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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김경인
1972년 서울 출생. 2001년 문예중앙 신인문학상으로 등단. lemonand@empal.com
구름 속으로
천천히 사라지고 있군
나는 조금 가벼워진다고 생각해
미끈거리는 꼬리를 싹둑 잘라내고
뒤죽박죽 흩어져볼까
지독한 냄새를 흘리며
나무는 이파리에 숨어 초록을 견디는데
나는 여전히 초록이 두렵고
그건 당신도 마찬가지
복면을 뒤집어쓴 새는 지겹지도 않나봐
오래전 목소리를 흉내낸다네
또 무엇을 고백하려고
(앵무새야, 불룩한 주머니를 뒤지지 말아다오
성대가 잘리기 전에, 어서!)
내가 모르는 곳에서 당신은 자꾸 태어나지
그림자놀이 따윈 다 끝장난 줄 모르고
고백했다고 아무것도 아닌 건 아니야
새끼를 가득 품은 눈먼 주머니쥐처럼
그물 속 새는 변성(變聲)을 거듭하며 새 이야기를 낳고
열개의 손가락은 각기 다른 방향으로 지워진다네
나는 냄새를 풍기며 부드럽게 스며들지
가장 낯선 얼굴 속으로
밖의 사람들
이곳의 시계는 자주 멈춘다. P는 오늘밤 또 칼을 들었다. 내 말 좀 들어봐. 나를 쫓아다니며 잔소리를 늘어놓는, 사지가 다 잘린 저 인형들. 꼭 엄마를 닮았지 뭔가. 시체가 될 지경이라구. P가 송곳니처럼 박혀 으르렁거린다.
K는 이빨을 딱딱 부딪친다. 큭큭, 호러쇼는 한물갔다니까. 상상력 좀 키워보게. 이곳은 온통 썩은 물속이로군. 제법 마음에 들어. 이제 모든 게 진력이 나. 손목을 자르고 붙이고 하는 일 따위…… 나는 여기서 영원히 헤엄치겠어.
아, 불쌍한 사람. 하지만 절대 문을 열어주지 않겠어요. L은 아름다운 그림자 정원의 소유자. 이봐요, 나는 나의 정원을 가꾸다 그곳에서 죽겠어요. 나는 그림자에 흠뻑 홀려 있는걸요.
C는 반쯤 열린 문과 반만 닫힌 문 사이에 끼어서 얼굴을 뜯는다. 나는 자꾸 작아지는데 내 몸은 왜 이리 커지는 걸까. 모두 나를 싫어한다는 걸 알아. 왜일까 왜일까. 나는 나로부터 얼마나 멀어진 걸까.
우리는 각자의 소문을 거쳐 여기에 왔다. P가 칼을 내리고 비명을 지를 때 우리는 서로의 일부가 되지 않기 위해 침묵 속으로 귀를 던진다. 여기로 흘러든 사람들은 완벽한 정적 속에서 잠시 멈춘다. 문설주에 피를 바르고 서둘러 꿈 밖으로 뛰어나오는 사람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고요해진 문밖에 우리는 모여 있고 우리는 뿔뿔이 흩어진다. 사라지지 않는 소문처럼, 누군가의 지붕을 내리칠 폭우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