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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초점
날것 그대로의 농촌을 삼키다
이시백 소설집 『갈보 콩』
오창은 吳昶銀
문학평론가, 지행네트워크 연구위원. 저서로 『비평의 모험』 『나는 순응주의자가 아닙니다』(공저) 등이 있음. longcau@hanmail.net
이시백(李時帛)의 연작소설집 『누가 말을 죽였을까』(2008)는 ‘풍자와 야유로 점철된 농촌소설’이다. 그의 소설 속 농촌은 현대도시와 대비되는 낭만적 공간이 아니다. 그곳은 자본주의적 경제논리를 ‘생존 원리’로 습득한 농민들이 이기적인 눈빛을 번득이는 장소다. 농민들은 땅값을 놓고 야합해 도시민을 등쳐먹으려 들고, 작은 권력에 일희일비하며, 타향받이들에게 거침없는 일상적 폭력을 휘두른다. 작가는 농촌에 대한 낭만적 환상을 갖고 있는 도시민들에게 농촌의 욕망은 도시로부터 전이된 것이라고 야유를 퍼붓는다.
『갈보 콩』(실천문학사 2010)은 『누가 말을 죽였을까』의 문제의식을 심화시킨 작품집이다. 이 책의 배경은 여전히 농촌이고, 주요 인물 대부분이 농민이다. 어떤 독자는 이시백이 또 ‘농촌소설’을 펴냈느냐고 실망하겠지만, 나는 그가 다시 ‘농촌현실’을 보듬었기에 귀하게 느껴진다. 한국은 식량자급률이 겨우 27% 정도이고, 그나마 쌀을 제외하면 곡물 자급률이 4.6%밖에 되지 않는다. 게다가, 2015년이면 쌀 수입시장이 완전개방된다고 한다. 정치권에서는 ‘더이상 농업이라는 말을 쓰지 말자’며 농업포기정책을 공공연하게 표방하고 있으니, 갈보 콩을 읽는 나의 마음은 내내 저미도록 아팠다.
배추값 파동이 일어야 ‘농촌에 무슨 일이 있었나’ 하고 눈을 돌리는 세속에서 오롯이 ‘농촌의 현실’을 문학적으로 형상화해내는 작가가 이시백이다. 그는 ‘있을 법한 농촌’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농촌’을 필맥에 고스란히 새겨넣었다. 내가 보기에 『갈보콩』은 더욱 농익은 입담에 탄력이 붙어 팽팽하고, 풍자의 칼날은 더욱 날카롭게 벼려져 있어 예리하다. 풍자는 내부를 향해 있을 때 독한 성찰을 촉구하게 된다. 작가는 농촌 붕괴의 요인을 외부로 돌리지 않고, 자본주의적 잇속에 자신을 내맡긴 농민 스스로에게서 찾는다. 자해에 가까운 이러한 풍자가 농촌의 현실을 오히려 냉철하게 인식하게 한다.
이 소설집에 수록된 작품들은 대부분 당대의 현안을 곳곳에 갈무리한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놓고 농촌사회에서 벌어지는 박진감 넘치는 논쟁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가 하면(「워낭소리」 「부조」), 4대강사업의 여파로 들썩거리는 농촌의 세속이 그려지고(「두물머리」), 노무현 전 대통령의 자살 사건을 둘러싼 민심의 동향이 직접적으로 형상화되기도 한다(「웹 2.0」). 정치적 사안뿐 아니라, 농촌사회를 요동치게 만든 생태마을, 정보화마을, 직불금 파동, 지역개발사업, 유전자변형농산물(GMO) 문제 등도 폭넓게 작품을 둘러싸고 있다.
단편 「뭘 봐」를 예로 들어 살펴보자. 면사무소의 주선으로 ‘물 맑은 메뚜기 마을’ 사업에 뛰어든 수산리 마을주민들은 ‘몇억의 지원금’에 눈이 뒤집힐 지경이다. 이 기회에 전동안마의자를 놓자는 노인회에서부터, 최신 헬스기구가 필요하다는 부녀회, 축구회 기금을 마련해야 한다는 청년회까지 의견이 분분하다. 하지만 관료행정의 장벽 앞에 예산을 쓸 수 있는 곳은 한정되어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자, 옛날처럼 새마을운동식 도로포장과 다리보수에 돈을 쏟아붓고 만다. 민주화시대에 이르렀다는 한국사회가 농촌에만 오면 여전히 ‘동원체제’의 작동방식을 답습한다. 농민들의 ‘물색없는 정치적 태도’도 문제지만, 농촌을 낙후시킴으로써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키려는 지배권력이 더 큰 문제다.
정치적 현안을 다룬 소설 치고 편향적이지 않은 작품이 없다. 이것은 정치소설의 함정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시백의 소설은 ‘서툰 정치소설’의 범주에 머무르지 않고, 돌연한 활력을 곳곳에서 발산한다. 어떻게 이런 대결이 가능했을까? 그는 현실정치를 농촌사회와 버무려내면서도, 쉽사리 정치적 타협을 하지 않고 집요하게 ‘대화성’을 유지한다. ‘대결하는 대화성’이라고 명명할 수 있는 이러한 태도가 독자들에게까지 긴장감을 전염시킨다. 그 예를 「부조(扶助)」를 통해 살필 수 있다. 이 작품은 2008년 촛불집회 이후, 미국산 쇠고기 수입개방 문제를 받아들이는 농촌의 풍경을 직접적으로 형상화했다는 점에서 문제적이다. 명근은 매년 명절 때면 자신의 집에서 키우던 한우를 잡아 이웃들에게 저렴한 가격으로 공급해왔다. 그런데 촛불집회로 미국산 쇠고기 값이 턱없이 떨어지자 바로 옆집에 살던 을성이 미국산 쇠고기를 도매가격으로 떼어와 마을에서 판매한다. 명근와 을성이 한우와 미국산 쇠고기의 경제성, 안전성, 국제관계의 역학관계를 놓고 벌이는 논쟁은 팽팽한 대결 양상을 띤다. 누구의 손도 쉽사리 들어주지 않으면서 대화를 끌어가는 작가의 집요한 태도가 압권이다. 당위적으로 보았을 때, 현실은 명료하다. 하지만 대화적 관계로 현실을 재구성하면, 복잡한 결이 서서히 맨살을 드러낸다. 이시백은 민중형상을 날것 그대로 직시할 줄 아는 작가다.
그런 의미에서 이시백이 바라보는 ‘농민상/민중상’에 시선을 돌려볼 필요가 있다. 이시백 소설들의 농민은 대개 ‘낙천적인 민중’의 형상으로 그려지는 것이 아니라, 일그러진 형상으로 포착되고 있다. 이 굴절된 의식으로 인해 금전적 욕심 때문에 파국에 도달하기도 하고, 조그만 권력이나 이권에 집착하며 허우적댄다. 그의 소설에는 ‘낙천적 민중’이 아니라 ‘다성적 민중’이 그로테스크한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바로 이 부분에서 이시백 소설의 성취가 돋을새김된다.
그는 당위로 말하지 않고, 현실과 대화한다. 이 명제는 리얼리즘 문학의 핵심이기도 하다. 현실과 대화하면서 가닿은 소설의 서사와 너무도 정당한 주장을 위해 현실을 재단한 소설 사이의 간극은 심오하다. 이시백의 농촌소설은 김종광의 「모내기 블루스」(2002)나 공선옥의 「명랑한 밤길」(2007)이 낭만적 필치로 덧칠된 것과 달리, ‘갈등하는 대화’를 통해 훼손된 농촌을 그려냈다는 점에서 문제적이다. 또한 우애령의 『당진 김씨』(2001)나 주영선의 『이웃』(2008)이 취하는 농촌 방문자의 시선에서도 자유롭다. 그의 소설은 내부자의 목소리로 위기의 농촌을 해부한다. 과연 현실이, 농촌이 위기 아닌 때가 있었던가. 당위 앞에서 모든 현실은 위태롭다. 현실과 당위의 치열한 대결을 펼쳐 보인 『갈보 콩』은 그렇기에 돋보인다.
이제 2000년대 농촌소설은 현실의 언덕배기를 넘어, 리얼리즘의 산마루에 도달한 작품을 갖게 되었다. 바로 그 자리에 『갈보 콩』이 오롯이 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