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초점
너 자신의 과거인 좀비들을, 그러므로 환대하라
김중혁 장편소설 『좀비들』
허병식 許炳植
문학평론가. 주요 평론으로 「기원의 신화, 종언의 윤리학」 「문학의 공동체」 등이 있음. monogata@naver.com
그리하여 우리는 다시금 좀비들을 대면하게 되었다. 이런 식의 대면은 낯설지 않다. 자기 삶이 일체의 욕구를 잃어버린 ‘무신호의 블랙홀’을 통과하던 중이었다고 말하는 좀비들(창비 2010)의 서두는 이 작품의 주인공 채지훈이 세계로부터 단절되어 온전히 자신만의 내면에 갇혀 있음을 지시한다. 세상에 떠도는 온갖 말을 전달하는 휴대전화의 전파가 완전히 차단된 채 자신들의 고유한 통신체계를 사용하는 ‘고리오 마을’이라는 허구적 장소로 그가 들어가게 되는 것은 ‘필연적’으로 좀비와의 조우를 예감하게 만든다. “어제를 지워버려야만, 어제 이전의 모든 일들을 깊은 땅속에 묻어버려야만 오늘을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25면)고 말하면서 스스로를 유폐시킨 주체에게로 땅속에 묻힌 자들, 과거를 떠올리게 만드는 존재들이 돌아오는 것은 어쩌면 정해진 순서가 아닌가. 아직 죽음을 올바르게 완수하지 못한 자, 유령이나 좀비들이란 늘 되돌아와서 살아 있는 주체를 심문한다. 온전히 매장하지 않은 죽음이 되살아나듯, 억압된 기억은 항상 되돌아와 우리들의 평안한 거주지의 문을 두드린다. 그러므로 이런 식의 방문은 낯설지 않다. 되돌아온 사람(revenant)이란 죽은 자, 유령, 좀비의 다른 이름이다.
좀비와 대면한 것이 필연적인 결과임은 채지훈 스스로도 이미 파악하고 있다. “나에게 일어난 일은 모두 하나로 연결되어 있었다.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런지 모르겠지만, 나에게 삶은 일직선이었다. 하나의 사건은 이전 사건의 결과이자 다음 사건의 원인이었다”(14, 375면)고 말하는 인과론이, 작품의 서두와 결말에 반복적으로 등장하기 때문이다. 채지훈이 홍혜정과 뚱보130과 함께 벌이는 역사재조립 게임은 그러한 세계인식을 반복한다. 하나의 사건이 다른 사건의 원인이 되고, 그 뒤에 오는 사건은 앞의 사건으로 인해 발생한 것이라는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것. 그러나 이 게임에서 좀더 중요한 요소는 주어진 사건들에 인과관계를 부여하는 구성적 주체의 역할이다. 고리오 마을에서 이 게임을 같이 수행한 그들은 공동의 역사를 창출해냄으로써 어떤 연대를 이루고, 그 속에서 각자가 최선의 자아를 만들어내기를 원하는 존재가 된다. “어째서 아무것도 두렵지 않은 것일까. 뚱보130과 홍혜정과 홍이안이 내 몸속으로 들어와 무언가를 건드렸고 나를 다른 사람으로 바꾸어놓았다. 내 피를 바꾸어놓았다”(180면)라는 채지훈의 자기인식은 바로 그 지점에서 발생한다. “언젠가부터 그 욕망마저 잃어버리고 살았는데, 너와 홍혜정씨를 만나서 그걸 되찾았어. 욕망이 어떤 건지 다시 생각났어”(243면)라는 고백 또한 이와 동일한 맥락을 반영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다시 채지훈이 “나에게 일어난 모든 일은 하나로 연결되어 있었다”고 말할 때, 그것은 인과론이 흔히 그러하듯 어쩌면 사건들 사이에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원인과 결과라기보다 그것에 필연성을 제공하려는 마음의 작용이 만든 인연설(因緣說) 혹은 연기론(緣起論)이었는지도 모른다.
이쯤 되면 우리는 “혹시 좀비의 눈을 들여다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그건 엄청난 경험이다. 좀비와 대면한다는 건 허공을 들여다보는 일이고, 깊은 구멍을 들여다보는 일이고, 죽음과 마주하는 일이다”(105면)라는 채지훈의 진술을 더이상 믿기 어려워진다. 그가 죽음과 마주함으로써 금지당하고 승화되지 못한 주체의 욕구를 되찾게 된 계기는 좀비의 눈을 들여다본 사건으로부터 발생한 것이 아니라, 그 구멍을 메워나가는 필연성의 서사를 구성해나간 살아 있는 몸을 지닌 사람들과의 만남을 통해 가능해진 것이기 때문이다. 홍이안의 삶에 대한 긍정에 감염되어 비로소 형과 어머니의 죽음에 대한 부채감에서 벗어나기 시작한 채지훈은 그녀의 말을 되받아 이렇게 말한다. “특별한 죽음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에 사람들은 죽음을 동경하고 두려워하지만 세상에 특별한 죽음은 없다. 죽음은 단순한 소멸이고, 0이다.” 그리하여 “0이 되지 말고, 쉽게 소멸하지 말고,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한다”(240면)고 말하는 대목은 어째서 그가 죽은 자들에 대한 죄의식으로 가득한 고리오 마을과 좀비들을 위해 싸우게 되는가에 대한 유력한 답변을 제공한다. 그들이 바로 삶과 죽음의 경계에 겨우 존재하는 헐벗은 타자의 얼굴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너 자신의 과거인 좀비들을 기억하라, 그리하여 어떠한 두려움도 없이 그들을 환대하라. 이 명령은 『좀비들』의 서사와 함께 우리가 오래 기억해야 할 윤리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김중혁(金重赫)의 이 작품에 나타난 헐벗은 타자에 대한 윤리적 요청과 책임이, 혹시 너무 늦게 도착한 소식은 아닌가 하는 의문은 거두기 어렵다. 이미 우리는 2000년대 문학이 이 헐벗은 삶을 표상하는 두렵고 낯선 타자들—유령, 괴물, 시체—의 목록으로 가득 차 있음을 알고 있다. 이 기나긴 목록을 다 읽고 난 후에 비로소 다가온 『좀비들』의 서사에서 새롭게 좀비들을 대면해야 하는 어떤 낯선 윤리학의 선언을 발견하기는 어렵다. 마치 어떠한 공포도 느끼지 않는 것이 당연하다는 듯 좀비와 맞서 그의 머리통을 날려버리고, 좀비의 심장에 꽂아넣었던 야구방망이를 들고 막사를 향해 돌진하는 영웅담으로 형질전환한 이 작품의 서사는 어떤 윤리적 경험의 기록이 아니라 수행되어야 한다고 선포된 과제의 불성실한 제출이라는 인상을 준다. 외부의 충격을 0에 가까이 흡수하는 차량용 턴테이블인 ‘허그쇼크’라든가 원하는 모든 것을 다 만들어주는 고리오 마을의 식탁 같은 김중혁표 발명품들이 죽음과 대면한 자의 윤리적 경험을 대신 들려줄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러나 생체 정치를 수행하는 장장군의 병영에서 벌이는 채지훈의 분투가 이전의 김중혁 소설이 보여줬던 ‘짝패들의 윤리’를 넘어설 잠재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은 분명히 기억할 필요가 있다. 인물들의 연대는 여전히 특정한 취향을 공유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발생하지만, 이경무나 케켈 같은 타자들, 그리고 좀비가 되어버린 존재들까지 모두 끌어안고서 “피비린내와 아우성이 공기를 가득 채운” 이곳의 긴급한 요청에 응답하겠다는 태도는 취향의 연대를 넘어 이 박탈된 삶의 근본적인 적대에 대한 진정한 대면으로 이어질 것이다. 우리가 다시금 여행이 끝난 자리에서 새롭게 시작될 이야기를 기다려야 하는 것은 그러한 이유 때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