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구독 회원 전용 콘텐츠
『창작과비평』을 정기구독하시면 모든 글의 전문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구독 중이신 회원은 로그인 후 이용 가능합니다.
촌평
김기흥 『광우병 논쟁』, 해나무 2009
대중적 과학주의의 신화를 넘어
김명진 金明振
성공회대 강사, 시민과학쎈터 운영위원 walker71@empal.com
작년 상반기에 우리 사회는 미국산 쇠고기 수입재개 문제를 놓고‘뜨거운 여름’을 보냈다. 정부의 졸속협상에 대한 문제제기에서 출발한 촛불집회는 이내 광우병의 위험성, 검역 주권, 소비자의 권리 등을 둘러싼 폭넓은 대중 논쟁으로 발전했다. 그러나 이처럼 뜨거웠던 열기는 광우병에 대한 우려가 아무런 과학적 근거도 없다는‘괴담’론을 앞세우며 「PD수첩」을 그 진원지로 지목해 공세를 편 정부와 보수언론, 일부 전문가단체 앞에서 점차 수그러들고 말았다. 이후 촛불집회를 어떻게 볼 것인가에 관한 지식인사회의 활발한 토론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으나, 애초 논쟁을 야기했던 쟁점들 중 그 어느 것도 아직까지 속시원하게 해결되지는 못하고 있다.
영국 에든버러대학에서 과학사회학으로 박사학위를 받고 웰컴의학사연구쎈터에서 연구했던 김기흥의 『광우병 논쟁』은 한국사회를 달구었던 미국산 쇠고기 수입 논쟁의 의미를 되새기는 데서 중요한 기여를 할 수 있는 책이다. 이 책은 저자의 박사논문을 발전시킨 영문 저서 The Social Construction of Disease: From Scrapie to Prion (2007)의 일부를 일반 독자들을 위해 다시 쓰고 영국의 광우병과 인간광우병(변종 크로이츠펠트야콥병) 발생, 한국의 광우병 논쟁 등 최근 사건들에 대한 서술을 새로 덧붙여 만들어졌다.
『광우병 논쟁』은 250면 남짓한 소략한 분량에도 불구하고, 광우병 같은 퇴행성 신경질환을 총칭하는 감염성 해면상 뇌증(TSE)에 관한 과학연구의 역사를 그간 이 주제와 관련해 국내에 출간된 그 어떤 책보다도 소상히 다룬다. 특히 다양한 종들에서 발생하는 TSE중에서 역사가 가장 오래되고 연구성과도 많이 축적되었는데도 국내에서는 그간 가장 덜 주목받았던 질병인 양의 스크래피에 대한 연구를 자세히 다루고 있는 점을 주목할 만하다. (스크래피scrapie는 18세기 중반에 영국에서 처음 발생해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간 후 일종의 풍토병으로 자리잡은 양의 질병으로, 이 병에 걸린 양이 기둥이나 벽에 몸을 긁어서 양털과 살점이 떨어져나가는 모습을 두고 이런 이름이 붙었다.) 독자들은 이 책을 읽으면서 지난 수십년간 연구자들이 축적한 과학적 성과뿐 아니라 그들이 직면했던 모순과 혼란까지도 생생하게 접할 수 있다.
이 책에서 저자는 크게 두가지를 강조한다. 우선 TSE관련 연구가 그간 두명의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했을 정도로 비약적으로 발전했는데도 여전히 수많은 불확실성으로 점철돼 있으며, 허점과 내적 모순, 논란의 단계를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단적인 예가 TSE의 원인으로 널리 알려진 프리온(prion)이라는 감염성 단백질이다. 미국의 생화학자 스탠리 프루지너(Stanley B. Prusiner)는 1982년에 TSE의 발병 원인이 통상적인 박테리아나 바이러스가 아니라 유전정보를 갖고 있지 않은 감염성 단백질인 프리온이라는 이단적 주장을 내놓아 학계에 엄청난 파장과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이후 프리온 가설은 치열한 논쟁을 거친 끝에 점차‘정설’로 인정받기 시작했고 1997년 프루지너에게 수여된 노벨상은 이를 공고하게 만드는 결정적 역할을 했다. 그러나 TSE에는 프리온 이론으로 설명할 수 없는(혹은 뚜렷한 근거가 없는 임시변통의 설명만이 가능한) 측면들도 여럿 남아 있으며, 프리온과 통상적인 바이러스가 함께 병의 원인이 된다는 견해도 여전히 사라지지 않고 있다. 이는 TSE의 과학이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며, 우리가 알고 있는 사실들이 결코 완벽한 것이 아님을 말해준다.
이어 저자는 TSE중 특히 광우병과 인간광우병이라는 질병이 갖는‘사회성’을 강조한다. 광우병의 사회성은 다시 두가지 방식으로 작동한다. 먼저 스크래피나 광우병처럼 가축에서 나타난 TSE의 경우 새로운 산업축산 기법의 도입(동종교배, 동물 사체를 재활용한 육골분 사료)과 분리시켜 생각할 수 없으며, 그런 점에서 인간이 스스로 만들어낸 사회적 질병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좀더 흥미로운 것은 두번째 방식, 즉 질병의 파급효과에서 엿볼 수 있는 사회성이다. 흔히 광우병과 인간광우병은 동물성 사료 금지와 특정위험물질(SRM) 식용 금지 이후 점차 사라져가고 있으며 발병률도 그리 높지 않은 질병으로 그려지곤 한다. 특히 전체 발병자 수가 전세계적으로 200여명에 불과하다는 사실은 공식 전문가들이 광우병의 위험을 낮게 파악하는 중요한 근거가 되어왔다. 그러나 이는 광우병과 인간광우병이 미치는 사회적 파장과 공포의 확대에서 비롯된 엄청난 사회적 비용을 무시한 소치이다. 단 한마리의 광우병 발병만으로도 해당 국가의 축산업에 치명적 타격이 가해질 수 있으며, 단 한명의 인간광우병 환자 발생도 공중보건 씨스템에 대한 결정적인 신뢰 상실을 야기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이러한 질병의 사회성은 앞서 언급한 TSE의 과학적 불확실성에 의해 더욱 증폭된다.
이 때문에 저자는 가령 『죽음의 향연』(Deadly Feasts, 사이언스북스 2006)을 쓴 과학저술가 리처드 로즈(Richard Rhodes)의 최근 입장과는 상반된 결론을 내리고 있다. 논란이 한창이던 작년 8월에 로즈는 국내 한 언론사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이 책을 썼던 무렵(1997년)의 예측이 지나치게 과장되었으며 광우병의 위험은 대단치 않은 것으로 생각한다는 입장을 밝힌 바 있다(“광우병, 멀지않은 미래에 소멸할 것”, 조선일보 2008.8.5). 그러나 김기흥은 광우병을 둘러싼 과학적 불확실성이 여전히 높고 확실한 진단과 치료법도 없는 현상황에서 그런 식의 단정은 잘못된 공공정책상의 판단으로 이어질 수 있다며 우려를 표한다.
불확실성과 질병의 사회성을 강조하는 저자의 논의에 전적으로 공감하면서도 한가지 남는 의문은, 과연 이런 논의를 한국의 맥락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다. 작년 촛불정국에서 구사된 과학담론을 분석한 오철우는 정부와 일부 전문가들이 확률을 앞세운 숫자놀음으로 논쟁의 쟁점을 협소한 기술적 차원으로 축소시키는 데 성공했음을 보여준 바 있다(오철우 「대중적 과학주의의 그늘 읽기」, 『그대는 왜 촛불을 끄셨나요』, 산책자 2009). 확실하고 분명한 답을 줄 수 있는 (것처럼 보이는) 과학주의가 한국사회에서 여전히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는 방증이다. 반면 과학의 한계와 위험의 불확실성을 강조한 일부 시민사회단체와 위험연구자들의 주장은 촛불정국에서 별로 힘을 쓰지 못했다. 해방의 힘으로 과학을 사고하는 근대 이후 한국의 경험에서 비롯된 이러한 대중적 과학주의 속에서 불확실성 논의는 과연 어떻게 자리잡을 수 있을까? 이는 앞으로도 언제든 재연될 수 있는 위험 논쟁을 대비해 우리가 시급히 답해야 할 과제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