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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단과 현장 | 성명
‘한국병합’ 100년에 즈음한 한일 지식인 공동성명
- 이 글은 2010년 5월 10일 한국의 서울과 일본의 토오꾜오에서 ‘한국병합’ 100년에 즈음해 발표된 한일 지식인 성명 전문이다. 일본의 한국병합은 ‘불의부정한 행위’였으며 ‘1910년 8월 22일의 병합조약의 전문도 거짓이고 본문도 거짓’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는 이 성명에는 한일 양국의 지식인 214인(한국 109인, 일본 105인)이 참여했다. 특히 주목할 점은 그간 일본정부의 입장이 병합조약 등은 ‘대등한 입장에서 또 자유의지로 맺어졌던’ 것으로 유효했지만 1948년 대한민국 성립으로 무효가 됐다는 것인 데 반해, 이번 성명에서는 일본 지식인들이 병합조약 등은 원래 불의부당한 것이었으며 당초부터 원천 무효였다는 한국 측 해석이 공통된 견해로 받아들여져야 함을 천명한 점이다-편집자.
1910년 8월 29일, 일본제국은 대한제국을 이 지상에서 말살하여 한반도를 일본의 영토에 병합할 것을 선언하였다. 그로부터 100년이 되는 2010년을 맞이하여 우리들은 그 병합이 어떻게 이루어졌던가, ‘한국병합조약’을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하여 한국, 일본 양국의 정부와 국민이 공감하는 인식을 확인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 문제야말로 두 민족 간의 역사문제의 핵심이며, 서로의 화해와 협력을 위한 기본이다.
그간 두 나라의 역사학자들은 일본에 의한 ‘한국병합’이 일본정부의 장기적인 침략정책, 일본군의 거듭된 점령 행위, 명성왕후 살해와 국왕과 정부요인에 대한 협박, 그리고 이에 대한 한국인들의 항거를 짓누르면서 실현시킨 결과란 것을 명백히 밝히었다.
근대 일본국가는 1875년 강화도에 군함을 보내 포대를 공격, 점령하는 군사작전을 벌였다. 이듬해 일본 측은 특사를 파견, 불평등조약을 강요하고 개항시켰다. 1894년 조선에 대규모의 농민봉기가 일어나 청국 군이 출병하자 일본은 대군을 파견하여 서울을 장악하였다. 그리고 왕궁을 점령하여 국왕, 왕후를 가두고 이어 청국 군을 공격하여 청일전쟁을 일으켰다. 한편으로 이에 대항하는 한국의 농민군을 무력으로 진압하였다. 청일전쟁의 승리로 일본은 청국세력을 한국에서 몰아내는 데 성공하였지만 삼국간섭(三國干涉)으로 승전의 대가로 획득한 요동반도를 되돌려놓게 되었다. 이런 결과에 부딪혀, 일본은 그간 한국에서 확보한 지위마저 잃게 될 것을 우려하여 국왕에게 공포감을 주고자 왕비 민씨를 살해하였다. 국왕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에 보호를 구하게 되자 일본은 러시아와 협상을 통해 사태를 수습하려 들게 되었다.
그러나 의화단(義和團) 사건으로 러시아가 만주를 점령하게 된 후, 1903년에 일본은 그 대신 한국 전토를 일본의 보호국으로 하는 것을 인정할 것을 러시아에 요구하였다. 러시아가 이를 거절하자, 일본은 전쟁을 결심하고 1904년 전시(戰時) 중립을 선언한 대한제국에 대규모의 군대를 진입시켜 서울을 점령하였다. 그 점령군의 압력하에 2월 23일 한국 보호국화의 제1보가 된 ‘의정서’의 조인을 강요하였다. 러일전쟁은 일본의 우세승으로 결말이 나고, 일본은 포츠머스 강화조약에서 러시아로 하여금 한국에 대한 일본의 지배를 인정하게 하였다.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는 곧바로 천황의 특사로 서울로 와서 일본군의 힘을 배경으로 위협과 회유를 번갈아 1905년 11월 18일에 외교권을 박탈하는 ‘제2차 한일협약’을 체결시켰다. 의병운동이 각지에서 일어나는 가운데 고종황제(高宗皇帝)는 이 협약은 강제된 것으로 효력이 없다는 친서를 각국 원수(元首)들에게 보내었다. 1907년 헤이그 평화회의에 특사를 보낸 일로, 통감 이토 히로부미는 이에 대한 고종황제의 책임을 물어 그의 퇴위를 강요하고 군대를 해산시켰다. 이와 동시에 7월 24일에 ‘제3차 한일협정’을 강요하여 한국의 내정에 대한 감독권도 장악하였다. 이러한 일본의 침략에 대하여 의병운동이 크게 일어났지만, 일본은 군대, 헌병, 경찰의 힘으로 탄압하다가 1910년에 ‘한국병합’을 단행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상과 같이 ‘한국병합’은 대한제국의 황제로부터 민중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의 격렬한 항의를 군대의 힘으로 짓누르고 실현시킨, 문자 그대로 제국주의 행위이며, 불의부정(不義不正)한 행위였다.
일본국가의 ‘한국병합’ 선언은 1910년 8월 22일의 병합조약에 근거하여 설명되고 있다. 이 조약의 전문(前文)에는 일본과 한국의 황제가 두 나라의 친밀한 관계를 바라고, 상호의 행복과 동양 평화의 영구 확보를 위해서는 “한국을 일본제국에 병합하는 것만한 것이 없다”고 하여 병합이 최선이라고 확신하고, 본 조약을 체결하기에 이르렀다고 서술되어 있다. 그리고 제1조에 “한국 황제 폐하는 한국 전부(全部)에 관한 일체의 통치권을 완전하고 또 영구히 일본국 황제 폐하에게 양여(讓與)한다”고 기술하고, 제2조에 “일본국 황제 폐하는 전조(前條)에 서술되어 있는 양여를 수락하고 또 전적으로 한국을 일본제국에 병합하는 일을 승낙한다”고 적고 있다.
여기서 힘으로 민족의 의지를 짓밟은 병합의 역사적 진실은, 평등한 양자의 자발적 합의로, 한국 황제가 일본에 국권 양여를 신청하여 일본 천황이 그것을 받아들여, ‘한국병합’에 동의했다고 하는 신화로 덮어 숨기고 있다. 조약의 전문(前文)도 거짓이고 본문도 거짓이다. 조약 체결의 절차와 형식에도 중대한 결점과 결함이 보이고 있다.
‘한국병합’에 이른 과정이 불의부당하듯이 ‘한국병합조약’도 불의부당하다.
일본제국이 침략전쟁 끝에 패망함으로써 한국은 1945년에 일본의 식민지 지배로부터 벗어났다. 해방된 한반도의 남쪽에 수립된 대한민국과 일본은 1965년에 국교를 수립했다. 이 때 체결된 양국 관계의 ‘기본에 관한 조약’(기본조약으로 약칭) 제2조에 1910년 8월 22일 및 그 이전에 체결된 모든 조약 및 협정은 이미 원천 무효(already null and void)라고 선언되었다. 그러나 이 조항의 해석이 한, 일 양국 정부 간에 서로 달랐다.
일본정부는 병합조약 등은 ‘대등한 입장에서 또 자유의지로 맺어졌다’는 것으로 체결시부터 효력을 발생하여 유효였지만, 1948년의 대한민국 성립으로 무효가 되었다고 해석하였다. 이에 대해 한국정부는 ‘과거 일본의 침략주의의 소산’이었던 불의부당한 조약은 당초부터 불법 무효라고 해석하였던 것이다.
병합의 역사에 관해 지금까지 밝혀진 사실과 왜곡 없는 인식에 입각하여 뒤돌아보면 이제는 일본 측의 해석을 유지할 수 없게 되었다. 병합조약 등은 원래 불의부당한 것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당초부터 null and void였다고 하는 한국 측의 해석이 공통된 견해로 받아들여져야 할 것이다.
현재에 이르기까지 일본에서도 완만하나마 식민지 지배에 관한 인식은 전진해왔다. 새로운 인식은 1990년대에 들어서 고노(河野) 관방장관 담화(1993), 무라야마(村山) 총리 담화(1995), 한일공동선언(1998), 조일(朝日) 평양선언(2002) 등으로 나타났다. 특히 1995년 8월 15일 무라야마 총리 담화에서 일본정부는 ‘식민지 지배’가 초래한 ‘막대한 손해와 고통’에 대해 ‘통절한 반성의 뜻’과 ‘마음속으로부터의 사과’를 표명하였다.
또한 무라야마 수상은 1995년 10월 13일 중의원 예산위원회에서 ‘한국병합조약’에 관해 “쌍방의 입장이 평등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라고 답변하고 노사카(野坂) 관방장관도 같은 날 기자회견에서 “한일병합조약은 (…) 극히 강제적인 것이었다”고 인정하였다. 무라야마 수상은 11월 14일, 김영삼(金泳三) 대통령에게 보낸 친서에서 병합조약과 이에 앞선 한일간의 협약들에 대하여 “민족의 자결과 존엄을 인정하지 않은 제국주의 시대의 조약이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강조하였다.
여기서 마련된 토대가, 그후에 여러가지의 시련과 검증을 거치면서, 지금 일본정부가 공식적으로 병합과 병합조약에 대해 판단을 내리고 ‘기본조약’ 제2조의 해석을 수정하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미국의회도 하와이 병합의 전제가 된 하와이 왕국 전복의 행위를 100년째에 해당하는 1993년에 ‘불법한(illegal) 행위’였다고 인정하고 사죄하는 결의를 채택하였다. 근년에 ‘인도(人道)에 반하는 죄’와 ‘식민지 범죄’에 관하여 국제법 학계에서 다양한 노력이 기울여지고 있다. 이제 일본에서도 새로운 정의감의 바람을 받아들여 침략과 병합, 식민지 지배의 역사를 근본적으로 반성하는 시대가 오고 있는 것이다.
‘한국병합’ 100년을 맞아 우리는 이러한 공통의 역사인식을 가진다. 이 공통의 역사인식에 입각하여, 한국과 일본 사이에 놓여 있는, 역사에서 유래하는 많은 문제들을 바루어 공동의 노력으로 풀어나갈 수 있을 것이다. 화해를 위해 필요한 과정이 한층 더 자각적으로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
공통의 역사인식을 더 튼튼히 하기 위해서는 과거 100년 이상에 걸친 일본과 한반도의 역사적 관계에 관한 자료는 숨김없이 공개되어야 한다. 특히 식민지 지배의 시기에 기록문서 작성을 독점한 일본정부 당국은 역사자료를 적극적으로 모아서 공개할 의무가 있다.
죄는 용서를 빌지 않으면 안되고, 용서는 베풀어져야 한다. 고통은 치유되어야 하고, 손해는 갚지 않으면 안된다. 관동대지진 중에 일어난 한국인 주민의 대량 살해를 비롯한 모든 무도한 행위는 다시 살펴보지 않으면 안된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아직도 해결되었다고는 말할 수 없는 상태이다. 한국정부가 조처를 취하기 시작한 강제동원 노동자, 군인 및 군속에 대한 위로와 의료지원 조치에, 일본 정부와 기업, 국민은 적극적인 노력으로 대응하기 바란다.
대립하는 문제는 과거를 성찰하고 미래를 응시하면서, 뒤로 미루지 말고 해결해나가야만 한다. 한반도의 북쪽에 있는 또 하나의 나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일본의 국교 정상화도 이 병합 100년이라는 해에 진전되어야 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한국과 일본 사이에 진정한 화해와 우호에 기초한 새로운 100년을 열어갈 수 있을 것이다. 우리들은, 이 취지를 한국, 일본 양국의 정부와 국민에게 널리 알리고, 이를 엄숙히 받아들여주기를 호소한다.
2010년 5월 10일
한국(109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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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105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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