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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신자유주의를 넘어 어디로?

 

일본의 금융위기와 신자유주의

 

 

하가 켄이찌 芳賀健一

니이가따(新潟)대학 경제학부 교수. 저서로 『글로벌 자본주의와 기업씨스템의 변용』 『국민국가씨스템의 재편』 『시장경제의 신화와 그 변혁』 등이 있다.

 

  • 이 글의 원제는‘日本の金融危機とネオリベラリズム’이며, 일본 잡지 『겐다이시소오(現代思想)』 2009년 1월호에 실린 것을 저자의 동의하에 옮긴이가 축약·정리한 글이다. 원문은 창비 일본어 웹페이지(www.changbi.com/jp)에 게재한다. ⓒ 芳賀健一 2009/한국어판 ⓒ 창비 2009

 

 

2007년 여름 시작된 미국의 써브프라임 위기가 2008년 여름 금융공황으로 폭발하여 지구적으로 확대되면서 실물경제로 파급되고 있다. 이 글은 이번 금융공황에 앞서 발생한 일본의 금융위기와 그에 따른 일본의 자본축적체제의 변용을 고찰한다. 이 두 금융위기에 공통되는 현대적 요인은 1980년대에 발흥했던 신자유주의이며 그 일환인 금융규제 완화다. 이 글이 1990년대 이후 일본의 금융위기를 이번 미국의 금융위기와 직접 비교하는 것은 아니나, 일본의 경험이 향후 미국의 위기 진행에 그리고 미국의 위기가 일본의 금융규제씨스템에 시사하는 바는 크다 하겠다.

 

 

1. 일본형 신자유주의 정책의 등장

 

1973년의 1차 석유위기를 계기로 일본에서 고도성장기(1955~73년)가 종언을 고하고, 선진국은 일제히 물가와 실업률이 동시에 오르는 스태그플레이션에 휩싸였다. 그러자 그 원인으로 케인즈식 정책을 주축으로 하는 복지국가가 지목되고, 대안으로 신자유주의 정책이 채택되었다. 신자유주의란 작은 정부, 민영화, 규제완화를 수단으로 정부의 극소화와 시장의 극대화를 추구하는 정책사상이다. 구체적으로는 영국의 새처 정권(1979~90년), 미국의 레이건 정권(1981~89년)하에서 실시되었다.

일본에서는 나까소네(中曾根康弘) 정권(1982~89년)이 일본형 신자유주의 정책의 효시다. 당시 일본의 최대 과제는 재정적자의 해결이었는데, 1979년 총선에서의 자민당 참패로 소비세 부과에 의한 세수증대가 백지화되자‘행정·재정개혁’에 의한 세출삭감에 의존하게 되었고, 이때 국철, 전전공사(電電公社, NTT의 전신-옮긴이), 전매공사가 민영화되었다. 그러나‘행정·재정개혁’은 거품경기에 따른 내수확대, 세수증가, 1988년말의 소비세법 도입 등으로 용두사미가 되고, 정치쟁점은 1988년 리쿠르트사건(리쿠르트사가 당시 주가상승이 예상된 리쿠르트 코스모스사의 미공개 주식을 나까소네, 타께시따竹下登 등 당대 거물 정치인에게 뇌물로 공여한 사건-옮긴이)을 계기로 정치개혁, 특히 선거제도 개혁으로 옮겨갔다.

 

 

2. 금융규제 완화와 거품경제

 

고도성장기에 확립된 전후 일본의 금융씨스템은 외환법에 의한 국내외시장 분단, 금리·업무·진입 등에 대한 규제 등 금융당국의 엄격한 규제하에 놓여 있었다. 이러한 규제의 목적은 금융기관의 경쟁을 제한하여 금융씨스템의 안정성을 유지하는 데 있었다.

1980년대 영국과 미국이 주도한 신자유주의 정책이 일본의 축적체제에 미친 영향은 대체로 제한적이었으나, 금융규제에 대해서만큼은 예외였다. 고도성장기형 금융씨스템은 1차 석유위기를 계기로 해체되기 시작한다. 우선 금융구조가 크게 변했다. 기업부문에서 투자정체로 말미암아 우량 제조대기업의 외부자금에 대한 의존도가 낮아지자 주요 은행들(도시은행, 장기신용은행, 신탁은행)이 새로운 대출처를 찾아나서면서 은행간 경쟁이 격화되었다. 또한 1975년부터 은행과 증권의 업무구분이 모호해지자 금융기관간 경쟁은 더 심해졌다. 더욱이 1977년 국채유통시장 해금을 계기로 예금금리 자유화시대가 도래했다. 이처럼 1차 석유위기 이후 국내 금융구조가 변하는 가운데, 금융규제 움직임이 부분적으로 완화되거나 그 효과가 줄어들다가 다시 1980년대에 가속화되었다. 그 배경에는 미국의 압력도 있었으나, 당시 대장성(현 재무성)은 외압을 이용해 국내의 반대를 누르고 금융자유화를 촉진하여 엔화를 국제화함으로써 토오꾜오를 런던, 뉴욕에 비견되는 국제 금융시장으로 키울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이렇게 국내외 요인이 결합해 금융규제 완화가 진행되는 환경에서 은행은 예상되는 경쟁격화와 이윤축소를 융자확대로 해결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공격적인 융자’전략을 구축했다.

이후 각종 예금금리가 거의 반년마다 자유화되고 최저예금액이 낮아져갔다. 1988년에는 이른바 BIS(국제결제은행) 규제도 도입되었다. 이를 도입한 이유 중 하나는 낮은 이윤 때문에 융자확대 노선으로 치달은 국내은행의 국제은행 업무를 규제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BIS규제가 은행에는 수익확대의 유인이 되었다. 만약 은행의 자기자본비율이 8%라 할 때, 대출을 1백억엔 확대하려면 자본을 8억엔 증가시켜야 한다. 이에 은행은 본업에서는 리스크 프리미엄을 요구할 수 있는 중소기업과 개인에 대한 융자에서, 신규 분야로는 국제융자 부문에서 전략목표를 설정했다.1

은행자유화에 대한 국가전략은 없었다. 첫째, 1981년 은행법 개정시 대장성 원안에는 정보공시와 경영이 부진한 은행에 대한 경영개선계획 명령이 포함되어 있었으나, 은행업계가 이에 맹렬히 반대하자 이 규정을 삭제했다. 대장성이 옛 규제를 대체할 새 규제 마련을 진지하게 구상하지는 않은 것이다. 둘째, 1982년부터‘금융자유화’에 대한 대응책이 검토되었으나 결론은‘규제의 최소화와 점진적 대응’뿐이었다. 이는 점진적으로 규제를 완화하면 금융기관이 최적의 행동을 취하리라는 신념을 표명한 데 지나지 않았다. 일본에서는 오랜 기간 경쟁제한적 규제하에 있으면서 은행들이 새로운 환경에 혁신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을 기르지 못했다. 그 결과 이들은 경쟁적 환경에서‘공격적 융자’라는 가장 안이한 전략을 세움으로써 거품에 휘말리게 되었다.‘정부의 실패’이자‘은행의 실패’다. 다만 소규모 금융기관의 파산에 대비해 1986년 예금법이 재개정되어, 자금원조제도가 도입되고 예금보험 한도액 인상(3백만엔에서 1천만엔으로), 보험요율 인상이 이루어졌다. 그후 1996년까지 금융위기 관리수단이라고는 예금보험법 개정, 예전부터 일본은행이 가지고 있던‘최후의 대부자’기능 그리고 대장성의 행정지도뿐이었다.

일본의 거품경제는 1986년 4/4분기에서 1991년 1/4분기까지 51개월간 이어졌다. 이를 거품이라 부르는 것은 지가와 주가의 급등을 특징으로 하기 때문이다. 지가는 6대도시 상업지에서 1985~91년간 약 5배 급등했고, 연간 토지투자총액은 같은 기간 11조엔에서 25조엔으로 불어났다(1985~91년 총액 112조엔). 이 기간 토지 매도자는 가계이고, 매입자는 주로 부동산업자와 건설업자였다. 은행의‘공격적 융자’전략이 금융 측면에서 토지투기에 대한 자금공급으로 지가상승을 지원한 것이다.

이런 전략을 일거에 발현시킨 것이 일본은행의 저금리정책이었다. 1986년 1월부터 금리를 5회 인하하여, 당시 사상 최저인 2.5%의 정책금리를 1989년 5월부터 유지했다. 일본은행의 금융정책 목표는 물가안정이지만, 여기에 자산가격은 포함되지 않았다. 1985년 이래 엔고와 저유가로 수입 원재료값이 떨어져 도매물가가 안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일본은행이 대장성에 금리를 인상하자고 설득할 수 없었다. 이는‘일본은행의 실패’다.

주가도 급등했다. 주가는 1982년을 저점으로 점차 상승해, 1990년말에는 닛께이지수 평균이 38,915엔으로 최고치를 기록했다. 1986~89년의 직접금융시장(equity finance) 규모는 약 55조엔에 달했다. 은행이 주식을 발행하는 목적은 앞서 말한 BIS규제에 맞추어 자기자본을 충실히하고 제2차 온라인화에 대비해 설비투자용 자금을 조달하는 것이었다. 제조대기업은 설비투자를 내부자금으로 충당할 수 있었으므로, 직접금융시장에서 조달한 자금은 금융투자에 썼다. 주가상승이 직접금융시장 규모를 늘리고 여기서 얻어진 자금이 다시 주식시장에 유입되어 주가를 끌어올리는 주가거품의 메커니즘이 형성된 것이다. 만일 이 자금이 실물경제 측면의 생산적인 투자에 쓰였다면 여기서 얻어진 수익이 주가를 뒷받침해주었겠으나, 실상은 그러지 못했다.

거품경제기는 자산가격만 급등한 표층적 호황기였을 뿐 아니라, 고도성장기 이래 오랜만에 오는 설비투자 호황기이기도 했다. 매출증대에 대한 기대감이 회복되고 1차 석유위기 이후의 투자정체에 따른 반등적 수요도 작용하여, 거의 모든 업종에서 설비투자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제조업의 다품종 소량생산화나 제품의 고부가가치화는 생산비용을 상승시키고, 경쟁심화로 말미암아 이윤을 포함시킨 가격설정이 불가능하여 손익분기점은 상승하고 영업이익률은 고도성장기 수준을 밑돌았다. 매출이 하락하면 적자상태에 빠지는 비용구조가 된 것이다.

1차 석유위기 때 경영자가 노동조합에 고용과 임금 중 양자택일하도록 압박하자, 노조는 전자를 택했기 때문에 임금상승이 억제되었다. 임금은 시장요인과 제도요인으로 결정되는데, 전자의 유효구인배율(공공 직업안내소에 등록된 구인자 수를 구직자 수로 나눈 비율-옮긴이)은 높으나 후자의 노조교섭력 저하가 임금상승을 억제했다. 지가와 주가급등의 자산효과가 가계소비를 유발하는 현상도 보이지 않았다. 소비증가를 지탱한 것은 주로 기업의 접대비였다.

 

 

3. 거품붕괴와 금융위기

 

일본은행은 1989년 5월에서야 긴축금융정책으로 전환했고 대장성도 1990년 4월부터 17년 만에 부동산융자 총량규제를 발동했다. 금융기관의 융자가 제한되면 지가거품의 메커니즘은 붕괴한다. 다만 총량규제에서는 농림계통 금융기관과‘주택금융전문회사’(주전住專)가 규제대상에서 제외되는‘허점’이 있었다. 그로 인해 전자가 운용하기 힘든 자금이 후자에 대출되고 후자가 부동산융자를 확대하여, 지가하락은 주가하락보다 1년 늦어졌고 나중에‘주전문제’가 터졌다. 설비투자가 1991년부터 급감하고, 지가는 줄곧 하락하여 2005년에 정점의 1/5 수준으로 떨어졌다. 지가하락과 토지거래 감소는 부동산업자나 건설사의 토지자산을 부실화해 이들의 채권자인 은행의 대출채권을 부실화했다.

은행의 부실채권 처리방식에는 간접상각과 직접상각이 있다. 은행이 예상되는 부실채권 발생에 대비해 대손충당금을 적립해두는 것을‘간접상각’이라 한다.‘직접상각’이란 은행이 대출처를 도산시키고 담보를 처분하여 부실채권을 회수하는 것으로서, 이렇게 되면 은행의 대차대조표 대변에서 부실채권이 사라지고 대손충당금으로 담보를 처분해서 얻은 현금은 차변에 기재됨으로써 부실채권 처리가 완료된다.

현재 예금보험제도에 의해 예금자(개인과 법인) 1인당 1천만엔(이자 포함)까지 예금이 보호된다. 이 제도의 목적은 소액예금자 보호와 예금인출사태 방지에 있다. 1971년 정부, 일본은행, 민간 예금취급기관이 균등 출자한 예금보험기구가 설립되었다. 예금취급기관은 이 기구에 예금보험료를 납부하고, 파산한 경우 적립한 보험료에서 페이오프(예금보험의 지불)가 이루어진다. 이번 금융위기에서는 예금액 보호가 시행되어 페이오프는 실행되지 않았다.

한 은행이 파산하면 다른 은행으로 예금이 인출되거나 은행간 결제씨스템이 마비되는 등 씨스템상의 리스크가 발생한다. 이뿐 아니라 파산은행의 정상채권을 보유한 기업이 본의 아니게 대출을 유지할 수 없게 되는 등 실물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크다. 따라서 파산은행이 정상채권이나 예금을 구제금융기관에 양도하여 그 기관에 예금보험기구가 페이오프 상당분을 자금원조하는 파산 처리방식이 강구되었다. 또한 파산한 금융기관의 회수 가능한 부실채권은 분리해 예금보험기구의 협정은행인 정리회수기구에 싯가로 양도하는 방식도 정비되었다.

자기자본비율이 낮아져 파산위험이 있는‘건전’은행은 조기시정조치를 면하고자‘대출기피’나‘대출회수’로 현 자산규모를 유지할 가능성이 높아, 이 또한 실물경제를 압박하는 요인이 된다. 이에 대한 대처방안은 공적자금 투입으로서, 1998년에 제도화되었다. 이러한 파산처리씨스템이 금융위기 와중에 정비되었다.

 

거품붕괴 전기(1991~97년)

거품붕괴 후의 금융위기와 실물경제동향은 1998년을 전후로 크게 구분된다. 1992년 여름, 거품기에 유난히 부동산 융자에 빠져 있던 일본채권신용은행과 효오고(兵庫)은행이 위기를 맞았다. 정부의 초기 금융위기 관리책은 다름 아닌 부실채권의‘계획적·단계적 처리’를 목표로 하는‘미루기 정책’이었다. 대장성은 고작 일본채권신용은행에는 은행장 사임을 포함한 재건계획 책정을, 효오고은행에는 전 은행국장을 대표로 임명하는 자의적인‘재량행정’으로 대응하여 위기를 일시 진정시켰다. 정부가 미루기 정책을 택한 것은 경기가 회복되면 지가도 회복되어 부실채권도 자연 소멸되리라는 낙관론, 부실채권에 관한 인식부족, 은행보호정책에 대한 재계의 반발 등에 기인한다.

한편 일본은행은 1991년 7월 정책금리 인하를 단행해 종래의 거품억제에서 금융기관 구제로 돌아섰다. 부동산융자 총량규제도 1991년말에 해제되었다. 3년 후인 1995년 8월 효오고은행이 전후 최초로 은행법에 의해 파산하고 키즈(木津)신용조합이 거액의 부실채권 때문에 업무정지 처분을 받았다. 대장성은 같은해 6월 당시 타께무라(武村) 대장성 장관이‘금융씨스템의 기능회복에 대하여’라는 금융정책의 기본방침을 발표해 정책기조를 종전의 미루기에서 세금투입이나 청산으로 전환했다. 이듬해인 1996년 6월에는‘금융3법’과‘주전처리법’이 성립되었다. 최초로 금융위기 관리씨스템이 구축된 것이다. 금융3법 중 하나로 자기자본비율에 의거하는 조기시정조치가 도입되고 5년간의 특례조치로 예금전액보호가 도입되었다. 은행은 부실채권 처리를 가까스로 본격화하여 1996년 3월 결산시‘부실채권 처리가 큰 고비를 넘었다’고 말하기 시작했다.

실물경제가 1993년 4/4분기에 바닥을 치긴 했으나 그전의 왕성한 설비투자로 자본 스톡(stock)이 증가한 상태였기 때문에 회복에는 이르지 못했다. 통상 경기순환 패턴에 따른‘반동불황’이다.2 그러나 1995년 1/4분기부터 설비투자가 회복되었는데 그 이유 중 하나가 자본 스톡의 조정이다. 선행하는 설비투자 붐 이후 10년 정도가 지나면서 감가상각이 일어나 주글라순환(Juglarcycle, 설비투자와 밀접히 연관되어 약 10년을 주기로 나타나는 중기 경기순환-옮긴이)의 상승기에 걸린 것이다. 또한 다품종 소량생산에 따른 비용상승이 부품 수의 축소 등으로 없어지고 1차 구조조정으로 인건비가 삭감되어 손익분기점도 개선되었다.

이러한 기업측 요인에 재정금융정책이 결합했다. 한신(阪神)대지진의 피해복구와 엔고대책의 일환으로 1995년 4월부터 대규모 재정정책이 실시되고 일본은행도 한층 금융완화정책을 편 결과 거시경제정책이‘마중물’효과(pump effect)를 거둔 것이다.

하시모또(橋本龍太郞) 정권(1996.1~1998.7)은 금융위기 관리씨스템 구축과 경기회복을 이어나가 1996년 11월 이른바‘금융빅뱅’을 지시하고, 12월에는 5대개혁을, 이듬해 1월에는 6대개혁을 주창했다. 장기간 중단되었던 신자유주의 정책이 부활한 것이다. 이미 1990년대에는 규제완화가 경제활성화나 내수진작의 중심축이 되었다. 하시모또의 6대개혁의 중점은 다시 재정건전화에 놓여, 1997년 4월부터 소비세를 5% 인상하고 특별감세가 폐지되었으며 의료비도 인상되어 국민부담은 약 9조엔 증가했다. 회복중인 가계소비를 억누른‘경제실정’인 것이다. 나아가 예산의 상한을 설정한‘재정구조개혁법’이 금융위기가 발발한 1997년 11월 도입되었다.

 

금융공황의 격발에서 금융‘정상화’로(1998년~현재)

1997년 11월 중견 증권사인 산요오(三洋)증권, 4대 증권사 중 하나인 야마이찌(山一)증권, 도시은행인 홋까이도오 타꾸쇼꾸(北海道拓殖)은행 등 금융기관이 줄도산하며 거품붕괴 후기에 돌입했다. 이 위기는 서서히 은행간 거래시장으로 전파되어가는 씨스템의 위험으로 발현했다. 대량 예금인출사태도 전국적으로 발생했다. 정부가 예금보험대상의 예외인 외화예금과 금융채, 은행간 거래를 전면 보호하겠다고 약속했으나, 정부의 위기관리력에 대한 신뢰가 결핍된 탓에 소용없었다. 4월의‘경제실정’이 실물경제 침체를 가져오긴 했으나, 11월의 금융공황 발발의 직접적인 원인은 금융기관의 대규모 부실채권 발생이었고, 금융3법체제가 위기관리체제로서의 준비가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경제정책은 신자유주의 정책에서 위기관리체제의 재편·강화와 대규모 재정정책으로 다시 전환되었다. 후자는 건전 금융기관에 대한 공적자금 투입을 최초로 가능케 했다. 예금보험기구에 30조엔의 공적자금이 준비되어, 부실채권 처리로 인해 감소한 자기자본을 보충하고 선의의 대출자에 대한 대출회피를 예방하기 위해 이듬해 3월 1조 8천억엔이 우선주나 후순위채 등의 형태로 21개 은행에 투입되었다.

그럼에도 금융의 불안정성은 가라앉지 않았고 그 결과 1998년 7월 참의원선거에서 자민당이 참패하고 오부찌(小淵惠三) 정권(1998.7~2000.4)이 탄생했다. 1998년 10월에는 우여곡절 끝에‘금융재생법’‘조기건전화법’‘개정 예금보험법’등이 도입되었다. 금융기관 파산처리와 위기관리를 일원화한‘금융재생위원회’가 설치되고 금융기관의‘특별 공적관리’(국유화)를 포함하는 파산 처리체계도 만들어졌다. 공적자금 규모도 60조엔으로 증액되었다(2000년에 70조엔으로 증액). 그리고 일본장기신용은행과 일본채권신용은행은 국유화되었다. 그사이 금융행정기구도 재편되었다. 종래 대장성이 재정과 금융에 대한 행정권한을 모두 장악하고 있었으나, 후자가 1998~2007년에 금융감독청, 금융재생위원회, 금융청에 분산 위임되었다. 또한 1997년 6월에는 신일본은행법이 도입되어 일본은행의 대장성으로부터의 독립성이 강화되었다. 1980년대 중반 이후의 그리고 1996년‘금융빅뱅’에 따른 규제완화도 금융위기 관리씨스템의 구축과 병행해 진전되었다. 1996년 11월에는 당좌계좌에 대한 이자지급 금지를 제외한 예금금리가 완전 자유화되고 업무규제도 완화되어, 1996년 6월‘금융씨스템 개혁관련 2법’으로 모아졌다. 1997년 5월 외환법 개정에 의해 외환업무 취급규제가 사라져 내외시장을 분단시켰던 규제도 철폐되었다.

1996년과 1998년에 형성된 금융위기 관리씨스템은 2001년 3월말까지만 시행될 한시적 조치였으므로, 2000년 5월에 예금보험법이 개정되어 항구적인 씨스템이 형성되었다. 요점은 금융위기 재발시 총리를 의장으로 하는‘금융위기대응회의’가 내각부에 설치되어 공적자금에 기초한 예금 전액보호나 공적자금 투입이 가능해진 것이다. 페이오프도 예정을 다소 당겨서 2005년 4월부터 전면 해금되고, 기업이나 지방자치단체의 대단위 예금에 대한 대비책으로는 무이자지만 예금 전액이 보호되는‘결제용 예금’이 페이오프 해금에 맞춰 창설되었다.

1998년 10월 금융재생법에 기초한 부실채권의 분류기준과 대손충당금 비율이 정비되고 집행도 엄격해져, 은행의 부실채권 처리가 가속화되었다. 은행의 허술한 자기사정(自己査定)에 대한 금융당국의 검사가 엄격해지고 불황형 도산이 늘었기 때문이다. 은행의 적자결산이 1996년 1/4분기부터 2004년 1/4분기까지 이어져 금융기관의 파산 건수도 2001년에 최고치인 56건을 기록했다.3 금융위기 관리씨스템이 정비되었는데도 혹은 정비되었기 때문에 금융씨스템 동요가 계속된 것이다.

2001년은 부실채권 처리의 정점이었는데, 부실채권 처리를‘구조개혁’의 중점사업으로 내건 코이즈미(小泉純一郞) 총리는 2002년 9월 금융담당 장관을 연착륙 노선의 야나기사와(柳澤伯夫)에서 경착륙 노선의 타께나까(竹中平藏)로 교체했다. 개각 직후 공표된 강경한‘금융재생프로그램’은 금융불안을 재연해, 주요 은행주가 급락하고 닛께이지수는 2003년 4월 28일 거품 이후 최저치인 7,607엔을 기록했다. 주요 은행이 파산하면 은행주를 대규모로 보유한 생명보험회사가 파산하고, 이들이 파산하면 은행이 이들에 투자한 기금이나 후순위채가 부실화해 둘의 연쇄파산이 우려되었다. 2002년 10월부터 2003년 5월에 걸쳐 주가공황이 발생한 것이다.

주가공황에 기인하는 금융위기는 2003년 5월 리소나(りそな)그룹에 대한 자본투입시 주주책임을 묻지 않게 되자 끝이 났다. 투자자들은 이를‘대마불사’신호로 받아들여, 외국인의 은행주 매입이 시작되고 주가가 상승했다. 타께나까의‘금융재생프로그램’은 공연히 금융불안을 부추기고 은행 경영자와 주주의 도덕적 해이를 공인했을 뿐이다.

2005년 5월 주요 은행의 결산이 몰린 시점을 겨냥해 정부는 드디어 금융‘정상화’선언을 발표한다. 거품붕괴 이후 실로 15년에 걸쳐 금융 불안정성이 이어진 것이다. 금융청의‘부실채권 처분손실 등의 추이’에 따르면 2002년부터 2007년 3/4분기까지 처분손실 누계는 98조 6천억엔이다. 예금보험기구가 교부국채를 현금화한 것은 10조 4천억엔이다. 예금전액 보호조치가 없었다면 사라지고 말았을 금액이다.‘금융안정화법’과‘조기건전화법’에 의해 2001년말까지 투입된 공적자금과 리소나은행에 대한 자본증자분을 합하면 12조 4천억엔이 넘는다.4 2005년까지 예금취급기관의 파산 건수는 181건이며, 이 중 은행은 20개이나 정상화한 것은 주요 은행뿐이었다. 대형은행의 부실채권 비율은 정점인 2001년말 8.7%에서 2007년말 1.4%로 낮아졌으나, 지역은행은 8.1%에서 3.8%로 낮아진 데 불과하다.5

 

금융공황하의 거시경제정책

오부찌 정권은 1998년 4월부터 대규모 재정정책을 채택했고 10월에는 중소기업에 대한 융자대책으로‘중소기업 안정화 특별신용보증제도’(총 30조엔)를 도입했다. 국채발행 잔고는 1997년말 274조엔에서 2001년말 448조엔으로 급증했다.

코이즈미 정권(2001.4~2006.9)은 세번째 신자유주의 정책, 즉‘구조개혁’을 정책과제로 설정했다. 2001년 6월에 내각회의에서 결정된 이른바‘개괄방침’에서는 최우선과제로 “부실채권 문제를 2~3년 내에 해결한다”고 했으나, 전술한 대로 부실채권 처리는 당시 이미 정점에 있었고 이듬해에 쓸데없이 주가공황을 일으켰을 뿐이다.

‘개괄 방침’에서는‘일본의 잠재력 발휘를 막고 있는 규제·관행이나 제도를 근본적으로 개혁’한다고 선언했다. 이는 종래의 일본 경제씨스템의 사회적 토대를 해체하는 정책이다. 금융위기가 규제철폐의 부산물이며‘큰 정부’가 금융위기를 관리하고 있었다는 점은 전혀 돌아보지 못한 채 신자유주의 정책이 주창되었다. 5년에 걸친 코이즈미 정권의‘구조개혁’은 거창한 슬로건하에 언론을 통해‘신자유주의 언어’를 보급했을지언정, 그 정책수단은 종래의 규제완화와 세출억제에 따른 재정건전화에 다름 아니다. 후자는 사회보장씨스템과 지방재정을 곤란에 빠뜨리고 내수확대를 저해했다. 유일한 거시경제정책은 외환정책으로, 정부는 엔저 유도를 위해 2003년 1월부터 다음해 3월까지 37조엔어치의 달러 매입에 개입했으나, 그 혜택은 제조대기업에만 돌아갔다.

일본은행은 1999년 2월 콜금리를 0%로 유도하는‘제로금리정책’을 도입하고도 일시적으로 정세파악에 실패해 다시 해금했으나, 2001년 3월에는 본원통화를 윤택하게 공급하는‘양적 완화정책’을 도입했다. 2006년 3월에는‘양적 완화정책’을, 6월에는‘제로금리정책’도 해제했다. 금융정책은 문고리에 매단 끈과 같아, 끈을 잡아당겨 문을 열 수는 있으되 열고 나면 닫을 수 없다. 자금수요가 큰 국면에서 긴축금융은 효과를 발휘하나, 자금수요가 결여된 국면에서는 금융완화가 자금수요를 촉진하는 효과는 제한적이다. 다만 은행간 거래시장이 불안정한 상황에서 그같은 양대정책이 풍부한 본원통화 공급으로 은행의 유동성 우려를 잠재우는 효과는 있었다.

 

금융공황과 실물경제

금융공황의 악영향으로 실물경제는 1998년과 2001년에 물가하락과 경기침체가 동시에 발생하는 디플레이션 악순환에 빠졌다. 1992~97년 연평균 GDP성장률은 실질성장률 기준 1.4%, 명목성장률 기준 1.8%였으나, 1998~2007년에는 각각 1.2%, 0.3%로 더 떨어졌고 더욱이 명목성장률이 실질성장률을 밑도는 디플레이션 상태였다.

금융공황이 실물경제를 위축시키는 경로는 두가지다. 첫째는 금융위기가 직접적으로 기업과 가계의 투자와 소비를 위축시키는 것이다. 제2의 경로는 간접적이다. 금융위기에 의해 투자와 소비가 급감하는 거시경제 환경에서 기업들은 매출확보를 위해 극심한 가격인하 경쟁을 벌인다. 한 기업이 가격을 인하하면 다른 회사가 뒤따르는 것이 디플레이션의 미시적 기초다. 이것이 1998년과 2001년에 디플레이션 악순환을 발생시켰다. 기업이 가격을 인하하면서도 이익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비용삭감에 나서야 하는데, 그 주요 수단이 인건비 감축과 구매선 조정이다. 후자는 납품가격 삭감으로서, 이 경로를 통해 구조조정이 전파된다.

전자는 신규채용 억제, 정규직의 임금억제와 장시간 노동 그리고 비정규직 확대다. 후생노동성에 따르면, 1997~2007년‘임원을 제외한 고용자’는 157만명 증가했으나 그 내역을 보면 정규직은 419만명 감소하고 비정규직(파트타임·파견·계약직 등)은 574만명이나 증가했다.6 그 결과 노동자가 현재 셋 중 하나 꼴로 불안정한 비정규직 지위에 있다. 더욱이 2007년 비정규직 비율은 남성이 18.3%인데 여성은 53.5%로, 노골적인 성차별적 노동시장이 형성되어 있다.

기업이 노동자를 정규직에서 비정규직으로 바꾸는 이유는 고용조정의 용이함과 인건비 삭감에 있다. 상용 정규직의 생애임금은 2억 791만엔이나, 상용 비정규직의 경우는 약 절반인 1억 426만엔, 파트타임 노동자는 4,637만엔으로 추정된다.7 게다가 기업의 인건비에는 현금급여뿐 아니라 사업주가 부담하는 사회보험료도 포함된다. 『법인기업통계조사(法人企業統計調査)』에 따르면, 전체 기업의 2005년‘복리후생비’는‘조세공과’의 2.4배, 인건비 총액의 11.4%를 차지한다. 사회보험료 회피가 비정규직 고용의 동기인 셈이다. 비정규직의 사회적 배제는 사회보장씨스템으로부터의 배제이기도 하다.

고용전략의 전환은 특히 청년층에 타격을 가했다. 2007년 15~34세 연령층에서 프리터(freeter)가 181만명, 무직이 62만명, 실업자가 116만명, 비정규직이 579만명에 달했다. 기업이 먼저 비정규직을 확대하면 노동자파견법 등 노동법제가 개정되어 이를 뒷받침하는 경향이 강하다.

미시적·단기적으로는 인건비 감축이라는 고용전략이‘성공’했다. 2002년 이후 기업이익률 회복의 최대 기여요인이 바로 이것이었다. 비정규직 증가는 미시적으로 기업의 조직능력, 특히 인적 기능 저하를 가져와 경쟁력을 쇠퇴시키지만, 그 효과는 점진적으로밖에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나 이러한 고용전략은 거시경제적으로 경기회복 메커니즘을 파괴한다. 기존에는 수출증가나 주택투자가 수요회복을 선도하고 이것이 투자와 고용 및 임금증가에 의한 가계소비 증대를 이끌어 장기호황을 실현시켰으나, 이 경로가 파괴된 것이다. 『국민경제계산(國民經濟計算)』에 따르면‘고용자 보수’(compensation of employees, 한국에서는 피고용자 보수라 하며, 피고용자가 받는 모든 보수로서 임금·봉급, 고용주 부담의 보험, 연기금 등을 포함한다-옮긴이) 중‘임금·봉급’은 1997년 241조엔에서 2003년 218조엔으로 감소한 뒤, 2006년에도 226조엔으로 약간 증가한 데 그쳤다. GDP의 약 60%를 차지하는 가계소비가 부진한 것이 2002년 이후 경기회복이 미약하고 디플레이션이 계속되는 최대 요인이다.

‘고용자 보수’의 저하경향에도 불구하고 왜 경기가 더 악화되지 않을까? 이는 일본의 그리고 동아시아 경유의 대미수출이 증가한 덕택이다. (그러나 수출주도형 축적체제는 미국의 수입이 감소하면 붕괴하기 마련이며, 이미 붕괴중이다.) 또한 어렵게 구축해온 일본의 사회보장씨스템이 내수를 밑받침하고 있기 때문이다. 『국민경제계산』에서‘가계 최종 소비지출’은 1997년 279조엔에서 2006년 284조엔으로 증가했는데, 이러한 가계소비의‘건실함’은 현금으로 연금을 급부한 것 등에 기인하는 바 크다. 한편 사회보장급여에 교육 등에 대한 정부지출을 추가한‘가계 현실 최종소비’는 1997년 328조엔이었으나 2006년에는 341조엔으로 착실히 증가하고 있다. 실제 사회보장급여는 1997년 69조엔에서 2005년의 88조엔으로 증가했다.8‘가계 현실 최종소비’가 내수의 기반 균열을 막는 일대 요인이었던 것이다.

코이즈미 정권이 구조개혁을 추진할 수 있었던 것은 외생요인인 수출증가 때문이며, 역설적으로‘구조개혁’이 파괴하려 했던 사회보장제도가 내수의 기반 균열을 막은 것이다.

 

 

4. 일본 금융위기의 교훈 그리고 과제

 

일본의 금융위기는‘세가지 실패’-옛 규제가 효력을 잃었을 때 새 규제를 구축하지 못한 채 옛 규제를 철폐한‘정부의 실패’, 규제완화에 의한 경쟁격화를 융자확대로 메우는 전략을 세운‘은행의 실패’, 1980년대 후반에 초저금리정책을 지속하여 자산가격 급등을 방치한‘일본은행의 실패’-가 결합하여 발생한 현상이다. 정책과정에 우여곡절은 있었으나 그나마‘큰 정부’와‘큰 (중앙)은행’이 금융위기를 관리했다. 일본이 주는 교훈은 금융시장의 안정적 작동을 위해서는 정부에 의한 실효성 있는 금융기관 규제와 감시감독이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번 써브프라임 위기에서 분명해졌듯이, 자기자본비율 규제는 상업은행이 신중한 대출행태를 보이도록 하는 인쎈티브가 되지 못했다. 이는 일본이 시장의 자율적인 은행 점검기능이‘주’가 되고, 금융당국의 역할은 이를 보완하는‘종’에 불과한 금융위기관리씨스템을 가지고 있음을 뜻하는 것이다. 그러나 예컨대 주식시장이 은행의 과도한 리스크 부담을 사전에 관찰하여 주가를 하락시킴으로써 경영자에게 경고한다든가 하는 시장 점검기능은 환상이다. 시장과 정부는 주종관계가 아니라 상호 보완관계에 있다.

일본의 불황의 원인은‘구조개혁’의‘구조’가 아니라 금융위기와 그것에 직·간접으로 영향받은 거시경제 메커니즘의 변환에 있었다. 특히 종래의 고용구조를 파괴하고 비정규직 비율을 높인 것이 문제였다. 대안적 노동정책으로 시사적인 것이 스웨덴의‘렌(G. Rehn)-마이드너(R. Meidner) 모델’이다. 이에 따르면 저임금을 용인하는 것은 경영이 열악한 생산성 낮은 기업을 사회적 보조금으로 존속시키는 것과 다름없다. 임금격차 축소에 따른 임금상승은 생산성이 낮은 기업의 이윤을 압박하여 그 기업에 생산성 향상의 유인을 제공한다. 생산성이 높은 기업의 임금상승률은 생산성 상승률을 밑돌므로 이윤이 증가해 투자와 고용이 확대된다. 이러한 임금결정씨스템이 경영자를 규율하고 산업구조 전환을 촉진한다. 단,‘동일가치노동 동일임금’이‘전 노동자 동일임금’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기능의 차이에 조응하는 임금격차는 노동자에게 기능향상의 인쎈티브를 부여하므로 용인된다. 그러나 이것만 취하면‘유연한 노동시장’론에 악용될 수 있다. 이 모델에서는 연대임금정책이 실업자 재훈련 등의 적극적 노동시장정책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스웨덴 같은 강력한 노동조합이 없는 일본에서는 이 모델을 그대로 수용할 수 없어 정부의‘노동규제’가 노조 역할을 대행해야 한다. 비정규직이 증가한 이래 처음으로 경기후퇴기를 맞은 지금, 정규직에 비해 이들에 대한 구조조정이 손쉽다는 점이 유감없이 발휘되어‘고용자 보수’가 이전보다 급감한 탓에 디플레이션 악순환이 재발할 가능성이 있다. 5년여의‘구조개혁’은 일본의 자본축적체제를 부분적으로 파괴하고 크게 변조시켰으나, 다행히 미국형 신자유주의적 축적체제로 대체되지는 못했다. 단기적으로는 적극적 노동정책을, 중기적으로는 사회보장씨스템을 가미한 내수주도형 자본축적체제가 구축되지 않으면 안된다.

이런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필요조건은‘신자유주의 언어’의 극복이다. 신자유주의는 일본의 금융위기와 자본축적체제의 변용을 관통하는 것이다. 지금의 미국발 금융위기를 금융규제의 재구축 정도가 아닌 신자유주의의 주술을 푸는 전지구적 호기로 삼아야 한다.

번역 김양희│대외경제정책연구원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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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川野克美 『金融自由化戰略の歸結』, 有斐閣 1995, 8면, 27~28면.
  2. 山家悠紀夫 『景氣とは何だろうか』, 岩波書店 2005, 99면.
  3. 『預金保險年報』(2005) 3면.
  4. 竹內俊久 「預金保險機構の財務構造」, 『預金保險硏究』 2007년 4월호.
  5. 「金融システムレポ-ト」 2008년 9월호 39~40면.
  6. 『勞動經濟白書』(2008) 27면.
  7. 風間直樹 『雇用融解』, 東洋經濟新報社 2007, 127면.
  8. 『社會保障統計年報』(2008) 102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