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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김성대 金成大
1972년 강원도 인제 출생. 2005년 창비신인시인상으로 등단. ksdgod@hanmail.net
구인
내가 잠들면 안경을 벗겨줄 사람
안경을 고이 접어놓고
내 눈동자에 손을 담가 꿈을 정돈해줄 사람
지문이 물결처럼 퍼졌다 돌아오고
눈썹에서 겨울나무가 자랄 때
나의 이륙과 착륙을 수신호해줄 사람
이름을 지우고 중력을 풀고
수레바퀴살을 풀어
나를 무생물로 만들 사람
옷깃에 다시 얼룩이 묻을 때까지
마블링의 호랑이를 만날 때까지
까맣게 나를 놓아줄 사람
주사위놀이를 대신 해줄 사람
그리하여 매번 깨어날 때마다
다른 우주를 낚아줄 사람
온몸을 빛의 점자책으로 만들어
움직이는 벽화를 그리고
꽃 키우는 법을 배우고
종이 접는 법을 배우고
노래의 탯줄을 보관해줄 사람
강을 떠도는 뿌리를 따라
금속과 유릿조각을 모아줄 사람
마블링의 얼굴기계 속에서
나를 영구히 가공할 사람
그리고
그의 턱을 대신 괴어줄 사람
하숙집
담장 안 풀숲에 엄마들의 가정이 있다 담장을 쌓다가 허리가 절반쯤 굽은 엄마들의 가정은 고요하다 앞치마의 꽃무늬도 회색 담장의 고요를 채색하지 못한다
잠들기 위해 부드러운 손목은 없어도 괜찮다 엄마들이 나 하나를 재우느라 묵음의 아카펠라를 부른다 나는 금세 김같이 재워진다
엄마들은 반찬걱정을 하지 않는다 구중궁궐 궁중음식이 나보다 맛있을까 배추를 절이고 칼을 갈면 등심에 불이 붙는다 식탁보의 그을음은 날마다 새롭고 마른멸치를 먹을 때면 은비늘이 눈썹에 달라붙는다
그러나 담장 밖은 나의 세계가 아니다 날씨가 바뀌고 예보가 뒤따라가는 담장 밖은 나의 세계가 아니다 엄마들은 배웅만 할 뿐 결코 마중나오는 법이 없다 내가 없는 동안 엄마들은 놋그릇을 닦고 해바라기씨에 편지를 쓴다
작은 상어처럼 나는 밤을 뜯어먹으며 담장 안으로 간다 풀숲에서 고요한 보석처럼 빛나는 엄마들이 부스스 일어서면 때로 꼬리뼈가 솟는다 엄마들, 오늘은 목욕을 건너뛸래요 반찬도 세가지만 주세요 나도 조미료를 먹고 싶어요 나의 작은 반항은 그러나 금세 엄마들의 손길에 제압된다 나는 꿈의 근육까지 풀어져 풀숲을 휘젓는다
조용한 하숙집 있음. 담장 안을 기웃거리는 순간 당신은 이미 포섭된다 하숙생들은 서로 마주치지 못한다 만날 일은 없겠지만 미리 말해두어도 좋겠다 몇년 동안 안치지 않은 햅쌀처럼 정말 조용한 하숙집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