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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예소설가 특집
배명훈 裵明勳
1978년 부산 출생. 2005년 과학기술창작문예 단편부문에 당선되어 작품활동 시작. 연작소설 『타워』, 소설집 『안녕, 인공존재!』 등이 있음. mh_bae@hotmail.com
예술과 중력가속도
※주의: 식사시간을 피해서 읽을 것
은경씨는 얼굴이 작고 몸매가 날씬하며 자세가 꼿꼿한데다 피부까지 뽀얘서 단연 눈에 띄는 미인이었다. 나는 황급히 도로변에 차를 세우고 사진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누구? 이 여자?”
그러자 엄마가 의기양양한 얼굴로 말했다.
“왜? 마음에 드나?”
“사진발이겠지.”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다시 차를 출발시켰다. 싸이드 미러를 흘깃거리는 모습이, 쑥스러운 마음에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것처럼 보이지 않을까 걱정스러웠다.
하지만 누가 뭐래도 내 결심은 확고했다. 나는 2년 동안이나 만난 여자가 있었다. 엄마는 소진씨가 썩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였지만 별로 신경 쓸 일은 아니었다. 엄마가 재산이 많은 것도 아니고 내가 나이가 적은 것도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저런 미인을 물어오다니, 놀라울 따름이었다.
엄마는 딱 세번만 자기가 소개해주는 사람을 만나보고 그래도 생각이 안 변하면 소진씨와 결혼해도 좋다고 말했다.
“결혼해도 좋고 말고가 어디 있는데? 엄마가 허락하든지 말든지 나는 무조건 결혼한다니까.”
엄마는 내가 그렇게 말하든 말든 가능한 모든 인맥을 총동원해서 괜찮은 여자를 물색하기 시작했다. 그래봐야 엄마들 취향이라는 게 다 뻔했기 때문에 나는 그다지 걱정이 안됐다. 첫번째 여자는 반듯한 집안의 착하고 귀여운 아가씨였고 두번째 여자는 지적이고 쾌활한 의사선생님이었는데, 아무리 봐도 나와 어울리기보다는 자기들끼리 더 잘 어울릴 것 같은 사람들이었다. 둘 다 엄마의 며느리 이상형에 너무나 잘 맞아떨어졌다는 의미다. 하지만 세번째 여자, 은경씨는 달랐다. 그렇게도 소진씨가 싫었을까, 엄마는 급기야 자기 이상형까지 포기한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 전략은 나쁘지 않았다.
“뭐 하는 여자라고?”
“아버지가 우주항공 무슨 박사라는데, 달에서 살다가 대학 들어가면서 이민 왔다 하던데.”
“대학 들어가면서가 아니라 달기지 폐쇄되면서 왔겠지.”
“아닌데. 대학 들어가면서 왔다던데.”
“그거나 그거나.”
“아닌데.”
엄마는 끝까지 우겼다. 엄마가 틀렸다는 것을 입증하려면 본인을 직접 만나 이야기를 듣는 수밖에 없었다. 나는 마지못해 약속을 정했다. 실물을 보고 싶어서가 아니라 진실이 궁금해서였다. 은경씨 본인이 이야기하는 진실은 이랬다.
“대학이요? 취직이 안되니까 대학을 가기는 가야겠더라고요.”
“왜 취직이 안돼요?”
“달에서 배운 걸 하나도 못 써먹게 돼서요.”
“왜요? 달에서 뭘 하셨는데?”
“예술을 좀 했거든요.”
“아. 예술.”
은경씨는 실물이 더 매력적이었다. 표정이 풍부하고 표현이 살아 있었다. 예술을 좀 하셨다니, 나는 저런 거만한 소리가 전혀 부담스럽게 들리지 않는 이유가 궁금했다. 아마 긴 목선 때문일 것이다. 다시 은경씨에게 물었다.
“예술계 쪽은 잘 모르지만, 무슨 텃세 같은 게 있었나 보죠? 달에서 활동하신 분들은 아무래도 이쪽에는 기반이 없으니까.”
“네? 텃세?”
은경씨는 그게 무슨 말인가 하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다가 이내 웃음을 터뜨렸다.
“아, 그런 게 아니고, 종목이 좀 그랬어요. 지구에서 하기는 좀 어려운 걸 했거든요. 텃세에 부딪힐 정도까지 가보지도 못했어요.”
은경씨가 웃는 모습을 보고, 나는 상황을 섣부르게 짐작하고 엉뚱한 말을 해버린 게 아니라 오히려 아주 적절하고 필요한 말을 끄집어내서 분위기를 한층 좋게 만드는 데 성공한 것만 같은 착각에 빠졌다.
“그래요? 달에서만 할 수 있는 게 있어요? 어떤 걸 하셨는데요?”
은경씨는 전쟁통에 잃어버린 자식 이름이라도 떠올리듯 힘없이 대답했다.
“무용이요. 현대무용.”
“아. 무용.”
“네, 무용. 근데 달에서 하던 무용은요, 지구에서는 절대 할 수 없어요. 중력 때문에 거기 무용이랑 여기 무용은 아주 달라요. 그래서요……”
“아, 중력. 그렇겠네요. 지금은 그럼?”
“지금도 무용수예요. 서울에 유학 와서 완전히 처음부터 다시 배웠어요. 그렇긴 한데.”
그렇기는 한데, 아마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중력이 여섯배나 큰 별로 이사 온다는 건 간단한 일이 아니다. 몸무게가 여섯배로 는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똑바로 서 있기도 힘들 텐데 춤을 추다니. 모르긴 해도 재활치료에 가까운 훈련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렇게 고생해서 무대에 선다 해도 다시 얻은 무대가 생각만큼 만족스럽지도 않았을 것이다.
세번째 만난 날, 은경씨는 옆에서 누가 보든 말든 신경도 쓰지 않고 보도블럭을 팔짝팔짝 뛰어다니면서 이렇게 말했다.
“여기서는 아무리 연습해도 점프가 이 정도밖에 안돼서……”
그 점프는 내가 본 것 중 가장 우아하고 시원한 점프였다. 그런데도 점프가 부족하다니. 달에서는 도대체 어디까지 올라갔다가 내려왔단 말인가. 나는 길고 가는 팔다리를 휘저으며 폴짝폴짝 뛰어다니는 은경씨 옆을 걷는 내 모습이 어쩐지 자랑스러웠다. 그래서 그날 저녁에 소진씨를 보고 이렇게 말했다.
“우리, 차분하게 서로에 대해 생각할 시간을 갖는 게 좋을 것 같아.”
사실 나에게 그런 시간 따윈 전혀 필요 없었다. 더 생각하고 말고 할 것도 없었다. 나는 이미 은경씨에게 푹 빠져 있었다. 하지만 소진씨는 정말로 우리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해 차분하게 생각해본 것 같았다. 일주일쯤 뒤에 긴 말 없이 헤어지자는 소리가 나온 걸 보면 소진씨는 우리가 처한 상황을 객관적으로 면밀하게 분석해서 결국 정답을 찾아내는 데 성공한 게 분명했다. 아무튼 현명한 여자였다.
은경씨와는 관계 진전이 빨랐다. ‘엄마가 시켜준 소개팅’의 유일한 장점은 교제중인 남녀가 자신들이 결혼을 전제로 만나는 것인지 아닌지 따지고 잴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저쪽에서 그만 만나자는 이야기가 나오지 않는 이상, 일은 엄마가 시켜주는 소개팅의 플롯대로 착착 진행되기 마련이었다. 서로의 의중을 떠보는 심리게임을 할 필요가 없어지자 서로의 진실한 내면도 더 빨리 드러났다.
은경씨의 내면은 예술혼으로 가득한 세계였다. 솔직히 나는 그 섬세한 영혼을 감당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었다. 왜 예술가들은 자기 내면의 가장 아름다운 부분을 소중히 간직하지 않고 저 밑바닥에다 아무렇게나 흘려놓은 것일까. 은경씨가 ‘인간 정신의 진정한 아름다움을 건져올리기 위해’ 한번씩 고뇌와 쓸쓸함 그리고 절망으로 가득 찬 내면의 바닥 깊은 곳까지 내려갔다가 올라올 때마다 나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저렇게 아름다운 피조물이 단지 밑바닥으로 내려가기 위해 저렇게 어마어마한 양의 술을 저 조그만 입으로 들이붓는단 말인가.
엄마는 당신의 소중한 외아들에게 직접 소개한 그 우아한 피조물의 내면세계가 코스모스보다는 카오스에 가깝다는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엄마는 은경씨를 마음에 쏙 들어했다. 나도 마찬가지다. 나는 내가 미친 줄 알았다. 우는 여자가 지껄이는 이야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귀기울여 듣다니. 게다가 그 말이 도대체 무슨 소리인지 이해하려고 애쓰기까지 하다니. 그건 사랑이 분명했다.
그전까지만 해도 나는 은경씨에 대한 나의 사랑이 단지 그녀의 우아한 외모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했다. 물론 그 생각 때문에 죄책감이 들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게 뭐 어때서. 하지만 어느 한심한 영혼이 다른 곳도 아닌 바로 자기 자신의 내면을 도통 갈피도 못 잡고 헤매는 꼴을 목격하고도 전혀 짜증이 느껴지지 않는 것을 보고는 생각이 바뀌었다. 내 사랑은 은경씨의 외모에서만 비롯된 게 아니었다. 그렇다고 내면에서 오는 것도 아니다. 결국 내면도 외면도 아닌 희한한 곳에서 왔다는 이야기인데, 그게 어딘지는 알 수가 없었다. 친구들은,
“그냥 너 변태야.”
하고 말했지만 그럴 때마다 나는,
“변태가 뭐 어때서!”
하고 짧게 대꾸했다. 은경씨가 화요일이나 수요일부터 시작된 깊고 깊은 내면의 고독에서 벗어나 며칠 만에 처음으로 얼굴에 옅은 미소를 보이던 순간. 그 순간의 희열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내 사랑의 본질을 설명해봐야 무슨 소용이 있을까. 그냥 미친 걸로 해두는 편이 나았다.
은경씨가 멀쩡해지면 우리는 자주 사람들을 만나러 다녔다. 은경씨에게는 당연히 달에서 온 친구도 있었다. 그중에서도 나는 장창석이라는 무용수가 유난히 신경쓰였다. 달예술가협회 임원이라는데, 잘은 몰라도 달에서 살던 시절에 은경씨와 무슨 일이 있었던 게 분명했다. 몸을 섞었을지도 모른다. 몸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니까. 그의 팔다리 길이와 시원시원한 손동작이 눈에 거슬렸지만 더 파고들면 집착이 될까봐 그쯤에서 관심을 끊었다. 아무래도 좋게 헤어진 사이 같지는 않았다. 다행이었다.
동료들이 보기에 은경씨는 어떤 사람이냐고 물었더니 그는,
“은경이요? 우리의 영원한 여신이고, 눈물 많은 예술가죠. 눈물이 아주 많은.”
하고 대답하고는 다른 곳으로 화제를 돌렸다. 하지만 나는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 것 같았다. 눈물이 아주, 대단히, 매우, 굉장히, 지겹도록 많은 예술가! 너도 된통 당해봤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은경씨네 부모님도 그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특히 은경씨 어머니는 한편으로는 딸을 대단히 자랑스러워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내가 몇달이나 은경씨 곁에 머무르는 게 훨씬 더 장하다는 눈치였다.
“저, 그런데요, 왜 그렇게 저를 대견스러워하시나요?”
“아니, 그냥 저, 우리 애가 세상을 많이 못 보고 자랐어. 사람 대하는 것도 서툴고. 자네가 많이 도와주게.”
이상한 대답이었다. 나는 뭔가 속고 있는 게 아닌지 두려웠다.
‘이거, 하자 있는 물건 아냐?’
은경씨네 부모님은 나이보다 더 늙어 보였다. 젊은 사람이야 달에서 태어났더라도 적응기간만 거치면 지구 중력에 거의 완벽하게 적응하는 경우가 종종 있지만 노인에게는 아무래도 쉬운 일이 아닌 모양이었다. 그래서인지 지구로 돌아온 달 거주자 대부분은 불쌍해 보였다. 어깨에 무거운 짐이라도 진 것처럼 다들 축 늘어져 있어서 더 그랬다. 우리 눈에는 그 짐이 그저 실체 없는 은유에 불과할지 모르지만, 그들에게 지구의 중력은 엄연히 실체를 가진 짐이다. 아틀라스 같은 거인의 어깨 위가 아니라 힘없고 구부정한 노인네의 발아래 놓인 지구라는 이름의 짐.
나는 은경씨가 어깨에 보이지 않는 짐을 지고 공연하는 모습을 여러번 보았다. 그때마다 은경씨는 제일 좋은 자리를 마련해주었다. 하지만 평생 무용공연이라고는 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좋은 자리가 별로 필요없었다. 누군가 자리 값이 아깝지 않을 만큼 잘 감상해줄 사람이 있을 텐데. 사실 나는 스토리 없는 공연은 도무지 이해가 안됐다. 남의 데이트에 눈치 없이 낀 스무살짜리 남자애처럼 어색한 기분으로 무대 위의 은경씨를 멀뚱멀뚱 바라볼 뿐이었다.
미모로 따지면 단연 은경씨가 주인공이었지만, 춤 실력만 놓고 보면 솔직히 그 정도는 아니었다. 그래도 내 눈에는 은경씨가 제일 나았다. 과거 따위 아무래도 좋았다. 무용수가 춤을 못 추는 것쯤 사소한 결함에 불과했다. 가만히 있어도 예술인데 무엇이 더 필요하단 말인가. 하지만 은경씨는 늘 예술가로 평가받고 싶어했다.
“오늘 나 어땠어요?”
“최고였어요.”
“그래요? 어떤 부분이요?”
그렇게 구체적으로 물으면 말문이 막혔다. 그렇다고 몸매와 피부가 환상인 것 같다고 대답할 수는 없었다.
“다요.”
“에이. 그게 뭐야.”
늘 그렇게 실망만 하면서도 은경씨는 공연 때마다 내가 꼭 와주기를 기대했다. 언젠가는 나 같은 사람한테도 춤을 보는 안목이라는 게 생길 거라고 믿는 걸까. 아니면 그냥 내가 지켜봐주는 게 든든한 걸까. 아무튼 은경씨가 표를 건네며 꼭 와달라고 말하면 나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자신있게 대답했다.
“당연하죠!”
“꼭이에요. 약속했어요!”
물론 약속을 못 지킬 때도 있었다. 진짜로 출장을 가는 날이나, 혹은 가짜로 출장을 가야 하는 날. 하지만 나는 대체로 충성을 다하는 편이었다. 그리고 행복했다.
그러던 어느날이었다. 결혼날짜가 얼추 잡혀가던 무렵이었다. 은경씨가 나에게 티켓 한장을 내밀었다.
“또 공연이네요.”
“네.”
“표정 보니까 보통 공연이 아닌가 봐요. 중요한 거죠?”
“네. 세상에서 제일 중요해요. 올 거죠?”
티켓에 적힌 날짜를 확인했다. 석달 뒤였다.
“당연하죠.”
그날 무슨 일이 생길지는 아무도 몰랐다. 하지만 그 상황에서 굳이 그 말을 할 필요는 없었다.
“그날은 무조건 와야 돼요. 바쁜 일이 생겨도 무조건 와야 해요.”
“그럼요. 당연하죠. 그런데 무슨 공연인지 물어봐도 돼요?”
“비밀이에요.”
비밀이라고는 했지만 티켓 한쪽에 설명이 다 나와 있었다. ‘무중력의 경이(Weightless Wonder)!’라는 제목의 외계예술가협회(The Association of the Outer Space Artists) 설립 축하공연이었다. 외계인 은경씨. 공연은 3부로 나뉘었는데, 화성신체예술동맹과 지구궤도예술가조합이 1부와 2부 공연을 맡고 달예술가협회가 3부를 맡았다. 언뜻 이해가 안 갔지만 공연장은 화성, 지구궤도, 달의 공연 환경을 완벽하게 재연한 새 무대라고 했다.
“달에서 하던 공연을 재연하는 거군요.”
“네!”
은경씨는 얼굴 가득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환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나도 기뻤다.
“그럼 진짜 점프를 볼 수 있겠네요.”
“네! 근데 큰일이에요. 지구에 적응하느라 다리가 튼튼해져서 지붕까지 날아오를지도 몰라요.”
“우와, 힘 조절만 하면 진짜 환상적인 점프가 나오겠는데요.”
“그럼요! 당연하죠!”
“근데 무대는 이번에 새로 짓는 거예요? 어딘데요?”
은경씨는 그냥 웃기만 했다. 순간, 공연장이 외국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티켓 앞뒷면이 영어로 돼 있었기 때문이다. 은경씨는 자신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미국이에요.”
미국. 은경씨에게서 주워들은 말들을 떠올렸다. 지구궤도예술가조합은 사람도 많고 돈도 많았다. 달 기지는 각국의 달 자원 개발예산이 확 줄어드는 바람에 운영 자체가 망명정부 수준이었고, 화성 정착지는 거리가 너무 멀어서 지구에서는 큰 힘을 쓸 수 없었다. 하지만 지구궤도를 도는 우주정거장은 세계경제 침체에도 그다지 큰 타격을 입지 않고 살아남아서 꾸준히 영향력을 행사하는 모양이었다. 나사(NASA)에서도 과학문화 진흥 명목으로 돈을 대는 경우가 많았고, 그러다보니 새 공연장도 미국에 지은 모양이었다. 부연설명이라도 하듯 티켓 한구석에 나사 로고도 찍혀 있었다.
“아, 그래요? 미국이라. 좋아요. 한번도 안 가봤는데 이번 기회에 한번 가죠.”
은경씨가 안도의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나는 그러지 못했다. 사실 나는 비행기가 싫었다. 그래도 은경씨에게 그 이야기를 하지는 않았다. 희생하기로 한 것이다. 사랑이 틀림없었다. 희생이라니!
결혼이 늦춰질 것 같았다. 하지만 기우였다. 부모님은 결혼날짜를 공연 열흘 뒤로 잡았다. 미국까지 간 김에 공연 끝나자마자 둘이서 신혼여행부터 다녀온 다음 결혼식을 올리라는 이야기였다.
“엄마도 참 참신도 하시네. 무슨 신혼여행부터 가고 결혼식을 나중에 해?”
말은 그렇게 했지만 나도 싫지는 않았다.
하지만 아주 약간 신경이 쓰이는 부분이 있었다. 내가 은경씨네 부모님께,
“그럼 두분도 공연 보러 같이 가시죠. 자식들 있을 때 오랜만에 여행하시는 것도 좋잖아요.”
하고 마음에 없는 소리를 했을 때 두 사람이 보인 반응 때문이었다. 특히 장인은,
“절대 안되지. 신혼여행인데 둘이 갔다와. 눈치 없다고 욕먹어.”
하고는 정색하고 사양하는 것이었다. 오고간 대화로만 보면 별로 이상할 것도 없었지만 그렇게 펄쩍 뛸 것까지는 없었는데 아주 질색을 하고 반대하는 모습이 어쩐지 불안하게 느껴졌다.
“왜요? 그래도 흔치 않은 기횐데 직접 가서 보시면 좋죠.”
“그러니까 자네는 꼭 가서 보고 와. 우리는 많이 봤어.”
“그래도 혼자 가면 심심하잖아요.”
“그래도 신혼여행이잖아.”
뭔가 속고 있는 기분이었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장인 말대로 어쨌거나 신혼여행이었으니까. 앞으로도 쭉 그렇게 젊은 사람들 일에 끼어들지 말고 뒷방 한구석에서 조용히 지내셨으면 좋겠다 싶었다. 물론 부모로서 아무런 사심 없이 그저 자식을 돕기 위해 가끔 경제적 지원을 하겠다고 나선다면 인도적인 차원에서 받아들일 용의는 있었다.
은경씨가 연습 때문에 곧장 미국으로 떠나버렸으므로, 우리가 꼭 해야 하는 일을 제외한 나머지 결혼준비는 양가 부모님이 떠맡아야 했다. 어차피 순서가 바뀐 김에 웨딩촬영 같은 귀찮은 일들은 나중에 하기로 했다. 그런데도 이것저것 챙길 일이 많았다.
그렇게 공연날짜가 다가왔다. 나는 결연한 심정으로 비행기를 타고 미국으로 갔다. 공항에는 마중 나온 사람이 없었다. 호텔에서 조용히 하룻밤을 지내고, 다음날 택시로 공연장까지 혼자 찾아가야 했다. 택시에 오르자마자 나는 공연장 위치가 적힌 종이를 기사에게 내밀었다. 그러자 택시가 이상한 곳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그것도 시내 중심가에서 멀찍이 떨어진 인적 없는 곳으로. 뭔가 잘못됐구나 싶었다.
그렇게 한참을 간 뒤에야 저 멀리 비행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왜 또 비행장이지? 엉뚱한 데로 온 게 아닌가 걱정스러워졌다. 솔직히 조금은 무섭기도 했다. 그러나 그 순간, 다행스럽게도 은경씨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나를 마중하러 정문 앞까지 나온 것이었다.
“무서워 죽는 줄 알았잖아요. 공연장이 왜 이런 데 있어요?”
“좀 외지죠? 여기, 나사(NASA) 시설이거든요. 나사 우주쎈터. 오느라 고생 많았죠?”
은경씨는 나를 관람객 대기장소로 안내한 다음, 리허설을 해야 한다며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이제야 만났는데 나는 또 혼자였다. 그렇게나 근사한 애인이 있는데도 공연장을 찾을 때면 나는 늘 혼자 남겨지곤 했다. 게다가 그런 낯선 곳에서 홀로 남겨지는 기분은 한국에서 혼자가 될 때와는 또 달랐다.
주위를 둘러보니 한국사람인 게 분명한 몇몇이 눈에 띄었지만 굳이 가서 말을 걸고 싶지는 않았다. 언제까지 대기하라는 걸까. 나는 멍하니 앉아서 창밖을 바라보며 무슨 일이든 일어나기를 기다렸다. 심심했다. 테이블에는 이상한 비행기 사진이 놓여 있었다. 몸통이 보통 비행기보다 몇배나 뚱뚱한 고래를 닮은 비행기였다.
나는 속으로 한참 동안이나 그 비행기를 비웃어주었다. 바보. 아둔한 놈. 이상한 놈. 심심해서 죽을 것만 같았다.
한참 뒤에야 사람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어디론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남들이 하는 대로 가방을 보관함에 맡긴 다음 다시 그들을 따라 건물 밖으로 나갔다. 그러자 조금 전에 사진으로 본 못생긴 비행기가 활주로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는 차례로 비행기에 올랐다. 또 어디론가 가야 하는 모양이었다. 또 비행기를 타야 하다니, 너무 심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사실 그만큼 기대도 컸다. 어쩌면 공연 자체보다 나사 기술로 만든 무중력 공연장이 더 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중력을 마음대로 다루다니. 그런 놀라운 일이 벌써 가능해졌다니!
계단을 오르는데 승무원들이 공연 티켓을 확인했다. 비행기 안으로 들어서자 검은 천으로 표면을 마감한 벽이 나타났다. 여객기가 아니라서 그런지 객실로 가는 입구가 영 이상한 구조였다. 오른쪽으로 난 통로를 따라 한참을 걸어가자 안쪽으로 통하는 문이 보였다. 나는 사람들을 따라 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눈앞에 묘한 광경이 펼쳐졌다.
비행기 내부는 생각보다 훨씬 넓었다. 무엇보다 천장이 높았다. 겉모습이 그렇게 우스꽝스럽게 생긴 데는 다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둥근 아치 모양의 천장은 높이가 적어도 7미터는 돼 보였고, 뒤쪽에서부터 3분의 2 정도는 좌석이 들어차 있었다. 그리고 나머지 3분의 1에는 좌석이 없었다. 대신 이상한 장치들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천장에 매달린 조명기기에 음향기기까지. 아무리 봐도 무대라고밖에는 볼 수 없는 시설이었다.
뒤에서 사람들이 줄지어 들어왔다. 다른 사람들을 흘끗 보니 다들 공연 티켓에 표시된 자리를 찾아가는 듯했다. 나도 티켓을 꺼내 들고 내 자리를 찾아갔다. 늘 그렇듯 제일 좋은 자리였다. 그러니까 그곳이 바로 그날의 공연장소라는 의미였다. 무대가 좀 이상하긴 해도 어디론가 더 날아갈 필요가 없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비행기를 개조해서 만든 공연장이라니, 괜찮은 아이디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것은 완전히 착각이었다. 사람들이 모두 자리에 앉자 비행기가 슬슬 주기장(駐機場)을 빠져나가더니 이내 활주로 끝에서 이륙 준비를 하는 게 아닌가. 그러더니 설마 하는 내 생각을 비웃기라도 하듯 프로펠러를 맹렬하게 회전시키며 활주로를 달리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이륙이었다. 당황스러웠다. 뭐 하자는 걸까. 내리고 싶었다. 납치당하는 기분이었다. 은경씨나 다른 무용수들이 이 비행기에 타기나 했는지 의심스러웠다.
비행기는 그렇게 한참 동안이나 위로 올라가더니 꽤 높은 곳에 다다른 뒤에야 수평으로 자세를 잡았다. 창문이 모두 막혀 있어서 얼마나 높이 올라갔는지 알 수 없었다. 잠시 뒤에 승무원 몇명이 무대에 올라가더니 안내방송에 따라 긴급상황 대처요령을 설명했다. 그러고는 구명조끼 사용법을 설명하더니 갑자기 이상한 비닐가방을 꺼내 들었다. 의자 밑에 있으니 모두 가방 위치를 확인하라고도 했다. 하지만 나는 영어를 썩 잘하는 편이 아니라서 손짓 발짓만으로는 도대체 어디에 쓰라고 준 물건인지 알 수가 없었다. 의자에 끈으로 고정된 것을 보면 개인용 도구가 분명했고, 입구에는 특별한 잠금장치가 없어서 두 손으로 열어젖히면 쉽게 열리고 그냥 두면 저절로 닫혔는데, 그것 말고는 아무것도 알 수가 없었다.
승무원들이 자리로 돌아가자 조명이 어두워지며 안내방송이 나왔다. 안전벨트를 풀지 말라는 내용 같았다. 공연이 곧 시작될 모양이었다.
‘설마! 이런 데서? 무중력 공연장은 어쩌고?’
잘 찾아보니 좌석 앞쪽에 공연 프로그램이 꽂혀 있었다. 1부는 ‘화성침공’이라는 제목의 공연이었다. 음악이 흘러나왔다. 이륙할 때부터 느꼈던 점이지만, 방음이 잘 되는 모양인지 엔진 소음이 생각보다 적었다.
그리고 막이 열렸다. 세명의 남자 무용수가 무대 오른쪽에서 뛰어나와 팔다리를 이리저리 비틀어 댔다. 그 순간 우리가 탄 비행기가 아래로 떨어졌다.
“어어어!”
나도 모르게 소리가 튀어나왔다. 그러자 옆자리에 앉은 백인 중년 부부가 내 쪽으로 절도있게 고개를 돌리더니 단호한 표정으로 검지를 입술에 갖다대며 “쉿!” 하는 소리를 냈다. 멸시당한 기분이었다. 하지만 놀란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여기저기에서 어어어 하는 소리가 튀어나왔다. 난기류인가.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비행기라는 게 한번 흔들리기 시작하면 배가 흔들리는 것과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심하게 요동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무대 위를 보니 무용수들은 그 와중에도 아무렇지도 않은 듯 춤을 추고 있었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자세히 보니 그들은 아무렇지도 않은 게 아니라 오히려 자신감 넘치는 동작으로 무대를 휘젓고 있었다. 여자 무용수 네명이 왼쪽에서부터 무대로 날아 들어왔다. 실제로는 가볍게 걷고 있을 뿐인데도 보기에는 마치 발이 땅에 닿지 않고 스르르 미끄러지는 것처럼 보였다.
그 순간 뭔가가 시선을 잡아끌었다. 무대 위쪽에 부착된 작은 모니터에 ‘1/3G=Martian Gravity’라는 표시가 들어왔다. 화성 중력이라는 뜻이었다. 나는 화성의 중력이 지구 중력의 1/3밖에 안된다는 사실을 그때 처음 알았다. 그리고 크게 실망했다. 나사의 최첨단 무중력 기술이 겨우 이런 거였다니.
하강을 시작한지 2분이나 지났을까, 좀더 본격적으로 실망할 틈도 주지 않은 채 비행기가 서서히 기수를 쳐들었다. 그러자 모니터에 표시된 중력 수치도 차츰 증가했다. 무대에 불이 꺼졌다. 음악은 멈추지 않았다.
1G=Earth Gravity
1.01G
1.02G
……
비행기는 지구 중력의 두배에 도달하고도 한참이나 더 고도를 높였다. 잠시 후 기체가 수평으로 자세를 회복하자 다시 무대에 불이 들어왔다. 그러고는 아니나 다를까 비행기가 다시 한번 덜컥 하강을 시작했다. 지구 중력의 3분의 1인 화성 중력에 다다를 때까지 아래로 곤두박질치기 위해서였다. 여기저기에서 사람들의 탄성이 들렸다. 감탄이라기보다는 탄식에 가까운 소리였다. 끙.
처음에는 앞사람 때문에 무대가 잘 안 보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비행기가 기수를 아래로 향하는 동안 자연스럽게 객석에 경사가 생겼다. 자세히 보니 무대도 벽 쪽보다 객석을 향한 쪽이 약간 높아서 하강하는 동안에만 정확히 수평을 유지하도록 만들어진 모양이었다.
무용수들이 가벼운 발걸음으로 무대를 뛰어다녔다. 바른 자세로 도약한 다음 긴 체공시간을 활용해 내려오는 동안에만 두 바퀴 반을 회전하는 동작이었다. 독특하고 아름다운 동작이었다. 하지만 또 2분쯤 뒤에 무대 조명이 어두워지고 비행기가 서서히 위를 향하자, 나는 결국 이게 도대체 뭐 하는 짓인가 하는 생각이 들고 말았다. 슬슬 속이 울렁거렸기 때문이었다.
허둥지둥 공연 프로그램을 펼쳤다. 1부만 해도 그런 짧은 무대가 무려 아홉개나 됐다. 앞으로 일곱번을 더 해야 쉬는 시간이라는 뜻이었다. 누군가 괴성을 질렀다. 나도 그러고 싶었다. 하지만 참았다. 공연을 망치고 싶지는 않았다. 적어도 은경씨의 무대가 무사히 지나가기 전까지는 그 어떤 문제도 일으키고 싶지 않았다.
비행기는 마치 40일 밤낮으로 내린 비 때문에 생겨난 거대한 파도 위를 정처 없이 떠가는 노아의 방주처럼 올라갔다 내려가기를 반복했다. 무대는 아름다웠지만 객석은 아비규환이었다. 생전 처음으로 인간의 육체가 만들어내는 순수한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알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것은 예술이 주는 감동의 파도였다. 그와 동시에 가슴 한구석에서부터 거대하고 압도적인 멀미가 파도처럼 밀려왔다.
백인 노인 하나가 안전벨트를 풀고 화장실 쪽으로 달려가다가 중심을 잃고 바닥에 뒹굴었다. 아무래도 지구 노인이 화성 중력에 적응하기란 쉬운 일이 아닌 모양이었다.
나는 눈을 감았다. 공연이고 뭐고 도저히 눈을 뜰 수가 없었다. 눈을 감고 조용히 파도를 느꼈다. 실로 거대한 파도였다. 비행기가 서서히 파도를 따라 위로 올라갔다. 얼마 되지 않아 정점에 이르렀다. 정점을 지나자 비행기는 머리를 아래로 푹 숙였다. 푹. 아주 푹.
끙.
멀미였다. 그것도 생애 최대의 멀미였다. 객석 곳곳에서 고통스러운 신음이 새어나왔다. 죽어버릴 것 같았다. 하지만 은경씨가 나올 때까지는 살아남아야 했다. 은경씨의 점프를 볼 때까지는 어떻게든 버텨야 했다. 그 뒤에는 죽어도 별 수 없었다. 그런데 진짜로 죽을 것 같았다. 나는 그제야 좌석마다 부착되어 있던 비닐가방이 어디에 쓰는 물건인지 알 것 같았다. 그걸 보는 순간 눈치를 챘어야 했다. 그때 비행기에서 뛰어내렸어야 했다.
눈을 뜰 수가 없었다. 못 볼 꼴을 볼 것 같았다. 신나는 음악이 흘러나왔다. 도대체 누구 좋으라고 흘러나오는 음악일까. 살짝 눈을 뜨고 무대 쪽을 확인했다. 그리고 깜짝 놀랐다. 화성인들은 아직도 공연을 하고 있었다. 팔다리를 비비 꼬고 앞구르기로 공중을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여전히 활기찬 동작이었다. 하지만 몇몇은 얼굴이 파랬다. 나는 다시 눈을 감았다. 제발!
시간이 얼마나 지나갔는지 알 수 없었다. 그렇게 드디어 1부가 끝났다. 영원히 활활 타오르는 지옥불길에 아주 잠깐 동안 쉬는 시간이 허락된다면 딱 그런 느낌일 것 같았다. 객석 조명이 밝아지고 승무원들이 복도를 오가며 재빠른 동작으로 청소를 했다. 비행기는 수평을 유지한 채 아무런 흔들림 없이 평화롭게 날아갔다. 쉬는 시간은 20분이었다. 공연 프로그램에는 무중력 공연장이 다음 공연을 준비하느라 진행이 매끄럽지 못하니 양해하라고 적혀 있었다. 연료 공급이 필요하다는 걸 보니 공중급유라도 할 모양이었다. 물론 나는 그 시간이 고마웠다.
승무원들이 멀미약을 나눠주었다. 차라리 수면제를 나눠줬으면 좋겠다 싶었다. 청소가 끝날 무렵 고개를 들고 주위를 살폈다. 박수를 쳐가며 공연을 끝까지 감상한 사람도 있었지만 객석은 대체로, 칸나에 전투에서 한니발이 이끄는 카르타고군에 대패한 로마군 진영처럼 처참했다. 도망칠 곳도 없고 싸울 만한 공간도 없이 사방이 완전히 포위당한 채 허망하게 섬멸당한 객석을 보자 한숨이 나왔다.
2부 공연은 제목이 아예 ‘제로 G’였다. 쉬는 시간 20분이 지난 다음에는 무중력을 겪어야 한다는 뜻이었다. 공연 진행요원들이 무대 경사를 조절했다. 하강할 때 무대가 수평을 유지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는 사이 덧없이 20분이 다 흘렀다.
객석에 불이 꺼지자 공포가 엄습했다. 사람들은 제자리로 돌아가 안전벨트를 맸다. 음악 소리에 등골이 오싹했다.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무대가 밝아졌다. 그러자 비행기가 아까보다 훨씬 더 빠른 속도로 하강했다. 나는 모니터에 표시된 중력이 0으로 내려가는 것까지 확인한 다음 눈을 딱 감았다. 0G는 분명 인간이 우주정거장에서 느끼는 중력의 크기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사람이 높은 곳에서 떨어져 죽을 때 느끼는 중력의 크기이기도 했다.
그러니까 그것은 추락이었다. 몸이 붕 떠오르는 느낌 따위는 들지 않았다. 그냥 자유낙하였다. 30초쯤 뒤에 비행기가 하강을 멈추자 이제는 몸이 갑자기 아래로 쏠리는 느낌이 들었다. 비행기는 곧바로 기수를 들어 위로 올라갔다. 중력이 1G 이상까지 올라갔다. 그러고는 그 기세 그대로 거의 2G 근처까지 올라갔다가 서서히 지구 중력을 회복한 다음,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두번째 무대를 위한 중력가속도에 돌입했다. 비행기가 다시 아래로 곤두박질쳤다는 뜻이다.
눈을 감기 전에 아주 잠깐 무대 쪽으로 눈을 돌렸다. 거의 다 벗은 몸에 바디페인팅을 한 여자들이 느릿느릿한 동작으로 공중을 떠다녔다. 여섯개의 육체가 위아래의 구분이 없는 공간을 비스듬한 각도로 서서히 자전하고 있었다. 보기만 해도 어지러운 광경이었다. 곧바로 눈을 감았지만 이제는 생각만 해도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2부 공연은 무대 하나하나가 짤막한 대신 그만큼 강하 횟수가 많았다. 비행기가 무려 열여덟번이나 올라갔다 내려가기를 반복하는 통에 객석은 아수라장이 되고 말았다. 나 역시 하마터면 의자에 붙어 있는 ‘개인장비’를 사용할 뻔했다. 막상 입구를 열고 보니 겉보기와 달리 용량이 장난이 아니었다. 주최측에서는 이 사태를 예상했다는 의미였다. 당연한 일이었다. 그걸 몰랐을 리가 없다. 어떻게 모를 수 있단 말인가. 욕이 튀어나왔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2부의 마지막은 머리 위로 우산을 펼쳐든 열두명의 무용수가 공중에 몸을 완전히 띄운 채 각기 다른 자전축을 중심으로 재빠르게 회전하는 화려한 무대였다. 젠장. 눈이 핑핑 돌았다. 아예 눈을 뜨지 말았어야 했다. 맨땅에서 봐도 어지러울 것 같은 광경이었다.
2부가 끝났는데도 관객들은 아무도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너무나 압도적인 공연에 다들 할 말을 잃은 표정이었다. 하나같이 얼굴에 핏기가 없었다. 위대한 예술이 전해주는 순수한 감동 앞에 인종과 피부색의 차이는 아무 의미가 없었다. 모두가 새파랬다.
20분 뒤에 3부 공연이 이어진다는 안내방송이 나오자 멀미를 심하게 한 노인네들이 소리를 질러댔다. 폭동이 일어날 것 같았다. 나도 소리를 지르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아직 은경씨가 안 나왔기 때문이다. 내가 누구 때문에 참고 기다렸는데, 은경씨 무대도 못 보고 공연이 끝나버리면 그 죽을 고생이 모두 아무것도 아닌 게 된다. 나는 가슴 한구석에서 꿈틀대는 살의를 간신히 억눌렀다.
승무원들이 나섰지만 사태는 쉽게 진정되지 않았다. 결국 건장한 체격의 진행요원들이 나서서, 저승 문턱에 한발을 걸쳤다가 돌아온 듯 퀭한 얼굴의 노인네들을 진정시켰다. 아니 진압했다. 그들은 공항에 내리자마자 경찰을 부를 기세로 한참을 중얼거리며 자리로 돌아갔다.
우여곡절 끝에 무대 기울기 조정이 끝나고 예정보다 10분 늦게 3부 공연이 시작됐다. 달 공연이었다. 달의 중력은 지구의 6분의 1이어서 무중력 상태보다는 견디기가 수월할 것 같았다.
오산이었다. 음악이 흐르고 조명이 바뀌자 은은한 달빛이 객석에 퍼졌다. 가을밤 야외공연처럼 감미로운 풍경이었지만 도저히 오래 눈을 뜰 수가 없었다.
우웩.
결국 ‘개인장비’를 열었다. 우웩.
눈이 안 떠졌다. 무대는커녕 주위를 둘러볼 수조차 없었다. 하지만 은경씨가 나오는 장면을 놓치지 않으려면 잠깐씩이라도 눈을 뜨고 무대를 살펴야 했다.
3부 ‘월희(月姬, Chandramukhi)’는 달에서 가장 유명한 레퍼토리이고 아까와는 달리 스토리가 있는 무대였다. 그중 유명한 장면만 1분 30초씩 잘게 잘라서 여덟번으로 나눴기 때문에 스토리만 알면 찬드라무키 역을 맡은 은경씨가 언제쯤 등장할지 예상할 수 있었다. 하지만 불행히도 나는 그 이야기가 어떻게 진행되는지 전혀 몰랐다. 나뿐 아니라 지구인 대부분 그 이야기를 몰랐다. 그래서 자주 무대를 확인해야 했다. 아주 짧은 순간이라도 자꾸만 눈을 떠야 한다는 의미였다.
춤은 회전보다는 수직 방향의 이미지에 초점을 맞춘 듯했다. 일단 무용수들이 다들 키가 크고 팔다리가 길어서 아래위로 뻗기만 해도 춤의 주제를 알 것 같았다. 첫 무대가 끝나기 직전에 드디어 은경씨가 등장했다. 나는 눈을 크게 떴다. 하지만 그 첫 무대에서는 아무도 점프를 하지 않았다. 대신 가볍고 따뜻한 멜로디에 맞춰 통통 튀듯 가벼운 걸음으로 무대를 오갈 뿐이었다. 다들 땅에 발을 딛고 느린 음악에 맞춰 몸을 기묘하게 비비꼬는 데만 열중해 있었다. 팔다리를 위아래로 계속 뻗어대는 걸 보니 좀 있으면 점프가 나오기는 나올 것 같았다.
비행기가 다시 기수를 들었다. 눈을 감았다. 욕설이 들려왔다. 여러 외국어에 난생처음 듣는 언어도 끼어 있었지만 어쩐지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것만 같았다. 견디기 힘들 만큼 거대한 멀미가 밀려들어왔다가 밀려나갔다. 꾹 참았다. 두 뺨에서 핏기가 싹 가시는 게 느껴졌다. 객석을 비추는 은은한 달빛이 어쩐지 신경쓰였다. 나는 지금 어떤 꼴을 하고 있을까? 무대에서 객석이 보이지는 않을까? 은경씨는 내 자리가 어딘지 알 텐데, 눈을 감은 내 모습을 보고 실망하지는 않을까?
비행기가 정점에 이르렀다. 그리고 곧 아래로 떨어졌다. 다음 무대가 열린다는 뜻이었다. 나는 눈을 번쩍 떴다. 은경씨는 없었다. 속이 뒤집혔다. 다시 눈을 감았다. 잠시 후, 첫 장면 마지막에 나왔던 발랄한 멜로디가 들려왔다. 음악에 전혀 조예가 없는 내가 듣기에도 바로 월희의 테마인 듯했다. 눈을 떴다. 은경씨였다. 그런데 젠장. 멀미였다. 우웩. 눈을 반쯤 감았다. 무용수들이 제자리에서 빙글빙글 돌았다. 은경씨는 세명의 월희 중 하나였다. 은경씨가 내 쪽을 바라보았다. 슬픈 눈이었다. 아, 어쩌자고. 연기의 일부일까, 아니면 나한테 보내는 섭섭한 눈빛일까?
우웩. 은경씨는 빛이 났다. 지구에서 본 은경씨와는 또 달랐다. 지구인들의 무대에서와도 전혀 달랐다. 내 온 신경이 무대로 빨려들어갔다. 그런데 무대는 자꾸만 아래쪽으로 흘러내려갔다. 나도 거대한 멀미의 파도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러자 갑자기 그런 생각이 떠올랐다.
우웩. 우웩. 우웩.
생각은 무슨!
나는 아예 위를 토해버렸다. 위가 없는데도 여전히 멀미가 났다. 차라리 죽여라 죽여, 하고 눈을 감았다. 점프는 무슨! 이 마당에 공연은 무슨 공연이야! 눈을 꼭 감았다. 공연은 그냥 흘려보냈다. 은경씨가 보든 말든 상관없었다. 비행기는 몇번이나 올라갔다 내려가기를 반복했다. 나는 거의 죽을 것만 같았다.
그런데도 자꾸만 음악소리가 들려왔다. 귀가 한껏 예민해졌다. 귀는 소리만 듣는 게 아니라 중력이 어느 방향으로 흐르는지도 듣는다. 눈을 감고 있자니 귀로 들은 것들이 눈앞에 그려졌다. 지구와 달의 중력이 만들어놓은 거대한 파도 위를 그 뚱뚱하고 못생긴 비행기가 허둥지둥 날아가는 모양.
꾸웩.
뇌를 토했다. 머릿속이 텅텅 비었다. 공연이 다 끝나가고 있었다. 내면의 소리가 뇌를 거치지 않고 직접 영혼을 울렸다. 예술이 싫어! 텅 빈 두개골 안을 메아리가 내달렸다. 예술이 싫어, 싫어, 싫어, 싫어!
그리고 그때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갑자기 속이 시원해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눈을 떴다. 무대가 보였다. 은경씨가 춤을 추는 무대. 머릿속이 멍해져서 음악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다. 귀를 토한 걸까. 고요한 무대 위를 은경씨가 날아올랐다. 무대를 딛는 순간 왼쪽 허벅지 근육이 섬세하게 꿈틀대더니 길고 아름다운 육체가 허공으로 높이 솟구쳐올랐다. 천천히 천천히,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날아올랐다. 그러고는 영원히 바닥에 닿지 않을 것처럼 느릿한 속도로 서서히 아래로 내려왔다. 그러자 조명이 어두워졌다. 은경씨의 발이 바닥에 닿는 것을 신호로 비행기가 마지막 무대를 향해 힘차게 위로 솟구쳐 올라갔다.
우웩. 아, 제발 좀!
무대장치나 조명만 놓고 보면 마지막 무대는 그다지 화려하지 않았다. 세명의 월희와 한명의 남자 무용수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 은경씨와, 다른 두 사람의 월희는 별다른 장치도 없는 무대 위를 맨발로 통통 뛰어다녔다. 곧 초승달 모양의 지구가 무대 뒤로 내려왔다. 달에서 보는 지구의 모습이었다. 은은한 푸른 조명이 은경씨의 목과 가슴, 옆구리를 타고 흘렀다.
실눈을 뜨고, 무대 위에 올라가 있는 단 한사람의 남자 무용수인 장창석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잠시 후 은경씨가 그쪽으로 걸어가더니 그의 손에 이끌려 공중으로 들어올려졌다. 아주 손쉽게 위를 향해 쭉.
문외한의 눈으로 몇달간 세심하게 관찰한 바에 따르면, 현대 지구무용에서 여성이라는 존재의 물리적 가치가 어떻게 취급되는지는 너무나 분명했다. 바로 집어던지는 것이었다. 던지고 비틀고, 목에 감아 돌렸다가 제자리에 세워놨다가, 내동댕이치고 다시 주워들고, 접었다 폈다 들었다 놓았다 당기고 밀치고 울리고 웃기고…… 물론 여자 무용수들이 진짜로 그렇게 다루기 편해서 그런 게 아니라 오로지 피나는 연습 끝에 얻을 수 있는 착시현상이었겠지만, 아무튼 결과적으로는 그랬다. 남자가 이끄는 대로, 혹은 안무가가 의도한 대로, 손쉽게 들어올려지고 집어던져지는 여성이라는 이름의 물리적 실체를 구현해내는 것.
은경씨는 바람으로 만든 인형처럼 가볍게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수평 방향으로 움직이는 동작이야 지구 중력에서나 달 중력에서나 별로 달라 보일 게 없었지만 수직 방향으로는 눈에 띄게 차이가 났다. 지구에서 봤을 때보다 여섯배나 더 가벼워진 은경씨, 여섯배나 더 여자 무용수의 본질에 가까워진 그 가벼운 존재감. 은경씨는 비닐봉지처럼 가볍게 날아올라서 그만큼 천천히 아래로 내려왔다. 체공시간이 어찌나 길던지 무대에 발이 닿기 전에 그 긴 팔다리를 쭉쭉 뻗어가며 세번이나 동작을 바꿀 수 있을 정도였다. 나는 그 비현실적인 감각 때문에 다시금 현기증이 일어나는 듯했다.
잠깐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 장창석이 세명의 월희를 번갈아 공중으로 들어올리는 모습이 보였다. 아니, 집어던졌다는 표현에 가까운 동작이었다. 세명의 월희는 머리가 아래쪽으로 다리가 위쪽으로 향하도록 온몸으로 큰 원을 그리며 공중으로 날아오르는 것으로도 모자라 급기야 회전하는 도중에 몸을 옆으로 비틀기까지 했다. 그 광경을 보고 객석에서 일제히 탄식이 새어나왔다. 비명에 가까운 탄식이었다.
차마 오래 보고 있기 힘든 광경이었기 때문에 나도 결국은 눈을 감고 말았다. 하지만 금방 다시 눈을 떴다. 그러자 활처럼 팽팽하게 상체를 뒤로 젖힌 은경씨의 우아한 육체가 허공을 내달리는 장면이 보였다. 은경씨는 앞뒤로 뻗은 다리를 모으지도 않은 채 그대로 무대 위에 내려앉았다. 그리고 두 손으로 바닥을 짚고 쓰러지듯 가볍게 착지하더니 곧바로 몸을 굴려 바닥을 쓸며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한번 위로 힘차게 뛰어올랐다.
점프. 3회전. 점프. 5회전. 점프. 5회전 반.
점프 점프 점프 점프 점프.
그건 거의 사람이 아니라 별이었다. 육체가 아닌 천체 그 자체였다. 가볍고 날렵하며 빛이 나는 물체. 달이라는 이름의 쎌레스티얼 바디(celestial body). 집어던질 수도 있고 허리에 감아 돌리거나 팔을 붙들고 공중에 휘휘 휘돌릴 수도 있는 여성이라는 이름의 조그만 천체.
“제발 그런 것 좀 하지 말라고!”
누군가가 죽어가는 목소리로 그렇게 절규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 춤은 이제 마지막 동작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은경씨는 몸을 잔뜩 구부려 온몸에 힘을 가득 모으더니 몇발인가를 빠르게 앞으로 내딛으며 공중으로 힘차게 뛰어올랐다. 그리고 두 팔을 자연스럽게 벌리고 가슴을 쫙 편 다음 길고 우아한 목선이 최대한 드러나도록 목을 쭉 뻗었다. 아무것도 아닌 단순한 동작이었지만, 언젠가 은경씨가 한 말처럼 천장에 닿을 듯 굉장한 점프였다. 저쯤 가면 이제 아래로 내려가겠지 하는 지구인의 상식 때문에 위로 솟구쳐올라가는 은경씨의 동선이 더 비현실적으로 보였다. 이제는 떨어지겠지, 이제는 떨어지겠지. 은경씨는 그런 상식을 세번이나 깨뜨리고 계속해서 위로 솟구쳐 올라갔다. 등에 로켓 엔진이라도 단 듯, 누군가 위에서 끌어당기기라도 하듯, 아니, 원래부터 저렇게 위로 위로 계속해서 치솟아야 하는 운명을 타고난 사람인 것처럼.
나는 은경씨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지그시 감은 눈, 무언가 소중한 것을 온몸 가득 품은 듯 애틋한 표정이었다. 저런 거였구나! 나는 처음으로 진짜 은경씨를 만난 것 같았다. ‘예술 하는’ 은경씨. 환희에 찬 은경씨. 다시는 보지 못할 은경씨의 진짜 얼굴. 은경씨는 그 상태 그대로 영원히 지면에 닿지 않을 것처럼 공중에 머물러 있었다.
물론 진짜로 그럴 수는 없었다. 6분의 1로 줄어들긴 했어도 여전히 운명처럼 지구 중력에 묶여 있기는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그러니 곧 눈을 뜨고 무대에 내려앉아야 했다. 은경씨가 온몸으로 표현하고 있는 그 무한한 환희가 머지않아 아쉬움으로 바뀌려는 찰나.
그리고 바로 그 순간 은경씨의 몸이 서서히 뒤로 젖혀졌다. 뒤로 한바퀴 돌 모양이었다.
시간이 멎은 것만 같았다. 어쩌면 심장이 멎은 건지도 모르겠다. 아, 저 아름다운 영혼이 영원히 저렇게 머물러 있기를! 다시는 땅 위에 내려오지 않기를! 나는 진심으로 그렇게 바라 마지않았다.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다시 지구의 시간이 흘렀고, 시간에 따라 지구의 중력이 고개를 들었다. 솟구쳐 올라가는 은경씨의 발목을 붙잡아 다시 지면 아래로 끌어내리기 위해서였다.
끌려가면 안돼!
나는 속으로 그렇게 외쳤다. 그러나 혼자 힘으로 지구의 중력 끝까지 저항할 수 있는 무용수는 세상 어디에도 없었다. 은경씨도 마찬가지였다. 얼마나 굉장한 점프를 했든, 얼마나 천상의 경계 가까이 다가갔든 결국은 두 발 모두 무대 위에 내려앉을 수밖에.
정점을 지나 서서히 몸이 아래로 향하자 은경씨는 높이뛰기를 하듯 상체를 크게 뒤로 젖혀 시선이 완전히 아래를 향할 때까지 자전하듯 뒤로 크게 한바퀴를 돌았다. 어쩐지 내려오는 동작이 올라가는 동작보다 빨라진 듯한 착각마저 들게 만드는, 수면 근처까지 올라갔던 물고기가 다시 물속 깊은 곳으로 헤엄쳐 들어가듯 매끄럽고 날렵하며 자신감 넘치는 동작. 하지만 이제 발을 아래로 뻗어 착지자세를 잡고 나면 다시는 돌아가지 못할 천상의 시간들. 은경씨의 우아하고 긴 다리가 서서히 아래로 향하는 모습이 보였다. 망설임 같은 건 전혀 느껴지지 않는, 언젠가 인류가 달 표면을 향해 내딛던 첫 한걸음처럼 자신있고 당당하며 후회 없는 한걸음.
그런데 당신 정말로 후회하지 않는 거야?
무대에 발이 닿는 소리가 났다. 객석에 불이 들어왔다. 그렇게 공연이 모두 끝났다. 그리고 나는 심장을 토했다.
우웩.
박수를 치고 싶었는데 그럴 수가 없었다. 휘파람을 불고 싶었는데 다른 게 튀어나올 것 같았다. 너무 오래 눈을 뜨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만 그런 게 아니었다. 그날 그 공연을 보러 온 관객들 중에 박수를 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우웩. 우웩. 우웩.
심장을 토했는데도 내 몸 안 어딘가에서 영혼 비슷한 게 계속해서 꿈틀거리는 게 느껴졌다. 그순간 나는 깨달았다. 아! 영혼이라는 건 토해낼 수 있는 게 아니었구나!
은경씨가 나를 보고 웃고 있었다. 객석은 완전히 아수라장이었다.
그날을 마지막으로 지구 대기권 안에서는 두번 다시 외계무용공연이 열리지 않았다.
“원래 타인의 예술행위는 보는 사람을 구역질나게 만들 수도 있는 거라고요.”
그런 어마어마한 변론을 유언처럼 남긴 채, 외계예술가협회는 불법감금과 가혹행위, 사기 등의 혐의로 조직이 완전히 해체될 때까지 고초를 치렀다. 결국 은경씨는 그 화려했던 순간을 다시는 재연할 수 없게 되고 말았지만, 그날 이후로 나는 이 까다로운 여자의 내면 깊숙한 곳, 영혼의 가장 처참한 밑바닥에 아무렇게나 떨어져 있는 예술의 가치를 결코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렇게 또다시 지구의 시간이 흘렀다. 기괴하고 사랑스러운 결혼생활이었다. 날아갈 듯 자유로운 그 숭고한 예술혼이 묵직하고 음울한 이 지구의 중력가속도를 이기지 못해, 결국 서른네살 아까운 나이에 은경씨가 스스로 목숨을 끊을 때까지였다.
그리고 그날이 올 때까지 나는 온 마음을 다해, 그리고 그날 미처 토해내지 못한 내 영혼을 다 바쳐, 나의 아내 은경씨를 아끼고 또 아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