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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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중일 金重一

1977년 서울 출생. 2002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ppooeett@naver.com

 

 

 

해바라기 전쟁

Marionette Performance Story

 

 

구형 턴테이블 위에 낡은 LP버전의 지구를 올려놓고 모래바람의 목쉰 노래를 듣는 밤입니다. 보내주신 계절들은 잘 받고 있습니다. 항상 부족한 계절만큼 우리는 또 한무리의 어린 병사들을 잃어야 합니다.

한번도 울어본 적 없다는 신의 동공같이 까맣고 건조한 대사막의 밤은 아름답습니다. 별들을 무수히 주렁주렁 매달고 있는 백전노장, 불멸의 전장영웅 하늘은 나란히 선봉에서 지금도 우리를 지휘하는 중입니다.

고통스럽게 죽어간 어린 병사들의 계급장으로 쌓은 계단을, 끝없이 밟고 구름 위로 오르는 야간행군은 얼마나 고되고 가혹한 훈련인지요.

배신자들. 오래전 우리는 해바라기를 되찾기 위해 출정했습니다. 시간의 해방군으로부터 마을이 점령당하고, 해바라기들은 모두 흩어졌지요. 우리는 더듬이가 잘려나간 귀뚜라미처럼 숨어서 울어야 했습니다.

마음의 한가지 얼굴. 미친 해바라기들. 고작 하나의 마음일 뿐인 그것들은 변변한 몸 없이도 우리를 떠나 행복할까요. 오늘도 나는 대사막 한가운데에서 얼굴 없는 해바라기들과 맞닥뜨리고 있습니다.

턴테이블 위에서 아직도 노래는 계속됩니다. 해바라기의 목쉰 노래를 따라 나는 턴테이블 위를 둥글게 둥글게 돌고 또 도는 야간행군을 하는 중입니다. 먼저 간 병사들의 시체가 내 그림자 대신 발목에 매달려 질질 끌리는 밤입니다.

당신은 안전하십니까? 나는 마리오네뜨처럼 유쾌하고 분주하고 심각합니다. 지금은 슬퍼하지 않고 우는 법, 기뻐하지 않고 웃는 법을 연습중입니다. 살짝

땀이 나는군요.

 

 

 

담장 속으로

 

 

담장을 확 치며 전동차가 들어옵니다

나는 온몸으로 담장을 밀고 담장 속으로, 들어갑니다

긴 대열에 합류한 난 빙벽에 걸린

자일 하나를 겨우 차지하고 대롱대롱 매달려

깜박 졸기도 합니다 꿈속에서만

잠깐씩 등장하는 마법사가 말하길,

대열 속의 사람들이 하는 말은

몽땅 다 거짓말, 이 충고도 어쩌면 거짓말

나 또한 대열 속에 있으므로

 

나는 캄캄한 담장에 둘러싸인 채

담장을 따라 퇴근을 합니다

땅속으로부터 솟구쳐 한강 위를 달리는

담장 한쪽은, 오늘도 둥근 불덩어리 시계가 걸렸던 자리

내가 뒤돌아선 그림자의 어깨를 툭 치며

지금이 몇시쯤 됐을까요?

물었을 때, 떠난 애인이 말없이 돌아보며

다 녹아 뚝뚝 떨어져내리는 시곗바늘을 가리켰지요

담장 너머로 가기 위해 나도 잠시

담장에 기대어 피곤한 눈을 붙이기도 합니다

그러다 꿈결처럼 뒤돌아보며 오늘이

무슨 요일인가요? 아득하게 물었을 때

죽은 할머니가 꽝꽝 얼어버린

시곗바늘을 입김으로 녹이고 있었지요

 

담장 한쪽은, 오늘밤도 둥근 얼음시계가 걸릴 자리

나는 분명 담장을 따라 걷고 있었는데

사방은 허허벌판, 무슨 일인지 마법사에게 물었을 때

이 저녁, 장밋빛 붉은 얼굴로 줄지어 선 너희가 담장이니

너희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고작

자꾸 허물어져내리는 담장 한쪽을

울음벽돌로 채워넣는 일뿐

도대체 담장 너머엔 무엇이 있길래

자꾸 모두가 내 반대쪽으로만 허물어져가는 것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