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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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성 韓美成

1949년 서울 출생. 1995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시집 『중세기로 간 친구』가 있음. vanitas49@hanmail.net

 

 

 

 

 

가그랑한 말에 둘러싸인 으르렁 말

소리나는 말 사이로 들락거리던 소리나지 않는 말

테이블과 의자 사이로 꾸물거리며 눈치보던 말

찻잔과 스푼 사이를 저울질하던 말

프리마로 녹아 혀끝에 감도는 말

천천히 찻잔을 놓으며 담배를 만지작거리며

손가락 끝에서 떨기만 하던 말

그냥 문을 열고 빠져나가버리는 말

정거장까지 귀를 곤두세우고 따라오던 말

황급히 지하철을 타고 매끄럽게 질주하는 말

방에서 수천년의 먼지가 되어버린 말

시멘트벽에 못이 되던 말

녹이 흐르던 말

너펄거리는 거미줄이 된 말

전자시계처럼 밤새도록 껌벅이던 말

연필 끝에서 엎어지고 지우개로 지웠던 말

새벽이면 눈물을 흘리던 말

반질반질한 해골이 되어버린 말

이제 와서 정말이지 난……

 

 

 

백년 동안의 고독

 

 

밤 9시와 10시 사이, 해운대 오킴스 레스토랑에서

 

붉은 조명등이 있는 테이블에 앉았다

유리창 너머로

모래사장을 따라 불빛 일렁이는 해변

파도가 하얗게 부풀어오르는 밤바다가 보이고

 

숱 많은 머리에 검은 잠바를 입은 정아가 옆집 고양이 이야기를 꺼낸다

 

“그 남자가 목젖을 잘랐다지 뭐야. 끔찍하지?”

“차라리 자궁을 들어내지.”

“일단 발정만 하면 밤새도록 울음소리가 신음소리 같아.

……혼자 사는 남자가 견디기 어려웠을 거야.”

 

자궁 긁어내는 소리를 떠올리면서

식은 커피를 마셨다

독실한 기독교신자인 희야가 바람난 여자 이야기를 꺼낸다

 

“그 여잔 문 꼭꼭 걸어잠그고 커튼까지 쳤지만 뻔해.

기도만 한다지 뭐야.”

“차라리 수의(壽衣)나 만들고 있을 것이지

참 한심하다.”

“온 집구석에 벌레들만 득실거린다지 뭐야.”

“결국 그러다 성치 않을 거야.”

 

어깨 너머로 파도는 부풀어오르고

지난 시간을 쏟아내듯 다시 하얗게 부서진다

천천히 파도를 밀며 닦아내듯이 낮게 희야가 말한다

 

“무척산 기도원에 갔다온 후부터는 나도 이젠 달라졌어.

열망도 가라앉았어.

실루엣만 남기고…… 난 그 실루엣 같은 사랑이 좋아.”

 

천천히 커피잔에 묻은 루즈 자국을 문지르며

백년도 더 넘은 화인을 문지르며

임신도 못했던 갈증난 젊은날 사랑 이야기를 한다

 

“아직 임신할 수 있어. 이제 사십인데……”

 

식은 커피를 넘기며 옥이가 응대한다

 

까만 유리창 너머에 해안선 같은 가능성이 정말 있을까 있을지도 모른다

검은 하늘은 단 하나의 별도 품지 못하고 바다에 빠졌다

우리들 사이에는 모래 씹히는 소리가 들리고 황폐한 침묵만 굴러다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