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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 40주년에 부쳐 | 일본

 

젠야(前夜)

파국의 전야를 신생의 전야로

 

 

타까하시 테쯔야 高橋哲哉

『前夜』 편집위원 taka56@cronos.ocn.ne.jp

 

 

『창작과비평』의 창간 40주년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식민지지배에서 해방된 후, 한일관계가 한일기본조약에 의해 왜곡된 형태로 재출발해야 했던 1965년, 그 이듬해 『창비』는 태어났습니다. 이후 박정희·전두환 등 군사독재정권의 가혹한 탄압에도 굴하지 않고 초지일관 한국 민주화운동의 지적 거점으로 존속했으며, 자유와 민주주의 그리고 평화를 추구하는 사람들에게 희망의 등불이 되어온 『창비』가 지금까지 걸어온 길에 깊은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창비』의 존재는 오늘날 동아시아세계에서 비판적 지성과 양심의 존재방식을 제시하는 최고의 예증 중 하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잡지 『젠야』는 무엇보다도 진정한 자유와 민주주의를 추구하고 그에 대한 반동적 흐름에 항거하는 지적 거점이 되고자 한다는 점에서 『창비』와 닮았습니다. 그러나 그 실적은 『창비』에 비하면 아직 충분하지 않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젠야』는 2004년 10월 1일 토오꾜오에서 창간된 계간지입니다. 발행 모체는 기존의 출판사가 아니라, NPO(특정비영리활동법인) ‘젠야’이며, NPO 젠야의 이사가 잡지 『젠야』의 편집위원을 맡고 있습니다. NPO 젠야는 잡지 『젠야』의 발행을 주된 사업으로 하는 문화활동단체로, 찬조회원과 구독회원 등의 후원으로 유지되고 있습니다. 현재 NPO 젠야의 이사는 타까하시 테쯔야(高橋哲哉), 오까모또 유까(岡本有佳), 이효덕(李孝德), 고화정(高和政), 미야께 아끼꼬(三宅晶子), 나까니시 신따로오(中西新太郞), 서경식(徐京植), 키꾸찌 케이스께(菊池惠介) 등 8인으로, 편집장을 겸하고 있는 오까모또 유까를 중심으로 잡지 『젠야』의 편집위원회를 구성하고 있습니다.

『젠야』가 추구하는 바는 창간과 동시에 발표된 「젠야 선언」에 명료하게 제시되어 있습니다.

 

□ 젠야 선언

1. 우리는 전쟁체제로 전락해가는 일본사회의 동향에 항거하며, 사상적·문화적 저항의 새로운 거점을 구축한다. 지금의 이 상황이 왜, 어떻게 만들어진 것일까. 일본이라는 일국적 틀에 갇힐 것이 아니라 동아시아, 더 넓게는 세계 안에서 ‘전후’의 역사를 비판적으로 재검토하고 ‘다른 길’을 모색한다.

2. 우리는 문화·예술분야의 비평에 특히 힘을 기울이고, 장르의 벽을 초월한 새로운 비평의 스타일을 창조한다. 지금처럼 비평정신이 쇠약한 상태로는 ‘밤’을 견디고 신생의 때를 맞이할 수 없기 때문이다.

3. 우리는 여성·피억압민족·소수자 등, 세계 곳곳에 존재하는 피억압자들의 경험을 역사성의 관점을 가지고 검증한다. 이를 통해서 다양한 형태로 억압·분단되고 서로 만나기도 어려운 상황에 있는 자들의 대화와 연대의 장을 구축한다.

4. ‘평화’ ‘민주주의’ ‘인권’ ‘인도’ ‘정의’…… 이런 인류 보편의 가치를 표현해야 할 말이 현재 만연하는 냉소주의, 상대주의, 현실주의, 자기중심주의의 레토릭에 마모당하거나 혹은 강대한 권력에 자의적으로 횡령당하고 있다. 우리는 이런 말에 포함되어 있는 가치 그 자체를 구제하고 재생한다.

5. ‘지적(知的)’인 것은 현실을 개혁하려는 정열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으며, 현실을 개혁하기 위해서는 ‘지적’이지 않으면 안된다. 이 ‘밤’을 후회 없이 살고자 하는 우리는 ‘지적’인 책임을 회피하지 않고, 진정으로 ‘지적’이고자 하는 노력을 아끼지 않는다.

 

이처럼 『젠야』는 무엇보다도 ‘전쟁체제로 전락해가는 일본사회의 동향’에 대해 사상적·문화적인 한 거점을 구축할 것을 우선과제로 삼고 출발했습니다. 거기에는 1990년대초 냉전체제의 붕괴와 전지구화의 진전과 더불어 시작된 새로운 세계상황에 대해 1990년대 중반부터 도도하게 불거진 우경화와 국가주의화로 반응한 일본사회에 대한 심각한 위기감이 있습니다. 이 우경화와 국가주의화가 한국의 옛 일본군 ‘위안부’ 김학순 할머니의 증언으로 시작된 ‘위안부문제’에 대한 반발이 계기가 된 것은 상징적입니다. 일본사회의 ‘전쟁체제로의 전락’은 90년대 이후의 새로운 세계정세에 대한 반응일 뿐만 아니라, 전후 반세기가 지났는데도 전쟁과 식민지지배의 책임을 직시하지 못하고 옛 제국의 부(負)의 유산을 청산하지 못한 일본의 전후 민주주의와 평화주의의 근본적인 약점에서도 유래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점에서 『젠야』는 전후 일본의 ‘진보파’가 수행해온 중요한 역할을 평가하면서도 단순히 그 연장선상에 스스로를 위치짓는 것이 아니라, 전후 민주주의와 평화주의에 대한 비판적인 문제제기도 주요한 과제의 하나로 설정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 문제제기는 필연적으로 ‘일본’을 초월하여 전지구적 차원에서, 특히 동아시아와의 관계 속에서 이뤄지지 않으면 안됩니다.

『젠야』의 입장은 단적으로 ‘반전·평화·반식민지주의’로 정의할 수 있습니다. 이런 입장에서 우리는 지금까지 다음과 같은 특집을 계속 꾸려왔습니다. 문화와 저항(창간호), 반식민지주의(제2호), ‘전후’ 재고(제3호), 여자들의 ‘현재’(제4호), 전쟁과 예술(제5호), 제3세계라는 경험(제6호). 각호의 내용을 상세하게 소개할 수 없는 것이 아쉽지만, 가령 주요 기획의 하나인 「젠야 인터뷰」에 지금까지 게재된 내용을 보는 것만으로도 『젠야』의 특징을 알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젠야 홈페이지 www.zenya.org 참조).

일본에서는 지금 전쟁체제로의 전락이 가속화됨과 동시에 언론계도 그 비판적 역할을 방기하고, 씨니컬한 현상 추인이나 노골적인 동조의 주장이 위세를 떨치고 있습니다. 심각한 현실 안에서 『젠야』는 세계, 특히 한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인근지역의 진정한 자유와 민주주의, 정의와 평화를 희구하는 사람들의 경험을 배우며 연대를 강화함으로써 일본 내의 반역사적 흐름에 대항할 용기와 지혜를 배양해갈 수 있길 염원합니다. 『창비』와도 가능한 모든 협력을 모색해가고자 합니다.

『창비』가 더욱 발전하기를 기원하면서 『젠야』가 표방하는 주장으로 글을 마무리함을 양해해주십시오. “파국 전야가 신생 전야가 되고, 전쟁 전야가 해방 전야가 되는 그 흔치 않은 희망을 우리는 버릴 수 없다.”

〔박광현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