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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오강남 『또다른 예수』, 예담 2009

기독교의 도그마에서 벗어난 영적 지혜

 

 

김선주 金仙主

신학자 i-sinnanda@hanmail.net

 

 

또다른예수표지오강남(吳剛男) 교수는 1945년에 발견된 나그함마디(Nag Hammadi) 문서를 같은해 히로시마와 나가사끼에 투하된 원자폭탄에 비교했다. 기독교계에서 그만한 폭발력을 지닌 문서라는 뜻이다. 도마복음은 나그함마디에서 발견된 여러 문서 가운데 하나로, 기성의 기독교 집단에서 이단으로 규정한 영지주의(靈知主意)의 성격이 뚜렷하게 나타난다.

영지주의는 기독교 초기부터 존재하던 철학적·종교적 분파다. 신성(神性)의 내적 분열에 의해 악이 발생했다고 보며, 이원론적 관점에 따라 물질과 육체를 악으로 규정하는 것이 핵심 교리이다. 신적 계시라고 부르는 특별한 지식에 의해서만 구원받을 수 있다고 주장하고, 하느님이 인간세상에 성육신(成肉身)한 것이 예수라는 신조를 거부한다. 따라서 일찍이 기독교의 최대 이단으로 규정되었다. 보수적인 기독교계, 특히 근본주의적 색채가 강한 한국 개신교회의 풍토에서는 도마복음을 이단 문서로 보는 경향이 강하다.

그런데 저자 오강남은 이러한 이단 문서를 풀이했다. 그것도‘또다른 예수’라는 발칙한 제목으로 말이다. 이단 문서를 들고 나와 거기서 제시된 예수의 가르침을 정통의 반열에 올려놓으려는 의도가 저돌적으로 읽힌다. 지난 2천년 동안 교회가 숭배하고 가르쳐온 예수상이 아닌, 다른 영역에서 예수의 모습과 가르침을 조명하려는 것이다.

모두 114절로 구성된 도마복음은 예수의 일대기와 어록을 서사적 방법으로 기술한 기존의 성경, 즉 정경(正經)과는 매우 다른 성격을 띠고 있다. 영적 지혜와 깨달음을 얻음으로써 하느님을 만날 수 있다는 도마복음의 주제는 오히려 불교의 가르침에 가깝다. 예수의 메시아성을 믿고 시인하는 것만으로 피안의 세계에서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입받아온 기존 기독교인들에게 이단적일 수밖에 없다.

또한 도마복음은 정경화된 4대 복음서(마태·마가·누가·요한)들보다 시기적으로 더 오래된 전승(傳承)을 포함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저자 역시 도마복음이 다른 복음서들보다 더 정통에 가까울 수 있다고 은근히 내세운다. 하지만 『또다른 예수』를 관통하는 것은 무엇이 정통이고 무엇이 이단이냐는 질문을 비웃는 다원주의적 해석이다. 정경 복음서들이 제시하는 예수상과 도마복음에서 제시하는 예수상이 서로 다르더라도 나름대로의 고유한 의미와 가치가 있는 것으로서 존중하면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이 책에 흐르는 사상이며 도마복음을 풀이하는 키워드다.

종교사를 돌아보면 모든 정통은 이단에서 출발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단과 정통을 가르는 기준은 선험적인 절대선이 아니라 시대를 장악한 종교권력에 의한 것임을 쉽게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이단적 사유와 탐구가 많이 시도되는 시대일수록 종교가 더욱 건강해진다. 종교도 민주주의 원칙처럼 견제를 통해 내적 건강성을 담보해야 하기 때문이다.

저자가 바라본 도마복음의 예수는 하느님이 인간의 육체를 입고 이 땅에 와서 대속(代贖)의 주가 되셨다는 절대적 믿음의 대상으로서의 예수가 아니라, 마음속에 있는‘참나’를 발견하도록 독려하고 평안으로 인도하는‘깨달음의 예수’이다. 저자는 믿음·소망·사랑에 더하여‘깨침’의 도를 빌립복음서를 빌려 설명하며(205면), “영의 사람, 깨친 사람, 내면의 빛을 발견한 사람, 의식의 변화를 받은 사람”(173면)을 구원에 이른 존재로 풀이한다.

이러한 해석은‘오직 은혜로만’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왜곡된 루터(M. Luther) 신학을 바탕으로 윤리적·초월적 영성을 의심하는 한국의 개신교회에서는 이단의 혐의를 받기 쉽다. 자기들이 생각하는 바와 조금만 달라도 이단으로 규정해버리는 못된 버릇을 지닌 한국 개신교회의 풍토에서 이는 청천벽력 같은 말이 아닐 수 없다.‘참나’를 찾는 자가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이 가르침이 2천년 가까운 기독교 역사에서 묻혀 있었던 것은 하나의 예수상을 설정하고 이를 통해 헤게모니를 장악하려 했던 종교권력자들의 횡포 탓이다.

이 책의 서문에서 밝힌‘환기적 독법’(혹은 독자반응 중심의 독법)은 본문을 읽고 거기서 촉발되어 독자 나름대로 뜻을 찾아보게 하는 방법이다. 독자를 이렇게 유도하는 것은 텍스트의 문자에 집착하여 쉽게 단정하고 정답을 찾아내려는 무모함으로부터 벗어나‘또다른 예수’를 찾아내기를 원하는 다원주의적 시도다. 다원주의적 사유는 흔히 포스트모더니즘의 유행담론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저자의 의도는 다른 데 있다. “깨달음을 강조하는 이 책이 한국에서 그리스도교인들과 불교인들을 이어주는 가교(架橋)의 역할을 할 수 있”(29면)게 하기 위해서다. 종교들 간의 갈등과 반목이 인류 역사에서 저지른 끔찍한 비극을 한번이라도 떠올려본다면 이러한 시도의 중요성을 이해할 것이다. 인간이 가장 잔혹하고 폭력적일 때는 자기확신에 차 있을 때다. 나의 신념과 신조만이 절대선이라고 확신할 때 인간은 상상을 초월하는 잔혹성을 띠게 된다. 우리 시대에 다원주의가 요구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또한 물질문명이 인간의 생명을 장악하고 운명을 좌우하는 자본주의 시대에‘참나’를 찾는 것이야말로 하느님과 인간, 그리고 세계에 대한 온전한 의식과 삶을 가능케 할 수 있다. 예수의 가르침이 자본주의에 충실한 삶의 양식을 추구하도록 오도되는 풍토에서 내면의 빛을 바라보고, 그것을 통해 참된 삶의 의미와 가치를 추구할 수 있게 한다는 점에서 영적 지혜는 유의미하다.

저자는 도마복음을 영지주의가 아닌 영적 지혜서로 본다. 영지주의가 “물질적인 것과 육체적인 것을 모두 악으로 규정하고 영혼이 이런 악한 물질세계로부터 벗어나야 함”(22면)을 가르치는 이원론적 사상이라면, 도마복음은 인간의 육체나 물질을 악으로 규정하지 않고 영적 깨달음을 가르친다는 점에서 다르다는 것이다.

그러나 평자가 생각하기에 『또다른 예수』를 압도하는 사상은 역시 영지주의 이원론이다. 그것으로부터 자유롭기 위해 애쓴 흔적들이 곳곳에 나타나 있지만, 영지주의가 지닌 이원론적 교리에서 완전히 자유로워 보이지는 않는다. 깨달음을 중시하는 불교와의 근접성을 강조하려다 보니 어록의 행간에 숨은 서사적 맥락을 놓쳐버리는 것이다. 영지주의 사유체계인 이분법적 해석이 어록의 형성과정에서 발생한 서사적(역사적) 사건을 논외로 한 것이다. 정경 문서와의 차별성을 강조하려다 보니 이러한 해석이 나온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도마복음과 유사한 가르침을 가지고 있는 이웃 종교들과 텍스트를 비교 설명하며 독자에게 다양하고 풍성한 맛을 선사하는 것은 이 책이 지닌 비교종교학적인 장점이다. 또 다양한 성서 해석의 여지를 주는 풀이 역시 신학의 도그마로부터 허리띠를 풀어놓고 자유롭게 노닐 수 있는 비교종교학의 소요유(逍遙遊)일 것이다.

오강남의 『또다른 예수』는 기독교 도그마로부터 비상하여 얽매임 없이 노니는 대자유를 선물한다. 이는 구만리 높은 하늘을 정처없이 노닐기 원하는 예수의 또다른 가르침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