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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아무도 가지 않은 길』, 인천문화재단 2006

동아시아 근대미학과 고유섭의 학문세계

 

 

민주식 閔周植

영남대 교수, 미학 jsmin@yu.ac.kr

 

 

권영필(權寧弼) 등이 지은 『아무도 가지 않은 길: 한국미학의 선구자 우현 고유섭』은 한국인으로서 해방 전 유일하게 미학미술사학을 전공한 우현(又玄) 고유섭(高裕燮)의 학문적 세계가 보여준 독보적인 의미를 전달해주고 있다. 2005년 8월 인천문화재단이 주최한 ‘우현 고유섭 선생 탄생 100주년 기념 국제학술심포지엄: 동아시아 근대미학의 기원’에서 행한 발표를 중심으로 편집한 우현의 학문과 생애에 대한 본격적인 조명이다. 이 책의 의의는 그간 그에 대한 한국 내의 논의를 넘어서서 중국과 일본 학자들이 함께 참여하여 동아시아 근대미학의 형성을 논하면서 그 틀 속에서 고유섭을 조명했다는 데 있다.

심포지엄을 통해 많은 학계 및 문화계의 전문가 그리고 일반시민들이 참여하여 활발한 논의의 장을 펼칠 수 있었던 것은 주최측의 세심한 준비와 배려에 힘입은 바 크다 할 것이다. 이 책은 인천문화재단이 기획하고 있는 예술총서 ‘문화의 창’제1권으로 출간된 것인데,이 씨리즈는 21세기 문화인천의 꿈을 실현하려는 열망을 담은 실험적 기획이기도 하다. 우현을 낳은 고장 인천에서 우현의 삶과 업적을 기리는 사업을 벌였다는 점에서 더욱 큰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이 책은 네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째는 앞서 말한 국제학술심포지엄 ‘동아시아 근대미학의 기원’의 내용이고, 둘째는 우현에 대한 회상이며, 셋째는 부인 이점옥 여사가 엮은 고유섭의 생애, 그리고 넷째는 고유섭의 생애와 연구에 관련된 자료이다. 이 가운데 가장 주목할 부분은 심포지엄의 내용일 것이다. 나머지 부분은 대체로 그동안 알려진 사실들을 새롭게 정리한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이 책은 동아시아 근대미학의 기원에 관해 한·중·일의 경우를 함께 살펴보는 가운데 우현의 학문적 위상을 거시적인 관점에서 조명해보았다는 점에서 특별한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이 심포지엄에서 중국 런민(人民)대학의 쟝 파(張法) 교수는 중국 근현대미학의 발전과정과 유형에 관하여 논했다. 그는 서구와 소련의 미학이 중국미학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지만 중국의 전통미학과는 기본적으로 구조가 다르다고 지적했다. 그는 고유섭의 문제의식도 이런 관점에 입각해 있다고 추정하면서, 미학의 현대적 체계 속에 동양 고전미학의 다양한 사상, 개념, 주제를 담아내야 한다고 주장한다.

토오꾜오대학 명예교수 사사끼 켄이찌(佐々木健一)는 ‘이문화(異文化)로서의 서양미학’이라는 논제로 메이지시대 서양미학을 수입한 나까에 쬬오민(中江兆民)의 서양미학 수용방식에 관하여 고찰하였다. 그는 프랑스인 베롱의 저술을 ?오민이 번역한 『유씨미학(維氏美學)』이라는 책을 통해서, 이문화로서 서양미학을 마주 대했던 선인들이 의식하지 못한 커뮤니케이션의 차이를 파악하고자 했다. 이를테면 인격성 내지 개성과 같은 서양사상의 기본개념에 관한 이해의 부족에서 초래된 오해에 주목한 것이다. 여기에서 그는 이문화를 배울 때 항상 따라다니는 뿌리깊은 인식의 차이가 있게 마련이고 이것이 다른 한편으로는 새로운 사상적 창조의 단서가 된다는 점을 아울러 지적하였다. 쯔다쥬꾸대학의 타까사끼 소오지(高崎宗司) 교수는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의 한국미론을 논한 그동안의 한국인들의 견해가 일면적인 평가에 치우치고 있음을 지적하고 한층 객관적이고 총체적인 파악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한편, 아사까와 타꾸미(淺川巧)의 한국예술에 대한 애정을 심도있게 부각시켰다.

김임수(金壬洙)는 고유섭의 방법론적 토대가 서구 근대 미학적 시야에 기초해 있음을 지적하고, 고유섭이 말하는 한국미의 성격, 즉 ‘자연의 순리에 순응하는 무관심성의 미적 체험’에 대한 해석을 시도하였다. 이인범(李仁範)은 고유섭의 학문적 성과에 대한 그간의 논의를 두 가지 방향에서 정리하였다. 하나는 예술의 초역사성과 개념적 인식의 필요성을 강조하면서 한국미학의 정초자로 자리매김하는 경우이고, 다른 하나는 일제 식민잔재 혹은 몰역사성을 지적하는 근거로 받아들이는 경우이다. 나아가 그는 고유섭에 대한 비판 가운데는 학문의 근대성 혹은 보편성을 식민성과 범주적으로 혼돈함으로써 오해를 초래한 것이 있다고 문제를 제기하면서, 고유섭으로부터 확인된 것은 단순한 민족주의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학문적 체계와 예술의 보편성에 대한 지향이라고 지적한다.

이 책이 갖는 학술적 의의는 이상과 같은 심포지엄에서 논의된 새로운 해석 부분에 치중된다. 이전에도 고유섭 관련 심포지엄이나 연구발표가 몇차례 있었지만, 이번에는 특히 동아시아 미학의 근대적 성립이라는 맥락에서 고유섭의 학문세계를 조명하려 했다는 점에서, 또 한국미의 탐구자 고유섭과 야나기를 주로 근대문화사적 관점에서 이해해온 연구방식에서 벗어나 텍스트 자체의 내용에 한층 충실하고 객관적인 시각에서 조명하려는 의지가 부각되었다는 점에서 새로운 이해의 창을 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다만 아쉬운 점은 심포지엄에서 제기된 다양한 질의와 토론의 내용이 이 책에 충분히 수용되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앞으로의 연구방향 모색에 도움이 될 수 있는 활기찬 논의들이 깔끔한 책의 편집에 희생되어버린 감이 없지 않다. 여하튼 이 책의 발간과 더불어 한국 근대미학의 선구자 고유섭을 이해하는 새로운 문화의 창이 열린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 창을 내다보며 아무도 가지 않았던 그 길을 이제는 함께 가는 길로 만들어가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