩된 과제를 해결해갈 수 있는 집합적 지혜를 구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 해결의 실마리를 이 책의 생산·유통·소비과정에서 찾고 싶다. 이 책이 출간된 2006년, 저자는 서울의 홍대거리를 누비고 다녔다. 역자 정호석은 이 책을 번역한 2007년, 토오꾜오대학 혼고오(本鄕) 캠퍼스에 있었다. 2008년, 평자는 이 책의 서평을 대만대학 근처의 까페에서 쓰고 있다. 이 생활공간의‘겹침’에서 빚어지는 사상연쇄가 중요하다. 이 연기(緣起)의 현장성이야말로 신대륙 인터넷마저 구세계의 시민종교로 정복하려는 힘에 맞설 수 있는 잠재적 가능성의 영역이 아닐까.
인터넷에서 검색한 저자의 블로그에서 한국어 번역본에 대한 감회를 엿볼 수 있었다.‘불안형 내셔널리즘의 시대’가‘한중일 인터넷세대가 서로 미워하는 진짜 이유’라는 제목으로 바뀐 것에 대한 푸념이 젊은이 특유의 구어체 말투에 묻어나온다. 그럼에도 결국 한국의 출판계 상황까지 헤아리는 넉넉한 아량을 베푼다. 배시시 웃음이 나면서, 다시금 우정이 싹틈을 확인하는 순간이다. 우리는 이렇게 조금씩 서로를 알아가고 있으며, 또 이해해가고 있다. 그것도‘2007년 토오꾜오’에서 쓴 블로그의 문장을‘2008년 타이뻬이’에서 읽으면서 말이다. 한중일 인터넷세대가 서로를 미워만 할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제 뜻이 맞고 생각을 같이하는 벗은 더이상 멀지만은 않은 곳에 있다. 부쩍 가까워진 그들에게 키따노 타께시(北野武) 감독의 청춘영화 「키즈 리턴」의 마지막 대사를 전한다. “우리 이제 다 끝나버린 걸까.”“바보- 우린 아직 시작도 안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