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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평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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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시와 정치’ 논의에 부쳐

 

 

신형철 申亨澈

문학평론가. 평론집으로 『몰락의 에티카』가 있음. poetica7@hanmail.net

 

 

 

이명박정부가 출범한 지 2년 가까이 되어간다. 몇가지 경우의 수 중에서 최선의 하나를 제외하면 나머지는 모두 똑같은 최악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은 지난 2년이 특별할 게 없다고도 한다. 그런 말들은 차선의 실현을 위해 진흙탕을 뒹굴어야 하는 현실정치의 실상과도 거리가 있을 뿐 아니라, 미세한 차이들에 주의를 기울이고 거기서 영혼의 개별성과 세계의 징후를 읽어내는 문학의 기질과도 이질적인 것이어서 곧이들리지 않았다. 실로 지난 2년이 가져온 변화는 극심했다. 여느 분야에서도 마찬가지였겠지만 문학 역시 사태를 외면할 수 없었을 것이다. 덕분에 지난 1년 동안 ‘시와 정치’라는 논점을 둘러싸고 많은 글들이 발표되었다.1 『창작과비평』 2008년 겨울호 특집 ‘문학이란 무엇인가’에서 본격화된 논의가 같은 잡지 2009년 겨울호 특집 ‘우리 시대 문학/담론이 묻는 것’에서 얼마간 일단락된 느낌이 있어 그간 발표된 글들을 정리해 읽었다. 좋은 글들이 준 자극 덕분에 기왕의 생각을 교정하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논의가 답보상태에 처한 것은 아닌가 하는 아쉬움을 느끼기도 했다. 시인들의 고투를 격려하고 비평가의 역할을 다시 생각해보는 것으로 독후감을 대신하려고 한다. 시인들은 무엇을 원하는가, 비평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두개의 물음을 차례로 묻자.

 

 

1. 시인들은 무엇을 원하는가?: 직접적으로 정치적이면서 첨예하게 미학적인-진은영의 경우

 

모든 것이 한 진지한 시인의 고뇌로부터 시작됐으니 그 물음을 다시 묻고 이야기를 시작해야 하겠다. “이주노동자와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을 지지하며 성명서에 이름을 올리거나 지지 방문을 하고 정치적 이슈를 다루는 논문을 쓸 수도 있지만, 이상하게도 그것을 시로 표현하는 것은 쉽지가 않다.”(진은영, 69면) 보다시피 이 문장에는 두개의 욕망이 개입돼 있다. 첫째, 이 시인은 직접적으로 정치적이기를 원한다. ‘모든 전위문학은 본질적으로 불온하다’(김수영)는 명제로 자족하는 이들이 많지만, 이 시인은 구체적으로 정치적일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있어서 물음이 급박해졌다. 시인은 시만 잘 쓰면 된다는 식의 겸손한 무관심 속에서는 이런 물음이 생겨날 수가 없다. 둘째, 이 시인은 첨예하게 미학적이기를 원한다. 그녀는 “이상하게도 그것을 시로 표현하는 것은 쉽지가 않다”고 적었지만, 아니다, ‘그것’을 시로 표현하는 것은 쉽다. 어려운 것은 ‘좋은 시’로 표현하는 일이다. 이것은 첨단의 미학적 감각을 갖고 있을 뿐 아니라 어떤 명분과도 그것을 맞바꿀 생각이 없는 시인만이 던질 수 있는 물음이다. 요컨대 직접적으로 정치적이면서 동시에 첨예하게 미학적이고 싶다는, 결코 흔치 않은 이중의 욕망만이 저런 고백을 하게 한다.

이 시인의 질문을 넘겨받아 적잖은 평론가들이 ‘시와 정치’라는 주제를 놓고 새삼스러운 고민을 시작했지만 그 와중에 우리는 그 이중의 욕망 중 하나로부터 조금씩 멀어진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앞서 말한 대로 진은영(陳恩英)은 ‘직접적으로 정치적이기를’ 원한다. 이 시인은, 비정규직 혹은 이주노동자 등과 관련된, 그러니까 매우 구체적인 현안들에 입장을 표명하고 싶어한다. 그리고 어떻게 하면 시로 그럴 수 있는 것인지를 자문하고 있다. 그러나 이후의 논의들에서는 초점이 미묘하게 바뀐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잘 안된다, 어떻게 하면 되는 것일까’를 묻는 것에서 ‘잘 안된다, 왜 안될 수밖에 없는 것일까’를 묻는 것으로 말이다. ‘시인의 욕망’에 대한 물음이 ‘시의 본질’에 대한 물음으로 전환되었다고 하면 맞을까. 화제가 어느덧 ‘시란 무엇인가’로 바뀌면서, 시란 ‘본래부터’ 이러저러한 것이기 때문에 시와 정치라는 논제는 아주 특수하고 제한된 방식으로만 이해되어야 한다,라는 결론들이 경쟁적으로 제출되었다. 시인은 난제를 제시했고, 그 난제를 손쉽게 해결하기보다는 그 난관 속에서 난관과 싸우며 겨우 써나가고자 했는데, 비평가들은 어떤 독창적인 해답을 단호하게 제시해야 한다는 책임감 속에서 세련된 논리적 건축물을 만드는 데 더 골몰한 것은 아닌가. 시란 무엇인가에 대해서라면 누구나 한마디쯤은 할 수 있고, 또 거기에는 정답과 오답이 있다기보다는 더 맞고 덜 맞는 답이 있을 뿐이어서 답이 많을수록 좋기는 하지만, 급박한 물음을 던지면서 모험에 나서려는 시인에게 때로 그런 말들은 힘 빠지는 훈수가 될 수 있다. 시인이 시의 정치적 힘을 과거와는 다른 방식으로 확장시켜나가려고 할 때, 비평가들은 과거의 과오를 되풀이해서는 안된다는 걱정 때문에 다소 소극적으로 대처한 듯싶다.

예컨대 서동욱(徐東煜)은 “시는 본성상 바로 실재하는 사물과 상관없는 이런 이미지를 통해 탄생”(429면)하며 그런 의미에서 “시인은 비(非)진리에 관여하는 자”(431면)라는 두 명제를 단호하게 제시하는데, 상대적으로 덜 음미된 어떤 측면에 조명을 가할 수야 있겠으되, 그 과정에서 이렇게 원천봉쇄에 가까운 논리를 구사할 필요까지 있을까 싶다. 첫째, 이미지에 대해서. 내가 보기에 시의 최소단위는 ‘시적으로 운동하는 언어’이다. 이미지는 시가 그 최소단위에 기초해 구축하는 시적인 것의 한 측면일 뿐이다. 시에는 이미지뿐 아니라 육성에 가까운 진술들도 존재하고 그것들은 탁월한 이미지에 버금가는 시적 효과를 산출할 수 있다. 시의 이 부분을 간과하면 우리는 김수영, 고은, 황지우, 최승자의 ‘직설적인’ 어떤 시들이 불러일으키는 시적 스파크를 설명할 길이 없다. 둘째, 진리에 대해서. 서동욱은 “문학은 진리이다” 같은 말들을 “유치하기 짝이 없는 ‘유사종교적’ 발언”(426~27면)이라고 신랄하게 지적하는데, 어떤 시인이 (저 글이 비판하는 바 그대로) 무슨 만고불변의 형이상학적인 진리의 담당자임을 자임하고 나서는 경우에 대해서라면 일리가 있는 비판일 수 있지만, 바디우 식으로, 천상의 대문자 진리(Vérité)가 아니라 (역사의 현장에서 발발하는 사건들을 통해 개시되는) 다수의 진리들(des vérités)을 추구하면서 그 진리들이 산출되는 공정 중 하나로 예술을 지목하는 식의 유연함을 발휘하는 경우라면, 시가 진리를 떠맡는다고 말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2 목소리 큰 사람들로부터 시의 섬세한 본질 중 하나를 보호하자는 취지인 줄은 알겠으나, 시의 최소정의 중 하나를 최대정의로 단정해 시의 가두리를 이토록 좁히는 것은 과잉보호가 아닐까.

대표적인 사례라 생각해 서동욱의 논의에 토를 달았지만 강동호(康棟皓)와 강계숙(姜桂淑)의 글에서도 시적 모험의 가능성 자체를 차단하는 것으로 오해될 만한 부분들이 있어 부분적으로는 뜻을 같이하되 최종 결론에는 선뜻 동의할 수가 없었다.3 이런 글들은 시인들의 고뇌에 비해 밀도는 높을지언정 열도는 낮다고 할 수밖에 없다. 이렇게 시인의 고뇌와 비평의 진단이 미묘하게 엇갈리는 길을 가는 와중에 진은영이 ‘정치적’이라는 말로 뜻하고자 한 것과 몇몇 비평가들이 그 말로 암시한 것은 썩 달라지기 시작했다. 이런 식이라면 차라리 용어를 분리하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나는 다른 곳에서 ‘소설과 윤리’라는 주제와 관련하여 ‘윤리적인’ 것(가치판단)과 ‘윤리학적인’ 것(사실판단)을 구분한 적이 있는데4 이런 방식으로 ‘정치적인’ 것과 ‘정치학적인’ 것을 나누는 것도 한가지 방법일 것이다. 특정 작품이 현실정치의 의사소통 장(場)에서 특정한 입장을 대변하는 발언을 포함할 때 그것을 ‘정치적인’ 것으로 ‘가치판단’하고, 특정 작품이 (예컨대 ‘생체-정치’‘성-정치’ 혹은 ‘정체성-정치’ 등의 용례에서 보듯) 넓은 의미의 ‘정치’와 연계되어 있어 정치학적 토론의 대상이 될 만한 논점을 내장하고 있을 때 그것을 ‘정치학적인’ 것으로 ‘사실판단’하자는 것이다.5  ‘미적인’(≒아름다운) 것과 ‘미학적인’(≒실험적인) 것도 같은 방식으로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요컨대 이렇다. 정치적·윤리적·미적인 것은 기존 장에서 특정한 입장을 채택하면서 개입하고, 정치학적·윤리학적·미학적인 것은 최상의 경우에 앞의 것들이 근거하고 있는 장 자체를 성찰하게 만드는 의제를 제기한다.

이렇게 용어를 제한해놓고 다시 정리해보면 분명해지거니와, 진은영의 애초 취지는 2000년대의 시가 보편적으로 ‘미적’이지는 않더라도 충분히 ‘미학적인’ 것이기는 하되, 그것이 다채롭고 폭넓은 의미에서의 ‘정치학적인’ 것이 아니라 더 직접적으로 ‘정치적인’ 것이 될 수는 없겠느냐는 것이다. 이후 비평가들이 ‘시의 정치’는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정치적인’ 것과는 다르다는 것을 강조하느라 놓친 것이 바로 이 부분이다. 미학적이면서도 동시에 (정치학적이면서도 동시에 혹은 끝내) 정치적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고 2000년대 시의 어떤 진화를 요청한 것이다. 진화? 미학적인 것을 포기하지 않으면서 정치적인 것을 얻을 수 있다면 그것이 진화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많은 경우 시가 정치적인 것이 되면서 미학적인 것을 잃어버리게 될 때 그 증상은 대표적으로 언어에서 나타난다. ‘언어에 대한 회의’6가 사라지면서 시의 긴장이 풀리는 현상으로 말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아주 엄밀한 의미에서, 미학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이 한몸이었던 사례가 우리 시사(詩史)에 있는가? 물론 있었다. 예컨대 황지우의 시는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는가. 그의 시가 대표적으로 보여준, ‘회의하면서 긴장하는’ 그 언어의 배후에는 권력에 의한 커뮤니케이션의 억압이라는 외적 상황이 있었다. 할 수 있는 말과 해야만 하는 말의 분열 속에서, 언어의 회의 혹은 언어의 긴장은 (시인 자신의 의지나 역량에 힘입은 바 못지않게) 상당부분 ‘역사적으로’ 성취되었다. 덕분에 그의 시는 첨예하게 미학적이면서 동시에 직접적으로 정치적일 수 있었다.

그러나 모두 알다시피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아무도, 적어도 시에서는, 그 어떤 발화도 억압하지 않는다. 이를테면 “발화가 욕망의 표현이고, 그 표현이 현금의 제도 안에서 허용되는 감성적 분할과 부조화한다면 이때 이미 여기서 정치적인 사건이 발생한다”(서동욱, 『문장 웹진』 좌담)는 말은 그래서 다소 낙관적이거나 수사적이다. 우리시대에 과연 금기시되는 욕망이 있는지 자체가 논쟁거리일 수 있거니와 그 욕망의 발화 자체가 ‘정치적 사건’이 되기에는 ‘현금의 제도’가 (최근에 급속도로 경화되기는 했지만 그래도 확실히 과거에 비하면) 꽤 유연하지 않은가. 그렇다면 그 발화는 의미심장한 ‘정치학적’ 쟁점을 제기할 수는 있을지언정 ‘정치적’ 효력을 발생시킬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해도 좋지 않을까. 그렇다면, 억압받지 않는 시는 어떻게 긴장할/긴장될 수 있는가. 나는 이 물음이 글의 서두에서 인용한 진은영의 물음 속에 숨어 있는 또다른 물음이라고 생각한다. “우리에게 아무도 총을 겨누지 않는”(「70년대산(産)」)데, 어떻게 무엇으로 시의 긴장을 획득할 것인가. 이제는 온전히 시(인) 자체의 힘으로 그 경지에 도달할 수밖에 없다는 게 정답이 아닐까. 오늘날 첨예하게 미학적이면서 직접적으로 정치적이기를 원하는 시인들은 과거와는 다른 방식으로 모험에 나서야 한다. 진은영이 랑씨에르를 인용한 것도 급진적으로 미학적이면 저절로 정치적일 수 있다는 식의 자기합리화의 근거를 찾기 위해서가 아니라 시인들이 앞으로 당면해야 할 모험의 방향을 가리켜 보이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이 시인의 말이 호소력을 갖는 것은 누구보다도 그 자신이 그런 모험을 앞장서서 시도해왔기 때문이다.7

 

옛날에는 사람이 사람을 죽였대

살인자는 아홉개의 산을 넘고 아홉개의 강을 건너

달아났지 살인자는 달아나며

원한도 떨어뜨리고

사연도 떨어뜨렸지

아홉개의 달이 뜰 때마다 쫓던 이들은

푸른 허리를 구부려 그가 떨어뜨린 조각들을 주웠다지

 

(…)

 

그건 오래된 이야기

옛날에 살인자는 용감한 병정들로 살인의 장소를 지키게 하지 않았다

-진은영 「오래된 이야기」(『창작과비평』 2009년 겨울호) 부분

 

말하자면 이런 시가 발표되고 있는데도 ‘시의 정치’가 갖는 특별하고도 예외적인 속성을 지나치게 강조하면서 사변적인 논의를 반복하는 것은 좀 답답해 보인다.8 어떤 시인들은 이미 모험을 시작했다. 이 모험에서 비평이 거들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을지는 모르지만, 하지 않는 편이 좋을 일들은 있다. 예컨대 정치적인 것과 정치학적인 것의 구분을 흐리는 방식으로 정치성의 내포를 한없이 넓혀서 사실상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는 논지에 도달하거나, 시인과 시는 분리되어야 하므로 시민으로서의 정치적 고민과 시인으로서의 미학적 고민은 서로 분리되어야 한다고만 말하거나, 시는 본래부터 직접적으로 정치적일 수 없고 그러려는 순간 미적으로 실패하거나 미학적으로 퇴행할 것이라고 과도하게 전제하는 일들 말이다. 이런 말들은 시인들의 고뇌와 공명하기 어렵다. 그보다는 “시 너머로 시인을 상상하지 않는 일이 어떻게 가능한가?”(조연정, 61면)를 물으면서 시인들의 고뇌와 노력을 정확히 읽어내는 일에 힘을 싣겠다는 진솔한 고백이나, “‘치안’에 대한 고민이 결여된 ‘정치’에의 관심이란 무관심과 무책임에 대한 일종의 알리바이로 기능할 우려가 없지 않”기 때문에 “특공대의 용맹은 존중하되 대중과 함께하는 좀더 다양한 공부와 사업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할 것”(백낙청, 36~37면)이라는 당부가 더 실제적이라는 느낌이다. 그렇다면 비평이 적극적으로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 지금까지의 논의와 동떨어진 것처럼 보일 한 시인의 시집을 놓고 이야기를 이어가보기로 한다.

 

 

2. 비평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투명한 코기토의 정치학-신해욱의 경우

 

작년 가을에 신해욱의 두번째 시집(『생물성』 문학과지성사 2009)을 읽고 나는 이것이 2009년에 나온 가장 뛰어난 시집이라고 단정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그 매혹의 정체를 단박에 파악할 수는 없었다. 얼핏 ‘2000년대 시’의 일반적인 방법론을 따르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이 시학의 정체는 그리 간단치가 않다. 2000년대 시의 가장 확연한 특징 중 하나가 ‘나’(서정적 자아 혹은 서정시의 화자)라는 심급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면, 그 성찰이 낳은 변종의 ‘나’들은 크게 두 계열을 이룬다고 정리해볼 수 있다. 하나는 나의 ‘심층’으로 들어가 상상적인 나를 폭발시켜버리고 내 안의 타자들을 쏟아내는 길이고(이때 ‘나’는 무수한 화자들로 분화된다), 다른 하나는 나의 ‘표면’에서 발생하는 감각적인 사건들을 포착해 우연적인 나를 발명하는 길이다(이때 ‘나’는 어떤 느낌들의 도체導體가 된다).9 비유컨대 황병승이 ‘나는’이라고 말할 때 그것은 무수한 인물들이 잔뜩 들어 있어서 곧 터져버릴 것 같은 어떤 불룩한 자루를, 김행숙이 ‘나는’이라고 말할 때 그것은 흩어졌다 모이기를 반복하면서 일시적으로 겨우 어떤 형태를 이루는 분말 같은 것을 연상하게 한다. 섬세하게 논구할 일이지만, 앞의 계열은 한국사회에서 다양한 마이너리티 문화가 분출하게 된 것과, 뒤의 계열은 한국사회를 완강하게 지배한 국가·민족·가족적 정체성의 힘이 약화된 것과 은밀하게 연관돼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시는 어떤가.

 

이목구비는 대부분의 시간을 제멋대로 존재하다가

오늘은 나를 위해 제자리로 돌아온다.

 

그렇지만 나는 정돈하는 법을 배운 적이 없다.

나는 내가 되어가고

나는 나를

좋아하고 싶어지지만

이런 어색한 시간은 도대체 어디서 오는 것일까.

 

나는 점점 갓 지은 밥 냄새에 미쳐간다.

 

내 삶은 나보다 오래 지속될 것만 같다.

-「축, 생일」 전문

 

누군가의 꿈속에서 나는 매일 죽는다

 

나는 따뜻한 물에 녹고 있는

얼음의 공포

 

물고기 알처럼 섬세하게

움직이는 이야기

 

나는 내가 사랑하는 것들을

하나하나 열거하지 못한다

 

몇 번씩 얼굴을 바꾸며

내가 속한 시간과

나를 벗어난 시간을

생각한다

 

누군가의 꿈을 대신 꾸며

누군가의 웃음을

대신 웃으며

 

나는 낯선 공기이거나

때로는 실물에 대한 기억

 

나는 피를 흘리고

 

나는 인간이 되어가는 슬픔

-「끝나지 않는 것에 대한 생각」 전문

 

시집 맨 앞에 놓여 있는 두편의 시를 옮겼다. 여기에서는, 앞에서 두 계열로 정리해본 그 흐름과는 뭔가 다른 어떤 방법론이 작동하고 있는 것 같다. 문제는 여기서도 ‘나는’에 걸려 있다. 신해욱의 시집을 읽다보면 ‘나’라는 주어가 이토록 집요하고 수상하게 반복되는 예가 예전에 또 있었던가를 묻게 되는데, 그리 길지 않은 저 두편의 시에서만 ‘나(내)’는 각각 9회씩, 총 18회 등장한다.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앞의 시는 생일날의 아이러니에 대해 말한다. 성인이 되어서 맞는 생일날에, 게다가 케이크를 앞에 놓고 축하파티라도 하게 되면, 우리는 왜 그토록 “어색한 시간”을 겪는가? 364일을 내가 아닌 채로 살다가 생일날이 되면 내가 나로 돌아가야만 하기 때문이 아닐까. 그러니까 생일날은 내가 나 아닌 채로 대부분의 생을 소모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는 고약한 날이다. 그 부조리한 기분을 마치 이목구비가 제멋대로 존재하다가 그날만 제자리로 돌아오는 것 같다고 한 비유의 신선함이나, “나는 내가 되어가고/나는 나를/좋아하고 싶어지지만”과 같은 식의, 문법적으로 어색해서 시적으로 성공적인 표현의 묘미 같은 것들이 읽는이를 사로잡는다. 뒤의 시가 이 정서를 이어간다. 이 시에서 ‘나’는 여러 방식으로 그러나 희박하게 존재한다. “내가 속한 시간과/나를 벗어난 시간”의 엇갈림 때문이다. 자기가 사랑하는 것들을 자랑스럽게 하나하나 나열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존재를 확신하는 사람들일 텐데, 나는 “나는 내가 사랑하는 것들을/하나하나 열거하지 못한다.”

이 두편의 시에서 특히 마지막 구절들이 오랫동안 독자를 붙든다. 시인은 “내 삶은 나보다 오래 지속될 것만 같다”라고 말했고 “나는 인간이 되어가는 슬픔”이라고 적었다. ‘나의 삶’은 나의 것이 아니다. 내가 나 자신이 아닌 시간에도 내 삶은 흘러간다. 그 소외감과 허망함은 앞으로도 “오래 지속될 것 같다.” 그래서 시인은 또 “나는 인간이 되어가는 슬픔”이라고 적었을 것이다. ‘이다’가 생략된 것으로 본다면 ‘나는 (인간이 되어가는) 슬픔’이라는 은유구조의 문장으로 읽을 수 있다. 나는 그저 ‘슬픔’이라는 어떤 정서의 껍데기일 뿐 아직 ‘인간’이 아니고 인간이 된다는 보장도 없다. 생물성과 인간성의 중간 지점, 그 어느 막막한 사이의 시공간에서 이 시인은 망연자실할 때가 많고 시적인 것은 바로 그 순간에 발생한다. 그래서 이 시인이 동사를 사용할 때 그것들은 대개 현재형이다. 나는 지금 현재에도 나인가를 물으면서, 나는 인간이기는 한 것인가를 물으면서, 그 가짜 나를 응시하고 진짜 나에 대해 생각한다. 두편의 시에서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나는/내가(…)”라는 문형을 이런 맥락에서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신해욱의 시를 읽을 때에는 두개의 ‘나’를, 그러니까 ‘응시(생각)하는 나’와 ‘응시(생각)되는 나’를 분별하면서 읽어야 한다. 그 둘 사이에 슬픔이 고이고 그 슬픔이 시를 쓰게 한다. 전자와 후자가 하나로 합쳐질 때 그녀는 더이상 시를 쓸 필요가 없게 될 것이다. 그러니 이 시들은 ‘잃어버린 나’, 더 나아가면, ‘잃어버린 나를 잊어버린 나’에 대한 두편의 비가(悲歌)다.

그러나 이런 면모가 적어도 아직까지는 주목을 못 받고 있다는 느낌이다. 예컨대 신해욱 시의 ‘나’를 두고 “이 경우 ‘나’의 몸은 비어 있으며 그 몸은 다만 타자의 시간을 환대하고 그 시간을 매번 새롭게 사는 숙주일 뿐”이라고 말하면서 이것은 “차라리 ‘나’를 통한 ‘타자의 타자화’”라고 지적한 함돈균(咸燉均)의 견해는 일면 타당하지만,10 또 그렇게 읽을 경우 2000년대 시의 일반적인 흐름에 이 시인이 합류하게 되겠지만, 나는 거기서 한번 더 뒤집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시인의 ‘나’가 타자들의 시공간을 떠돌고 있는 것은, 더 엄밀히 말하자면 내가 타자로 느껴지는 순간들에서 어떤 시적인 것을 발견하고 이를 집요하게 시로 옮기는 것은 그 사태가 다행스러워서라기보다는 문제적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일 것이다. 만약 “미지의 타자에게 나의 신체를 내어주고 무의식을 개방하는 ‘접신’의 순간들”을 긍정하는 이라면 ‘나’라는 주어를 그토록 강박적으로 시에 노출시키지는 않았을 것이다. 또 이미 지적한 대로 “나는 내가/물처럼 숨 쉬는 소리를 듣는다”(「화이트」)에서처럼 주어를 두번 반복하고 그 둘의 간격에서 어떤 상실감과 그리움의 정서를 분만해내는 패턴을 반복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어느 편이냐 하면, 그녀의 시는 ‘나’를 앞에 세워두고 진찰하면서 “환자의 용태(容態)에 관한 문제”(「오감도 시제4호」)를 두고 근심했던 1930년대의 이상(李箱)을 닮아 있다. 2009년의 신해욱은 이렇게 근심한다. “그런데 왜 나는 나로/사람은 사람으로/환원될 수 없는 것일까.”(「레일로드」)

그렇다면 그녀는 무엇을 원하는가. 신해욱이 각별히 아끼는 서술어가 있다면 그것은 ‘투명하다’일 것이다. 시 「화이트」는 “나는 열거되고 싶지 않아”로 시작해서 “투명한 슬리퍼를 신어도/투명해지지 않는다”를 거쳐 “춥다”로 끝난다. 단독성을 상실하고 일반성에 포섭될 때, 그러니까 내가 유일하고 온전한 나 자신이 아닐 때, 우리는 ‘열거’된다. 그 상황을 이 시인은 ‘투명하지 않음’으로 인지한다. 한편 다른 시 「비밀과 거짓말」에서 시인은 심장에 귀를 기울이면서 하나뿐인 나를 희미하게 감지하는데, 그럴 때에는 이런 문장을 적는다. “나는 심장이 뛴다.//그것은 아무도 모르는/무척 아름답고 투명한 일이다.” 요컨대 신해욱에게 투명한 것은 진실한 것이고 진실한 것은 투명한 것이다. 이를 투명성의 존재론이라고 부를 수 있겠다. 이 투명성은 그녀의 존재론뿐만 아니라 미학의 핵심 범주이기도 하다. 위에서 인용한 구절은 “아름답고 투명한”이라는 표현을 안고 있다. 그녀에게 투명한 것은 아름다운 것이고 아름다운 것은 투명한 것이다. 이것은 시집 『생물성』이 전달하는 매혹의 핵심을 설명하는 열쇳말로도 적절해 보인다. 수식어의 사용을 극도로 자제하고 ‘간결한 배치’(신해욱의 첫번째 시집 제목이기도 하다. 『간결한 배치』, 민음사 2005)를 이룩하는 데 헌신하고 있는 그녀의 수사학은 유사한 스타일을 공유하는 몇몇 시인들에 비해서도 단연 극단적이다. 물론 이 투명한 언어에 대한 열망은 투명한 나에 대한 열망을 꼭 껴안고 있다.11

그렇다면 신해욱의 시학에 투명성의 시학이라는 이름을 붙여도 좋겠다. 사실 비평이 해야 할 일은 ‘여기까지’가 아니라 ‘여기서부터’다. 이 투명한 코기토는 어떤 맥락에서 등장한 것일까. 잘 알려진 대로 투명함에 대한 이러한 열망은 스따로뱅스끼(J. Starobinski)가 루쏘의 문학에서 찾아낸 핵심적 상상력이기도 하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가장 자각적으로 던진 이의 명단 앞자리에 루쏘의 이름을 올려도 무방할 것이다. 황종연(黃鍾淵)의 적절한 요약대로 “루쏘가 요구한 것은 바로 사람 각자가 자기 자신이 되어야 한다는 것”12이고 이를 우리는 흔히 ‘진정성의 윤리학’이라고 불러왔다. 투명함의 이미지에 대한 루쏘의 집착13은 ‘자기 자신이 되어야 한다’는 열망의 문학적 표현인 셈이다. 최근 몇몇 사회학자들은 1997년 외환위기 이후 한국사회의 주체들이 이 진정성의 에토스를 서서히 폐기해왔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 자리를 대신한 것은 신자유주의의 자기계발 담론을 내면화한 ‘자기계발하는 주체’라는 사실을 밝혀냈다.14 루쏘 이래의 그 투명성에 대한 열망이 이제는 거의 사라지다시피 한 지금-여기에 인상적인 방식으로 도착한 신해욱의 투명성의 시학을 우리는 사회학자들의 근심과 함께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잃어버린 나’를, 더 나아가, ‘잃어버린 나를 잊어버린 나’를 아파하는 신해욱의 시는 오늘날 우리들 마음의 현황이자 주체성 위기의 한 징후라고 말이다. 이 지점에서부터 신해욱의 투명성의 시학은 미학적이기만 한 어떤 것이기를 멈춘다. 그것은 지적한 대로 사회학적이기도 하고, 더 나아가 그 주체성의 위기가 오늘날 한국사회의 신자유주의적 패러다임과 결부되어 있을 뿐 아니라 현정부의 퇴행적 통치행태의 한 배후가 되기도 했다는 점을 고려할 때, (정치적이라고까지 하기는 어렵더라도 최소한) 정치학적이다.

이런 독법은 ‘비평은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우리의 대답이기도 하다. 앞에서 비평은 정치적인 것을 향해 모험을 하는 시들과 함께 고뇌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물론 이것은 모든 시인들이 직접적으로 정치적인 시를 써야 한다는 뜻이 아닐뿐더러 모든 비평이 그런 지도(指導)에 나서야 한다는 뜻도 아니다. 비평은 한편으로는 모험하는 시인들을 격려하고 그들의 성공적인 성취들을 지지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어쩌면 더 중요한 일을 해야 한다. 첨예하게 미학적인 시들에서 우선 그 미학적인 것의 핵심을 정확하게 읽어내고(우리는 이것을 생략하고 그 다음 단계로 나아가는 투박함을 혐오해야 한다), 그 이후에 거기에서 정치학적인 것까지를 읽어내는 일 말이다. 어떤 시인이 직접적으로 정치적이기를 원하지 않는 이상 그의 시는 최대한의 경우 정치학적인 시로 읽힐 것이다. 그러나 비평은 이것을 어떤 결함으로 간주하지 않는다. 정치학적인 것은 정치적인 것의 장 자체를 성찰하는 계기가 될 논점들을 제공함으로써 또다른 방식으로 공동체에 기여할 것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비평은 텍스트를 통과하는 문을 여는 작업이다. 한권의 시집 앞에 우리는 선다. 미학적인 것의 문을 열면 그 안에 사회학적인 것의 문이 있고, 그 문을 열면 다시 정치학적인 것의 문이 있다. 독자가 마침내 정치적인 것의 문을 열고 광장으로 뛰쳐나갈지는 알 수 없지만 뛰지는 않더라도 아마 걸음걸이 정도는 달라질 수 있지 않겠는가.

 

요약하자. 시와 정치의 제휴를 바라보는 두가지 시각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을 ‘불가능한 가능성’으로 보는 시각과 ‘가능한 불가능성’으로 보는 시각. 전자는 그 제휴가 논리적으로는 가능하다고 말하면서도 사실상 거기에 희망과 의지를 품는 데 인색한 태도를, 후자는 그것이 체험적으로는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될 때까지 해보겠다는 태도를 요약한 말이다. 가능하지만 어렵다고 말하는 것과 어렵지만 가능하다고 말하는 것의 차이는 크다. 현학적인 말장난을 하려는 것이 아니라, 이 두 표현 사이의 차이만큼이나 미묘한 어떤 출발의 차이가 각자의 결론을 180도 바꿀 수도 있다는 얘기를 하려는 것이다. 나는 ‘가능한 불가능성’을 추구하는 태도를 작년 여름 서울 한복판에서 외쳐진 다음 문장들에서 보았다. “우리의 갈비뼈 하나를 뽑아 진실을 만드세요, 하느님. 그녀와 손잡고 거리로 나가겠습니다.”(진은영) “공기 속에서 온통 비린내가 납니다. 없는 문이라면 그려서라도 열어젖혀야겠습니다.”(신해욱)15 탄생하지 않은 그것과 손잡고 걷겠다는 것, 없는 문을 그려서 그것을 열겠다는 것. 이것들이 바로 ‘가능한 불가능’들이다. 모두가 할 수 있지만 문학은 할 수 없는 것이 있다는 게 문학이 모르는 정치의 착각이고 모두가 못하는 것을 문학은 할 수 있다는 것이 정치가 모르는 문학의 비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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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발표순으로 정리해본다. 진은영 「감각적인 것의 분배-2000년대의 시에 대하여」(『창작과비평』 2008년 겨울호); 김행숙·서동욱·심보선·신형철 좌담 「감각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 사이에서-오늘날 시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문학동네』 2009년 봄호); 이장욱 「시, 정치 그리고 성애학」(『창작과비평』 2009년 봄호); 서동욱 「시와 비진리-이미지의 논리」(『세계의문학』 2009년 여름호); 김형중 「문학과 정치 2009-‘윤리’에 대한 단상들 2」(『문학과사회』 2009년 가을호); 강계숙 「‘시의 정치성’을 말할 때 물어야 할 것들」(『문학과사회』 2009년 가을호); 강동호 「존재론적 비명으로서의 시적인 것-시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에 대한 단상」(『창작과비평』 2009년 가을호); 조연정 「무심코 그린 얼굴-‘시’와 ‘정치’에 관한 단상」(『문학수첩』 2009년 겨울호); 백낙청 「현대시와 근대성, 그리고 대중의 삶」(『창작과비평』 2009년 겨울호); 함돈균 「잉여와 초과로 도래하는 시들-주체 과정으로서의 시 그리고 정치」(『창작과비평』 2009년 겨울호); 김춘식·서동욱·조강석·조연정·진은영 좌담 「우리 문학의 이전과 이후-2000년대 이전과 이후의 우리 시」(『문장 웹진』 2010년 1월). 본문에서 인용할 경우 이름과 면수만 적는다.
  2. 정작 서동욱은 바디우를 바디우 자신이 (다수의 진리 산출 공정들 중 하나인 시〔예술〕에 철학을 봉합시켜버렸다는 이유로) 비판한 하이데거와 같은 계열로 간주한다. “양자 모두 시의 중요한 국면을 ‘진리에 대한 접근’에서 찾고 있”(426면)기 때문이라는 것인데, 이렇게 바디우의 진리 개념이 하이데거의 그것과 갖는 차이를 간과하고 둘 다 ‘진리’를 말했다는 이유로 함께 묶어 논의하는 것은 공정해 보이지 않는다. 게다가 “바디우는 그렇게 진리에 관여하는 시인들의 시대는 끝났다고 말한다”(같은곳)는 문장에도 오해의 소지가 있는데, 바디우가 ‘끝났다’고 말한 것은 ‘철학의 시에로의 봉합’이라는 (철학자인 바디우가 보기에) 비정상적인 사태를 초래한 바로 ‘그 특정한 시기’일 뿐, 앞으로도 영원히 시인들이 더이상 진리와 전혀 무관한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논지는 아니다. 바디우의 체계에서 시(예술)는 진리 산출 공정 중 하나였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기 때문이다. 알랭 바디우 『철학을 위한 선언』(백의 1995) 7장과 『윤리학』(동문선 2001) 4장 등을 참조.
  3. 강동호의 “예컨대 신자유주의를 지지하는 시 혹은 파시즘을 숭배하는 시를 부정해야 하는 근거와, 인권을 직접적으로 옹호하는 시가 그 정치적 올바름에도 불구하고 미적일 수 없는 이유는 사실상 동일한 논리적 맥락에 놓여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311면 주11)라는 언급이 필자의 선의와는 무관하게 “시가 정치적 문제를 다룬다면 그것은 이미 그것이 쓰여지기도 전에 미학적으로 무조건 실패한 것”이라는 주장으로 읽힐 수 있다는 지적이 있었고(진은영 『웹진 문장』 좌담), 한편 강계숙의 “시의 정치성은 추구의 대상이 아니다. 그것은 시로 있음으로써 사후적 확인을 요구하는 또 하나의 가능한 해석이다”(388면)라는 요지의 언급들이 시인의 고뇌와 노력 따위는 애초부터 불필요하다는 식의 단정으로 오해될 수 있다는 점에 대해서는 조연정의 언급이 있었다. 이제와 돌이켜 보면 졸고 「스키조와 아나키-2000년대 한국시의 정치학」(『창작과비평』 2006년 여름호)이야말로 ‘시와 정치’라는 주제와 관련해 지나치게 협소한 입장을 완강하게 관철한 경우가 아닌가 한다.
  4. “‘윤리적인’이라는 말을 두가지 용도로 사용할 수 있다. ‘윤리를 논의할 만한’(이 경우 더 걸맞은 말은 ‘윤리학적인’이 되겠지만)과 ‘윤리적이라고 평가할 만한’이라는 뜻으로 말이다.” 졸저 『몰락의 에티카』, 문학동네 2008, 176면. 예컨대 ‘이 텍스트는 윤리적이다’라고 말할 때, 이것이 그 텍스트가 윤리학적인 토론의 대상이 될 만한 텍스트라는 사실판단인지, 아니면 윤리적이라고 평가할 만한 전언을 담고 있다는 가치판단인지를 구분해야 한다는 뜻이다. 전자의 경우라면 차라리 ‘윤리학적인’이라는 표현으로 대체하는 것이 혼란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이 아닐까 싶다.
  5. 이런 기준으로 보면 각주 3)에서 거론한 졸고에 빈번하게 등장하는 ‘정치적’이라는 표현도 사실상 ‘정치학적인’에 가까운 뜻으로 사용되었다고 해야 한다. 이것이 정치학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 사이에 무슨 만리장성 같은 게 있다는 식의 반정치적인 제안으로 보일 수 있음을 알지만, 그러나 우리가 예컨대 진은영과 황병승에게 똑같이 ‘정치적’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면서 정치적인 것의 스펙트럼을 무작정 넓히고 그 안에서 결국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길을 택하는 것은 두 시인을 위해서건 혹은 우리 모두를 위해서건 결코 생산적인 일이 못 된다는 생각이다.
  6. 이에 대해서는 졸고 「정치적 진보주의와 미학적 보수주의」(『창작과비평』 2009년 가을호)에서 소박하게나마 언급했다.
  7. 진은영의 두번째 시집 『우리는 매일매일』(문학과지성사 2008)에 수록된 「문학적인 삶」이나 「Quo Vadis?」 같은 작품들을 예로 들 수 있겠다. 이 두편의 시에 대해서는 졸고 「아름답고 정치적인 은유의 코뮌」(『문학동네』 2009년 봄호) 참조.
  8. 인용한 시에 대해서는 한 평론가의 훌륭한 독해가 이미 나와 있다. 함돈균 「70년생의 두 알레고리」(『현대문학』 2010년 1월호) 참조.
  9. 이에 대한 논의는 졸고 「시뮬라크르를 사랑해」(김행숙 시집 『이별의 그늘』〔문학과지성사 2007〕 해설, 『몰락의 에티카』 재수록) 참조.
  10. 함돈균 「날짜를 배당받지 못한 생일날의 일기장」(『문학과사회』 2009년 겨울호) 참조.
  11. 물론 이는 순수한 민족어의 추구 같은 것과는 전혀 무관하다. 신해욱의 언어가 갖는 이상한 투명함은 오히려 한국어를 낯설게 만듦으로써 획득한 것에 가깝다. 이에 대해서는 작가 자신의 언급이 있었다. “한국어에 대한 한국문학의 관계란 그래야 하는 것이 아닐까. 편안함을 향해 움직이는 한국어의 생물적 욕망을 거슬러서, 이물감의 상태를 지속시키며 그것 자체를 질감으로 만들어내는 것. 환부를 현현하는 것. 나를 나로 부를 수 없게 만드는 것들을 껴안고 힘겹게 살아가도록 강제하는 것.” 신해욱 「이물감의 쾌락과 한국어-문학」, 『문학동네』 2009년 가을호, 384면.
  12. 황종연 「진정성, 개인주의, 소설」,『비루한 것의 카니발』 문학동네 2001, 261면.
  13. 이에 대해서는 J. Starobinski, Jean-Jacques Rousseau-Transparency and Obstruction 10장 참조.
  14. 각각 김홍중의 『마음의 사회학』(문학동네 2009)과 서동진의 『자유의 의지, 자기계발의 의지』(돌베개 2009)의 핵심 논점이다. 물론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진정성의 에토스가 완전히 패배했다고 보기보다는 개인 속에서 “민주적 선호와 신자유주의적 선호는 내적 긴장을” 형성하고 있으며 그것은 “지난 20여년간 우리 사회에서는 사적 행복과 공적 대의를 매개할 수 있는 기회가 매우 협소했기 때문”이라고 보는 지적도 귀담아들을 필요가 있겠다. 김종엽 「촛불항쟁과 87년체제」, 『87년체제론』 창비 2009, 143면.
  15. 이 두 문장은 모두 2009년 6월 9일 발표된 「6·9 작가선언」의 일부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