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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산문

 

인문정신의 위기와 ‘실천인문학’

오창은│문학평론가, 지행네트워크 연구위원

 

 

감시초소를 넘어설 때, 그 너머의 고요가 낯익다는 생각을 했다. 마침 이슬비가 내려 어깨에 멘 자료집 뭉치를 적시고 있었다. 세상을 적시는 상큼한 느낌의 여린 물방울이었지만 그 차분함이 편치 않았다. 이 느낌은 무엇일까? 낭패감의 뿌리를 찾아 회상에 나를 내맡기자, 문득 논산훈련소의 높은 담장이 생각났다. 안양교도소의 담장은 훈련병으로 입소하던 시절의 기억을 오롯이 되살려냈다. 그때, 위병소를 지나면서 나는‘당분간 세상과 단절된다’는 고립감에 주춤했었다. 그리고, 진짜‘세상과 단절된 이들과의 만남’을 위해 안양교도소의 높은 담장을 통과했다.

2008년 7월 14일부터 2주간 안양교도소에서 진행된‘제5기 평화인문학 강의’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나는‘제5기 강좌’의 총책임자였고, 수용자와 강사 들의 만남에 디딤돌을 놓아야 하는 첫 강사였다. 2주간의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도 우리는 예산이 전혀 없었다. 모든 강사들은 무급봉사였고, 자료집 발간 등은‘지행네트워크’연구위원들이 갹출해 충당했다. 다행히 행사가 다 끝난 후에‘아름다운재단의 개미스폰서’지원이 결정되어, 나중에야 강사료를 지급하고 적자도 메울 수 있었다.

강의록을 준비하면서도 시행착오의 연속이었다.‘마음을 치료하는 글쓰기’라고 강의 제목을 정했다가‘마음을 다스리는 시읽기와 글쓰기’로 변경했다. 수용자를 환자로 간주하는 듯한 제목이 마음에 걸렸던 것이다. 신경림의 「무인도」와 기형도의 「안개」를 함께 읽으면서 수용자들과 눈을 마주치고 그들의 이야기를 깊이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교도소에서 진행되는 인문학 강의에 매료되어 세번째 수강한다는 20대 중반 젊은 수용자의 진지한 눈빛은 강렬했다. 그는 내게 “내 글도 다른 사람을 위로할 수 있을까요?”라고 물어왔다. 그의 질문은‘글을 읽으면서 위안받은 자의 내면’을 절실한 마음으로 표현한 것이었다. 50대 초반의 한 수용자는 자신이 쓴 짧은 소설을 수줍은 듯이 모두에게 읽어주기도 했다. 반복되는 꿈 속에 자신의 현실적 욕망을 담아낸 엽편소설은 모두들 한바탕 웃음으로 내몰아 수업 분위기를 유쾌하게 반전시켰다. 나는 그곳에서 마음이 닫힌 인문학자였고, 몸이 갇힌 수용자들은 글쓰기를 통해 해방을 경험한 자유인이었다.

강의를 진행하면서 나는 세상에 대한 경험의 폭이 너무 좁다는 사실에 두려움을 느꼈다. 수용자와 동화되어 그들의 시선으로 바라본 세계는 내가 감당하기에는 너무 낯선 것이었다. 과연 인문학이 삶의 현장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평화인문학 강의 이후 나는‘인문학의 위기 담론’을 대학 밖에서 객관화해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2005년 나는 박사학위 논문을 끝마치자 대학원 연구실을 이용할 명분이 없어졌음을 알았다. 더이상 대학원생이 아닌 비정규직 교원에게 절실한 것은 안정적인 연구공간이다. 하지만 그 어느 대학도 시간강사에게 연구공간을 내주지 않는다. 그래서 그들은 비루한 형편에도 중고차와 노트북을 구입한다. 차는 강원도로, 충청도로 대학을 찾아 이동하는 수단이고, 노트북과 결합하면 움직이는 연구실이 된다. 한국사회에서는 매년 8000여명의 박사들이 배출되고 있는데, 이들 중 상당수의 인문학 박사들은‘지식 쎄일즈맨’이라는 직업을 유지하기 위해 자동차와 노트북에‘설비투자’를 한다.

나는 운좋게 기(氣)가 승한 동료들을 만나 중고차를 사는 대신 인문학적 실천을 모색하는 조그만 연구공간을 마련했다. 지행네트워크를 만든 때가 2007년 여름이었다. 우리가 모일 수 있었던 것은 대학원 시절부터 제도 밖에서 함께 어울렸기 때문이었다. 지행네트워크가 처음 한 사업이 무모하게도‘찾아가는 인문학’이었다. 실천인문학이라는 구상 속에서‘KB한마음’직원들과 만나 소설, 축구, 여행, 드라마를 주제로 인문학적 대화를 나눴다. 그리고 앞서 말한 안양교도소에 발길을 들여놓았고, 2009년 6월에는 수원구치소에서도 강의가 예정돼 있다.

대학 밖에서 인문학적 실천을 해보겠다고 눈길을 돌리고 난 후에야 이미 많은 단체들이‘대중과 인문학적 대화’를 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2005년 9월 성프란씨스대학(노숙인을 위한 인문학 강좌)이 문을 연 이래, 노원성프란씨스대학, 관악인문대학, 경기광역자활지원쎈터 인문학 등이 개설되었다. 소외계층에 먼저 손을 내민 인문학자들의 활동은 자활인문학, 평화인문학, 시민인문학, 실천인문학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린다. 이러한 의미있는 활동에‘철학아카데미’‘연구공간 수유+너머’등이 나서서 현장에서 대중과 대화하는 여러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었다. 최근에는 일단의 인문학자들이 노숙인, 재소자, 새터민, 다문화가정과 인문학적 대화를 나눈 결과를 『행복한 인문학』(이매진 2008)이라는 책으로 간행하기도 했다. 클레멘트 코스를 개척한 얼 쇼리스의 『희망의 인문학』이 한국 현실과 만나 구체화된 결과물이 바로 『행복한 인문학』이다.

 

대학을 벗어나‘거리로 나온 인문학’은 무엇을 지향하고 있는 것일까? 이는 대학 내 인문학이 어떤 위기에 처했는가를 살펴봄으로써 구체화할 수 있을 듯하다.

동서양에서 공히 인문학은‘인간 삶의 의미와 가치’에 관한 학문으로 이해되었다. 그런데 현대에 들어서는 분과학문의 체계에 묶여‘인간됨’에 관한 학문이 아니라,‘인간’을 분석하는 학문으로 도구화되었다. 나는 이것이 인문학의 위기가 발생한 내재적 원인이라고 본다. 문학·역사·철학을 포괄하던 인문학은 현대 산업사회에서 더욱 잘게 쪼개져 세부전공으로 분화되었다. 이렇다 보니 보편적 가치를 지향한다는 인문학도 자연과학처럼 각자의 전공을 벗어나면 대화가 통하지 않는‘방언의 학문’이 되어갔다. 세분화된 분과학문 속에서는 세계와 소통하려 했던 인문학자도 소외를 경험하게 된다. 세상을 보기 위해 높은 곳으로 오르지 않고, 깊이 내려만 감으로써 오히려 길을 잃은 형국이다. 현대 학문체제가 인문학을‘분절적 학문’으로 변질시켜,‘인간에 대한 파편화’에 갇힘으로써 인문학 내부의 위기를 촉발한 것이다.

인문학을 둘러싼 역사·사회적 맥락의 변화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전지구적 자본주의로 인문학은 세계체제에 의해‘도태된 학문’으로 취급받고 있다. 시장주의적 가치가 당연시되고, 경쟁이 삶의 원리로 자리잡은 상황에서 근본주의적 성격을 지닌 인문학은 서서히 고사(枯死)당하고 있다. 그 구체적 실상을 대학이‘자본의 식민지’로 변화된 현실에서 살펴볼 수 있다. 김영삼정부의 교육개혁 이후, 문학·사학·철학 등은 학부제로 인해‘경쟁력 없는 학과’로 간주되어 통폐합되거나 폐과되곤 했다. 순수인문학은 실용성에 내몰려‘문화콘텐츠학과’같은 응용인문학으로 전환되었고, 대학의 인문학적 교양교육도 크게 위축되었다. 대신 대학 교양강좌에서 필요할까 싶은 실용주의적이고 기능적인 강좌(화장품학, 단전호흡, 피부건강, 바둑, 스노우보드, 다이어트, 생활과 보험 등)들이 강단을 점령했다.

한때 대학은 억압적 정치권력에 저항하는 진지였고, 지배체제에 거리를 둠으로써‘미래 사회의 희망’을 잉태하는 해방구였다. 하지만 대자본에 잠식된 대학사회를 바라보면‘자본의 바깥은 없다’라는 선언을 실감하게 된다. 학생 편의시설에는 스타벅스 같은 대자본의 깃발이 꽂혔고, 대학의 신축건물은 SK경영관, 삼성도서관, LG경영관, CJ어학관 같은 대기업의 로고로 빛난다. 상황이 이러하니, 근본적으로 자본주의체제와 불화할 수밖에 없는 인문학이 위기에 처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학문제도적 측면에서 볼 때도 문제다. 한국 인문학은 1990년대 후반부터‘관리당하는 학문’의 길로 접어들었다. 그 중심에는 한국학술진흥재단(학진)의 계량화된 평가씨스템이 자리잡고 있다. 1998년부터 시작된 학진의 학술지 평가와 2002년부터 시작된 기초학문 육성지원사업은 처음에는 인문학 위기담론에 맞서 학문세계를 합리적으로 변화시키는 기획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어느 순간 인문학 연구는 국가기구의 필요에 따라 연구주제를 결정하는 일종의‘동원체제’에 복속되었다. 게다가 학진의 등재지/등재후보지 씨스템으로 인해 지식인의 글쓰기가 논문 쓰기로 고착되었고, 계량화된 평가씨스템 탓에‘논문의 생산성’만이 중요해졌다. 그러면서 대중은 인문학에서 더 멀어져 갔다.

대학과 학문제도 내에서 이러한 인문학의 위기상황에 대해 활발한 논의가 진행되고 있다. 하지만 이론과 실천의 관계에 대한 통찰 없이 진정한 인문정신의 회복은 가능하지 않다. 그렇기에 대학 밖에서 몸으로 부딪치며 실험하는‘실천인문학’의 의미를 적극적으로 평가할 필요가 있다.

 

얼마 전 한 연극비평가에게서 실천인문학에 관한 매서운 질책을 받은 적이 있다. 미술·문학·문화·연극 분야의 평론가들이 함께 모여‘행동주의 미학’에 관해 토론하던 자리였다. 그는 노숙자, 수용자, 도시빈민과 함께하는 실천인문학을 겨냥해 화살을 날렸다. 그는 대학 밖에서 인문학 강의가 활발히 전개되고 있어 인상적이기는 하지만, 그 진실에 의구심을 표했다. 인문학이 시민과 만나면서 어떤 실천적 효과가 발생할 수 있을지 회의적이라고도 했다. 무엇보다 다음과 같은 그의 비판이 인상적이었다.

“노숙자나 재소자들이 인문학 수업을 통해 감동을 받았다고들 합니다만, 내가 보기에 감동을 받은 이들은 노숙자나 재소자들이 아닌 것 같습니다. 강의를 하는 인문학자들이 나르씨씨즘적 태도로 감동에 겨워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요.”

한 비평가의 냉소적인 태도로 밀쳐두기에는 만만치 않은 문제의식이 새겨진 비수였다. 체제의 폭력에 상처받은 이들을 인문학이 위안할 뿐이라면, 현재의 고통을 일시적으로 망각하게끔 인문학이 동원되는 것은 아닐까. 자기위안에 매혹된 인문학자들이 교육이라는 계몽주의적 태도를 갖고 세상과 만나 어떤 의미있는 변화를 기획할 수 있을까. 인문학이 구현하려는‘인간의 보편적 가치’라는 것이 가능한 것일까.

그의 비판으로 인한 마음속 파문을 갈무리하며, 나는‘인문학과 보편’의 관계에 대해 생각했다. 그간 인문학은 보편이라는 추상 속에 몸을 숨기고, 초월적인 학문으로 행세해온 측면이 있다. 이론인문학의 후광 속에서 계급·문화·지역·성적 차이에 무심한 채 가치중립을 보편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보편적 가치라는 것은 절대적 가치와는 다른 것이기에, 역사적 국면 속에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 인문학이 추구해야 할 보편적 가치는 민주주의적 가치와 소통, 그리고 인간 윤리의 재구성일 것이다.

민주주의적 가치와 소통하지 못하는 논문 중심의 인문학은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 것일까. 나는 결코 이론인문학이 추구하는 보편적 가치를 무시하지는 않는다. 다만, 대학과 학문제도가 설정한 울타리를 벗어나지 않으려는 반대중주의적 인문학이 오히려 인문정신의 수액을 고갈시키고 있다고 생각한다. 인문학의 위기는 인문학자의 각성이나 대학 인문학 교육의 복권만으로 타개될 수 없고, 국가기구의 인문학 지원만으로도 해결될 수 없다. 인문학이 처한 지금의 상황은 인간성을 둘러싼 세계관의 싸움을 요구하고 있다. 더 근본주의적인 시각에서 보자면, 전지구적 자본주의 씨스템의 공세 속에서 인문학이 위기에 처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존재가치 자체가 위기에 직면해 있다. 나는 인간성의 위기에 대한 통찰의 한 축을 인문학이 담당하고 있다고 믿는다.

그렇기에, 나는‘시민인문학’‘실천인문학’이라는 문제의식 속에서 노숙자, 수용자, 도시빈민과 몸을 엉키며 대화하는 인문학자들을 존경한다. 이들은 스스로 삶의 바닥까지 내려가, 사회적 상처를 온몸에 새긴 사람들과 대화하려 한다. 이들은 인문학이 왜 체제와 불화하는 반제도적 성격을 지닐 수밖에 없는가를 현장에서 경험하고 있다. 제도는 인간을 가두는 것이고, 인문학은 제도로 갇히지 않는 인간 삶의 심층을 발굴해내는 학문이라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