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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신용 金信龍
1945년 부산 출생. 1988년 『현대시사상』으로 등단. 시집 『버려진 사람들』 『개같은 날들의 기록』 『몽유 속을 걷다』 『환상통』 등이 있음.
도장골 시편
營實
산비탈 가시덤불 속에 찔레 열매가 빨갛게 익어 있다
잡풀 우거진 가시덤불 속에 맺혀 있어서일까?
빛깔은 더 붉고 핏방울 돋듯 선명해 보인다
겨울 아침, 허공의 가지 끝에 매달린 까치밥처럼 눈에 선연해
눈이라도 내리면, 그 빛깔은 더욱 고혹적일 것이다
날카로운 가시들이 담장의 철조망처럼 얽혀 있는 찔레 덤불 속
손가락 하나 파고들 틈이 없을 것 같은 가시들 속에서
추위에 젖은 손들이 얹히는 대합실의 무쇠난로처럼 익고 있는 것은
아마, 날개를 가진 새들을 위한 단장일 터
磨齒의 입이 아닌, 부드러운 혀의 부리를 가진 새들을 기다리는 화장일 터
공중을 나는, 그 새들의 눈에 가장 잘 뜨일 수 있도록
그 날개를 가진 새들만 다가올 수 있도록
열매의 彩色을 운영해왔을 열매
영실이라는 이름의 열매
새의 날개가 유목의 천막인 열매
새의 깃털 속이 꿈의 들것인 열매
얼마나 따뜻하고 포근했을까, 그 유목의 천막에 드는 일
새의 腹部 속에 드는 일
남의 눈에는 囹圄 같겠지만, 전락 같겠지만
누구의 배고픔 속에 깃들었다가 새롭게 싹을 얻는 일, 뿌리를 얻는 일
그렇게 새의 먹이가 되어, 뱃속에서 살은 다 내어주고 오직 단단한 씨 하나만 남겨
다시 한 생을 얻는 일, 그 천로역정을 위해
산비탈의 가시덤불 속에서 찔레 열매가 빨갛게 타고 있다
대합실의 무쇠난로처럼 뜨겁게, 뜨겁게 익고 있다
도장골 시편
넝쿨의 힘
집 앞, 언덕배기에 서 있는 감나무에 호박 한 덩이가 열렸다
언덕 밑 밭 둔덕에 심어놓았던 호박의 넝쿨이, 여름 내내 기어올라 가지에 매달아놓은 것
잎이 무성할 때는 눈에 잘 띄지도 않더니
잎 지고 나니, 등걸에 끈질기게 뻗어오른 넝쿨의 궤적이 힘줄처럼 도드라져 보인다
무거운 짐 지고 飛階를 오르느라 힘겨웠겠다. 저 넝쿨
늦가을 서리가 내렸는데도 공중에 커다랗게 떠 있는 것을 보면
한여름 내내 모래 자갈 져날라 골조공사를 한 것 같다. 호박의 넝쿨
땅바닥을 기면 편안히 열매 맺을 수도 있을 텐데
밭 둔덕의 부드러운 풀 위에 얹어놓을 수도 있을 텐데
하필이면 가파른 언덕 위의 가지에 아슬아슬 매달아놓았을까? 저 호박의 넝쿨
그것을 보며 얼마나 공중정원을 짓고 싶었으면— 하고 비웃을 수도 있는 일
허공에 덩그러니 매달린 그 사상누각을 보며, 혀를 찰 수도 있는 일
그러나 넝쿨은 그곳에 길이 있었기에 걸어갔을 것이다
낭떠러지든 허구렁이든 다만 길이 있었기에 뻗어갔을 것이다
모래바람 불어, 모래무덤이 생겼다 스러지고 스러졌다 생기는 사막을 걸어간 발자국들이
비단길을 만들었듯이
그 길이, 누란을 건설했듯이
다만 길이 있었기에 뻗어가, 저렇게 허공중에 열매를 매달아놓았을 것이다. 저 넝쿨
가을이 와, 자신은 마른 새끼줄처럼 쇠잔해져가면서도
그 끈질긴 집념의 집요한 포복으로, 불가능이라는 것의 등짝에
마치 달인 듯, 둥그렇게 호박 한 덩이를 떠올려놓았을 것이다
오늘, 조심스레 사다리 놓고 올라가, 저 호박을 따리
오래도록 옹기그릇에 받쳐 방에 장식해두리, 저 기어가는 것들의 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