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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 40주년에 부쳐 | 한국

 

실천문학

다시 ‘우리 창비’로 돌아가자

 

 

김영현 金永顯

실천문학사 대표 baramun@dreamwiz.com

 

 

오랜 세월 강물처럼 흘러온 민주화운동은 사회의 구석구석으로 스며들어 이제 아무도 구시대로 돌이킬 수 없는 대세가 되었지만 민주세력으로 통칭되던 진보진영은 이제 막 절정기를 지나 전반적으로 퇴각기에 접어든 느낌이다. 사회 전반에 진출한 민주화운동 세력, 낡은 표현법대로 하자면 운동권은 그야말로 경제적 지배권을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분야에서 권력의 핵을 이루었고, 그것이 노무현정권에서 절정에 달한 것이다. 그러나 권력화된 세력은 반드시 자기 한계에 이르고 말듯, 청와대와 여당은 물론 최근 민주노총 등에서 불거져나오는 각종 내부문제는 이른바 권력화된 진보진영을 대중으로부터 더욱 멀어지게 하는 필연적 결과를 낳고 마는 것이다.

여기서 발생하는 보수세력의 대반격은 가볍게는 각종 선거에서의 한나라당 승리로, 그리고 더욱 심각하게는 사학법 개정에 대한 집단적·탈법적 반대에서처럼 개혁에 대한 전반적인 저항으로 나타날 것임에 틀림없다. 이것은 물론 양극화의 또다른 편에 있는 기득권의 기만적 탐욕에 기인하는 바가 크겠지만 다른 한편 민주화운동의 성과를 대중에게 환원하지 못하고 과거 김영삼·김대중 정권이 그랬던 것처럼 사유화, 사당유화(私黨有化)한 데 따른 필연적인 귀결일지 모른다. 그나마 그동안 사회 전반에 걸쳐 확산된 다양화된 삶의 방식과 인터넷 등을 통해 확장된 대중민주주의가 보수세력의 재등장을 일정하게 억제하며 민주화의 방향을 역행하지 못하게 하는 장치로 자리잡았다는 게 다행이라면 다행일 것이다.

『창작과비평』 40년의 역사 역시 이러한 전반적인 흐름과 그리 다르지 않을 것이다. ‘창비’는 주지하다시피 지난 시대 고난의 세월의 상징이자 영광이다. 강고한 권력에 맞서 지성사를 지켜온 외로운 성이자 가난한 시대정신, 가난한 문인들의 피난처이기도 했다. 그리고 당연히 창비는 지금 그 명예를 한껏 누리고 있다. 약간의 운이 따른 결과이기도 하겠지만, 창비는 그 세월 동안 명예뿐만 아니라 부에서도 과거 어느 상업적 출판사도 이루어내지 못했던 성과를 이루어낸 것이다. 오늘날 지배적 이데올로기가 된 세계자본주의의 기준으로 보자면, 역사적 정통성에서뿐만 아니라, 과거의 수배자에서 국무총리가 된 이해찬만큼이나 성공한 것이다. 근사한 사옥에 맛있는 뷔페가 곁들어진 행사에서 지나간 고난의 시절을 안주삼아 반추하는 것이 바로 지금의 모습이다.

모든 패권이 그렇듯 못난 과거의 추억은 빠르게 잊혀져가는 게 세상사이다. 황제 유비가 더이상 돗자리를 짜던 시절의 이야기와 그때 놀던 친구들을 돌아보고 싶지 않은 것과 같다. 거대담론의 생산에는 바쁘지만 정작 소소한 작은 그늘엔 눈을 돌릴 틈이 없게 된다. 그럴 뿐만 아니라 예전의 적이 지금은 친구가 된다. 문학의 경계는 허물어지고 리얼리즘은 기피되며, 대신 유행하는 힘있는 인기작가가 보기좋게 지면을 장식한다. 화려함이 진지함보다 더 큰 효과를 발휘하는 것이다. 이제 다시는 과거의 그런 가난한 시절이 오지 않을 뿐만 아니라 와서도 안된다는 것을 모두가 본능적으로 느끼는 것 같다.

이제 창비가 과거의 고난과 명예, 그곳으로부터 나왔던 자연적 권위를 다시 문학대중에게 환원하는 것은, 여타 운동권과 마찬가지로 거의 불가능해 보인다. 거대해진 조직은 필연적으로 자기유지를 위해 조직의 이기성과 이윤을 위한 합리성—이성과 다른 의미에서의 합리성—을 우선적으로 추구하게 마련이다. 그와 더불어 겸손이라는 덕 대신 강함, 적자생존, 패권 같은 니체적 덕목이 훨씬 높은 가치로 자리를 잡게 되는 것이다. 적자생존의 법칙 속에서 문학은 다양성을 잃고 더욱 상업화되며 결국 고사해나갈 뿐이겠지만 거대 출판사는 그들 고사해나가는 작가나 작품 들까지 돌아볼 여유가 없다. 그것이 어찌 창비만의 일이겠는가!

『창비』 40주년을 바라보는 시각은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어떤 사람은 상전벽해의 당황스러움을, 어떤 사람은 뿌듯한 감동을 느낄지 모른다. 무릇 자신이 어떤 추억으로 연루되어 있는가에 따라 각자 판단은 달라질 터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체로 문인들이란 그 자체가 같은 추억공동체이며 비슷한 추억을 먹고사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창비는 지난 시절에 고정된 한장의 흑백사진처럼 그들의 추억 중심에 놓여 있을 것이다. 얼어붙은 마포경찰서 뒤편 언덕길을 올라가던 그 숨가쁨의 기억처럼…… 그래서 그들 마음속 한켠에 여전히 창비는 ‘우리 편’이거나 심지어는—실주주들에게 대단히 외람된 말이지만—‘우리 것’이라는 생각이 잠재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것이 어려운 시절 창비를 지탱해준 힘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창비는 더이상 ‘우리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세상은 바뀌었고, 경쟁화된 시장경제는 너와 나를 철저히 재산상으로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분리시켜놓았던 것이다. 그럼에도 이런저런 섭섭함이나 바라는 마음이 적지 않은 까닭은 여전히 창비는 ‘우리 것’이라는 육친적 연대와 동지적 인식에서 떠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모모 출판사들처럼 아무런 문학적·운동적 추억거리도 없는 출판사가 제아무리 잘 나가거나 잘못 나간다 한들 아무도, 아무 말도 할 필요가 없는 것과 비교해보면 알 수 있듯이……

내게도 창비는 친정과 같은 곳이다. 그리고 『실천문학』의 입장에서 보자면 민족문학을 함께 지켜온 든든한 동지와도 같은 곳이다. 맹자의 말이 아니더라도 무릇 패도(覇道)는 쉽지만 왕도(王道)는 어려운 법이다. 바라건대, 그럴 수만 있다면, 창비가 지금의 모든 영광을 잊어버리고, 진정으로 겸손하게, 법고창신의 가난한 정신으로, ‘우리 창비’로 거듭나 다시 한번 신명난 바람을 불러일으켰으면 좋겠다. 말을 하자니 참으로 어렵다. 축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