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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산문

 

당신의 ‘앎’에는 믿음이 존재하는가

고봉준│문학평론가, 수유+너머 연구원

 

 

오늘날‘인문학’과 관련하여 대학에 희망을 걸고 있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 한때 대학은‘현실’과 무관한 지식을 생산한다는 이유로 비판받았지만, 지금은 속물적인 현실을 모방한다는 이유로 지탄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이미 대학은 현실법칙을 모방하는 차원을 넘어 기업으로 변신하고 있다.‘기업’은 대학이‘진리’와‘지성’이라는 이름으로 은폐하려 했던 맨얼굴이었지만, 이제 그 맨얼굴을 부끄러워하는 대학은 없다. 건물 신축에만 열중하고, 산학협력이라는 이름하에 대학에 자본의 영향력을 증가시키고,‘취업사관학교’같은 노골적인 간판을 내거는 것도 모자라 오늘의 대학은‘기업’을 자처한다. 대학 총장들이 CEO를 자임할 때, 한국사회에서 대학의 위치는 어디일까? 학생들에게 대학은‘진리’나‘지성’과는 상관없이 취업을 위해 거쳐야 하는 곳이고, 학자들에게 대학은 위태로운 밥그릇을 고민해야 하는 직장일 뿐이며, 대학당국에 대학은 구조조정으로 실용성을 극대화해야 할 대상일 따름이다. 대학에 학문이 없다거나 대학이 시장논리만을 좇는다는 것은 더이상 욕이 아니다.

경쟁과 실용이 지배할 때‘인문학’의 자리는 위태롭다. 대학에서 쏟아져나오는‘인문학의 위기’는 실상 이 위태로움의 표현이다. 위기론자들은 무차별적 시장논리와 효율성에 대한 맹신이 인문학의 위기를 초래했다고 말하고, 인문학을 되살리려면 대학 또는 국가 차원의 적극적인 지원이 뒤따라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씨스템이 초래한 위기를 또다른 씨스템을 통해 제어할 수 있다고 믿음으로써, 위기를 사유의 대상으로 삼지 않는다. 그렇지만 대학에 몸담고 있는 지식인들을 제외하면‘인문학의 위기’에 동의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대학은 인문학이 위기라고 말하지만, 정작 대학 바깥에선 인문학에 대한 대중들의 관심이 뜨겁기만 하다. 대학에서는 인문학과 순수 기초과목이 폐강되고 있지만, 대학 바깥에서는 성별과 연령을 초월하여 인문학을 공부하려는 사람들이 늘고 있고, 서점가에선 인문학 관련서적들이 때아닌 호황을 누리고 있다. 심지어 서울시장까지 나서서 인문학의 중요성을 역설하는 시대가 아닌가. 한때 인문학은 불온한 사상을 전파한다는 이유로 금기의 대상이 되었지만, 지금은 삶에 대한 가능성이라는 이름으로 전사회적으로 권장되고 있다. 그러므로‘인문학의 위기’는 제도권 인문학의 위기이고, 지식생산에서 독점적인 위치를 점해왔던 대학의 위상 변화를 나타내는 말에 지나지 않는다.

제도권 인문학은 왜 위기에 빠졌을까? 지식생산 주체의 학문적 게으름을 탓하는 것은 올바른 답이 아니다. 오늘날 강단의 지식인들은‘과중한 업무’에 비유될 만큼 지식생산을 강제당하고, 학문의 후속세대 역시 제도적으로는 탄탄하게 구축되어 있다. 혹자는 위기의 원인을 지식의 계량화에서 찾지만, 제도권 인문학의 위기가 드러나는 양상을 보면 그것도 올바른 지적은 아닌 듯하다. 오래전 대학에서 철학을 강의하는 사람에게 철학자와 철학교수의 차이점에 대해 물은 적이 있다. 그는 철학자는 자신의 앎에 대한‘믿음’을 갖고 있는 사람이지만, 철학교수는 앎에 대한 믿음 없이도 학문을 할 수 있는 존재라고 답했다. 가부장적인 사람도 대학에서 얼마든지 페미니즘을 강의할 수 있다는 얘기다. 지금 제도권 인문학에 부재하는 것은 앎이 삶을 바꿀 수 있다는 믿음이다.

인문학은 인간의 삶에‘개입’하는 학문이기에‘객관적’이지 않다. 객관성을 고집할 때, 인문학은 단순한‘정보’가 되고 만다. 제도권 인문학은 인문학을‘정보’나‘지식’의 차원으로 축소시킴으로써 이‘개입’의 능력을 잃었다. 물론,‘개입’이‘앎’의 문제만은 아닐 것이다.‘앎 없는 삶’은 맹목이고,‘삶 없는 앎’은 공허하다. 문제는 정보가 아니다. 지식과 정보는 그 자체로 삶에 개입하는 능력을 갖고 있지 않다. 지식의 계량화란 결국‘앎’을 정보의 차원에서만 이해하려는 태도가 아닐까. 중요한 것은 삶의 구원에 있어서‘앎’에 대한 믿음이다. 이 믿음에는‘위기’를 삶에 대한 다른 가능성으로 이끌어가는 힘이 있다. 위기란 결국 현재적인 삶의 방식이 한계에 봉착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문학은 현재와는 다른 종류의 삶을 상상하는 대안적·비판적 능력에 대한 사고이고, 이 경우‘앎’은‘삶’을 참조하고 있기에‘앎’과‘삶’사이의 관계는 결코 분리되지 않는다. 이것은 최근의 인문학 열풍이 대학의 외부에서 형성되고, 강의 참여자들이 주부와 직장인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확장되는 현상에서도 확인된다.

 

오랫동안 인문학은 전공자들의 전유물이었고, 한국사회의 현실을 인식하기 위해 발버둥치는 몇몇 학생들의 것이었다.‘재야’라는 존재가 없진 않았지만, 그때까지 지식 생산과 비판적인 지성은 대부분 대학 안에서 생겨나 대학 바깥으로 유포되었다. 생산과 소비의 씨스템이 명확했고, 그런만큼 대학의 위상 또한 높았다. 그러나 대중지성의 시대인 지금, 지식의 생산과 유포는 그런 방식으로 진행되지 않는다. 나는 연구공간‘수유+너머’(이하‘연구실’)에서 그것을 경험했다. 2000년대 초반까지‘연구실’의 강의와 쎄미나에는 이른바 연구자들이 많았다. 현실사회주의의 몰락 이후 한국사회에는 다양한 이론들이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했고, 학문적인 관심에서 그 이론들을 공부하기 위해 연구실을 찾은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그 숱한 이론들은‘전공’이라는 이름으로 소비되었을 뿐, 그들의 삶을 바꿔놓지는 못했다. 제도권 인문학, 특히 대학에서의 학문은‘삶’을 판돈으로 걸지 않는 지식의 생산과 소비가 아닌가.

최근‘연구실’강의와 쎄미나에서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대학원생이 아니라 직장인, 주부, 청년백수 등이다. 인문학 없이도 세속적인 삶을 살 수 있는 사람들이 인문학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이들에게는 대학 강의에서 발견할 수 없는 진지함과,‘삶’을 판돈으로 건 자들만이 보여줄 수 있는 신체성이 존재한다. 대학에서 강의를 하면서 나는 종종 대학이‘견딤’의 공간이라는 인상을 받는다. 강의를 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 모두 고통스러운 시간을 무감하게 견디고 있다는 것, 그러니 대학에서는 시청각 자료나 유머 등으로 고통을 덜어주는 사람이 인기있는 것이 아닐까. 지금 제도권의 인문학은 대학이라는 제도를 방패삼아 위태로운 목숨을 연장하고 있다.‘연구실’강의에는 이‘견딤’의 고통이 없다. 학교와 직장을 마치고 강의를 들으러 오는 사람들의 시선과 자세는 종종 두려울 정도로 선명하다.

앎의 신체성과 관련하여‘연구실’은 좋은 사례의 하나이다. 사람들의 예상과 달리‘연구실’에는 화려한 스펙(specification)을 자랑할 만한 사람이 드물다.‘연구실’은 사회의 기준에 맞춰서 살지 않겠다는, 공부를 통해, 친구와의 관계를 통해 새로운 종류의 삶을 구성하겠다는 사람들의‘활동’이 뭉쳐 있는 곳이다. 사회가 개인에게 강제하는 고통의 양이 증가할수록 연구실을 찾는 사람도 늘어간다. 그곳에서‘공부’라는 개념을 단순한‘지식’과 등치시켜 사고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앎’이 고시공부와 같은 것이라면‘연구실’보다는 차라리 고시원이 더 좋은 환경일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에게‘앎’은 곧‘삶’과 분리되지 않고,‘삶’또한‘앎’과 분리되지 않는다. 물론, 이것이 말처럼 쉬운 일만은 아니다. 또한 이 실험이 끝끝내 실패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우리가 스스로를 연구자들의 꼬뮌이라고 명명하는 까닭은 지식이 아니라‘앎’이 새로운 삶을 가능하게 한다는 믿음 때문이다. 우리는 행복하게 살기 위해, 좋은 삶을 구성하기 위해 공부를 선택했다. 또한 우리는 진정한 공부는 친구와 함께 하는 것이라고 믿는다.‘연구실’을 구성하는 것은 숱한 활동들이고, 그 활동의 하나가‘앎’이라는 형태로 드러날 뿐이다. 사람들은 종종‘연구실’의 규모와 지식의 생산에 깊은 관심을 갖는다. 그렇지만 우리가 보여주고 싶은 것은‘앎’을 통해 새로운 삶이 구성될 수 있다는 것이지‘앎’자체가 아니다.

‘연구실’은 매우 분주한 곳이다.‘연구실’은‘공부’의 공간이면서 동시에‘삶’의 공간이기 때문이다. 밥 짓고, 청소하고, 각종 쎄미나와 강좌가 진행되고, 요가와 탁구가 행해지고…… 활동이 늘어나면서 공간의 규모 또한 커졌다. 이 활동들 하나하나가 우리의 삶을 바꾸려는 노력이고 실험이다. 오랜 경험을 통해서 우리는 일상의 윤리에 대한 고민 없이‘삶’과‘앎’의 연계성이 확보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삶’이 뒷받침되는 곳에서‘앎’은 결코 정적일 수 없다.‘연구실’에서 행해지는 많은 활동들은 저마다의 윤리를 요구한다. 가령 대학에서‘교육’은 써비스의 일종으로 인식되지만,‘연구실’에서 강의는 활동의 하나이다. 때문에 강의를 듣는 사람들에게 써비스의 수혜자와는 다른 윤리를 요구한다. 이 요구가 때로 갈등을 불러오기도 하지만, 이런 윤리의 고민 없는 강의란 지식을 전달하는 친절한 써비스 이상일 수 없다. 대학과 달리, 우리는 이곳에서‘공부’하는 사람들을 삶의 파트너라고 생각한다.

인문학에 대한 대중적인 관심의 증가는 분명 사회적인 현상과 무관하지 않다. 경쟁이 그 어느 때보다 치열하게 작동하고, 경쟁은 승리자와 패배자 모두의 삶을 극도의 불안과 불확실성으로 몰아간다. 예상치 못했던 삶의 위기가 지금 경쟁과 실용이라는 이름으로 우리의 영혼을 잠식하고 있다. 이 경쟁에서 이기거나 살아남으려는 사람, 즉 삶에 대한 기존 모델을 신뢰하는 사람은 실용적인 서적에서 돌파구를 찾는다. 반면, 인문학에 관심을 갖는 사람은 새로운 삶의 가치와 모델을 고민하는 사람이다. 경쟁에서의 승리가, 물질적인 풍요가 삶의 행복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것을 몸으로 깨달은 것이다. 인문학은 삶의 위기를 먹고 자란다. 위기란 낡은 것의 한계지점이자 새로운 것의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위기에 직면하지 않는 한, 인간의 삶은 상상력보다는 관성의 힘에 의지하여 지속된다. 지금의 인문학 열풍은, 새로운 삶에 대한 대중의 욕망이 끓어오르고 있다는 방증이다. 그러므로 오늘의 인문학은 삶에 대한 새로운 비전에 근거하여 앎과 삶의 연속성을 구축함으로써 앎이 삶의 변화에 관계될 수 있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며, 한낱 정보나 지식이 아니라‘다른 삶’에 대한 상상을 촉발해야 한다.

 

지금, 인문학의 중심은 대학 외부(비제도권)로 이동했다. 이것은 제도의 확장이 아니다. 제도와는 별개로 삶과 앎의 일치라는 인문학 고유의 실험이 행해지는‘현장’이 생겨나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비제도권 인문학은, 대학이라는 제도의 방패가 제공하는 안정감 안에서 영위되는 제도권 인문학과 달리 불안정성에 노출되어 있다. 그렇지만 비제도권 인문학에 이 불안정성은 결핍이 아니라 새로운 실험의 가능조건이다. 제도적 안정성은‘활동’없이도 존속될 수 있지만, 비제도적 불안정성은 끊임없이 사유하고 실험하는‘활동’없이는 사멸하거나 제도에 흡수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대학 외부에서 인문학이 활성화되고 있는 현상은 제도권 인문학과 비제도권 인문학 모두가 사유해야 할 대상이다. 영토적 불안정성을 극복하고, 삶의 총체적 위기에 대처하면서 앎이 삶의 구원에 이르도록 힘쓰는 것, 앎이 다만 현란한 지식의 과시에 그치지 않도록 삶을 갱신하려고 노력하는 것, 마침내 그 노력이 지금까지와는 다른 삶의 방식으로 표현되도록 하는 것은 비제도권 인문학의 당면 목표 가운데 하나이다.

비제도권 인문학에도 물론 위기는 찾아온다. 그렇지만 그 위기는 제도의 위기와는 사뭇 다르다. 강단 인문학의 위기가 전공 학생의 급감이나 교양과목의 폐강처럼 제도 자체의 불균형으로 가시화되었다면, 비제도권 인문학의 위기는‘활동’자체가 안정됨으로써‘제도’에 근접하는 방식으로 드러날 가능성이 크다. 강단 인문학의 위기가‘제도’의 위기라면, 비제도권 인문학의 위기는‘제도화’의 위기이다. 우리는 알고 있다. 대학의 바깥에도 대학은 있고, 제도의 바깥에도 제도는 존재한다는 것을. 정확하게 제도는‘바깥’을 만들어냄으로써 자신의 영향력을 확장한다. 때문에 비제도권 인문학의 의의는‘존재’자체가 아니라 그것의‘활동’방식에서 찾아야 한다. 지난 20여년간 비제도권 인문학은 지속적으로 제도에 포획되었다. 이것은 비제도권 인문학이 제도의 연장선에 위치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렇지만 지금,‘비제도’는 제도의 연장이 아니다. 그것은 제도 자체에 대한 반정립이 아니기에‘대안’의 성격조차 갖지 않는다. 다만 제도와는 별개로 작동하는 실험일 뿐이다. 일상적인 불안정성은 비제도권 인문학의 조건이지 극복해야 할 난관이 아니다. 위기는 항상 내부에서 발생한다. 제도를 모방하거나 제도가 되려고 노력할 때, 비제도권 인문학의 실험은 추문으로 끝나고 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