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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구모룡 평론집 『시의 옹호』, 천년의시작 2006
새로운 시학을 향하여
정호웅 鄭豪雄
문학평론가, 홍익대 교수 yuhaj@wow.hongik.ac.kr
구모룡(具謨龍)의 『시의 옹호』는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1부에는 ‘시의 옹호’란 제목 아래 시론에 해당하는 묵직한 글 7편이, 2부에는 14편의 시인론이, ‘시집 읽기’란 제목을 달고 있는 3부에는 18편의 글이 실려 있다.
3부에 실린 글들은 아마도 시집 해설이나 서평일 것이다. 정진규, 김종해, 강은교 등 눈에 익은 시인들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시인들이 더 많다. 그 대부분은 부산 경남 지방에 거주하는 시인들이다. 이들의 시집을 살핀 글에는 지역의 울에 갇히지 않은 저자의 열린 문학정신이 한눈에 확연하다. 한 십년 전부터 활성화된 지역문학운동은 우리 문학(판)을 지배하는 중앙중심주의에 대한 비판적 문제제기이며 지역문학의 재구축을 향한 실천이라는 점에서 큰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 서울/지역, 지배/소외 등의 이분법에 갇혀 스스로를 제약하는 문제점도 그 안쪽에는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저자는 지역문학운동의 중심에 서 있으면서도 이런 문제점에서 멀리 벗어난 이론가이다. 다른 지역문학운동가들과 마찬가지로 지역문학운동의 기본 문제의식 위에 서 있으면서도, 저자의 글쓰기가 궁극적으로 겨누는 것은 한국시의 새로운 차원을 여는 것이고 새로운 시학을 수립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2부의 시인론을 특징짓는 것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한갓 표면의 형식이 아니라 깊이 숨어 있는 형식을 문제삼는다는 것. 다른 하나는 한 시인의 시세계를 꿰는 핵심요소를 적출하여 그것으로써 모든 것을 설명하고자 한다는 것. 이로써 저자의 시인론은 하나하나가 깊이와 완결성을 함께 갖춘 작품으로 스스로를 우뚝 세웠다.
그러나 한두 개의 핵심요소로 수십년에 걸친 시인의 방대한 문학세계를 일관되게 설명하고자 하는 것은 그 방법론에 깃든 단순화의 인력 때문에 곳곳에서 설득력이 부족한 해석을 만들어낸다. 예컨대 서정주(徐廷柱)의 널리 알려진 「자화상」을 두고 저자는 “그의 현실주의가 극복을 지향하는 것이라기보다 수락을 함축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그런데 여기서 현실 수락은 피신과 다름없다. 상황과의 대결에서 어떠한 비극도 만들지 않으려 하기 때문이다”(141면)라고 말한다. 내 생각은 다르다. 이 시의 주인공인 청년은 자신이 타자들과 구별되는 새로운 인간임을 선언하며( “나를 키운 건 팔할이 바람이다”), 구별과 배제의 메커니즘에 굴복하지 않고 자신의 길을 걸어가겠다고 다짐한다. 그 길의 구체적 성격은 알 수 없지만 외로움, 피흘림의 고통을 견디며 혼자 헤쳐가야 하는 험로임은 분명하다. 그럼에도 나아갈 수밖에 없는데 ‘불타는 바다’에 가닿고자 하는 바람(「逆旅」)이 이 청년의 정신 속에 불타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자화상」(「역려」를 비롯한 다른 초기시와 함께)은 바야흐로 인생의 본바다로 나아가고자 하는 한 청년의, 힘써 실현하고자 하는 삶이 어떤 성격의 것인지를 스스로 확인하면서 자신과 자신의 선택에 대한 굳은 믿음을 당당하게 내보인 작품이라 읽는 것이 타당하다. 형이상학적 초월성이라는 코드로써 미당 시를 일관되게 설명하고자 하는 방법론의 인력 때문에 저자는 이 점을 충분히 고려하지 못한 것은 아닐까.
1부에 실린 글들은 모두 새로운 시학 수립을 향한 저자의 열정과 그것을 뒤받치는 지적 온축의 폭과 깊이를 잘 보여준다. 25년 세월, 저토록 오랜 외로움의 시간과 성실한 우보(牛步) 일로(一路)의 발길이 일구어낸 본격 시론들이다. 저자는 근대시학을 떠받치는 자아중심주의, 동일성, 은유 등에 대한 비판적 검토를 통해 ‘화(和)와 제유 혹은 도(道)의 시학’을 제시한다(27~29면). 높은 차원의 시론이라 짧은 지면에 그 내용을 정리할 수 없어 지나치거니와, ‘생명시학’ ‘마음의 시학’이라 이름을 바꾸기도 하는 그 시학은 근대시학으로부터의 벗어남과 동시에 근대로부터의 넘어섬을 지향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새로운 시학의 수립과 함께 새로운 세계 구상의 꿈을 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 지향과 꿈은 “한편으로 마음을 궁구하고 다른 한편으로 관계를 새롭게 하는 일,”다시 말해 “마음의 밑바닥을 헤쳐가면서 타자들과 만나는 것”이며 그 만남의 과정에서 이루어지는 “관계 재조정을 통하여 (…) 험악한 근대를 변화시킬 미약하나마 그 어떤 계기들을 만”(55~56면)드는 것이라 말해지기도 한다. 요컨대 타자 만남의 시학, 관계 재조정의 시학이며 타자 만남의 정신, 관계 재조정의 정신이다.
우리의 전통시학을 비롯한 동양의 전통시학 그리고 한국 현대시에 대한 깊은 성찰 위에 세워진 저자의 탈근대 시학은 탈근대 지향성이 새롭게 열어가고 있는 한국시의 현실을 깊이 설명해낼 수 있는 효과적인 논리를 제공하며, 열어나가야 할 한국시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는 것이니, 따라 읽는 독자의 눈앞이 환하게 트인다. 새로운 시학을 향하는 저자의 구상이 빈틈없는 논리, 체계를 갖춘 시학으로 서길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