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의 목소리
통치 위기의 본질은 거짓과 비합리
● 특집에서 이남주의 「이명박정부의 통치 위기」를 흥미롭게 읽었다. 이 글은 특히 한국의 민주화에 대한 모종의 합의, 즉 민주화가 상당히 오랫동안 진행되었고 이로써 한국의 민주주의는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 명백한 사실이라는 믿음이 환상에 불과할 수도 있음을 다시금 일깨워준다. 각성의 계기는 바로 천안함사건이었다. 이 사건은 그 자체의 피해도 막대했지만 이남주는 그보다 큰 문제가 현 정부가 이를 조사하는 과정에 있었다고 지적한다. 국방부가 증거를 내놓을 때마다 전문가와 언론의 의혹이 뒤따랐고, 정부가 이 의혹을 다루는 자세는 한마디로 ‘덮고 가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이런 상황에서 전국민의 셋 중 둘이 정부 조사를 신뢰하지 않는 지경에까지 이른 원인이 무엇인지 이를 잘 짚어낸 글이었다. 이남주는 현 상황을 일컬어 “‘보수적 통치’와 민주적 거버넌스 사이의 부조화”라고 표현하고, 현 정부의 이러한 퇴행적 정치가 등장한 배경 또한 설득력있게 제시한다.
내가 이해하기론 거버넌스를 이끌어가는 하나의 축은 ‘참여하는 시민’이다. 그런 점에서 현안에 대한 시민들의 문제의식을 포착해내어 그들의 합리적 문제제기를 공론화하는 것도 중요한 과제 중 하나다. 논단과 현장에 실린 서재정・이승헌의 천안함사건 관련 글이 반가웠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들이 정부 조사의 허점을 일목요연하게 설명해주어 이 사건의 쟁점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던 점도 좋았지만, 그보다도 과학자로서 자신의 소신에 따라 제 목소리를 내는 사람이 우리 사회에 여전히 존재한다는 사실에 깊은 안도감을 느낄 수 있었다. 두 학자들의 건투를 빈다.
김철우 lovadpeac@hanmail.net
4대강사업, 그 고단한 길을 넘어
● 특집 박창근 교수의 글을 읽고 4대강사업을 생각하니, 옷을 찢으며 재를 뒤집어쓰고 싶은 심정이다. 4대강사업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하천 준설은 수자원 확보와 홍수방어, 수질개선을 목표로 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 하천 특성을 고려한다면 ‘녹색 댐’ 효과를 높일 수 있는 정책이 훨씬 중요하다. 잘 조성된 숲은 하천의 유량변동을 줄일 뿐만 아니라 수자원을 안정적으로 활용할 수 있게 만든다. 게다가 숲은 홍수조절 기능을 겸한다. 하도(河道) 주변의 식생이 발달하는 곳은 홍수시 일시적으로 물을 가두는 역할을 한다. 이런 곳을 준설하면 홍수피해가 커질 뿐 아니라 오염물질의 여과기능까지 상실한다. 하천의 습지나 하도 내 수초는 오염물질을 정화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물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절수운동이 선행되어야 한다. 물 낭비를 줄이는 노력 없이 더 많은 수자원을 확보하겠다고 보(洑)나 댐을 건설하는 것이 과연 ‘녹색성장’에 걸맞은 정책인지 묻고 싶다. 홍수예방을 위해서는 숲을 가꾸는 일도 중요하지만, 도시나 하천 주변의 땅을 함부로 개발하지 말아야 한다. 요즘 지자체에서는 숲이나 노지를 훼손하고 있고, 또 하천 주변에는 상가나 주택, 휴게시설이 잔뜩 들어서 오염물질을 흘려보내고 있다. 심지어 하천 골재까지 채취하여 건축재로 사용하기도 한다. 이러한 일들을 수수방관한 채 수질개선에 예산을 쏟아붓겠다고 한다면 그게 진정한 녹색사업일까.
arbre님 que-sais-je@hanmail.net
훌륭한 비전, 그러나 현장에선 막막
● 특집 중 성열관 교수의 「교육 위기와 학교혁신의 전략」을 잘 읽었다. 교육에 종사하는 사람으로서 교육과 관련된 글이 게재되면 형광펜을 사용해가며 꼼꼼하게 읽는다. 과연 무엇을 어떻게 해야 교육을 혁신할 것인가? 필자는 우리나라 교육현실이 ‘실효성 없는 신자유주의 교육정책’에 지배된다고 진단하며, 그 대안으로 ‘배움과 돌봄의 책임교육 공동체’, 즉 혁신학교의 비전을 제시한다. 그런데 세부로 들어가면 혁신학교의 정의와 건설을 위한 조건 제시에 그친 것 같다. 진정한 혁신학교가 무엇인가를 넘어서 어떻게 건설할 것인라는 실천의 문제에 대해서는 현장의 어려움이 담기지 않은 듯해 아쉬웠다. 혁신학교의 비전은 현장 중심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유병상 하남정보산고 교사 yoobs21@naver.com
백낙청 문학평론의 전모를 보려면
● 류준필의 「백낙청 리얼리즘론의 문제성과 현재성」을 읽었다. ‘리얼리즘론’에 대해 말한다지만 내겐 ‘백낙청 소론’으로 읽혔다. “문학엔 서사도 없어지고 비평도 사라졌다”는 한 언론인의 말처럼 비평의 의미를 묻기 힘든 시대다. 이런 시대에도 40년 가까이 문학비평가로 살아가는 한 문학인에 대한 후배 문학자의 경모가 글 사이에 숨어있는 듯하다. 백낙청의 리얼리즘론이 ‘변혁적 중도주의’라는 방법론으로 확장되고 ‘지혜의 시대’를 열어가는 데 밑절미가 된다는 게 소론의 요지일 듯하다. 그런데 확장과 밑절미가 되는 과정을 바라보며 류준필은 고개를 갸우뚱한다. 개인적으로 이 부분에선 백낙청의 원불교 수련과 로런스에 대한 공부를 언급해주었으면 했는데 없어 아쉬웠다. 백낙청은 90년대 중반부터 원불교에 관련한 글들을 써온 걸로 아는데 류준필의 눈이 거기까진 미치지 못했나 보다. 또 리얼리스트 로런스가 『묵시록』(Apocalypse and the Writings on Revelation)을 썼던 걸 생각하면 평생 로런스를 공부했다는 백낙청의 지금 모습이 그리 기이해 보이진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 본다.
전두영 exlibris18@hanmail.net
젊은 시에 엿보이는 채무
● ‘신예시인 특집’을 흥미롭게 읽었다. 독특한 화법의 김승일이 돋보였다. 그 기다란 길이에도 불구하고, 자기 철학과 호흡이 있는 시인의 등장이 반가웠다. 그러나 ‘신예’란 말에 너무 ‘특집’을 기대한 탓일까. 시인은 많아졌는데 철학은 줄어든 느낌. 이번 신예들도 산문시의 형식에 얽매여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시의 형식을 인위적으로 구획할 생각은 없다. 다만 한번쯤은 산문시의 등장 이유를 생각해보시기 바란다. 보다 자유로운 형식을 통해, 보다 자유로운 정신을 성취하기 위함이 아니었나. 장황한 설명문 같은 시의 모습들은, 외려 자유가 아닌 구속으로 느껴진다. 일개 독자의 견해일 뿐이나, 신예들이 바로 윗세대 시인들의 형식과 화법에 크게 빚지고 있다는 느낌은 서글프다. 이제 출발하는 시인의 생에, 시작부터 안고 가는 채무란 그리 건강한 모습은 아닐 것이다.
이지안 addshot@hanmail.net
정치와 과학을 다시 묻기 위하여
● 경찰이 시위 진압용으로 도입하려 했지만 ‘청력 손상’이라는 위험에 관한 의사결정에 활발하게 참여한 대중의 민주적 대응으로 인해 유보된 음향장비가 있다. ‘음향대포’라는 위협적이고 공격적인 이름의 무기로 불리지만, 태생은 ‘초지향성 장거리 음향장비’라는 지극히 가치중립적인 기능으로 설계된 기계에 불과하다.
지난호에 실린 실라 재써노프의 논문은 기술을 정치의 공간이자 대상으로 조명함으로써 기술과 가치판단에 대한 새로운 기준을 마련해준다. 얼핏 서로 연결되지 않아 보이는 ‘위험, 설계, 표준, 윤리적 제약’이라는 네 측면을 정치의 공간을 이루는 네 축으로 삼아 폭넓게 고찰하고 있다. 구분된 네 범주에서 일어나는 정치적 다툼은 마치 기하학적 공간의 함수처럼 비유된다. 위험에 대한 기술관료적/민주적 대응, 설계에 관한 이론적 참여/실천적 저항, 표준에 대한 역학적/임상적 시선, 윤리적 제약에 대한 자연/비자연의 대립 등, 축 상에서 반대방향으로 뻗어나가며 대립되는 개념들로 짝지어져 있는 것이다.
이를 ‘기술전문가’를 매개변수로 한 공간상의 함수로써 그려볼 수 있지 않을까. 이 글에서 저자가 ‘기술전문가’인 엔지니어의 자리를 애매하게 위치시켰다는 점은 의아하다. 저자의 지형도에서 가치중립적인 자리가 배제된 것은, 정치적 실제를 있는 그대로 반영한 결과이기보다 저자의 논의를 위한 전략적인 구상인 것처럼 보인다. 엔지니어들이 스스로를 ‘공평무사’하다고 생각하면서 ‘삶의 확고한 개선에 전념’할 수 있기 위해서는 그들의 노력에 대한 기술의 성과가—사회에서 유용하다고 평가되기에 앞서—부정적인 혹은 긍정적인 가치판단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할 것 같다. 엔지니어들이 원하는 기술의 지향점은 ‘지형도’ 위의 원점, 즉 정치적인 다툼에 있어서 가장 안전하고 이상적인 위치가 아닐까 한다.
정현주 hyunjoo.chung@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