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창작과비평

정기구독 회원 전용 콘텐츠

『창작과비평』을 정기구독하시면 모든 글의 전문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구독 중이신 회원은 로그인 후 이용 가능합니다.

논단과 현장 | 연속기획 ・ 한국사 100년 다시 보기 ③

 

6·15공동선언 10년 읽기

체제인정의 고단한 길을 넘어

 

 

정현곤 鄭鉉坤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 정책연구위원. 주요 논문으로 남북사회문화교류 발전을 위한 방안 「남북교류 거버넌스의 실태 분석 및 평가」 등이 있음. jhkpeace@empas.com

 
 

6·15공동선언이 발표된 지 10년이다. 6·15는 오늘의 ‘천안함 현상’을 맞는 지경에 이르렀지만, 북한체제를 결코 인정하지 못하는 이러한 반발기류가 낯선 것은 아니다. 북한체제 인정에 대한 강한 반감이라는 측면에서 보자면, 10년 된 6·15는 많은 고비를 넘어왔다. 난관이 많았던 체제인정의 고단한 길, 10년을 겪어온 6·15의 현재상이다.

 

 

2000년의 6·15, ‘과정으로서의 통일’로

 

6·15공동선언의 의미는 무엇일까? 일례로 우리는 그 선언의 생생한 결실인 개성공단을 생각해볼 수 있다. 군사분계선을 넘나드는 남북의 통로이자 남과 북 주민들의 공동생산공간인 개성은, 200만명 가까이 다녀간 금강산관광에서 또 70만명 이상이 오고간 남북교류의 여러 현장에서 느낄 수 있었던 변화된 남북관계 중에서도 두드러진 표징이다.1 이렇듯 6·15공동선언은 일상화된 교류현상을 의미한다. 분단으로 막혀버린 길이 열리고, 전쟁의 상흔에 얹혀 무턱대고 계속되기만 했던 적대적 남북관계 흐름이 뒤집혀, 화해·협력정책으로 나아간 역사적 전환이다.

여기서 일상화된 교류의 의미는 무엇인가? 이 문제의 해답을 찾기 위해서는 6·15공동선언 독해가 필요하다. 6·15공동선언은 ‘과정으로서의 통일’ 또는 ‘사실상의 통일’이라는 새로운 발상을 담고 있다. 이 발상은 통일을 완성된 형태라는 목표에만 두는 것이 아니라 과정에도 두고, 그 과정 자체를 통일이라고 인식하자는 점이 특징이다. 따라서 완성된 통일 형태는 아니지만 ‘사실상의 통일’이 가능해진다. 여기서 ‘사실상의 통일’은 화해와 협력 단계에서 실현될 수 있다고 설명된다.2 단일형 국민국가로서의 완전한 통일만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통합작업의 적절한 수준을 통일이라 이해하는 발상의 전환이다.3

물론 이 발상이 새롭다는 것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대표적인 경우가 이 선언을 일종의 기능주의 혹은 자유주의 패턴으로 이해하는 경향이다. 사회·문화·경제 등의 교류협력을 통해 정치와 군사 통합도 가능할 수 있다는 식의 이해에 대해, 반론은 곧바로 나타났다. 우선, 체제가 다른 두 나라가 이런 식으로 통일을 이루어본 적이 없다는 지적이 있다. 체제가 다른 두 공동체가 합쳐지는 과정이 실제로 단계적, 점진적, 그리고 평화적이라 할지라도 궁극적으로는 명백히 한쪽이 다른 한쪽을 흡수하는 모양으로 될 것이라는 주장이다. 또한, ‘수령제 독재체제’를 유지하고 있는 북한이 이러한 점진적 교류를 통해 자신들의 생각을 바꾸면서 개혁·개방에 나서기를 기대하는 것은 어렵다는 반론도 있다. 이런 이해들은 흡수통일이 불가피하다는 생각에 닿아 있다. 그러나 이들 논의에는 인식의 공백이 있다. 단계적이고 점진적인 시간의 흐름 속에서 형성될 정체성을 놓치는 것이다. 정체성이 인식의 틀에서 배제되는 것은, 그것이 미래의 문제임에도 현재적 사고에서만 규정하려 들기 때문이다.

 

 

6·15공동선언 2항과 ‘흡수통일 배제’라는 공약

 

6·15공동선언을 작성하는 과정에서 2항은 바로 이 정체성 문제를 다룬다. 인식은 초기단계였고, 그것은 당시의 논의가 입구에 있었기 때문이다. 남북의 두 정상도 미래형 인식의 공백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그러나 어쩌면 북은 이 문제를 더 현실적으로 느꼈을 수도 있다. 김대중 대통령이 10년, 20년을 상상했을 때, 김정일 위원장은 오히려 40년, 50년을 상상했을지도 모른다.

6·15공동선언 2항의 논의를 미래 정체성 논의의 첫단계로 볼 때, 먼저 통일과정에 대한 상호간의 이해가 필요했다. 그것이 ‘남북연합’ 혹은 ‘낮은 단계의 연방제’로 표현되었고 논의는 비교적 쉽게 타결되었다. ‘남북연합’이나 ‘낮은 단계의 연방제’는 단지 표현상의 차이이며, 단계적이고 점진적이면서도 평화적인 통일을 이루기 위해서는 그같은 중간단계를 두는 것이 필요하다는 점에 인식의 공유가 이루어졌다. 합의문 2항은 “남과 북은 나라의 통일을 위한 남측의 연합제 안과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 안이 서로 공통성이 있다고 인정하고 앞으로 이 방향에서 통일을 지향시켜 나가기로 하였다”로 정리되었다.

그런데 여기서 남북간의 전면적인 교류를 위해서는 ‘남쪽에 의한 흡수통일 배제’라는 추가적인 공약이 필요했다. 남북연합으로 합의가 되었다고 해서 흡수통일이 저절로 배제되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실제 남측의 남북연합은 흡수통일을 배제하지 않고 있었다. 노태우정부의 ‘한민족공동체통일방안’이나 김영삼정부의 ‘민족공동체통일방안’은 말할 것도 없고 김대중 대통령 자신의 ‘공화국연합제’4에서조차 남북연합은 완전통일로 가는 과도적 통일체제를 상정한 것이고, 완전통일은 대개 남쪽의 질서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런 점에서 흡수통일 배제의 문제는 오직 정부주체의 구체적 정책과 의지 표명을 통해 약속되는 것이다. 북으로서는 김대중 대통령의 대북정책 3원칙에서 표명된 ‘흡수통일 배제’에서 그러한 의지를 읽었다고 할 수 있다.

 

 

통일의 중간단계, 북이 더 고려했다

 

2000년 회담 당시 김정일 위원장은 ‘낮은 단계의 연방제’에 대해 상당히 집요했다고 알려졌다. 당시 회담에서 김위원장은 먼저 “연방제 통일을 지향하되 일단 낮은 단계의 연방제부터 하자는 데 합의”하자고 적극 나섰고, 나아가 “대통령께서 말씀하시는 ‘연합제’가 바로 제가 말하는 ‘낮은 단계의 연방제’와 같은 것”이라는 논리를 폈다고 한다.5 연합과 연방에 대한 두 정상의 토론은, 임동원(林東源) 당시 국정원장까지 가세하여 두 제도의 차이를 인식하는 데까지 나아간다.6 김정일 위원장은 이 대목에서 ‘연방제’로 즉각 통일하는 것은 냉전시대에나 하던 얘기로, 완전통일까지는 40년, 50년 걸린다면서 자신이 말하는 ‘낮은 단계의 연방제’가 ‘남북연합’과 같은 것임을 거듭 확인했다. 이 토론은 이미 알려진 대로 두 제도 사이에 공통성이 있고 그 방향에서 통일을 지향한다는 수준에서 정리되었다.

김정일 위원장은 왜 이렇게 ‘낮은 단계의 연방제’ 명칭에 미련을 버리지 못했으며, 또 ‘남북연합’까지를 포함하여 연방과 연합이라는 두 제도의 공통성에 집착했던 것일까? 일단 ‘낮은 단계의 연방제’라는 표현을 고수한 데 대해서는 짐작되는 이유가 있다. 남북연합이 분단을 고착시키는 방안일 수 있다는 판단하에, 북의 ‘하나의 조선’ 정책을 어떤 식으로건 표현하고자 했다는 측면이다.7 ‘연방제’가 김일성 주석의 유훈이라는 점에서도 그렇고 또 통일문제에서만큼은 북이 더 정통하다는 인식을 심어줄 수도, 통일지향성이 더 분명히 표현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더 중요한 것은 그러한 표현을 양보하고서라도 공동선언 2항을 합의하고자 한 점이다.

당시 김정일 위원장은 연합제와 연방제에 대해 토론하고 합의한 이후, 휴식을 마치고 재개된 회담에서 이 문제를 다시 꺼냈다. 2항의 합의가 야당으로 정부가 바뀌는 경우에도 지켜지겠느냐는 것이 그의 질문이었고, 뒤이어 미국 문제를 언급했다. 김정일 위원장은 “제가 대통령께 비밀사항을 정식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미군주둔 문제입니다만”이라고 하면서 꺼낸 얘기는 북이 이미 1992년 초에 미국에 사람을 보내 주한미군 주둔을 용인한다고 전했다는 내용이었다.8

이런 대화의 맥락에서 우리는 북이 남과의 전면적 교류에 앞서 확실한 체제보장 장치를 두고 싶어했고, 그것이 2항의 논의에 강하게 작용했다고 짐작해볼 수 있다. 여기서 야당 혹은 미국이란 북에게 일종의 장벽을 의미했다. 그러니까 ‘남북연합’이건 ‘낮은 단계의 연방제’이건 상당기간의 중간단계를 설정해두는 것이 2항의 의미라면, 이 문제는 체제열세에 있던 북에서 더 필요한 조치였던 셈이다.

6·15공동선언은 이러한 2항의 합의에 기초하여 3항의 인도주의, 4항의 경제교류와 사회문화교류, 그리고 5항의 당국자 회담을 향해 나아갔다고 할 수 있다.

6·15를 놓고 그것이 일상화된 교류현상이라 칭할 때, 서로 다른 체제 사이에서 벌어지는 이 교류의 공간에는 체제위협적 요소가 늘 작용하기 마련이다. 따라서 이 과정을 장기간의 중간단계로 설계하고 매우 의식적인 운영원리에 입각하여 작동시킬 필요가 있다. 그것이 ‘남북연합’ 또는 ‘낮은 단계의 연방제’가 갖는 공통성의 의미였으며, 이 단계를 운영하는 원리가 바로 체제인정이었던 것이다.

 

 

2000년의 선택과 상호요구의 대칭성

 

체제인정의 실체 분석을 위해 ‘2000년의 선택’이라는 개념을 만들어 사용하고자 한다. 여기서 ‘결정’이 아니라 ‘선택’이라 표현하는 것은, 거기에 조건을 포함하는 의미를 담기 위해서다. ‘2000년의 선택’에는 6·15공동선언만이 아니라 그해 1012일에 발표된 북미 공동코뮈니케까지 포함한다.

북미관계는 공동코뮈니케에 잘 담겨 있다. 이 만남에서 양자는 “첫 중대조치로서 그 어느 정부도 타방에 대하여 적대적 의사를 가지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하고 앞으로 과거의 적대감에서 벗어난 새로운 관계를 수립하기 위하여 모든 노력을 다할 것이라는 공약을 확언”한다.9 여기서 북미관계의 근본적인 변화를 이끄는 요소는 크게 두가지다. 하나는 핵활동과 미사일 발사실험 동결에 대한 북의 약속이다. 우선 제네바합의 이후 미국이 북의 추가 핵활동 의혹을 제기하며 지목한 금창리 시설은 19995월의 현장방문으로 그 혐의를 벗었다. 북이 1998831일에 발사한 장거리 미사일의 경우도 이듬해 9월에 가서 ‘협상 진행 속에서의 동결과 대북지원’으로 해소되었다. 공동코뮈니케가 “미사일 문제의 해결이 조미관계에 근본적인 개선”10을 이룬다고 적시한 점에 비추어 이 문제의 중요성이 짐작된다. 당시 미국이 윌리엄 페리(William Perry) 전 국방장관을 대북정책조정관으로 하는 태스크포스를 구성하면서 내놓은 접근법은 북미간 상호위협 감소를 위한 포괄적 대화였다. 미국은 북이 경제제재 해제를 원하고 있으며, 미국의 핵능력이 자신을 향할지 모른다는 북의 위협인식을 인정하게 된 것이다.11 다른 하나가 남북정상회담의 성사다. 공동코뮈니케에서 두 나라는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에 의하여 한반도의 환경이 변화되었다는 것을 인정”했고 이로써 “두 나라 사이의 쌍무관계를 근본적으로 개선하는 조치들을 취하기로 결정”12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북미 양자의 공약은 이러한 두가지 전제를 기초로 인도주의 실천, 경제교류, 반테러 동참 등 협력 요소들을 담게 된다.

여기서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첫째로 북미간 상호위협이 존재하며 이러한 위협의 실질적 억제만이 양국의 관계정상화로 가는 통로라는 점이다. 둘째로 남북정상회담이 미국에 던졌던 의미는, 북의 위협능력 억제 공약이 신뢰를 갖게 하는 장치가 바로 남북관계라는 점이다. 결국 ‘상호위협 억제’가 핵심적인 내용임을 알 수 있다.

6·15공동선언은 앞에서 언급한 대로 북에 대한 체제보장에 기초한 전면적 교류이다. 김대중 대통령이 정상회담을 마치고 돌아오면서 “한반도에 이제 전쟁은 없다”고 언급했고, 평화를 표현한 이 상징적인 말 속에서 정상회담에서 얻은 남쪽의 결실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그런 점에서 6·15공동선언은 북에 대한 체제인정과 남에 대한 위협 감소를 상호 요구로 담았음을 알 수 있다.

 

 

체제를 인정받기 위한 북의 행동은 적절한가

 

체제인정에 대한 북의 집요한 노력은 북미관계 혹은 남북관계에서 자주 나타난 대결과 단절의 현장에서 찾아볼 수 있다. 가장 두드러진 사건은 200210월 북의 고농축 우라늄 활동 공방이 제네바합의를 파기시키고 북의 핵개발을 부추겼던 일일 것이다. 당시 부시 행정부는 대북 중유제공을 금지하고 경수로 건설도 중단했다. 북은 빠른 속도로 핵무기를 개발해갔고 2005210일에 핵무기 보유를 선언했다. 이것은 ‘상호위협 감소’ 약속을 미국이 먼저 깨고, 이에 따라 북이 위협능력 증대로 대응해간 결과이다.

체제 문제를 핵무기 개발로 맞선 북한의 입장에 대한 대응은 2005221일을 전후해서 표명되는데, 이때 한국정부는 북에 대한 비료지원을 확인하면서 핵무기와 인도지원은 별개라는 입장을 내놓게 된다. 이 일은 우리 정부의 6·15 운영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왜냐하면 당시의 북의 핵무기 보유가 미국의 체제위협에 대한 응수로 인정될 수 있다는 의미를 담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20041113일에 노무현 대통령이 미국 로스앤절러스에서 열렸던 국제문제협의회 주최 오찬 연설에서 말한 내용과 맥을 같이한다. 당시 연설에서 노무현 대통령은 “북한은 핵과 미사일을 외부 위협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한 억제수단이라고 주장하고 있는데, 적어도 이 문제에 관해서는 여러 상황에 비추어 일리있는 측면이 있다”13고 한 것이다. 당시 참여정부로서는 미국이 먼저 상호위협 감소 공약을 취소한 것이 북의 핵무기 개발을 초래했던 만큼 이를 복원시켜냄으로써 핵무기 문제도 해결할 수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이러한 인식틀에서 정동영(鄭東泳) 특사는 김정일 위원장을 만났고, 남북관계 재개는 물론이고 핵문제 해결을 위한 6자회담 재개를 끌어냈다. 그리고 919일의 46자회담 공동성명을 통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모든 핵무기와 현존하는 핵계획을 포기할 것”을 공약하고, “미합중국은 한반도에 핵무기를 갖고 있지 않으며, 핵무기 또는 재래식 무기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공격 또는 침공할 의사가 없다는 것을 확인”14해냈던 것이다.

한편, 북이 느끼는 체제위협의 수준은 빈번한 남북관계의 단절현상에서도 잘 드러난다. 2001년에 부시 대통령이 김대중 대통령과의 정상회담(38일)을 전후해 김정일 위원장을 “독재자” “버릇없는 아이”(spoiled child)로 지칭한 것에 북이 반발하여, 313일로 예정된 남북장관급회담에 일방적으로 불참하고 남북당국간 관계를 1년 이상 중단시킨 일이 있었다. 당시 북의 명분은 김대중 대통령이 부시 대통령을 설득하지 못했다는 것이었는데, 지나친 반응이라 할 것이다. 또한 20026월의 서해교전은 북의 기습적인 선제공격이 우리 장병 6명의 목숨을 앗아간 사건으로, 위협 감소에 대한 약속을 북이 먼저 위반한 경우였다. 북은 이 사건이 우발적이었음을 알려옴과 동시에 유감을 표명했다. 다행스런 점은 이 사건의 수습 후, 북이 민간 차원의 8·15서울대회에 북 대표단 110명을 참석시키는 것을 시작으로 5차 이산가족 상봉(913일), 남북철도·도로 연결공사 착공식(918일), 부산아시안경기대회 북 선수단 참가(919일), 북 경제고찰단의 방한(1026일) 등 남북교류에 적극 응해온 점이다. 한편 참여정부가 출범하면서 대북송금 특검을 결정한 점은 당시 북의 핵무기 문제로 여론이 악화된 측면을 감안하더라도 과민대응으로 보인다. 이로 인해 남북관계 발전의 기대감이 많이 냉각되었다. 2004717일에는 베트남에서 체류중이던 468여명의 탈북자를 우리 정부가 데려온 일이 있었는데, 북은 83일로 예정된 남북장관급회담 불참을 시작으로 이듬해 5월까지 당국간 회담을 거부했다. 북은 이 사건에 대해 우리 정부가 체제인정 약속을 어긴 것으로 이해했던 것이다.

20067월에 북은 장거리 미사일을 발사하고 그해 10월에 핵실험을 감행한다. 이 충격적인 사건은 북한이 느끼는 체제위협의 정도가 얼마나 심각한지를 새롭게 부각시켰다. 문제가 된 것은 미국의 금융제재였다. 당시 미국 재무성은 북한 돈 2500만달러가 예치된 방코델타아시아(BDA) 은행을 돈세탁 우려 기관으로 지목하는 방식으로 북한의 국제 금융관계망을 차단했고, 북은 이를 체제붕괴 시도로 보고 미사일과 핵카드를 전면화시켰던 것이다. 여기서 문제는 미국의 대북 금융제재가 체제붕괴 전략의 일환이냐는 점이다. 이 제재조처가 2002년 초기부터 북한을 겨냥했다는 점, 구체적 물증을 제시하지 못했음에도 북의 혐의를 기정사실화했다는 점 등에 비추어 공격적이라는 점이 인정된다.15 게다가 미국이 북과의 협상에 나서 2·13합의16를 도출하면서 북의 자금을 미국 연방준비은행을 매개하여 돌려주었다는 점에서 북한의 주장에 좀더 힘이 실리는 것도 분명하다. 이 사건은 군사적 제재와 그에 대응하는 군사적 행동의 대칭성을 벗어나 경제제재에 군사적 행동을 감행한 첫 사례로, 이후 북한의 행동패턴을 예고한 것이기도 하다.

200710월에 2차 남북정상회담이 열렸다. 남북관계는 새로운 도약단계를 선언했고, ‘금융제재와 체제인정’의 대립에서 핵실험까지 초래한 문제도 수습되었다. 군사제재는 물론이고 경제제재까지 포함한 일체의 제재행위가 체제붕괴 시도라는 북의 인식은 위험수위를 오르내린다. 그러나 ‘핵활동’이 아니라 ‘핵무기’라 할지라도, 포기 공약이 지켜지는 이상 2000년의 선택은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17

 

 

북의 2차 핵실험과 새로운 도전

 

북이 2009년에 보인 일련의 행동은 과거와는 또다른 흐름을 보여주었다. 20094월의 인공위성 시험발사와 5월의 2차 핵실험을 두고 하는 말이다. 인공위성 발사와 2차 핵실험은 일련의 연속선상에서 이해될 수 있다. 인공위성이 발사되고 UN의 대북제재가 있자, 2차 핵실험이 감행되었기 때문이다. ‘UN의 대북제재-핵실험’의 연결은 2006년에 북이 보인 패턴의 연장으로, 위험수위이긴 마찬가지다. 여기서 논리적인 문제는 그에 앞선 ‘인공위성 발사-UN의 대북제재’의 고리에서 발생한다. 북은 이 문제를 우주의 자유로운 이용권으로 정당화한다. 여기서 인공위성이냐 미사일이냐 하는 과학적 정의의 문제는, 사실 북미관계에서 본질은 아니다. 장거리 투발(投發) 능력이라는 점에서 그 문제는, 상호위협을 다루는 정치의 문제다. 1998년에 북이 발사한 물체에 대해 북은 ‘광명성 1호’라는 인공위성으로 명명했지만, 북미간 협의과정에서 장거리 미사일 위협이라는 정치의제로 정리된 것이 이러한 의미를 잘 보여준다. 그러므로 인공위성이 발사되던 그 시기에 미국이 북을 위협했는가가 판단의 지표가 된다. 당시 오바마 행정부의 대북정책은 여전히 결정되지 않았지만, 협상이 주 기조가 될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다고 본다면, 위협이 존재했다고 판단하기는 어렵다. 결국 북의 선제행동이자, 북미관계 협상룰을 벗어던진 행위인 셈이다.

2009년의 이 현상은 과정상의 역전이라 할 만하다. 과거에는 미국이 압박하면 북이 핵과 미사일을 무기로 삼고 다시 협상을 하는 식이었던 데 비해 이번에는 북이 먼저 일을 벌이고 미국이 협상에 나서는 국면이 되었다.

북은 왜 이런 행동패턴의 변화를 보인 것일까? 핵무기 실험의 경험과 보유하고 있는 핵물질의 실체가 이런 행동에 적극적인 동기를 부여했다고도 할 수 있다. 나아가 북 내부에서 후계자 문제가 중심적으로 대두되었을 수도 있다. 특히 후계자 문제라면, 북으로서는 체제의 사활적 이해가 걸린 문제가 된다. 이런 상태라면 북의 체제는 북미관계나 남북관계와 무관하게 자기 일정을 강행할 수 있다.

2009년의 이런 변화가 남북・북미관계의 본질을 바꾸었을까? 그렇지는 않다. 본질이 바뀌려면 북은 한반도 비핵화 포기를 선언해야 한다. 그리고 핵무기 보유와 경제성장을 동시에 도모할 수 있는 대책도 있어야 한다. 그러나 한반도 비핵화를 거부한 채 국제사회와의 경제관계를 형성하겠다는 이러한 계획은 최대 우방인 중국조차 설득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2009년의 이 변화의 의미는 다소 축소된다. 북으로서는 더 많은 군사능력을 확보함으로써 체제 내의 정치적 안정감, 협상에서의 심리적 자신감, 주고받을 것이 많아진 교섭상의 유연력 등을 얻고자 했다는 해석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북은 2차 핵실험까지의 일정을 완료한 이후 본격적인 화해국면으로의 이동을 시도했다. 클린턴 전 대통령을 초청하여 그 편으로 억류중이던 미국기자를 석방하고, 김대중 전 대통령 조문외교를 통해 남북정상회담을 타진했다.

외부의 위협에 대한 제어로서만 아니라 내부 문제까지 포함한 북의 이 과도한 체제보장 행동은 수용될 수 있는가? 심지어 그것이 북 내부의 후계 문제와 연관된 내적 동기라고 하더라도 그러한가? 이것은 6·15에 제기된 새로운 도전이다. 여기에는 늘어난 위협능력을 제거하는 데 따른 경제보상의 증대, 주한미군의 성격 전환까지 포함한 평화협정 논의,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북 정권의 순조로운 이양까지 포함되어 있다. 여기서 6·15의 대답은 다시 분명하다. 상호위협의 제거와 관계정상화, 체제보장과 평화라는 요구의 대칭성이 유지된다면, ‘2000년의 선택’은 여전히 유효하다는 것이다.

 

 

2010년, 어떤 변화를 읽고 수용해야 하는가

 

지금 6·15는 발현될 수 있는가? 그렇다. 지금의 정부가 6·15가 겪어온 역사를 이해하고 이를 계승한다면 6자회담도 남북관계도 동시에 발전할 수 있으며 핵문제도 해결과정에 올려놓을 수 있다. 6·15는 한국정부의 의제운영능력 속에 존재해왔고, 지금도 그러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 10년 된 6·15를 운영하기 위해서는 우리 사회에서 일어난 여러 변화를 감지하고 반영할 필요가 있다. 가장 중요하게 고려해야 할 점은 지난 10년간 한국사회에서 양극화가 빠른 속도로 진행되었다는 점이다. 고용 없는 성장과 열악한 서민경제는 대북지원과 군사비 상승을 동시에 용인하기 어렵게 만든다. 다시 말해 평화의 확보가 군사비의 축소로 이어지고 그 혜택이 서민복지로 이동하도록 만드는 강력한 프로쎄스가 작동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화해・협력정책이 평화를 만든다는 설정이 6·15였다면, 지금은 평화가 화해를 불러일으킨다는 6·15의 실체화가 요청된다. 이를 위해서는 북의 위협능력 감소를 현실화할 수 있는 협상이 필요하다.

북의 위협능력 감소는 미국에 대한 우리의 군사적 의존을 축소시킬 수 있는 근본 방향이다. 미국에 대한 군사적 의존 증대는 북의 위협적 군사력을 이유로 유지되고 있고, 이라크나 아프가니스탄 등 세계 분쟁지역에 한국군 파병을 원하는 미국의 요구가 무시로 제출되는 이유로도 작용한다. 여기서 하나의 역설은 군사력 의존 탈피가 자주국방을 지향할 때 군사비는 여전히 증대되며, 이것은 남북간 상호위협 능력의 확대를 당분간 제어하기 어렵게 만들 것이라는 점이다. 결국 이 문제를 동시에 풀 수 있는 고리는 평화협정 체결이다.

한편, 북의 위협능력을 감소시키는 이러한 과정이 안정적으로 진행되기 위해서는 남북연합의 제도화가 동시에 필요하다. 북에 가장 위협적인 존재는 결국 남한사회의 존재라는 점을 감안할 때, “평화협정이 체결되고 북미관계가 정상화되며 외부의 경제지원이 증대한다고 해도 그것만으로는 분단국가로서의 체제안전이 보장되지 않는”18다고 북이 느낄 가능성은 충분하다. 이럴 경우 평화협정의 추진과정도 난관에 봉착할 수 있다. 615공동선언 2항의 작성과정에서 확인되었듯이, 여기서 말하는 남북연합은 ‘연합제’와 ‘낮은 단계의 연방제’의 공통성을 제도화한 새로운 남북연합이다. 여기에는 체제인정의 제도화가 관건이다.

6·15 운영에 있어서 정부와 비정부 분야의 거버넌스를 확장하는 문제도 중요하다. 제어하기 어려운 미국과 북을 이끌어 평화의 길로 나아가자면 정부의 힘만으로는 부족하다. 더 많은 지혜의 결집, 참여의 확대가 요구된다. 특히 정부에 의한 한미동맹의 지나친 중시가 한중관계를 악화시키면서, 한반도에 긴장이 조성되는 즈음에서는 균형감있는 민간외교의 역할이 더욱 중요해진다. 한편에서 분열과 대립선상에 있는 현재의 시민사회가 이런 과제를 감당할 수 없다는 우려도 있다. 책임성과 전문성을 갖추고 있느냐는 냉정한 지적도 있다. 시민사회의 분열은 시민사회 자체의 문제라기보다는 정당과 정부의 대결적 자세가 원인이다. 시민사회 내부는 대체로 소통과 상호이해를 추구하고 있으며, 대결에 동원되는 일부 세력은 오히려 예외적이다. 정부가 거버넌스를 실행해가면 자체로 해결될 수 있다고 단언한다. 그리고 책임성을 높이고 전문성을 강화하는 것은 시민사회 스스로 성찰할 문제로서 역량 강화에 박차를 가할 일이다.

대북사업과 관련한 여러 분야를 시민사회에 이양하는 문제도 6·15 공동선언을 새롭게 실현해내는 데 필요한 일이다. 여기에는 공공써비스의 민간이양이라는 관점이 하나의 출발이 될 수 있다. 대북관계의 경우 가장 중요한 것이 경제와 사회개발이고 이는 공공써비스 영역으로 분류할 수 있다. 공공써비스 영역의 민간이양은 정부 부담을 줄여주고 사회저변을 넓히는 효과를 발휘하며 전문성과 책임성을 확산함으로써 사회 전체의 능력을 신장한다. 이러한 구상은 대북사업에서 더욱 절실하다. 지금 대북 인도지원단체 등록제도와 남북협력기금이 운영중이며, 연관하여 공적개발원조를 위한 한국국제협력단(KOICA)이 존재하는데, 이 모든 것은 정부재원에 의존해 있던 체계다. 그런 점에서 대북사업이 정부재원 없이 진행되기 어렵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럴수록 가용 민간자원을 확충하는 자발적 운동이 중요하다. 대북지원은 사회가 감당할 수 있는 몫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며 그 수준에서 관리되는 것이 좋다. 이 또한 양극화시대에 적응하는 대북정책의 운영이기도 하다. 물론 쌀의 경우처럼 과잉생산과 보관료 등 오히려 정부재원을 소비하게 하는 자원의 경우는, 그 규모가 크고 정부의 대북정책 자원이라는 점에서 정부 관할하에 두는 것이 좋다.

 

 

새로운 시민주체를 발견하다

 

6·15공동선언이 발표된 지 10년 만에 우리는 ‘천안함 현상’에 직면했다. 불의의 사고였으되, 북이 범인일 수밖에 없다는 프레임에 갇혀 어렵사리 쌓아온 남북관계의 수많은 성과를 일거에 날려버린 이 현상에 6·15의 지친 현실이 담겨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 이 불의함에 맞선 거대한 시민의 노력도 우리는 동시에 보게 되었다.

천안함 현상은 과거 북이 관련된 안보사안과 같으면서도 다르다. 적어도 북이 관련된 군사적 충돌 혹은 그로 인한 죽음의 현장에서, 안보를 최우선으로 내세운 국가에는 거칠 것이 없었다. 이 시기에는 외부의 적을 앞두고 오직 맹렬한 공격적 언어만이 통용되었다. 그런 속에서는 어떤 평화적인 언사도 위협세력인 북을 옹호하는 이적행위로 간주된다. 천안함도 그랬다. 정부와 거대 언론기관이 일치하여 안보를 내세웠고 반대의견을 보이는 사람들은 곧바로 위험스런 세력으로 지목당했다.

그러나 이 위기의 순간에 참언론과 용기있는 시민단체와 진실을 외면하지 않는 양심적인 학자와 전문가가 겁없이 싸우고 있다. 무엇보다 정치와는 무관한 자연과학자들이 자기 영역에서 많은 과학적 반증을 내놓았고, 시민들은 진실에 다시 눈을 떴다. 짐작해보건대, 민주정부 10년과 6·15 10년의 역사를 일거에 반전시키려는 시도가 과거와는 다른 이런 저항을 불러오는 것이 아닐까?19

북이 관련된 안보문제에서 이렇게 진실을 추구하는 모습은 그것이 선거공간이라는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조건에서 생겨난 것이라 해도 매우 가치있게 보인다. ‘친북’ 공방 속에서 국가가 주도하는 안보담론에 대항하고 그것을 넘어서고자 했기 때문이다. 그들의 힘은 ‘친북’에서 자유로운 ‘진실’에 있기에 가능했다. 우리 사회에서 ‘친북’의 의미는 공동체로부터의 추방이다. 지배언론이 ‘친북’으로 낙인찍을 때, 이미 그것은 사실과는 무관한 이데올로기로 작용하여 사회에서의 배제 혹은 추방으로 귀결되기 때문이다. 이것이 북이 관련된 안보문제가 내포하는 치명적인 덫이다. 이런 위험성 때문에 북이 관련된 안보문제에 관해 진실을 외치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북이 관련된 안보사안인 이번 천안함사건에서 우리가 매우 새롭게 발견하는 것은 ‘친북’ 공방에서 자유롭고 진실을 추구하며 평화를 염원하는 시민단체와 시민의 존재다. 그들이라면 안보위기를 일으키는 주체가 남이건 북이건 진실의 잣대와 평화의 기준 속에서 충분히 상대와 맞설 수 있고 또 그것을 의제화하는 데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6·15 10년의 뒤끝에 이런 힘이 발견된 것은 우리 모두에게 큰 다행이다.

 

 

--

  1. 금강산에는 2008년 7월 11일 관광객 박왕자씨 피격사건이 발생하기 전까지 총 1,934,662명의 남측 인원이 다녀갔다. 그외 남북왕래 인원은 2009년말 현재 742,300명이며 그중 남에서 북을 다녀온 인원은 734,565명이고 북에서 남을 다녀간 인원은 7,735명이다. 통일부 홈페이지 참조.
  2. 임동원 『피스메이커』(중앙북스 2008), 57면.
  3. “저는 여기서 우리의 통일에 대한 개념을 바꿀 것을 제창합니다. 단일형 국민국가로의 ‘완전한 통일’이라는 고정관념을 버리고, 연합제와 낮은 단계의 연방제 사이 어느 지점에서 남북간의 통합작업이 일차적인 완성에 이르렀음을 쌍방이 확인했을 때 ‘1단계 통일’이 이룩되는 것이라는 새로운 발상이 필요합니다. 말하자면 무엇이 통일이며 언제 통일할 거냐를 두고 다툴 것 없이 남북간의 교류와 실질적 통합을 다각적으로 진행해나가다가 어느날 문득, ‘어 통일이 꽤 됐네, 우리 만나서 통일됐다고 선포해버리세’라고 합의하면 그게 우리식 통일이라는 겁니다.” 백낙청 『한반도식 통일, 현재진행형』(창비 2006), 20~21면.
  4. 노태우정부와 김영삼정부의 통일방안의 경우, 남북연합은 화해·협력단계 이후의 두번째 단계이며, 마지막 단계인 민족국가는 통일헌법에 따른 총선거를 통해 구성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김대중 대통령의 ‘공화국연합제’는 남북연합→연방→완전통일의 3단계 통일방안 중 두번째 단계에서 연방을 구상하고 있다. 정성장 「남북연합의 제도적 장치 및 운영방안」, 신정현 외 『국가연합 사례와 남북한 통일과정』(한울아카데미 2004), 226~53면.
  5. 임동원, 앞의 책 102~106면.
  6. “저희가 주장하는 ‘남북연합’이란 통일의 형태가 아니라, 통일 이전 단계에서 남과 북의 두 정부가 통일을 지향하며 서로 협력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를 말합니다. 통일된 국가 형태를 말하는 ‘연방’과는 다른 개념임을 이해해주셨으면 합니다.” 같은 책 103~104면.
  7. “낮은 단계의 연방제 안은 연방제로 가기 위한 잠정적 조치” 『로동신문』 2000.10.9; “련방공화국 창립방안에 대한 민족적 합의를 보다 쉽게 이루기 위하여 잠정적으로는 련방공화국의 지역자치정부에 더 많은 권한을 부여하며 장차로는 중앙정부의 기능을 더욱 높여 나가는 방향에서 련방제 통일을 점차적으로 완성할 데 대한 방안도 천명하시였습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 천명하신 이 방안은 결국 낮은 단계의 련방제안입니다.” 안경호 「‘고려민주연방공화국 창립방안’ 제시 20돐 기념 평양시 보고회 보고」, 조선중앙방송 2000.10.6.
  8. 임동원, 앞의 책 115~16면.
  9. 허문영 외 『한반도 평화체제: 자료와 해제』(통일연구원 2007), 32면.
  10. 같은 책 33면.
  11. 페리보고서는 북이 느끼는 위협인식을 두가지로 이해하고 있다. 하나는 군사적 위협 문제이다. 페리보고서는 1994년 북미간에 채택한 제네바합의에 기초한다고 밝히고 있다. 제네바합의는 3항에서 “미국은 북한에 대한 핵무기를 불위협 또는 불사용에 관한 공식 보장을 제공한다”고 적고 있다. 다른 하나는 경제 문제로서, 북한은 미국이 오랫동안 부과해온 경제제재의 해제를 중시하고 있다고 적시한다. 「페리보고서」(Review of United State Policy Toward North Korea: Findings and Recommendations 1999.10.12), 같은 책 539~63면.
  12. 같은 책 32면.
  13. 「盧대통령 WAC발언—美강경파에 ‘주의’환기 메시지」, 『국민일보』 2004.11.14.
  14. 허문영 외, 앞의 책 24면.
  15. 이 조처의 출발인 불법행위방지구상(IAI)은 북한이 마약과 위조지폐 등 불법행위를 통해 정권을 지탱하는 자금을 조달한다는 부시 행정부의 판단에 따라 2002년 초에 시작되었다. 이 기구는 국무부 등 14개 부처 200명 정도의 관리가 참여하는 범정부적 조직으로 발전했고, 15개 외국정부와 국제기구가 공조하는 국제적 대응기구로 자리잡게 된다. 2005년 당시 미 재무부의 조처는 미 사법부가 애국법 311조에 의거, 국제범죄자 80명을 위조담배 제조 혐의로 기소한 것에 기초해 있다. 그들 국제범죄망의 일부가 마카오의 BDA와 중국은행 등을 이용했다는 정황을 포착한 것이다. 당시 미 사법부는 북한이 일명 ‘슈퍼노트’라 불리는 위조지폐에 관계했다고 추정했지만, 위조지폐의 출처를 기소장에 명시하지는 못했다. 서재정 「BDA 문제의 해결인가? 봉합인가?」, 새로운코리아구상을위한연구원 『새로운 코리아 구상 Ⅱ』(2009), 138~41면.
  16. 2007년 2월 13일에 6자회담에서 발표한 이 합의문의 명칭은 ‘9・19공동성명 이행을 위한 초기조치’이다. 이에 따르면 북한의 모든 핵시설 폐쇄와 불능화, 모든 핵프로그램 신고를 댓가로 중유 100만톤 상당의 지원이 제공된다. 그리고 미국의 북한에 대한 테러지원국 해제와 적성국교역법 적용 종료과정도 동시 병렬적으로 진행한다. 허문영 외, 앞의 책 25면.
  17. 2000년 당시와 2007년의 상황 차이는 핵무기와 장거리 미사일로 현실화된 북의 군사적 위협능력이다. 이 위협능력은 남쪽에 인지되어 위협인식을 구성한다. 군비경쟁을 자극하는 것이다. 따라서 ‘2000년의 선택’의 관리가 더 어렵고 민감해지고 있음도 분명해 보인다.
  18. 백낙청 「‘포용정책 2.0’을 향하여」, 『창작과비평』 2010년 봄호, 84면.
  19. 천안함사건이 북의 공격으로 결론지어지고 이에 따라 대북제재로 가는 흐름에 대해서는 졸고 「천안함사건의 흐름과 반전」, 강태호 엮음 『천안함을 묻는다』(창비 2010)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