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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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단과 현장

 

기후변화 과학에 대한 공격

 

 

빌 매키븐 Bill McKibben

미국의 환경문제 전문 저술가이자 국제 기후문제 캠페인 350.org의 설립자. 일반 독자를 대상으로 지구온난화를 다룬 최초의 저서 『자연의 종말』(The End of Nature)을 비롯해 다수의 저서를 냈으며, 최근 『지구: 거친 새 행성에서 살아가기』(Eaarth: Making a Life on Tough New Planet)를 출간했다.

 

  • 이 글은 미국의 진보적 블로그 탐 디스패치(www.tomdispatch.com)의 2010년 2월 25일자 기고문으로, 원제는 ‘The Attacko nClimate-Change Science: Why It’s the O.J. Moment of the Twenty-First Century’이다. 원문은 www.tomdispatch.com/blog/175211과 창비 영문판 홈페이지(www.changbi.com/english)에서 확인할 수 있다. ⓒ Bill McKibben 2010/한국어판 ⓒ (주)창비 2010.

 

 

21년 전인 1989년, 나는 지구온난화에 관해 일반 독자를 대상으로는 흔히 최초라고 꼽히는 책을 썼다. 흥미로운 서평 하나가 『월스트리트저널』에 실렸다. 칭찬과 비판이 섞인 신중한 평가였다. 서평자는 “중요한 주제고, 눈길을 끄는 주장이며, 논증은 설득력 있다”고 썼다. 그 논평은 예외적 사례가 아니었다. 때마침 비슷한 시기에 아버지 부시 대통령은 “백악관효과(White House effect)로 온실효과(green house effect)에 맞서 싸울” 계획이라고 발표하기도 했다.

하지만 앞으로 몇주 후면 발간될 내 새 책(2010년 4월 출간된 Eaarth를 말함-옮긴이)에 대해서도 『월스트리트저널』이 같은 평을 할지는 의심스럽다. 미 공화당의 대선 도전자들 중 어느 누구도 이제 인간이 지구온난화를 초래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지난 대선에서 공화당 부통령 후보였던 쌔라 페일린(Sarah Palin)은 현재 기후과학을 “사이비”라고 부르고 있고, 유타주 의회는 지난주 “지구 온도에 관한 자료를 조작해 지구온난화라는 결론을 내려는 의도로 현재 진행중인 조직적 활동”을 비난하는 결의안을 거의 당론 차원의 투표로 통과시켰다. 마치 밀려오는 파도에게 움직임을 멈추라고 명령한 크누트 왕을 연기하듯이 말이다(크누트 왕이 이 명령을 내린 것은 전능하다고 아첨하는 신하들에게 경고를 주기 위한 것이었다-옮긴이).

여기에는 이상한 점이 있다. 1989년만 해도 기후변화에 관한 과학적 연구자료란 다 모아봐야 내 책상에 올려놓을 수 있을 정도였다. 과학은 아직 허약했다. 그래도 나는 내 보고서가 설득력 있다고 생각했지만, 많은 과학자들은 아직 동의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이제 기후변화에 관한 연구자료는 수퍼돔(Superdome, 뉴올리언스에 있는 대형경기장으로 2005년 허리케인 카트리나로 수천의 이재민들을 수용하면서 세계의 주목을 끌었다-옮긴이)을 채울 만큼 많다. (하지만 허리케인 카트리나로 그 건물 지붕에 구멍을 내는 일이 얼마나 쉬운지 밝혀진 이상 거기 채우는 것을 원하지 않을 수도 있겠다.) 세계의 모든 주요 과학기구들은 기후변화의 위험이 사실임을 보여주는 보고서를 제출해왔다. 역사상 가장 따뜻한 해로 기록된 연도 중 15개가 1989년 이후 20년 사이에 들어 있다. 또 한편에선 북극과 빙하가 녹고 바다가 급속하게 산성화되는 등 지구의 주요 자연계가 빠른 변화의 조짐을 뚜렷하게 보여왔다.

그럼에도 기후변화 과학에 대한 공격은 그 어느 때보다 거세며, 적어도 미국에서는 전례없이 뚜렷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인간이 지구온난화를 유발했다고 믿는 미국인들은 더욱 줄어들었다.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이 공격의 결과로 미 의회는 지구온난화 법규를 통과시키기는 고사하고 고려할 필요조차 거의 느끼지 못하고 있으며, 그 때문에 기후변화를 둘러싸고 국제적 합의를 이루기 위한 노력은 사실상 중단되었다.

 

 

기후변화 부인하기

 

기후과학을 비판하는 운동은 대단히 영리하고 또 대단히 효과적이었다. 어떤 방법을 썼는지 살펴볼 만하다. 내 생각에 O.J. 씸슨(Simpson) 재판이 이와 가장 유사하다. 이 사건은 이미 우리의 집단적 기억에서 사라져가고 있지만, 1995년 당시 사리분별이 가능했던 사람이라면 몇몇 이름을 대는 것만으로 그 사건을 다시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그 재판의 주요 증인이었던 카토 카엘린은 어떤가? 아니면 담당판사 랜스 이토는?

씸슨을 변호하기 위해 모인 드림팀 변호사들에게는 한가지 골칫거리가 있었다. 그것은 이 친구가 유죄임이 매우 확실하다는 것이었다. 그의 양말에는 피살자인 전처 니콜 브라운의 피가 여기저기 묻어 있었는데 그것은 그저 시작에 불과했다. 그래서 조니 코크란, 로버트 샤피로, 앨런 더쇼비츠, F. 리 베일리, 로버트 카다시언 일동은 “절차”를 문제삼기로 결정했고, “절차” 때문에 씸슨의 유죄가 의문시된다고 주장했다. 그저 “의문시”만으로도 그들에게는 충분했다. 이렇게 해서 LA경찰국 소속 범죄학자 데니스 펑이 〔사건의 증거인〕 혈액쌤플을 정확히 어떻게 운반했는지, 또는 〔씸슨 사건을 담당했던〕 수사관 마크 퍼먼이 1986년 한 씨나리오 작가와 이야기하는 도중 인종차별적 비방을 했다는 사실에 관해 반대신문이 이어졌다.

산더미처럼 많은 증거들이 도리어 이들에게 도움이 되었다. 건초더미가 충분히 크다면, 그 안에 바늘 몇개가 숨겨져 있을 확률은 높아지게 마련이다. 변호인들은 용케 찾아낸 것들을 최대한 이용했다. 이를테면 코크란은 변론을 마무리하며 퍼먼을 아돌프 히틀러에 비유했고, 그를 “대량학살을 저지를 인종주의자, 위증자, 미국 최악의 악몽, 악의 화신”이라고 불렀다. 실제 청중은 배심원단뿐이었고, 그들 중 많은 수가 LA경찰국을 싫어할 만한 충분한 이유를 갖고 있었지만, 변호인단은 TV에 몰입한 수많은 미국인들에게도 의심을 불어넣는 데 성공했다. 아무리 사소한 대목이더라도 몇주 내내 이 사건의 어딘지 딱 맞아떨어지지 않는 점을 계속 생각하고 있노라면 그럴 법도 했다.

마찬가지로 지구온난화의 과학을 의문의 여지가 없는 합당한 것으로 입증하는 수많은 증거더미들이 어떤 점에서는 당면한 가장 중대한 문제를 다양한 이유에서 문제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이들에게 요긴하게 쓰일 수 있다. 만약 보고서가 3페이지짜리라면 감당하기가 그리 어렵지 않고 오류도 많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3000페이지라면( ‘정부간 기후변화위원회’〔IPCC〕가 발표한 최신 보고서의 분량이다) 어떨까? 오류가 있을 확률이 높아지는 것은 당연하다.

실제로 ‘정부간 기후변화위원회’는 수많은 사소한 오류를 범했는데, 그중 한 예는 히말라야 빙하가 사라지는 날짜를 잘못 기재한 것이다. 보고서가 명시한 2035년에 그 일이 벌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데 현재 이 사실은 인터넷을 통해 너무나 널리 퍼졌고, 그 결과 부인할 수 없는 다른 증거, 즉 지구상 대부분의 빙하가 빠르게 녹고 있다는 사실은 거의 잊혀질 지경이 되었다.

누군가 어떤 과학자들의 이메일 3000통을 해킹한다면, 처신이 올바르지 못하거나 적어도 그런 처신을 언급하는 메일 몇개를 당연히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지난가을 영국의 한 연구소에서 벌어진 이른바 “기후게이트”(Climate-gate) 스캔들이다. 영국 이스트앵글리아대학 기후연구소 소장 필 존스는 다름아닌 ‘정보자유법’(Freedom of Information Act) 규정을 따르지 않았다는 이유로 대학당국이 처벌 여부를 결정하는 동안 강제 휴가조치를 받았다.

그를 기후과학의 마크 퍼먼이라고 부르고 계속해서 공격을 퍼붓는다면, 사람들은 세계의 과학연구자들이 실제로 수집한 산더미 같은 기후변화의 불편한 정보들을 무시하게 될 것이다. 사실 조니 코크란이 했던 것과 거의 똑같은 식의 야단법석을 떨 수도 있는데, 필 존스의 이메일이 “과학적 파시즘”의 증거라고 주장한 공화당의 제임스 쎈젠브레너 하원의원이나 자신의 적수들을 “히틀러 청년단”이라고 부른 기후변화 회의론자 크리스토퍼 몽크턴이 하고 있는 바가 바로 그런 예다. 그러한 표현은 서서히 퍼져나가고 있다. 나도 날마다 증오에 찬 이메일을 받는 데 이제 익숙해졌는데, 어제 받은 메일처럼 종종 “쓰레기 같은 나찌 멍청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다.

우연히 만난 행운을 써먹을 수도 있다. 가령 워싱턴 D.C.에 기록적 폭설이 내렸다고 치자. 지구온난화가 대기중 수증기량을 증가시킨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 기록적 폭설이야말로 과학자들이 예측해온 사건이라는 사실은 이때 전혀 중요하지 않게 돼버린다. 모든 이들이 지구가 더워지고 있다고 주장했는데, 엄청나게 눈이 많이 왔다는 것이면 충분하다.

웹싸이트 ‘기후 보급창고’(Climate Depot)의 운영자 마크 모라노(Mark Morano) 같은 타고난 정치공작자는 올겨울 폭설을 소재삼아 아직도 물리학이라는 것을 믿는 이들을 조롱하는 100개의 게시물을 올렸다. 모라노는 정말이지 탁월하게도, 웹캠을 실시간으로 연결해 독자들이 눈 내리는 것을 볼 수 있게 했다. 그의 전 상사인 공화당의 제임스 인호프(James Inhofe) 상원의원은 손자들에게 미국 국회의사당 마당에 이글루를 지어놓고 “앨 고어의 새집”이라는 표지판을 붙이게 했다. 바로 이런 것들이 사람들 머릿속에 오래 남는다. 장갑이 맞지 않으면 무죄를 선고해야 하는 것이다(조니 코크란이 O.J. 씸슨을 변호하면서 법정에서 사용했던 유명한 표현-옮긴이).

 

 

왜 우리는 기후변화를 믿고 싶어하지 않는가?

 

기후변화를 부인하는 이들은 구조적으로 몇몇 잇점을 갖고 있다. 엑슨모빌(Exxon Mobil)을 비롯하여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기후변화 연구가 틀렸음을 밝히려는 집단들 덕택에 그들의 “싱크탱크들”은 자금이 풍부하며, 그 돈은 기후변화가 거짓임을 입증하려는 실제적인 연구를 하는 데 낭비되지 않았다. 자체 TV방송망인 폭스(Fox)가 있다는 것 역시 도움이 되었지만, 이들 운동에 결정적으로 유용했던 것은 영국의 몇몇 우파 타블로이드 신문들이었다. 그들은 새로운 “스캔들”이 터질 때마다 대중매체를 이용한 여론몰이를 통해 소문을 기정사실로 만들었다.

올 2월 『뉴욕타임즈』마저 1면에 “회의론자들이 UN기후위원회를 비난하다”라는 기사를 실었다는 사실은 이 친구들이 대중매체를 움직이는 데 천재적임을 보여준다. 그 기사는 지난 몇달간 나왔던 비난들의 재탕이었다. 이 사건이 그들이 거둔 성공의 영광스러운 증거일 수 있는 것은 『뉴욕타임즈』가 크리스토퍼 몽크턴, 그러니까 (자신이 일종의 영국 자작子爵이라는 이유로 그 스스로 그렇게 불리길 좋아하는 존칭인) 몽크턴 경을 자료의 주요 출처로 인용했다는 점이다. 그는 “마거릿 새처의 전직 참모”로도 알려져 있는데, 새처가 총리로 재임할 당시 『아메리칸 스펙테이터』에 “에이즈를 막는 유일한 방법”을 처방하는 다음과 같은 글을 쓴 적이 있다.

 

(…) 모든 주민을 정기적으로 검진하고 (…) 보균자는 영원히 격리해야 한다. 전 주민을 대상으로 매달 혈액검사를 실시해야 하고 (…) 바이러스에 감염된 것이 밝혀지면, 설사 보균자일 뿐이라 해도 즉시, 강제로, 그리고 영원히 격리시켜야 한다.

 

그는 기후문제에 관해서도 동일한 열정과 상식을 갖고, 게다가 이제 주요 신문의 1면 상단에서 버젓이 발언하고 있다.

그렇지만 기후변화를 부인하는 이들이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유일한 혹은 주요한 이유가 돈과 대중매체인 것은 아니다. 그들은 사실 그 정도로 많은 돈을 다 쓰고 있지도 않으며, 무보수로 인터넷상의 로비활동 대부분을 수행하는 수많은 열정적 자원봉사자들을 곁에 두고 있다. 그들은 대다수 환경론자들보다 훨씬 요령있고 유능하게 현재 우리 정치의 주요 흐름을 활용했기 때문에 성공할 수 있었다. 그들은 대중이 엘리뜨에 대해 느끼는 분노를 잘 이해했다. 그들은 미국 전역에 널리 퍼져 있는 무력감을, 그리고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신비한 힘들이 우리를 속이고 있을지 모른다는 광범위한 의심을 간파했다.

이들 중 일부는 물론 순전히 당파적이다. 이를테면 『뉴욕타임즈』의 칼럼니스트 데이비드 브룩스는 최근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한편으로 나는 지구온난화가 실재하며 인간의 탓이라는 과학계 권위자들의 주장을 전적으로 수긍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그 이론틀과 모순되는 증거를 접할 때마다 기쁨의 전율을 느낀다. (…) 〔어느정도는〕 앨 고어를 멍청이처럼 보이게 만드는 일이면 무엇이든 마음에 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앨 고어를 그처럼 열렬히 공격할 때는 주로 그가 녹색투자로 엄청난 돈을 벌고 있으며 기후변화라는 개념이 온통 관련자들의 배를 불리기 위한 사기에 불과하다는 점에 초점을 맞추는 듯하다. 이 비난은 틀릴 수도 있고(고어는 녹색투자로 벌어들인 수익을 단체에 기증한다고 맹세했다), 과학자들이 기후변화 연구를 통해 돈을 버는 것은 아니지만(끊임없는 블로그 댓글은 그 반대다), 많은 이들이 이 이야기에 공감하고 있다. 내게도 동일한 주장을 담은 이메일이 하루에도 여러 통 날아온다. “게임은 끝났어. 우리는 당신 속을 훤히 알고 있어.”

내가 많은 이들의 공감을 불러일으켰다고 했을 때, 그것은 정말로 많은 수를 의미한다. 씸슨의 변호사들이 설득해야 했던 배심원단은 대다수가 LA도시 중심부 출신 흑인 여성이었고, 그들 중 5명이 본인이나 가족 중 누군가가 경찰과 관련해 “부정적 경험”을 한 적이 있다고 밝혔다. 변호사들에게 이들은 꽤 쉬운 상대였다. 지구온난화 문제에서도 우리는 모두 상당히 넘어가기 쉬운 상대다. 우리는 위기의 핵심물질인 이산화탄소를 배출하는 삶을 살고 있고, 또한 그 삶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유의미한 변화를 정말로 원하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조금만이라도 그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할 여지가 있다면 그 편을 택할 것이다. 특히 돈이 많이 들 것 같다거나 경제가 형편없을 때면 더욱 그러하다. 다음은 『덴버포스트』의 칼럼니스트 데이비드 하르싸니의 이야기다. “만약 한 국가, 혹은 세계에 대해 경제를 근본적으로 바꾸라거나 시민들에게 삶의 양식을 바꿔야 한다고 요구하려면, 그렇게 믿는 자들의 신뢰성과 증거가 난공불락의 것이어야 한다.”

헌신적인 공격자 군단이 열심히 공작중인 상황에서 “난공불락”을 요구하는 것은 목표를 불가능할 정도로까지 높이 설정하는 것일 수 있다. 우리가 지구온난화에 맞서 국가적·국제적 노력을 기울이고자 한다면 과학이 튼튼함을 계속해서 입증해 보일 필요가 있다. 그 일은 이미 시작되고 있다. 회의론자들의 헛소리에 명확하고 설득력있는 답변을 제공하는 새로운 웹싸이트와 아이폰 응용프로그램들이 등장했다. 기이하게도 회의론자들의 노력 자체가 어떤 점에서 이를 입증해주기도 한다. 수천페이지짜리 IPCC보고서를 면밀히 조사한 뒤 겨우 엉터리 인용구 서너개를 건졌다면, 그것은 보고서의 근본적 정확도를 입증하는 매우 강력한 증거다.

그렇지만 정치의 난투극을 피할 요량으로 소독약 바르듯 과학의 권위 뒤에 숨는 것은 분명 잘못이다. 왜냐하면 과학은 무한한 논쟁의 대상일 수 있고 또 사실상 그런 것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과학은 실제로 계속되는 논쟁에 다름 아니며, 누군가 과학이 “확정되었다”고 주장할 때 대다수 사람들이 이를 미심쩍게 여기는 것도 이런 이유이다. 언제는 특정 음식이 몸에 좋다고 하다가 나중에는 그것이 사망 가능성을 높일 뿐이라는 식의 이야기를 여러차례 들어온 사람들이라면 특히 그렇다.

 

 

자료만으로 충분하지 않은 이유

 

나는 일류 자유인문대학인 미들베리대학에서 일하고 있고, 그래서 내 주변에는 끊임없이 논쟁을 벌이는 사람들이 가득하다. 즐거운 일이다. 학부생 두명이 진행하는 교내 라디오 방송국의 주간방송이 지구온난화에 관해 표명하는 입장은 내가 접해본 회의적 견해 중 수준이 높은 편에 속한다. 그들은 회의론자이지 냉소주의자는 아니다. 진지하게 과학을 연구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우리가 알고 있는 것들이 지금으로서는 행동에 나서기에 충분하지만, 미래에는 충분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이내 인정할 것이다. 현재 확신을 품고 이야기할 수 있는 것들도 장차는 논란의 대상이 되기 마련이다. 끊임없는 혁신이 필요한 삶이다. 나는 분명 연구가 무의미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사실 우리가 국제 기후문제 캠페인 350.org에서 지난 2년 동안 해왔던 일은 과거에는 모호했던 기준치, 즉 과학자들이 안전하다고 말하는 100만분의 1 단위로 측정된 대기중 탄소량을 지지하기 위한, 『포린 팔러씨』(Foreign Policy)에 따르면 “역사상 최대 규모의 조직화된 전지구적 행동”을 조직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과학에만 집중하는 것이 잘못인 이유가 또 하나 있다. 우리가 세상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 과학이라면, 정치는 우리가 세상에 대해 느끼는 것이다. 감정이란 적어도 지식만큼 중요하다. 특히 그 감정들이 근거있는 것이라면 말이다. 사람들은 부당한 대접을 받고 있다. 그들은 현재 통제할 수 없는 거대한 힘들에 대해 무력하다. 분노는 정당하다.

그렇다면 그에 대해 어떻게 이야기해야 하는지 생각해보자. 엑슨모빌을 보자. 이곳은 지난 3년간 해마다 그 어떤 회사보다 많은 돈을 벌어들였다. 이 회사는 대기를 공공 하수구 삼아 자기네가 판매하는 화석연료의 필연적 부산물인 이산화탄소를 처리하는 방식으로 사업을 해왔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들이 아무 댓가도 지불하지 않고 이런 짓을 하게 내버려두었다. 우리가 사는 세계를 파괴할지도 모를 일을 하는데 그들은 돈 한푼 내지 않고 있는 것이다.

현재 미국 상원에 ‘배출총량규제 및 수입분배’(cap-and-dividend, 흔히 배출총량규제 환급제로 번역되나, 납세자에게 세금을 돌려주는 것이 아니라 에너지 생산자나 수입자에게서 거둬들인 돈을 국민에게 고루 분배하는 것임-옮긴이)라고 불리는 법안이 상정되어 있는데, 이것은 엑슨에 그 명목으로 비용을 청구하여 매달 나라 안 모든 이들에게 수표를 발송하려는 것이다. 물론 그 회사는 비용을 기름값에 전가하겠지만, 이 법안이 통과되면 미국인들 중 80%(에너지 과소비의 주범인 소득 최상위층을 제외한)는 돈을 벌 것이다. 그것은 레저용 차(SUV)는 그냥 주차시켜놓는 편이 좋다는 신호를 보내는 것이니 과학적으로 올바르고 또 정치적으로도 올바르다.

그런데 뭔가 속임수가 있다고 느낀다면? 당신의 의심은 옳다. 이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에너지기업의 뜻대로 움직이는 정치가들의 선거자금으로 흘러들어간 돈만 추적해보면 된다. 이글루를 만든 인호프는 어떤가? 지난 두번의 선거기간 중 100만달러 이상이 에너지 및 공익설비 회사들과 그 경영진의 주머니에서 나왔다. 앨 고어가 그린에너지로 돈을 벌어들일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정유회사를 운영해 버는 돈을 확인해보라.

누군가가 당신의 미래를 파괴할까봐 걱정인가? 그것도 옳다. 지금 중국은 그린에너지 시장을 지배하기 위해 박차를 가하고 있다. 그들의 투자규모를 보면 장차 풍력발전기와 태양전지판들은, 심지어 미국에 설치될 것조차 시카고가 아닌 천저우(垤州) 공장에서 생산되리라 예상된다.

석탄회사들은 더 많은 이윤을 내기 위해 공정을 자동화했고 양질의 탄광 일자리는 이미 사라졌다. 이제 그들은 정치력을 동원해 그 광부의 아이들이 탄광일을 못하는 대신 풍력발전용 터빈을 만드는 것도 못하게 막고 있다. 모든 이들은 당연히 잔뜩 화가 나 있으며, 물론 그 대상이 기후변화를 주장하는 과학자들만은 아니다.

하지만 공포와 분노가 우리의 유일한 감정이 아니라는 사실도 잊지 말아야 한다. 그것들은 분명 강력한 감정이지만, 우리가 느끼는 전부는 아니다. 그리고 우리의 가장 좋은 모습도 아니다.

우리에겐 사랑도 있다. 그 힘은 지금까지 종종 거대한 변화를 가능하게 했는데, 냉소주의자들에게는 특히 그것을 일깨울 능력이 없다. 이를테면 전세계 가난한 이들을 향한 사랑이 존재한다. 그것이 실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면, 최근에 교회, 특히 미 전역에 있는 복음주의 교회에 가보지 않은 탓이다. 복음을 진심으로 믿는 사람은 배고픈 이를 먹이고 집 없는 이에게 머물 곳을 마련해주라는 신의 명령도 진지하게 받아들인다.

그 목표를 이루는 데 있어 기후변화로 인한 해수면 상승과 사막화가 가장 큰 시험대라는 것이 누가 봐도 분명해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종교적 환경론이 지구온난화 운동 중 가장 효과적 분파로 새로 부상하고 있으며, 지난 10월 교회 수천곳에서 과학자들이 이야기하는 대기중 이산화탄소 안전수치인 350이란 숫자에 맞추어 벨을 울릴 수 있었다. 동방정교회 총대주교이자 4억 동방정교회 신자들의 지도자인 바솔로뮤(Bartholomew)가 다음처럼 이야기하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지구온난화는 죄이고, 350은 구원행위다.”

창조와 자연세계에 대한 깊은 사랑도 있다. 우리는 날 때부터 주변세계와 교감을 나누도록 운명지워져 있다. 대다수 근대적 특징들이 인간을 자연으로부터 격리하게끔 고안되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자연세계가 모습을 드러낼 때면-일몰이나 정원에서 보내는 시간같이-우리는 불현듯 무방비상태로 우리 너머의 것들에 대한 애정을 깨닫는다. 이것이 이를테면 보이스카우트나 걸스카우트 활동이 중요한 이유다. 감수성이 예민한 나이에 숲에 머무는 경험은 매우 강력한 영향력을 미칠 수 있다. 막대그래프나 원그래프와 함께 예술과 음악도 우리 삶의 일부가 되어야 한다. 350.org에서 기후변화에 반대하는 캠페인을 벌일 때는 반드시 우리가 알고 있는 가장 아름다운 장소, 사람들에게 역사와 정체성과 희망을 상기시키는 상징적 장소를 택한다.

기후회의론자들이 상대편을 급진주의자라고 몰아세우는 방식으로 번창해왔다는 점은 매우 아이러니하다. 실제로 지구온난화를 막기 위해 노력하는 이들은 매우 보수적이며 세계를 우리가 발견한 모습 그대로 두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아이들이 우리가 알던 세계를 알게 되기를 희망한다. 미래의 재앙을 완전히 확신할 수 없다는 이유로 대기중 탄소 함유량 기준을 2배로 높이자고 주장하는 것, 그런 것이 바로 급진주의다. 법정에서 유죄판결을 내리기 전에 우리는 모든 의혹을 없애고자 한다. 왜냐하면 죄 없는 사람이 감옥에 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법정 밖에서는 좀더 보수적으로 행동해야 한다.

결국 기후변화를 부인하는 이들은 패배할 것이며,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것이다(O.J. 씸슨조차 결국 감옥에 가지 않았는가). 그렇지만 그들의 패배는 우리 모두의 패배를 의미한다. 그들은 행동을 지연시켜 우리가 아직 시간이 있을 때 필요한 조처를 취하는 것을 막을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늦기 전에 진정한 변화를 만들어내고자 한다면, 그들의 회의적 태도가 문제의 핵심이 아님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 회의주의는 다만 우리의 저 깊은 곳에 자리한 변화에 대한 저항감을 이용하고 있을 뿐이다. 저항감이야말로 기후회의주의자들에게 활동의 공간을 제공해준다. 우리가 넘어서야 하는 장애물은 바로 이것이며, 이는 기본적으로 자료를 둘러싼 싸움일 뿐 아니라 용기와 희망에 대한 싸움이다.

번역│김영아·한성대 언어교육원 교수

빌 매키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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