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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문학의 정치성을 다시 묻는다
소설의 정치성, 몇가지 풍경들
김연수 권여선 공선옥
정홍수 鄭弘樹
문학평론가. 평론집으로 『소설의 고독』이 있다. myosu02@hanmail.net
1. 정치의 귀환
서양문학에서 현실 재현의 역사를 다루고 있는 에리히 아우어바흐(Erich Auerbach)의 『미메시스』(Mimesis: The Representation of Reality in Western Literature)를 읽다보면 역사와 사회의 변화하는 움직임 속에서 구체적인 인간 현실을 포착하는 리얼리즘의 소설적 출현에 이르기까지 얼마나 많은 우발적이고 의식적인 진퇴의 시간이 필요했는지, 자못 아연한 느낌마저 든다. 물론 분리에서 혼합으로 나아간 스타일의 변화를 통해 ‘리얼리즘’의 역사를 추적하고 있는 그의 분석은 ‘사실주의’의 협애한 시야는 분명 벗어나 있지만, 모더니즘과의 대결을 거치며 그것의 극복까지 지향하게 된 보다 창조적인 ‘리얼리즘 문학’의 세계를 감당하기에는 한계가 뚜렷한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장구한 시간 속에 추적하고 있는 스타일의 역사가 단지 형식적인 차원의 굴곡진 전개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좀더 깊고 넓은 시야에서 파악하게 된 인간 인식의 확대와 발전의 역사이며, 동시에 민주주의를 포함하는 인간 현실의 역사적 진전 그 자체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리얼리즘으로서의 문학의 원천과 역사를 확인하는 감흥은 전혀 만만한 것이 아니다. 특히 그 역사의 흐름이 근대에 이르러 소설문학의 자기확립으로 집중된 점을 상기할 때, 소설의 발생과 전개에 힘들게 기입되고 뿌리내린 리얼리즘의 지향을 우리 자신의 망각의 정치로부터 방어하는 일만으로도 그의 기여는 되풀이 참조할 만하지 싶다.
한참 해묵은 이야기를 서두에서 꺼낸 이유는 다른 게 아니다. 근자 문학의 정치성을 둘러싼 논의가 활발하고, 지금 이 자리도 그에 이어져 ‘소설과 정치’ 혹은 ‘소설의 정치성’을 생각하며 최근 소설들을 검토해보라는 요청 속에 마련된 것이다. 물론 최근의 이런 문제제기는 한가롭게 문학원론적 과제를 되새기다 나온 것이 아니다. 논의의 한가운데 민주주의의 퇴행이라는 당장의 한국 정치현실이 있고, 외부를 생각하기 힘든 신자유주의의 숨막히는 세계현실이 있다. 그리고 그 현실의 한복판에서 시와 정치를 한몸에 담고자 하는 한 시인의 간곡한 물음이 있었다.1 이후 이 글에서 제기된 문제와 관련해 많은 비평적 논의가 펼쳐졌음은 아는 대로다. 특히 지난호 『창작과비평』 지면에서 신형철(申亨澈)은 그간의 논의들을 다시 검토하면서, 진은영(陳恩英) 시인이 처음 제기했던 질문의 급박함이나 시적 모험의 현재성이 ‘시와 정치’라는 원론적이고도 ‘사변적인 논의’에 막혀버린 것은 아닌가 하는 아쉬움을 피력하기도 했다.2 시에서 ‘정치적인 것’과 ‘정치학적인 것’을 구분하자는 그의 제안은 그 질문의 긴박성과 대면하기 위한 비평적 고민의 산물이며, 유념할 만한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정치학적인 것’ 다음에 ‘정치적인 것’이 오는 식으로 시의 ‘정치성’이 순차적이거나 계기적으로 실현될 수는 없는 일이고보면, 이 방법적인 구분 이후에도 시와 정치의 절합(節合)은 여전한 난문으로 남는다. ‘시와 정치의 제휴’를 ‘가능한 불가능성’의 시각에서 사유하자는 글의 결론이 그 어려움을 웅변하는 듯하다.
이 질문을 소설 쪽으로 가져온다고 해서 명쾌한 답이 주어질 리는 만무하다. 서두에서 소설의 역사에 새겨진 리얼리즘의 지향을 『미메시스』의 특별한 노고와 통찰에 기대어 환기해보고자 했지만, 당장의 한국소설에서 현실과 창조적으로 교섭하는 미학적 경로를 ‘소설의 정치성’과 관련지어 찾아보는 일은 또다른 과제일 수밖에 없다. 가령 그 리얼리즘의 지향을 ‘리얼리즘 문학’의 정치적 함의와 도덕적 정열을 의식하는 차원에서 되새기려고 하는 경우에도, 그 양상은 모더니티의 본격적 전개와 다양한 차원에서 부딪치고 교섭한 20세기 한국소설의 다단한 전개를 고려할 때, 한층 복잡한 인화(印畵)의 과정을 거칠 수밖에 없으리라는 점은 분명하다. 멀리 갈 것도 없이, ‘80년대 한국문학’의 시간으로부터 세번의 십년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이제 한국소설을 80년대적 의미에서 ‘정치’를 의식하며 읽고 쓰는 일은 드문 경우가 되었다. ‘리얼리즘 문학’의 실천적 지향이 포괄하려 한 인간해방의 ‘정치’는 문학의 자리든 삶의 현장이든 적잖이 힘을 잃었다. 사실 인간해방의 정치가 그 대문자 지위를 상실해가는 과정은 수많은 ‘정치’가 발견되고 호명되고 생겨나는 과정이기도 했다. 인간해방의 정치는 어느 면 억압의 자리로 전도되었고, 이 역사의 아이러니 앞에서 많은 사람들이 길을 잃었다. 말할 것도 없이 이 아이러니를 주도한 것은 담론이나 문학의 장(場)이 아니라 불패의 지위에 오른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역사현실 그 자체였다. 신자유주의의 한국 점령을 실질적인 수준에서 완수한 구제금융사태 이후 우리 모두는 경제적 동물의 불안을 경쟁적으로 내면화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대문자 정치의 실종과 함께 삶의 미시적인 차원에서 많은 억압의 기제가 발견되고 호명되었지만 그 ‘작은 정치들’이 일종의 무력감을 동반할 수밖에 없었던 것도 좀더 근본적인 적대의 전선이 요지부동이었고 오히려 강화일로였던 작금의 상황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지그문트 바우만(Zygmunt Bauman)은 해방적인 대문자 정치가 사라지고 공공의 아고라가 텅 빈 자리에 들어선 ‘생활정치’(life-politics)의 성세(盛勢)에서 개인의 자율과 자유를 추구할 자원과 수단이 제약되고 제거되는 역설을 보고 있기도 하거니와,3 대문자 정치와 공공의 아고라를 새로운 차원에서 회복하는 일은 ‘작은 정치들’의 정치성을 제대로 보존하고 실현하기 위해서라도 점점 더 중요한 과제가 되고 있는 느낌이다. 그리고 이것은 촛불과 ‘애도의 정치’가 열어젖힌 아고라의 새로운 공간, 그 낯선 가능성을 생각할 때, 현실의 긴절한 요청이기도 한 것 같다. 소설과 정치의 관계가 새삼 문학적 화두가 되어야 한다면, 아마도 이러한 맥락 어름일 것이다. 문제는 지금 한국소설의 현장일 텐데, 김연수 권여선 공선옥의 몇몇 작품을 언급해보려 한다. 산만하고 단편적인 논의일망정, 지금 문제되고 있는 맥락에서 ‘소설과 정치’를 생각하는 작은 단초라도 찾을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2. 쉽게 발화되지 않는 정치성: 김연수
진은영 시인이 시의 미학과 정치적인 전언 사이의 불편한 서걱거림을 고민하면서 시와 정치의 문제를 제기했음은 두루 아는 바다. 그런데 소설가 쪽에서도 비슷한 맥락의 고민이 토로된 적이 있다.4 김연수(金衍洙)는 작년말 한 좌담에서 자신의 단편소설 「당신들 모두 서른 살이 됐을 때」(『세계의 끝 여자친구』, 문학동네 2009)를 두고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당신들 모두 서른 살이 됐을 때」 같은 경우에는 용산이 불타는 걸 보고 처음에는 의욕적으로 시작을 했죠. 저 일에 대해서 소설을 한번 써야 되겠다, 사회적 자아로서 가지고 있던 여러 가지 생각들도 있고 또 감정적 분노도 있고 그랬으니까요. (…) 쓰면 쓸수록 그걸 쓸 수 없다는 걸 절실하게 느끼게 돼요. 왜 쓸 수 없냐 하면, 내가 아는 사실들이 진짜 그 사람들이 경험한 바로 그 사실들일까 하는, 엄청나게 큰 벽이 생기거든요……5
이 말을 문면 그대로, 자신의 경험 바깥에서 사실 그 자체를 직접적으로 온전하게 느끼고 안다는 게 가능하기는 한 것인가, 하는 다분히 근원적인 인식론적 무력감이 토로된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도 물론 가능하다. 그러나 조금은 과장된 그 인식론적 결벽성 이면에서 문학의 윤리를 고민하고 있는 작가의 목소리를 읽어내기는 어렵지 않다. 그것은 이 비극적인 동시대의 사건을 대상화하는 소설적 거리(距離)에 대한 질문, 또는 그 질문 앞에서의 곤경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사회적 자아’는 쉽게 비판하고 분노할 수 있지만, ‘소설 쓰는 자아’는 그 비판과 분노의 대상에서 자기를 분리하기 힘들다. 실체적 사실을 온전히 느끼고 알 수 없다는 무력감이 문제가 아니라, 대상과 나의 관계를 묻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면제할 수 없는 문학적 진실의 자리가 문제인 것이다. 물론 이런 질문은 다루려는 대상이 무엇이든 진지한 소설이라면 감당해야 하는 일차적인 시련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용산참사 같은 사건을 다룰 경우, 대상과의 소설적 거리를 질문하는 일은 훨씬 예민한 윤리적 성찰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그러면서 이 질문이 ‘안다고 가정된’ 소설의 시선을 근본적으로 회의하게 만드는 데까지 나아갈 때 “쓸 수 없다”는 과장된 절망적 무력감을 낳았던 것 같다. “아무것도 쓸 수 없는 상태가 되어서…… 실은 그 상태에서야 뭔가를 쓰기 시작하는 거지요.”(김연수, 같은 면)
그렇다면 김연수는 그 절망적 상태에서 어떤 소설의 길을 찾은 것일까.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서른번째 생일을 쓸쓸하고 막막한 청춘의 마지막 장을 넘기듯 통과하고 있는 여성 일인칭 화자의 도입이다. 아마도 작가 스스로 감당하고 용인할 수 있는 소설적 거리가 그쯤이라고 본 듯한데, 이 여성화자 ‘나’의 ‘마음의 풍경’을 가로지르고 있는 것은 기본적으로 단자적인 고립감이라 할 만한 어떤 것이다. 대학시절 광고 동아리에서 남자친구와 함께 영화에 대한 꿈을 키우기도 했지만 지금은 홍보대행사에서 피 말리는 수주전쟁을 벌이느라 영일이 없는 그녀에게 서른이 되는 해 다섯번째 달에 북미대륙을 횡단하겠다는 꿈 따위는 사라진 지 오래다. 그 꿈의 동반기획자였던 헤어진 남자친구 종현은 영화판에서 최저임금을 받으며 일하다 지금은 택시운전을 하며 서울시내를 돌고 있다. 택시 안의 상황을 인터넷으로 생중계하며 한번 탄 승객이 다시 자신의 택시에 탈 확률을 두고 게임을 벌이고 있는 종현의 유별난 ‘희망 프로젝트’가 역설적으로 웅변하듯 “약육강식의 확률로만 움직이는 거대하고 비정한 도시 서울에 맞서” 소설 속의 이들 젊은세대가 운용할 수 있는 인간적 연대와 소통의 기획은 잘 보이지 않는 것 같다. ‘70,000분의 1’ 같은 허수에 가까운 확률을 만지작거리고 있는 모습에서 그 ‘단자적인 고립감’의 집약적 표현을 발견하기는 어렵지 않다. 그렇다는 것은 이 여성화자 ‘나’가 소설의 시점으로 필요했던 이유가 단지 형식적인 차원의 소설적 거리 때문만은 아니라는 이야기가 된다. 기실 여기에는 노동자나 민중 같은 집단적 표상을 더이상 정치의 자원이나 동력으로 상상하기 힘든 세상이나 세대의 역사적 전개가 하나의 실감으로 전제되어 있다. 그러나 인간 유대의 감각을 개발하고 상상하게 만들었던 집단적 표상이나 공동체적 전망이 약화되었다고 해서 더 나은 삶을 향한 꿈꾸기가 사라질 리는 만무하며, 가령 이 작품의 화자 ‘나’의 경우라면 ‘70,000분의 1’로 표현되는 기적 같은 우연의 연대(連帶)는 새로운 차원의 어떤 정치적 발화일 수도 있지 않겠는가. 그것을 ‘단자의 정치학’이라 부르든 다른 어떤 이름으로 부르든, 2009년 겨울 세상과 고립된 불타는 망루의 절망 다른 한쪽에 또다른 연대의 시간을 갈구하는 우리 시대 희망 없는 젊음의 초상을 하나의 시선으로 배치하려 한 김연수의 ‘소설 쓰는 자아’의 선택을 감상적 무력감의 발로로 볼 수 없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렇다면 작가가 제목에 두드러지게 내세운 ‘서른 살’은 하나의 기표로서 정치적 주체의 호명 과정일 수도 있다는 말인가. 계급 환원의 화석화된 혁명적 정치 관념이나 인간 본성의 본질주의적 환원에 토대한 보수적 정치 관념 모두를 거부하는 입장에서라면 우리는 조심스럽게, 사회적 뿌리를 찾지 못하고 부유하는 고립된 ‘서른 살’의 시간을 특정한 현실적 맥락을 통해 정치의 지평에 새롭게 올려볼 수도 있을 것이다. 가령 수십만의 촛불 인파 사이에서 그 시간, 주변에서 택시를 몰고 있을 종현을 떠올리며 모종의 ‘그리움’을 토로하는 ‘나’의 모습은 아마도 우리 시대 ‘서른 살들’이 생성시키고 있는 낯선 아고라의 풍경일 수도 있지 않겠는가. 그런데 자명한 길을 거부하며 힘들게 찾아낸 소설적 우회로의 개시(開示)에도 불구하고 「당신들 모두 서른 살이 됐을 때」는 용산의 시간과의 소설적 긴장을 충분히 품어내지는 못한 느낌이다. 소설의 결말, 일년여 만의 만남에서 이제 막 서른 살이 된 두 연인이 용산참사를 가운데 두고 그간 자신들이 겪은 시간을 나누는 장면이 간접화법의 보고성 설명에 그치고 만 것은 두 사람이 말하는 ‘울음’과 ‘고독’과 ‘참혹’과 ‘두려움’이 소설에 ‘내속(內屬)’되지 못한 방증이라는 점에서 일견 안타까운 소설적 실패의 지점처럼 보인다. 더구나 ‘나’의 고백 속에 용산참사 때 숨진 윤용헌 씨의 장남 윤현구 군의 편지를 삽입 인용한 대목은 작가가 차라리 소설 미학의 어떤 균열을 감수하려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불러일으킨다. 종현의 택시 안 카메라가 그날 새벽의 불붙은 현장을 우연히 담고, ‘희망 프로젝트’ 싸이트에서 ‘나’가 그것을 우연히 보게 되는 ‘허구적’ 설정에 암시되어 있듯 이 소설의 관건은 그 가깝고도 먼 타자적 거리감을 소설적 긴장으로 끝까지 유지해내는 데 있었던 것이 아닌가. 그러나 앞서 인용한 작가의 고백이 아니더라도, 이 부분적인 소설적 균열과 실패는 이해할 만한 것이다.6 이것은 작가가 생각하는 소설이라는 우회로와 현실의 정치적 긴급함이 만나고 길항한 흔적이기 때문이다. 물론 「당신들 모두 서른 살이 됐을 때」는 그 균열을 통해 정치성을 발화하는 소설의 미학적 모험을 적극적으로 추구한 작품은 아니다. 오히려 김연수 소설의 고유한 화법을 지키면서 쉽게 발화되지 않는 정치성, 그 균열을 감수하고 용인하고 있다는 느낌이 강하다. 그러나 그 미학적 균열로부터 소설과 정치의 긴장을 새로운 차원에서 되돌려받을 수 있다면, 이 지점은 김연수 자신의 소설세계에도 그렇고 지금 한국소설에도 시사하는 바가 적지않은 소설적 모험의 시작이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3. 적대와 모욕의 인간학: 권여선
권여선(權汝宣)의 소설은 정치를 소설의 서사적 표층에서 직접 발화하지 않으면서, ‘제거되지 않는 존재론적 갈등과 적대’로서의 ‘정치적인 것’(샹딸 무페)을 소설의 물질적 육체로 감각화하는 아주 특별한 예인 것 같다. 권여선의 소설은 인간들 사이에는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메워질 수 없는 모멸과 모욕의 골이 패어 있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환기시키는데, 정상성의 인간 가면 너머로 짐승의 적의와 비천함을 끌어내고 대면시키는 집요함은 소설의 문체와 언어에 끈적한 점액처럼 달라붙어 있어 떨치기 힘든 불편과 불쾌를 읽는이들에게 준다. 그렇다고 그 적의나 공격성의 맥락이 명료한 것도 아니다. 권여선의 소설에서 인간들은 느닷없이 물어뜯고 한참 뒤에 모욕당한다. 「반죽의 형상」(『분홍 리본의 시절』, 창비 2007)에서 화자 ‘나’가 말하듯 “모욕이 즉각 교환되지 못하고 시간의 회로 속에서 길을 잃는” 일은 다반사다. 이상한 일인데, 그럼에도 이 모두는 말할 수 없는 실감을 준다. 간단히 말해, 권여선의 소설은 우리에게 인간의 실패와 세계의 실패를 수긍하라고 ‘모욕적’으로 유혹하고, 우리는 그 유혹에 기꺼이 굴복한다. 항의는커녕 모욕을 향유하면서 우리는 인간과 세계의 진창에 고개를 박는다. 그 진창은 ‘세계와의 불화’같은 고상한 문학의 정치학이 발을 들여놓을 수 있는 곳이 아니다. 그곳은 해소될 수 없는 적의와 적대가 “이마와 뺨에서 터져 흐른 진물”처럼 고여 있고, “으깨진 밥알과 국건더기가 가래침처럼 국그릇에 주룩 떨어”지듯 삭제될 수 없는 분노가 입에서 흘러내리는 지옥도의 땅이다. 그 지옥도의 주민인 「가을이 오면」(같은 책)의 여성 로라는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조금만 더 증오를 불태워보기로 했다. 아등바등 발버둥쳐봐야 어차피 늦었다. 그녀는 또 한번 제대로 버려졌고 그리하여 모든 것은 제자리를 찾았다. 황금이 녹아 끓을 만큼의 시간이 흘렀다. 세상을 천국으로 만드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녀 내부를 불지옥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지옥의 눈으로 보면 세상은 그지없이 평온하고 아름다웠다.” 이 지독한 불지옥의 시선은 권여선의 소설을 특이한 층위에서 정치화한다. 이 점을 같은 소설집에 수록된 「문상」이라는 작품을 통해 조금 살펴보기로 하자.
1975년 4월 9일 대법원 선고 18시간 만에 여덟명의 목숨을 사형에 처한 박정희 유신독재정권의 대표적인 폭압정치의 사례, ‘사법살인’이라고도 불리는 제2차 인혁당사건. 2005년 국정원 과거사위원회는 이 사건이 당시 중앙정보부에 의해 조작되었다는 조사결과를 발표했고, 2007년 1월 서울중앙지법은 재심에서 여덟명 전원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문상」에 나오는 삼십대 중후반의 여주인공 우정미는 물론 허구의 인물이지만, 다섯살 때 아버지가 정치범으로 사형당한 그녀의 가족사는 즉각적으로 한국 현대정치사의 가장 참혹했던 사건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게 한다. 그런데 「문상」은 이 사건을 소설의 후경에 무심하게 놓아둔 뒤, 아주 기이한 방식으로 소설의 정치성을 전유한다. 소설은 사형당한 정치범의 딸 우정미를 이상하게 뒤틀린 병리적인 인물로 격하하며 불편하기 짝이 없는 타자로 조소(彫塑)해가는데, 그러면 그럴수록 그 격하의 시선은 내부에서 봉합될 수 없는 실패의 지점을 드러내며 괴물 같은 죄의식으로 전도되고 만다. 그렇다면 이 전도의 의미는 무엇인가.
소설의 초점화자 ‘그’는 시인으로, 삼년 전 허접한 시창작교실 강의 시간에 우정미라는 여성을 알게 된다. 그의 기억 속 우정미는 어떤 인물인가 하면, “머릿속에 살짝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깊고 은밀한 접촉을 당한 듯 불쾌해지는 질감의 소유자”다. 삼년 만에 불쑥 큰아버지의 죽음을 알리며 문상을 청하는 전화가 그녀로부터 걸려온다. “우리 큰아버지, 한평생 독신으로 사시면서, 아버지 사형당한 후로 어머니랑 저를 쭉 돌봐주셨던 분이잖아요.” 사형당한 아버지 이야기는 그녀가 시 합평회 자리에서 자신의 시를 변호하며 꺼낸 말이기도 한데, 이런 떠벌림은 통상적인 감각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언행이 아닌가. 기실 관습적인 소통의 맥락을 무시하는 폐쇄적이고 유아적인 우정미의 언행은 그녀를 병리적으로 보이게 하기에 충분하며, 우정미에 대한 ‘그’의 혐오감의 표면적 근거이기도 하다. 그런데 소설은 그녀의 이상한 언행을 통해 아버지의 사형 뒤 모녀가 겪었을 끔찍한 시간을 유추하게 하는 감상적 접근 따위에는 아예 관심이 없다. 대신 소설은 우정미를 불편한 타자로 구축해가는 ‘그’의 내면에서 무언가 회피하고 있는 진실을 은근히 추궁한다. 진부한 표현이긴 하지만, 사실 우정미는 속죄양의 자리에 있다. 생명정치의 패러다임이 말하는 호모 싸케르(Homo Sacer)가 배제-포함의 비식별역 속에 있듯, 전통적인 의미의 속죄양 역시 배제와 포함의 구조를 통해 공동체의 한계 속에 기입되어 있음은 잘 알려진 바다. “인간은 속죄양에게 자신의 죄를 전가하면서 자신의 취약성을 인정하는 동시에 부인한다. (…) 여기에는 동정과 공포, 동일성과 타자성이 모두 관련된다. 속죄양은 너무 낯설어도 안되고 너무 친숙해도 곤란하다.”7 우정미 가족이 겪은 수난은 법적 정치적 구제로 종결될 수 있는 게 아니다. 우정미는 정확히 그 종결될 수 없는 잔여의 형상이다. 심지어 소설 화자 ‘그’는 우정미를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도 그녀의 시를 읽고 말할 수 없는 불편함을 느끼지 않았던가. 「문상」은 죄 없는 속죄양의 자리를 둘러싼 긍정과 부인, 연민과 혐오의 아이러니를 아주 신랄하게 묻는다. 흥미로운 것은 딱히 ‘낯설게 하기’라고도 말하기 어려운 기묘한 소설 화법의 전개를 통해 그 아이러니의 심문을 수행한다는 사실이다. 가령 술자리의 뒤끝, 우정미의 눌린 허리와 살찐 엉덩이를 맹렬하게 쫓아가는 ‘그’의 느닷없는 행동은 ‘방어’의 실패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우스꽝스럽지만 이해할 만하다. 그런데 여관에서의 잠자리 뒤, 그녀는 묻는다. “너무 잘하세요, 선배님. 누구한테 배웠어요?” 맥락을 잃고 미끈거리는 말의 외설적 어조와 뉘앙스가 차라리 무섭지 않은가. 제거 불가능한 모욕의 잉여가 ‘그’에게 달라붙는 순간이다. 죄 없는 우정미의 자리가 이 치명적인 얼룩을 가능케 한 관계의 좌표임은 물론이다. 두 사람의 음모로 엮어 만든 기괴한 털묶음을 화해의 꽃다발인 양 내미는 우정미의 행동은 또 어떤가. 그리고 집요하게 그녀는 다시 묻는다. “기술이 좋으시던데, 선배니임.” “어떤 여자한테 배웠어요?” 결국 ‘그’는 토사물을 쏟아내며 완전히 무너져내린 채 환청을 듣는다. “나를 봐요! 당신들은 모조리 죄인이에요! 나를 봐요! 당신들의 죄가 만들어낸 이 괴물을 좀 보라고요!” 물론 우정미는 그런 말을 할 리 없다. 그녀는 백지상태의 무구함 그 자체가 아닌가. 그런 의미에서 환청의 노출이 이 소설의 특별한 긴장에 도움이 되었는지는 의문이다. 소설의 결말에서 화자 ‘그’는 망설이던 끝에 우정미의 상가(喪家)에 가지 않기로 작정한다. “언젠가는 가겠지만 아직은 아니다. 살 수 있을 때는 나쁘게라도 사는 게 미덕이다. 나쁘게도 살 수 없을 때 착하고 순하게 우정미에게로 가겠다. 그녀는 그에게 안온한 사형대가 되어줄 것이다.” 이 진술을 모욕당한 자의 위악이라고 쉽게 넘겨버릴 수 있을까. 윤리에 제압되지 않는 비루한 자기보존의 정치는 정확히 이 지점에 토대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무섭다.
요약컨대, 권여선이 「문상」에서 보여준 모욕의 인간학은 그 착목의 심도나 소설 언어의 독특한 운용 모두에서 최근 한국소설에 내속될 수 있는 정치성의 의미있는 한 가능성으로 보인다. 이 경우 소설의 정치성을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 하는 난문이 그대로 남아 있는 셈이지만, 이 장의 서두에서 언급한 ‘정치적인 것’의 함의를 염두에 두는 것도 한 방법일 수 있다면 말이다.
4. 세계의 공유, 공감의 언어: 공선옥
소설의 정치성을 가능케 하는 미학적이고 윤리적인 장치로 공감의 힘을 생각해볼 수 있다면, 공선옥(孔善玉)의 소설은 그 점에서 거의 특권적이라 할 만한 세계를 구축해가고 있는 것 같다. 공선옥 소설 안팎에서 공명하는 공감의 힘이 가난하고 헐벗은 타자의 삶에 대한 ‘자기 응시’의 체험적 진실을 기반으로 하고 있음은 잘 알려진 대로다. 최근 백지연(白智延)은 『명랑한 밤길』(창비 2007)을 비롯한 공선옥의 근작에서 타자에 대한 관심과 공감의 심화를 읽어내면서, 그 타자와의 조우의 순간이 “신체의 온기, 노래, 울음” 등 인물들이 나누는 “감각적인 체험” 속에 드러나는 지점에 주목한 바 있다.8 이 비평적 언급을 존중하면서, 여기에 더해 공선옥 소설이 소설의 화법이나 문체의 수준에서 규범적 구속이나 세련성을 무시하면서 돌파 혹은 전유하고 있는 감각적인 것의 개방, 특별한 공감의 지평을 이야기해볼 수는 없을까.
가령 백지연도 그 울음소리를 인용으로 옮겨놓았지만, 「영희는 언제 우는가」에서 공감을 일으키고 ‘사이’를 만드는 “감각적인 체험”은 운다는 사실 그 자체가 아니라 “아이고오 아이고오”로 이어지는 그 울음소리의 낯선 소설적 발화에서 비롯된다. 그런데 공선옥 소설의 이런 발화는 입말이나 날것의 목소리를 전통적 이야기성의 복원 차원에서 전략적으로 도입한 성석제 소설의 인식적 충격과는 다른 지점에서 감각적인 것의 열림으로 이어진다. 나는 이 열림이 공선옥 소설의 경우 삶과 소설 사이에 개입할 수밖에 없는 미학적 변용의 최소화 혹은 거스름과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소설은 반규범적이고 형식에 개방적이기도 하지만, 나름의 완강한 미학적 규범을 포기한 적도 없다. 멀리 갈 것도 없이 한국 단편소설의 미학을 두고도 특정한 규범적 이해가 있음을 우리는 안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거기서 말하는 언어의 밀도나 구성의 긴장, 묘사의 기율 등등은 얼마나 숨막히는 것인가. 그에 대한 반발이 또한 ‘언어학적 전회’를 포함하는 소설의 미학적 모험의 역사를 이루는 것이겠지만, 공선옥 소설에서 우리가 느끼는 것은 그런 미학적 반발이라기보다는 그저 무심한 거스름이 아닌가. 「영희는 언제 우는가」에서 또 한명의 울음의 주체인 소설 화자 ‘나’는 이렇게 자신의 내면을 고백한다. “나는 운다. 기가 막혀 운다. 무엇이 기막힌가. 웃기는 내 감정이 기막히다고 하기가 싫다. 그래서 그냥 운다. 아무 말도 못하고, 그냥 서럽게. 울면서 나는 내 울음의 이유를 부지런히 찾는다. 이유가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없는 것 같기도 하다. 그래서 맘껏 울어젖혀지지가 않는다. 맘껏 울지 못할 울음 우는 게 창피해진다.” 전혀 정제되지 않은 날것의 문장이 이어지는데도 그 감정의 충실함은 소설 안에서 열리고 밖으로도 열린다. 물론 소설가의 미학적 통제는 어떤 형태로든 작동하고 있는 것이겠지만, 적어도 소설적 작위성을 느끼기는 힘들다. 여기에는 소설 속 인물에게 소설의 미학이나 규범을 거쳐 배달된 언어의 느낌이 적다. 다시 말해 삶의 자리와 소설의 자리 사이에 미학의 빗금이 잘 보이지 않는다. 우리는 통상 그 빗금을 지나야 좀더 복합적인 진실이 개시된다는 문학의 약속에 익숙하지 않은가. 그런데 공선옥 소설은 그 미학의 빗금을 무시하는 듯하면서 그것이 가리거나 놓치는 인간 진실의 누수를 환기시킨다. 그리고 그 누수는 궁핍이나 소외의 물질적 현실이 좀더 착실하게 소설적으로 보고된다고 해서 쉽게 메워질 성질의 것도 아니다. 공선옥 소설이 개방하는 인간사의 감각적이고 구체적인 진실은 소설 미학의 규범을 무심히 거스르는 만큼, 상투적인 인간 이해의 여러 장벽을 허위의 부유물과 함께 시원스레 깨뜨리기 때문이다. 「명랑한 밤길」에서 간호조무사로 일하는 스물한살 시골처녀 연이는 자신을 농락한 ‘글 쓰는’ 남자를 “또한 그러한 날 밤에, 내 가슴에 머리를 처박고 한 말들을 잊었느냐고”라는 단 한마디로 마음속에서 정리해버리는데, 바로 그 대상의 행동에서 아무런 문학적 처리 없이 그대로 꺼내놓은 듯한 ‘처박고’의 생생한 뉘앙스가 쓸어버리는 허위의 진폭은 소설 속 남자 개인을 훨씬 넘어선다. 이것은 혹 우리 소설이 잊은 생(生)언어는 아닌가. 공선옥 소설의 문제성은 이 날것의 감각이 부분적인 돌출을 넘어 소설 전체를 틀어쥐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면서 그것은 그 전체에서 소설의 인물이 발하는 진실된 인간 감정과 만나게 해준다.
그러고 보면 이 특별한 공감의 언어는 작가 개인의 사유지를 모르는 듯하다. 표현의 허세를 찾기 힘든 공선옥의 소설에도 물론 나름의 완미(婉媚)한 문학적 수사(修辭)가 없는 것은 아니다. 전교조 해직 경험이 있는 갱년기의 여성화자는 이십년 만에 다시 만난 운동권 선배와의 인연을 이렇게 들려준다. “그가 내 집에 올 때면 들고 오는 냉동생선처럼 그와의 기억들이 내 생애 어딘가에 냉동저장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나는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그가 한밤중에 내 집에 왔을 때, 그와의 기억의 편린들이 해동되어 온밤을 흥건히 적시는 동안”(「폐경전야」, 『명랑한 밤길』). 이 진부하되 투명한 수사가 주는 낯선 해방감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나는 방금 공선옥의 소설 언어가 사유와 독점의 영토를 모르는 듯하다는 말을 했거니와, 이러한 언어는 우리가 그냥 함께 맞잡고 들어올려야 하는 것이 아닌가. 공선옥에게 소설의 언어는 우리가 공유하고 감당하고 있는 세상의 현실, 그 좁고 초라하고 얼크러진 세계의 일부일 뿐이다. 그 언어는 결국 속되고 고단한 대로, 그렇게 살아갈 수밖에 없는 그 현실의 지평으로 되돌려주어야 하는 것이다. 공선옥 소설의 언어와 문체가 그 자체로 비판적일 수 있다면, 바로 이 지점에서다. 지금 우리에게 소설의 정치성이란 화두가 문제가 된다면, 소설의 언어는 무엇보다 우리가 공유하고 있는 세계에 대한 관계 혹은 믿음을 복구하는 데 쓰여야 한다. 공선옥의 소설은 무엇보다 그 언어로 이 점을 강하게 환기시킨다. 남자의 집에서 돌아오는 비 내리는 밤길, 「명랑한 밤길」의 연이는 뒤를 따르는 듯한 남자들의 기척에 정미소 안으로 뛰어들어 몸을 숨긴다. 거기서 연이는 그 ‘남자들’, 그러니까 네팔과 방글라데시에서 온 이주노동자 깐쭈와 싸부딘의 가슴 아픈 망향가를 듣는다. 그리고 소리 낮춰 함께 노래한다. 잠시 뒤, 놀라운 순간이 도래한다. 그 결말의 몇 문장을 여기 옮긴다. “사랑했나봐 잊을 수 없나봐 자꾸 생각나 견딜 수가 없어 후회하나봐 널 기다리나봐…… 나는 정미소를 나섰다. 나는 빗속에서 악을 썼다. 눈에서는 눈물이 쏟아졌다. 그러나 나는 노래 불렀다. 저기, 네팔의 설산에 떠오른 달이 보인다. 나는 달을 향해 나아갔다. 비를 맞으며 천천히, 뚜벅뚜벅, 명랑하게.”
5. 새로운 ‘정치성’, 난문을 남겨두고
소설의 정치성은 어느 면 동어반복의 개념인지도 모른다. 근대소설이 인간사의 여러 국면을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지평 속에서 그려낼 수 있게 되면서 참다운 자기형성의 계기를 마련했음은 두루 아는 바다. 근대소설의 영예에 주어졌던 총체성이나 전체성의 지향, 혹은 객관 진실의 추구라는 무거운 짐은 타고난 바탕으로서 근대소설의 정치성이나 사회성을 생각하지 않고는 이해될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소위 ‘근대문학 종언론’의 한 요체가 근대소설이 감당했던 정치성이나 사회성의 측면이 대폭 약화될 수밖에 없었던 작금의 상황을 가리키고 있는 것처럼, 최근 한국소설 역시 표면적으로는 정치성과의 직접적 관련을 이야기하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2000년대 소설을 두고 여러 평자들이 지적한 것처럼, ‘무중력의 공간’에서 씌어지는 듯이 보이는 소설들 역시 나름의 현실 연관을 의식/무의식적으로 맥락화하고 있으며 그런 만큼 거기서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층위를 적극적으로 읽어낼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이 점을 전제로 하고서, ‘소설의 정치성’이 새삼 문제가 된 당장의 현실적 맥락에 대해서는 글의 서두에서 간략히 언급한 바 있다. 사정이 이렇다면, 제대로 된 논의의 출발은 그 ‘정치성’의 의미를 새롭게 묻는 것이어야 할 터이다. 그러나 이 경우 “삶과 정치가 실험되지 않는 한 문학은 실험될 수 없다”9는 진은영 시인의 뜨거운 화두를 피해갈 수 있을까. 다시 말해, 이 화두를 통과하지 않고 새로운 ‘정치성’의 의미를 이야기할 수 있을까. 감당하기 힘든 화두 앞에서 나는 우회의 길을 택했다. 김연수의 딜레마는 지금 한국 소설미학의 어떤 보수성 앞에서의 곤경은 아닌가. 권여선의 적대와 모욕의 인간학은 ‘정치성’의 새로운 테마일 수 있는가. 공선옥의 ‘반미학의 미학’으로부터 참조할 수 있는 ‘정치성’의 미학적 경로는 없는가. 그러나 질문은 가닥을 잡지 못했고, 새로운 ‘정치성’의 난문은 그대로 남았다. 질문의 희미한 윤곽이라도 그렸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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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은영 「감각적인 것의 분배: 2000년대의 시에 대하여」, 『창작과비평』 2008년 겨울호.↩
- 신형철 「가능한 불가능: 최근 ‘시와 정치’ 논의에 부쳐」, 『창작과비평』 2010년 봄호.↩
- 지그문트 바우만 『액체근대』, 이일수 옮김, 강 2009, 77~83면 참조.↩
- 이어지는 인용에서 알 수 있듯, 표면적으로 김연수는 미학 이전에 ‘사실’이라는 벽을 문제삼고 있다. 그러나 결벽성이나 작가적 겸손을 접고 보면, 정치성의 직접적 수용을 힘들게 하는 소설 미학의 문제로 김연수의 발언을 읽는 것도 가능할 것 같다. ‘비슷한 맥락’이라고 한 것은 이 때문이다.↩
- 김훈·김연수·신수정 좌담 「문학은 배교자의 편이다」, 『문학동네』 2009년 겨울호 61면.↩
- 공교롭게도 김연수의 좌담이 실린 『문학동네』 같은 호에는 소설가 황정은의 용산참사 보고문 「입을 먹는 입」이 실려 있다. 읽는이를 말할 수 없는 분노와 부끄러움 속으로 몰아가는 이 글의 강력한 정서적 파장은 무엇보다 글쓴이의 몫이고 사건의 민감성과도 관련되어 있겠지만, 르뽀 형식의 글이 주는 직접성의 힘도 무시하기 어려울 것이다. 현실의 창조로서 ‘허구적 변용’의 미학적 교섭을 견뎌야 하는 소설의 자발적 구속을 생각해보게 되는 대목이다. 게다가 지금 문제되고 있는 것은 용산참사라는 당장의 민감한 정치적 사건이기도 하다.↩
- 테리 이글턴 『우리 시대의 비극론』, 이현석 옮김, 경성대출판부 2006, 481면.↩
- 백지연 「타자의 인식과 공공성의 성찰: 전성태와 공선옥의 소설을 중심으로」, 『창작과비평』 2009년 겨울호, 69면. 백지연은 한나 아렌트의 입론에 기대어 이 감각의 소통행위로부터 존재의 ‘사이’가 구성하는 공공영역의 창출로 논의를 확장하고 있다.↩
- 진은영, 같은 글 84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