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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2010년대 한국문학을 위하여

 

자체제작 소리를 내는 상자들, 그리고

2010년대 시로 나아가기 위하여

 

 

김수이 金壽伊

문학평론가, 경희대 교양학부 교수. 평론집 『환각의 칼날』 『풍경 속의 빈 곳』 『서정은 진화한다』 등이 있음.

whitesnow1@hanmail.net

 

 

1. ‘자체제작 소리를 내는 상자1’들 앞에서

 

전선들과 내부기관이 고스란히 노출된 건물 형태는 현대 도시의 낯익은 장식미학이지만, 작품의 제작 원리와 과정이 작품에 내재되는 것은 예술의 오랜 불문율이었다. 예술의 창조원리와 세부공정은 작품의 비가시적 차원과 작가의 무의식적 차원에 저장되어온 것이다(알다시피 그 탐구와 해명의 작업은 ‘비평’의 몫이었다). 이는 마치 인간이 자신의 기원과 형성에 대해 충분히 알지 못하거나 의식하지 못하면서, 그 원리와 구조를 살아내고 있는 것과 같다. 이런 맥락에서 예술의 기원은 자연과 인간에 대한 모방행위를 넘어, 피조물인 인간이 자신의 출현에 대한 해결할 수 없는 의문을 역으로 자신이 주체가 되어 행하는 ‘자기 재창조의 의식(儀式)’으로 변용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사회의 감성적 매트릭스를 해체하고 새롭게 조직화”2하는 시를 상상한 2000년대의 젊은 시인들은 시쓰기의 원리와 공정을 텍스트에 기입했다. 그 과정에서 철학과 비평의 사유와 언술을 시에 도입했고, 자신들의 시에 관한 별도의 비평문을 작성하기도 하였다. 말하자면 자체 이력발화 장치를 단 시를 창작한 셈인데, 이는 1969년에 로버트 모리스(Robert Morris)가 나무로 만든 「자체제작 소리를 내는 상자」의 2000년대 산(産) 시 판본에 비유될 수 있다. 만들어질 때의 소리가 안에 든 테이프를 통해 ‘내면의 소리’처럼 흘러나오는 이 기묘한 상자는 자신의 탄생과 현재를 겹쳐놓는 발본적인 존재방식을 연출한다. ‘기원’을 ‘기관’으로, ‘원리와 공정’을 ‘작동’으로 변용하면서, 예술창조 원리의 선형적 분할선(작품 완성 이전과 이후의 시간)과 가시적 분할선(작품의 외형에 드러난 것과 드러나지 않는 것)을 지우는 것이다. 기원과 현재, 과정과 산물을 동일한 시공간에 배치함으로써, 이 지극히 단순한 모양의 상자는 예술의 발생과 지속을 교란하는 예술사적 사건이 된다. 이를 변주하기라도 하듯, 2000년대의 젊은 시인들은 자신과 세계와 시를 끊임없이 현재형으로 재창조하는 야심찬 시적 기획을 추진한다. 자신과 세계와 시의 기원을 사후적으로 재구성하는 제작자가 되어 제작 원리와 방법을 시에 적어넣은 것이다. “나는 사방에서 자꾸만 태어났습니다” “이제부터 나는 기다란 수염을 달고/아무런 화면도 보여주지 않을 거야……”(황병승), “감정의 동료들은 여전히 집이 되기를 거부하지요”(김언), “감각으로 사유하는 종(種)들이 잠들지 못하는 밤이네요”(유형진), “감각이 열릴 때, 세상 도처가 나의 거처다” “내 안에서 살던” “시를 낳을 저 몸”들(강정)……. 자기 자신 및 세계와 시의 재창조에 대한 자의식으로 충전된 제작자-시인은 이질성들의 불협화음과 혼선 등의 ‘자체제작 소리들’을 시에 각인했다. 철학과 비평의 사유와 언술이 소용되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3

젊은 시인들의 비평적 시각이 담긴 시와, 시와 연동된 비평이 내는 ‘자체제작 소리’는 크게 세가지 음(音)으로 논쟁적으로 해석되면서 증폭되었다. 세 유형의 음은 계기적 시간이 아닌 질적 시간의 차원에서 2010년대로 나아가기 위한, 이른바 2000년대 시의 출구전략을 비판적으로 모색하는 데 중요한 발화점이 된다.

첫째, 서정과 시의 종언을 겨냥한 반서정, 비서정, 탈서정, 비시, 시의 종언 등의 파열음. “문제는 서정이 아니다”(신형철)라는 진정 국면을 거쳐 ‘서정’을 ‘마지막’ 어휘4로 호명하면서 잠정 봉합된 일련의 논쟁은 ‘미래파’를 독립된 시적 사건이 아닌, 시와 비평이 유례없이 협업한 동상이몽의 담론이자 사건으로 본 김홍중(金洪中)의 진단에서 가장 첨예화되었다. 김홍중은 미래파 시가 모든 문학적 대의와 책무를 폐기한 ‘오따꾸-동물 시인’이 쓴 “‘실재’로부터 자유로운 시”인 반면, 미래파에 대한 비평은 정작 미래파 시에 없는 실재의 열정을 맹렬히 추적한 ‘실재의 열정에 대한 열정’(바디우, 지젝)의 산물이라고 본다. 두개의 다른 역사적 시간에 속한 시와 비평의 이접(離接)에 미래파 담론의 특이성이 있다는 것이다. 실재의 열정을 잃고 스칼라(방향 없는 크인용자)만 남은 운동이 된 시는 더이상 “자체의 미학과 서정성만으로는 그것의 사건적 성격을 충족시키지 못하며 비평이라는 담론과 결합할 때 비로소 하나의 문학사적 의의를 지닌 사건으로 발발하게 된다.”5 이로써 미래파 담론은 시가 비평과 동업해서만 사건이 될 수 있음을 증명한 사건, 즉 진정성이 사라진 ‘포스트-진정성 시대’의 시의 종언이자 새로운 시의 출현의 징후가 된다. 그렇다면 오늘날 시는 사건의 주체로서의 자격을 일부 비평에 위임하고 ‘사건 미달’적 존재로 축소된 것일까? 혹 2000년대 시단의 특이성은 시와 비평의 담론적・사건적 연대에 앞서, 시와 비평(/철학) 장르의 구조적 융합에 있는 것은 아닐까. 젊은 시인들이 비평과 철학의 시적 전유를 통해 ‘자체제작 소리’를 생성했다고 할 때,6 문제의 핵심은 이들이 만들어 낸 ‘자체제작 소리’의 성과와 한계를 따지는 일이 된다. 김홍중은 오따꾸-동물 시인의 시가 종래의 시적 원동력을 폐기한 것과는 별개로 “언제나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효과를 산출할 것”임을 명시하는데, 시의 실재와 산출효과를 분리하는 이 해석학적 지점은 ‘시와 정치’ 논쟁의 중요한 촉발점이 된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이 논쟁에 가장 문제적인 비평을 제출한 것은 텍스트의 생산자인 시인 자신이었다.

둘째, 21세기를 여는 시단에 갑작스레 울려퍼진 이질적이고 파격적인 신생음(新生音). 그것의 문학적・정치적 의미에 관한 평가는 ‘시와 정치’ 논쟁을 통해 쟁점화되었다. 2000년대 시의 신생음에 대한 가장 적극적인 평가자인 황현산(黃鉉産)은 최근 밝힌 소회에서 이 논쟁을 단적으로 가름한다. 그에 따르면, 시와 정치 논쟁의 요체는 독재와 이념이 퇴조한 현실에서 “문학의 정치적 진정성과 효과에 대한 질문이 문학의 내재적 정치성에 대한 성찰로 바뀐 것”에 있다. 이 논쟁을 지켜본 소감을 황현산은, 소통과 소비에 휘둘리는 “근래의 문화계 판세에서, 새로운 구조, 새로운 이미지, 새로운 담론을 생산해내려고 애쓰는 사람들은 그 노력의 가치를 인정받지 못할 뿐만 아니라, 세속과 타협하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낙원의 악마로까지 치부되어 뒷공론의 피해를 입게 마련이다”라고 격한 어조—그로서는 매우 이례적인—로 토로한다. 그가 보기에 젊은 시인들의 시가 도모한 ‘은유와 환유의 동시적 기능화’는 주체와 타자의 자리바꿈을 통해 삶을 바꾸는 정치적 행위로, “순결한 글쓰기가 누릴 수 있는 진정한 긍지”를 수호하는 길이었다.7 황현산은 김홍중과는 상당히 다른 각도에서 사태를 바라보는데, 젊은 시인들의 새로운 시가 글쓰기의 긍지를 담은 미학적・정치적 실천인지, 실체와는 무관한 효과만 남기고 시와 예술의 영역 밖으로 이탈한 문학사적 사건인지에 대한 관점의 차이는 현단계의 시와 예술 전체에 대한 입장의 차이와 연결되어 있어 우리 시의 앞으로의 전개와 연동된 논쟁의 여지를 남겨두고 있다.

셋째, 기존의 질서에 ‘감성적 불일치’를 일으키는 미학적=정치적 소음. 세계를 건강하게 어지럽히는 소음으로서 ‘자체제작 소리’는 시인 자신이 직접 쓴 비평을 통해 밝힌 것이라는 점에서 별도의 항목을 요한다. 대표적인 예로, 진은영(陳恩英)의 비평은 미학과 정치의 새로운 결합방식을 촉구하는 담화문(자기 세대의 선언문을 겸한)의 성격을 지니는데,8 진은영은 랑씨에르(R. Rancire)와 들뢰즈-가따리, 김수영에 기대어 미학적 자율성과 타율성의 치열한 왕복운동을 통해 전개하는, 유비나 재현이 아닌 생성 차원의 ‘딴사람-되기’ 및 ‘문학의 삶-되기’를 구체적인 방법론으로 제시한다. 자신을 이루는 조건들인 미학적 타율성에 직접적 개입을 추구하는 미학적 자율성은 타자를 살아내는 존재의 전환을 통해 ‘실천’에 이르게 된다.9 여기서 짚어볼 것은, ‘딴사람-되기’를 추구하는 ‘미학적-감성적 체제’가 사회의 감성적 매트릭스를 구성하는 구조적 원리를 내면화할 위험에서 어떻게, 얼마나 자유로울 수 있을까 하는 점이다. 저마다 분방한 차이를 추구하는 젊은 시인들의 시가 비슷한 주체성의 형식과 양식모형(style matrix, 아서 단토)을 갖게 된 것은 이 문제의 실상에 관한 하나의 증거로 채택될 수 있다. 현실의 질서에 가하는 미학적・정치적 균열로서 ‘소음’의 진가에 대한 평가는 이들이 서명한 시와 비평에 담긴 ‘자체제작 소리’가 얼마나 철저하게 발본적이고 전복적인 것인가에 달려 있게 된다.

파열음, 신생음, 소음을 키워드로 하여 2000년대 시단이 제기한 질문에 대해, 이 글은 또다른 각도의 질문을 구성함으로써 2010년대의 시가 나아갈 방향을 모색해보기로 한다. 질문에 대한 대답이, 대답이 아닌 또다른 질문을 통해 지속될 수 있기를 바라면서.

 

 

2. “정교한 횡설수설”에 대한 주석과 질문

 

우리는 목숨을 걸고 쓴다지만

우리에게

아무도 총을 겨누지 않는다

그것이 비극이다

세상을 허리 위 분홍 훌라후프처럼 돌리면서

밥 먹고

술 마시고

내내 기다리다

결국

서로 쏘았다.

—진은영 「70년대産」(『우리는 매일매일』, 문학과지성사 2008) 전문

 

이 총이, 우주의 어느 종족이 갖고 다닌다는, 맞은 사람이 쏜 사람의 관점을 그대로 경험하게 되는 ‘모든-관점 총’(『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이었다면 좋았을 것이다. 그랬다면 ‘우리’는 목숨을 걸 필요가 없었고, 세상의 무관심에 낙담할 필요가 없었으며, 기어코 서로를 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모든 정치적・사회적 책무에서 탈출한 ‘오따꾸-동물 시인’과 ‘순결한 글쓰기의 긍지’를 간직한 미학적・정치적 전사(戰士) 사이에서, 소통의 즐거운 삐걱거림과 소통의 이데올로기 사이에서, 현실정치에 미학적으로 개입하는 실천과 미학의 혁신 자체로 미시정치를 수행하는 실천 사이에서 관점들의 전쟁에 휘말릴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또한 그러므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을 수많은 관점들-타자들로 미분하고 또 끝없이 연합하는 일이었다. 그 차이들의 무한행렬 어디쯤에서 불현듯 ‘……내……’가 마음에 드는 얼굴을 가질 수 있기를 소망하면서. ‘딴사람-되기’를 시도하기에 앞서, 우리는 이미 수많은 ‘딴사람’들(소년, 소녀, 다양한 성적 소수자, 유령, 동물, 사물 등)이었고, 그(것)들의 쿨렁이는 시시각각의 집합체였다. ‘나’는 태어났으나 살지 않았고/못했고,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졌으나 어찌어찌 실존했으며, 세계는 내게 처음부터 부정되었으나 그럼으로써 계속 내 앞에 존재할 수 있었다. 얼굴과 이름을 갖지 못하고, 보편적 정의(定義)가 아닌 특수한 지정(指定)의 진술들을 마음껏 거느리는 ‘나’의 이합집산의 현장에서, ‘나’는, ‘그’는, ‘당신’은, ‘우리’는, ‘나/그/당신/우리’는 즐거(…)웠는가. 혹은, 어쩌면 ‘그것’은.

 

내가 유령인 것은 중요하지 않아요

내가 어느 시대를 살고 있느냐, 그게 문제겠지요

 

그렇다면 얼굴이 생길 때도 되었는데

얼굴 다음에 표정이 사라집니다

윤곽이 사라진 다음에 드디어 몸이 나타났어요

내 몸이 없을 때 더없이 즐거운 사람

—김언 「유령-되기」(『거인』, 랜덤하우스중앙 2005) 부분

 

나에게는 다섯 명의 시인이 있지

첫 번째 사람,

그는 아파,

모두가 떠나간 검은 빌딩의 불 켜진 한 층처럼

밤새

통증이 빛난다

눈먼 시간들이 부딪치는 어느 모서리에서

(…)

마지막 사람은 엉터리

서툰 시 한 줄을 축으로 세계가 낯선 자전을 시작한다

—진은영 「앤솔로지」(『우리는 매일매일』) 부분

 

아무도 모르는

사이

조금씩 바닥에 가루로 흘러내린

그 시차의 이름을

이제 나는 쓸 것이다

—김경주 「개명(改名)」(『시차의 눈을 달랜다』, 민음사 2009) 부분

 

어느 쪽으로 가도 상관없어 어차피 양쪽 모두 미친 것들이니까

구름을 흔드는 웃음소리,

하늘에 걸린 체셔 고양이의 얼굴

—황병승 「Cheshire Cat’s Psycho Boots_7th sauce」

(『여장남자 시코쿠』, 랜덤하우스중앙 2005) 부분

 

‘나’는 ‘유령-되기’를 경험중인 미정형의 불안정한 존재이거나, 다섯명의 시인들(아픈 시인, 용감한 시인, 의사 흉내를 내는 시인, 천재 시인, 엉터리 시인)의 분열-통합체이거나, 무한한 시차들의 중단 없는 불연속적 경유지이거나, 경계의 구별을 없앤 혼종과 잡종의 소멸-형성체이다. 거칠게 요약하면, 형질 변화, 내향적 분열, 외향적 분산, 내・외부의 혼융 등의 방식으로 기존의 주체형식에 대해 이(異)-, 탈(脫)-, 혼(混)-, 후(後)-, 비(非)- 하는 다른-새로운 주체형식은 2000년대 젊은 시인들이 보여준 새로운 시와 미학의 토대를 이루는 것이다. 명멸하고 분열하고 분산하고 뒤섞이는 존재・주체는 언술 층위에서는 은유와 환유를 동시에 실행하면서 동일성과 정해진 규칙으로 수렴되지 않는 독특한 언술 체제를 구축한다. 이를 진은영은 ‘무질서한 이야기들’(「무질서한 이야기들」)이라고, 김경주는 ‘밤의 낱말들, 정교한 횡설수설’(「정교한 횡설수설」)과 그에 수반되는 “이질(異質)의 시제”(「여독」)들이라고 이름붙인 바 있다.

이 더없이 희박하면서도 역동적인, 무수한 타자들과 다채롭게 동행하면서 동일성의 권력에 저항하는 주체는, 2000년대 시가 표상해낸 새로운 주체형식이자 전략임에 분명하다. 2000년대 젊은 시인들의 작업은 우리 시에 동일한 차원으로 배치될 수 없는 차이들에 관한 ‘시차적(視差的) 관점’10을 부여했다는 점에서 ‘신세대의 몫’ 이상을 수행한 측면이 있다. 그런데 이 새로운 주체형식과 전략이 급변하는 현실 속에서 본래의 지향성을 충족하기 위해서는 더욱 정교하고 복합적인 시각을 부단히 확보해가야 한다. 다음의 두개의 질문 혹은 이견이 그 방법적 통로가 될 수 있겠다.

먼저, 2000년대 시가 고안해낸 주체형식이 기존의 시와 특히 현실에 대해 ‘얼마나’ 전복적인 것인가의 문제이다. ‘자본-기술 연정(聯政)의 단일지배체제’(도정일)가 세계를 제압한 현시대에, 주체의 창의적인 사유와 상상은 지배이데올로기의 무의식적 반영이나 표상이 되어버릴 위험에서 자유롭지 않다. 위험은 무엇보다 주체의 정체성과 주체성의 형식이라는 근본적인 층위에서 스멀거린다. 자본권력에 의한 세계화는 “문학의 정치적 진정성과 효과에 대한 질문”을 “문학의 내재적 정치성에 대한 성찰로 바꾸”는 데 일조하는 것을 넘어, 주체구성의 형식 자체를 바꾸어놓고 있는 것이다. 자본이 지배하는 세계화의 제국은 균일과 통합의 세계화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동질화와 차이라는 이중전략을 구사하면서 동일성을 강화한다. “깨뜨리고 분산시킨 다음 통합하고, 통합한 다음 차이의 환상을 유지시키는” 자본주의의 이 오래된 전략은 ‘한 체제 속의 다양성’이라는 자유주의 이데올로기와 결합하여 지금 단일세계체제의 강력한 질서를 구축하고 있다. 그러나 그 다양성이란 끝까지 ‘한 체제 속의’ 다양성이지 ‘다른 체제’를 생각하거나 실현할 수 있는 다양성이 아니다.”11 이로 인해 우리가 차이를 이야기하는 동안 차이는 자주 생기와 탄력을 잃고 흐물흐물해진다. 다양한 주체와 문화의 차이를 승인하는 순간에 그 순정한 차이의 일부(때로 전부)는 자동 삭감된다. 속악한 경제논리로부터 인문학을 구해내려는 동안에 인문학은 구조(救助)와 부흥의 노력 자체에 의해 어딘가 마모되고 일그러진다. 비정규직의 권익 보호와 근본 대책을 위한 법안은 오히려 비정규직을 양산하는 편법 및 불법의 선들과 교묘하게 겹쳐진다.

주체가 수많은 타자들로 끊임없이 자신을 미분(微分)하고 재구성하면서 ‘감각적인 것의 재분배’(랑씨에르)를 통한 미학적・정치적 실천에 이르려면, 이 끝없이 갈라지는 이중성의 리좀이 주체의 전복적 전략이기에 앞서, 자본-권력이 구사하는 지배전략이기도 하다는 점을 간파해야 한다. 지젝의 단호한 주장에 의하면, “분산된 복수적인 구성된 주체’는 후기자본주의가 유포하는 이데올로기인 “‘과잉’ 동일화의 두려움”의 반사체로, 어떠한 전복적인 힘과도 무관한, “단지 후기자본주의에 조응하는 주체성 형식(강조는 원문)일 뿐이다.12 후기자본주의가 유포하는 주체성의 형식이 구성원들에게 동일화의 과정을 과잉동일화에 대한 두려움과 차이에 대한 환호로, 차이의 소멸을 차이의 끊임없는 지형 변경과 과잉생산을 통한 차이의 생성으로 전유하게 하는 것이라면, 차이는 동일성에 대해서뿐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어쩌면 훨씬 더 많은) 의문을 품고 분쟁을 벌여야 한다. 기존의 사회질서에 감성적 불일치를 일으키는 정치적 행위로서 ‘감각적인 것의 재분배’는, 현사회의 감성 및 주체 구성의 매트릭스를 구조화하고 있는 선들을 무의식적으로 반영할 위험에 대한 자기검증을 내장해야 한다. 동일성의 권위를 해체하고, 단일한 서정적 주체의 권좌를 다양한 타자들에게 이양하는 미학적・정치적 실천이 진정 새롭고 전복적인 것이 되기 위해서는 자신을 관통하고 있는 또 자신이 관통하려는 복잡한 사회적 맥락(미학적 타율성)을 날카롭게 투시하는 시선을 지속적으로 증식해내야 하는 것이다.

비약의 위험을 무릅쓰고 말하면, 2000년대의 새로운 시들이 분열・분산・유동의 주체와 언술을 통해 만들어낸 ‘소음’은 자본-기술권력이 지배하는 후기자본주의 사회의 새로운 화음에 흡수될 위험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않다. 구체적인 질문으로 바꾸어보면, 2000년대 새로운 시들의 방법론인 ‘은유와 환유의 동시적 기능화’ 혹은 ‘자동사(自動詞)적인 발화’13 —기호의 대량생산이 가능하고, 기호의 물질성이 강조되며, 발화 자체의 지속성을 특징으로 하고, 무의식의 구성방식(은유와 환유의 운동)을 따르는 발화방식—의 언술 구조와 경로는 자본과 기술이 이동하며 확산하는 경로, 즉 결합과 계통의 축을 자유자재로 흐트러뜨리며 무한히 자가증식하는 경로와 어떻게 ‘근본적으로’ 구별될 수 있을까?14 2000년대의 새로운 시들이 수행한 새로움과 전복의 실체, 문학사적 의의를 제대로 따지기 위해서는 이곳까지 내려와야 하는 것이 아닐까? 이 질문에는 두가지 난점이 첨부된다. 첫째, 지배이데올로기가 유포하는 주체구성과 발화방식에 대한 구조적 반영이 그 자체로 잘못된 것이라고 하기는 어렵다는 것. 왜냐하면 그러한 주체와 발화방식에 의해서도 시의 완성도는 확보될 수 있으며, 전복적인 지향성 역시 어느정도 달성될 수 있기 때문이다. 2000년대의 새로운 시들의 성과는 이 점에서 부정될 수 없다. 둘째, 그러나 주체가 현실에 대해 위반과 전복을 ‘근본적이고 지속적으로’ 생산하고자 하며, 텍스트의 ‘자체제작자’로서 스스로가 자신의 기원이 되고자 할 때 이 구별은 필연적이라는 것. 2000년대 새로운 시들의 성과는 이 점에서 2010년대로 자동 계승되기 어렵다. 한마디로 말하면, 위반과 전복의 피동형과 능동형, 구조의 반영과 생산, 이 두 층위를 어떻게 명민하게 구별하고 시적으로 형상화할 것인가에 2010년대에 출현해야 할 새로운 시의 과제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혼동의 위험을 충분히 성찰하지 못할 때, 위험을 타파하는 좀더 치밀하고 깊이있는 시선을 갖지 못할 때, 시는 ‘오따꾸-동물 시인’의 피로와 반성을 모르는 유희와 구별되기 어려워질 것이며, 시와 예술의 종언은 마침내 실현되는 것일 터이다.

2000년대 시단을 가로질러온, 고정된 동일성에 대해 운동하는 차이들의 우월한 지위를 인정하는 시각에 대해서도 의문을 가져볼 필요가 있다. 다시 지젝을 참조하면, 현 상황은 “일체의 고정된 사회성을 침식하는 궁극적인 ‘탈영토화’의 힘”이 바로 ‘자본’이라는, 종래의 “맑스주의적 통찰을 소생시켜 ‘후기자본주의’를 이데올로기적 위치들의 전통적 고정성(가부장적 권위, 고정된 성역할 등)이 일상생활의 무제약적 상품화에 대한 장애물이 되는 시대로 파악해야 할 때가 온 것일지도 모른다.”15 탈주하는 주체와 탈주의 선들이 자본의 씨스템이 기입해놓은 바를 이행하(게 될 가능성이 있)는 사회에서는 오히려 전통적인 동일성이 가장 저항적인 위치와 전복적인 역할을 맡게 되는 역전현상이 벌어질 수 있다. 우리 시의 경우도, 변화하는 현실의 어느 시점(바로 지금일 수도 있다)에서는, 가령 서정적 동일성에 기초한 자연의 가상을 노래하는 시와, 그 동일성을 해체하며 분투하는 시의 위치가 역할이 뒤바뀌는 사태가 일어날 수 있다. 이는 물론 행복하고 아름다운 자연의 가상을 노래한 시들이 그러한 가상을 유포하는 이데올로기에 자각 없이 편승하는 경우가 아닌, 그 이데올로기 자체에 대한 비판적 문제의식을 내장하고 있는 경우에 한해서이다(그러한 ‘효과’를 내는 시들을 배제하기는 어렵겠지만). 마찬가지로, 동일성을 해체하며 분투하는 시들이 현실의 조건인 미학적 타율성을 통찰하고 그에 적극 개입하는 미학적 자율성을 실천하는 경우가 아닌, 미학적 타율성을 미학적 자율성으로 오인하여 그대로 승인하는 경우에 한해서이다.

노동시와 생태시의 위상이 변화해야 할 필연성에 대해서도 같은 맥락에서 생각해 볼 수 있다. ‘노동(/생계)’과 ‘생태(/생존)’는 21세기의 인간과 사회가 전지구적으로 직면한 가장 중대한 현안임에도, 바로 그 이유로 지배이데올로기에 의해 심각하게 왜곡되는 사안이기도 하다. 2000년대 시단이 노동시와 생태시에 부과한 ‘낡음’의 혐의들, 지나간 시대의 유산이며 목적지향적이고 동어반복적이라는 등의 조항들은 명백히 우리 시의 내부 요인에 의해 작성된 것만은 아니었다. 지배이데올로기의 침전물이기도 한 이 경직된 구도는 새로운 시의 형성과정에도 관여한 그것이었다. 큰 것의 정치가 작은 것들의 정치성으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정치적 실천의 직접적인 선과 우회적인 선, 즉 미학을 내장한 정치적 행위와 내재된 정치성으로서의 미학이 ‘낡은 것’과 ‘새로운 것’의 관계로 은연중에 재편된 것이다. 2010년대에 노동시와 생태시가 낡은 것과 새로운 것의 이분법을 넘어서, 함의와 형식을 새롭게 만들어가야 할 두가지의 필연성이 여기서 마련된다. 노동과 생태 문제의 중요성, 더불어 노동시와 생태시를 둘러싼 시단의 구조적 배치의 변경. 2000년대를 뒤로하면서 이제 우리 시는 다른 것들뿐 아니라 같은 것들에도, 새로운 것들뿐 아니라 낡은 것(으로 간주한 것)들에도 가능성을 공평하게 열어놓아야 한다. 오래되고 낡은 것이 새로울 수 있는 가능성은 이제 잠언이나 주기적으로 회귀하는 순환법칙의 차원이 아닌, 현실의 구조적 차원에서 열려 있기 때문이다.

우리 시의 근미래를 향한 두번째 논점은 ‘모든-관점 총’은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비유로 제시될 수 있다. 분산되고 복수적으로 구성된 주체는 타자들과/타자들로 끊임없이 분열과 연대를 거듭하는 와중에 있지만, 완전히 타자의 자리로 나아가 온전히 타자 자신이 될 수는 없다. 타자의 자리로 나아가 타자의 삶에 자신을 일치시키려는 노력은 더없이 숭고하며 그 자체로 의미를 갖는 것이지만—때로 언뜻언뜻 빛나는 일치의 순간이 도래하기도 할 것이다—노력의 대부분은 타자와의 일치 불가능성을 깨닫는 데 바쳐지게 될 것이다. 이 스산하고 텅 빈 불가능성의 순간들이야말로, 그러나 주체와 타자가 아이러니컬한 일치에 이르는 비약과 도약의 순간일 수 있다. 그러므로 시는 타자의 자리로 무한히 나아가려는 노력과, 그것의 불가능성을 절감하는 가혹한 자각 사이에서 씌어질 수밖에 없고 씌어져야 한다. 시쓰기는 고통받는 이웃에게로, 노동자에게로, 자연에로, 사물에로, 시간에로, 장소에로, 언어에로, 이 모든 것들과 연결된 나 자신에게로 끊임없이 나아가려는 노력과 좌절 사이에서, 가능성과 불가능성 사이에서 폭주하는 균열과 전율을 살아내고 기록해야 한다. ‘딴사람-되기’는 ‘딴사람-되(기를 열망하)기’와 ‘딴사람-되(기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자각하)기’의 드넓은 간극에서 (불)가능성의 이중적인 시선을 바탕으로 전개되어야 한다. 그 순간들 속에서 ‘윤리적 예술체제’와 ‘시학적-재현적 예술체제’와 ‘미학적-감성적 예술체제’가 불현듯 합치하는 지점이 생겨날 수 있으며, 시는 미학적이며 정치적이며 윤리적인 실천을 동시에 이행할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3. 이중성의 ‘사랑’의 주체들

 

열망과 불가능성의 이중적인 위치에서 ‘타자-되기’를 실행하는 주체는 동일성과 차이에 대해 동시적인 분쟁을 벌이는 주체와도 겹쳐진다. 우리는 2010년에 시집을 낸 두 시인의 시에서 타자들로의 끊임없는 몸바꿈 속에 주체의 타자적 분산을 어떤 ‘넓이’와 ‘깊이’로 변주하는 ‘사랑’(김수영의 시가 발안한 것을 현재 진은영의 비평이 이어받은)의 주체를 발견할 수 있다. 2000년대 시단에서 드물게 노동시의 새로운 발성법과 문제의식을 보여준 이기인(李起仁)의 시와, “어떤 다른 ‘몸’을 발효시킴으로써 리얼리즘의 재현의 미학을 넘어서는 동시에 ‘타자성’을 문제틀로 한 2000년대 시의 예술적 짜임을 다른 방향으로 선회시킬 수 있는 미학적 위력을 품은”16 것으로 평가된 이영광(李永光)의 시가 그것이다.

 

공장 밖으로 심부름을 나온 달빛

심부름을 나온 바람,

심부름을 나온 소녀가 슈퍼에서 쪼글쪼글한 귤을 한 봉지 산다

슈퍼 주인 할아버지가 자기 방식으로 귤을 센다

늘어진 전깃줄에서 나온 백열등이 귤을 또 센다

초코파이가 들어와 부풀어오른 비닐봉투 배가 불룩하다

‘이게 모두 얼마예요’ 그래서 ‘이게 모두 다 얼마예요’

‘이게 모두 얼마예요’와 ‘이게 모두 다 얼마예요’라는

말을 들은 귤과 초코파이의 몸이 욱신욱신 속이 상해서 비닐봉투에 들어 있다.

자정이 넘어서 귤을 벗기고 있는 소녀와 소녀를 벗기고 있는 기계소리가 아프다

‘오늘밤이 지나면 얼마를 줄 거예요?’

귤을 벗긴 이의 손톱은 달을 파먹은 것처럼 노랗게 물이 들었다

무심한 달빛이 공장 지붕을 아프게 지나간다

—이기인 「달의 공장」(『어깨 위로 떨어지는 편지』, 창비 2010) 전문

 

이기인의 시에는 ‘나’가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다른 존재와 사물들 속에 은밀하게 스며들어 타자들 속을 ‘아프게’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하여 이 ‘착한’ 존재적 전환이 섣부른 감정이입이나 주체의 타자적 분화 및 확장으로 귀착되는 것도 아니다. 시의 전면에서 사라진 ‘나’는 달빛, 바람, 소녀, 슈퍼주인 할아버지, 백열등, 귤, 초코파이, 기계소리, 공장 지붕 등에 동등한 무게와 밀도로 편재(遍在)하면서 각각의 몸을 극진하게 살아낸다. 자신의 것이 아닐지라도 누군가의 아픔으로 연대하는 몸들의 길을 내는 것은 바로 이 보이지 않는 주체, ‘나’이다. 스스로를 드러내지 않으며 기꺼이 다른 존재들 속에 편재하는 ‘나’는 “귤과 초코파이의 몸이 욱신욱신 속이 상해서 비닐봉투에 들어 있다”거나, “무심한 달빛이 공장 지붕을 아프게 지나간다” 같은 발화를 전지적 시점을 빌려 이행한다. 그러나 이 전지적 시점은 읽는 이에게 타자를 전유하지 않으면서 타자의 아픈 삶을 공유하려는 주체의 사랑이 녹아 있는, 함께할 또다른 숨은 주체들을 기다리는 비어 있는 시적 공간으로 경험된다. “자정이 넘어서 귤을 벗기고 있는 소녀와 소녀를 벗기고 있는 기계소리”의 ‘아픔’은 그렇게 멀리 있으면서 가까이 있다. 소녀-노동자의 ‘다른’ 삶을 나누어 갖는, 이기인으로 하여 2000년대의 노동시가 새롭게 나아간 사랑의 자리를 이 지점에서 목도할 수 있다.

 

저렇게도 깡마르고 작고 까만 얼굴을 한 유령이

이 첨단의 거리를 배회하고 있다니

그러므로 지금은 유령과

유령이 되지 않기 위해 몸부림치는 몸들의 거리

지하도로 끌려들어가는 발목들의 어둠,

젖은 포장을 덮는 좌판들의 폭소 둘레를

택시를 포기한 당신이 이상하게 전후좌우로

일생을 흔들면서 떠오르기 시작할 때,

시든 폐지 더미를 리어카에 싣고

까맣게 그을린 늙은 유령은 사방에서

천천히,

문득,

당신을 통과해간다

—이영광 「유령 1」(『아픈 천국』, 창비 2010) 부분

 

주체가 나누어 갖는 것은 타자의 아픈 몸과 삶의 유물론적이며 존재론적인 차원만은 아니다. 이영광에 의하면, “저렇게도 깡마르고 작고 까만 얼굴을 한 유령”의 ‘유전자’의 발생학적 층위까지가 여기 포함된다. “좀처럼 보이지 않는, 떠돌아다니는 유령의 몸에 불과하지만, 매순간마다 다시 현존할 수밖에 없는 영원한 ‘다른 몸’”17들은, 그러므로 결코 영원히 다른 몸이 아니다. 그것은 다르면서 이미 같은 몸, 선천적인 유전자에 의해 출생하는 몸이 아닌, 첨단의 거리에서 후천적인 유전자에 의해 감염되어 어느날 문득 출현하는 ‘당신’의 몸이며 당신 속에 은닉된 ‘나’의 몸이다. “사방에서/천천히,/문득,/당신을 통과해가”는 ‘유령’은 비가시적인 가시성, 현존하는 부재의 ‘살아 있는 죽음’의 아이러니를 넘어 모든 인간에게서 주체성과 생명력을 박탈하는 현대문명의 통치술을, 유령화하는 몸의 ‘죽어 있는 삶’의 아이러니로 현현한다. “유령과/유령이 되지 않기 위해 몸부림치는 몸들”은 바로 우리 자신(의 미래형이거나 현재형)인바, “시든 폐지 더미를 리어카에 싣고/까맣게 그을린 늙은” 타자의 형상으로 주체를 ‘통과하는’ 유령은 주체의 안과 밖을 하나로 잇는 현대문명 산(産) 뫼비우스 띠의 유전자 버전에 해당한다. 주체와 타자를 ‘죽어 있는 삶’으로 동질화하는 유령의 유전자는 ‘첨단의 거리’에서 주체의 ‘타자-되기’가 밟아나가야 할 안팎의 이중경로를 한눈에 보여준다. 현재 이영광이 전하는 실제 상황은 이러하다. “나는 또 이렇게 웅크린 채로/나타났다.”(「잠 깰 무렵」) 그리고 “사랑은 도처에서 좀비처럼 나타난다/하지만 사랑을 사랑해.”(「현기증」) 사랑은 이렇게 유령화하고 좀비화한 타자와 주체와 사랑으로부터 그 자체를 구해내는 또 한번의 ‘기술’이 되고 있다. “어떻게 하면 다시 나타날 수 있을까”(「유령 2」)를 고민하는 존재와 주체의, 타자(들)의, 사랑의.

 

 

4. 다시, ‘현재의 시’들을 기다리며

 

이것은 사랑을 사랑하는 일에 관한 노래이며 이야기이다. 사랑을 사랑함으로써 사랑하는 능력을 지속하고, 다시 사랑을 나타나게 하는 일에 관한 노래며 이야기다. 우리가 사는 오늘의 세계에서는 “(매연도 이제 공기니까)”(이영광 「물음」), 혼탁해진 사랑의 대기 속에서 사랑을 그리워하고 호흡하는 것이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닐 것이다. 이로써 시와 시인은 세계와 자신에 새로운 기원과 출발을 부여하는 또다른 ‘자체제작 소리’들을 만들어내게 될 것이며, “‘서정’이라는 ‘마지막 어휘’”의 지평을 현재형으로 또 한번 갱신하게 될 것이다.

‘미학적-감성적 체제의 매트릭스화’를 경계하며 2010년대 시가 나아가야 할 자리는 더 많은, 더 복잡한, 더 날카로운 인식과 상상과 감각을 요구한다. 그 자리는 이를테면, “자본과 지식의 새로운 융합”이 양산한 “사적인 저항의 마지막 한구석마저도 빼앗긴 절대적 프롤레타리아트”18와 “세계 바깥의 무산자인 시인”(심보선)이 양극에서, 도처에서, 다른 지점에서, 같은 지점에서 수시로 얼굴을 맞대는 자리여야 할 것이다. 모든 것들의 배치와 구조가 얼마든지 반대로 바뀔 수 있음을 생각하면서, 더 근원적인 것을 꿰뚫어보는 시선과 능력을 끊임없이 획득해가는 자리여야 할 것이다. 이를 도정일은, 동질화를 막는 아이러니에 의해 작동되며, 앞뒤를 동시에 보는 야누스의 비전처럼, 하나가 다른 하나를 비추게 하는 쌍방향 시각이며 과거-현재-미래를 현재에 동시화(同時化)하는 ‘통합적 상상력’19이라고 명명한 바 있다. 2010년대의 이름으로 오고 있는 미래는, 문학을 지탱하고 성장하게 해온 이 상상력이 부딪치고 싸워나가야 할 새로운 현재를 열어놓고 있다. 새로움이 새로움이기 위하여, 탈주가 탈주이기 위하여, 통찰이 통찰이기 위하여, 문학이 문학이기 위하여 더 깊고 넓게 투신해야 할 현재를.

다시, 여전히, 새롭게 현재의 시들이 씌어져야 할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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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로버트 모리스가 1969년에 만든 목재예술품의 제목인 「자체제작 소리를 내는 상자」(Box with the Sound of its Own Making)에서 따온 것이다. “이것은 특별한 목공 솜씨로 만들어진 것 같지 않은 목재 입방체로, 그 안에 제작시의 망치질과 톱질 소리를 들려주는 테이프가 들어 있다. 이 테이프는 자기 자신이 생겨나게 된 과정에 대한 상자의 기억과도 같으며, 이 작품은 적어도 마음과 몸의 문제에 대해 어떤 논평을 가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아서 단토 『예술의 종말 이후』, 이성훈・김광우 옮김, 미술문화 2004, 187면)
  2. 진은영 「감각적인 것의 분배」, 『창작과비평』 2008년 겨울호 80면.
  3. ‘자체제작 소리를 내는’ 시의 생산자로서, 세계와 시와 자신의 형성에 전격 개입한 자립적인 제작자-시인은 이전에도 있었다. (탈)근대에 대한 사유를 독창적인 시의 스타일로 변주한 김수영, 황지우, 최승자, 김혜순 등이다. 이들의 시는 시의 본질에 대한 근원적 성찰과, 자신의 시와 언어, 미학에 대한 엄중한 비평적 시선을 뼈대로 한, ‘기원’과 ‘현재’가 동일한 지평에서 충돌하는 시에 속한다. 이들은 비평적 문제 설정과 철학적 사유를 시의 추동력으로 삼은 ‘자체제작 소리를 내는 시’의 생산자로, 이들의 시가 상대적으로 실패작이 될 때는 비평적 문제의식과 철학적 사유가 시를 추월할 때였다. 2000년대 젊은 시인들 역시 스스로를 기원으로 한 새로운 시쓰기를 꿈꾸며, 비평적 시선과 언술을 시에 융합하였으며, 이와 유사한 양상을 보여주었다.
  4. 조강석 「‘서정’이라는 ‘마지막’ 어휘」, 『경험주의자의 시계』, 문학동네 2010, 45~58면 참조.
  5. 김홍중 「실재에의 열정에 대한 열정」, 『마음의 사회학』, 문학동네 2009, 411~25면 참조.
  6. 이와 함께, 흥미롭게도 2000년대 젊은 비평가들의 비평은 유례없을 정도로 ‘시적’이며 ‘미학적’인 것이 되었다. 신형철, 조강석, 허윤진 등 시에 필적하는 문체와 미학적인 태도를 지닌 비평들을 보라.
  7. 황현산 「문학의 정치성과 자율성」, 『현대시』 2010년 10월호 99~109면 참조. 이 글의 마지막 구절은 다음과 같다. “문학이 정치를 넘어선다고 하더라도 문학하는 사람은 정치적이어야 하”며, “순결한 글쓰기가 누릴 수 있는 진정한 긍지도 거기 있을 것이다.”
  8. 진은영, 앞의 글 참조.
  9. 진은영 「한 시인의 진지한 고뇌에 대하여」, 『창작과비평』 2010년 여름호 20~29면.
  10. 지젝은 구조적으로 양립 불가능한 두 현상에 관해 그 시차적 간극을 보존하면서 통찰하는 ‘시차적 관점’을 제안한다. 시차(視差, parallax)란 두 층위 사이에 어떠한 공통언어나 공유된 기반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결코 고차원적인 종합을 향해 변증법적으로 “매개/지양”될 수 없는 근본적인 이율배반(antinomy)을 뜻하는 것”으로, ‘시차적 간극’이라는 개념은 변증법에 되돌릴 수 없는 장애물을 배치하는 것이 아니라, 그 전복적 핵심을 간파할 수 있게 만드는 열쇠를 제시하는 것에 있다(슬라보예 지젝 『시차적 관점』, 김서영 옮김, 마티 2009, 13~14면 참조).
  11. 도정일 「문화영역의 세계화 또는 아큐 현상」, 『시장전체주의와 문명의 야만』, 생각의나무 2008, 72면.
  12. 슬라보예 지젝 『부정적인 것과 함께 머물기』, 이성민 옮김, 도서출판b 2007, 415~16면.
  13. 권혁웅 「멜랑콜리 판타곤」, 『우리는 매일매일』 해설, 120~24면 참조.
  14. 이 의문은 2000년대 젊은 시인들의 시에 인간의 삶과 현실을 거의 분, 초 단위로 바꾸어놓고 있는 기술문명에 대한 탐구가 미흡하거나 결여되어 있는 점과도 연결된다.
  15. 슬라보예 지젝, 앞의 책 416면.
  16. 이찬 「유령의 정치학, 또는 초혼(招魂)의 존재론」, 이영광 『아픈 천국』 해설, 창비 2010, 119~31면 참조.
  17. 이찬, 앞의 글, 129면.
  18. 슬라보예 지젝, 앞의 책 22면.
  19. 도정일 「밀레니엄, 오, 밀레니엄!」, 앞의 책 31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