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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초점

 

경험주의자의 혀

조강석 평론집 『경험주의자의 시계』

 

 

함돈균 咸燉均

문학평론가,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HK 연구교수. 평론집 『얼굴 없는 노래』가 있다. husaing@naver.com

 
 

35962000년대 한국문학의 가장 중요하고도 격렬한 사건 중 하나를 ‘시의 귀환’이라 할 수 있다면, 이 ‘귀환’이 제 존재의 운명을 건 2000년대 비평의 기투(企投)와 함께였기에 가능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한 평론가는 70년대 산(産) 2000년대발(發) 비평세대의 특질을 한국문학사상 가장 이론적으로 무장된 세대의 등장이라는 말로 요약한 바 있지만, 내가 보기에 이 세대 비평에 드러나는 그 못잖은 특질은 이들이야말로 텍스트와 자신의 비평을 동일한 운명공동체 속에서 의식하고 있으며, 텍스트에 대한 주석을 넘어서서 자신들의 비평을 하나의 ‘읽는’ 텍스트로 만들려는 욕망을 가장 적극적으로 드러낸 세대라는 사실이다. 2000년대 중반 이후 지난 5~6년간 조강석(趙强石)의 비평은 이 세대 비평가군 속에서도 유독 돋보이는 것이었다고 할 만하다. 크게 보아 그 비평의 특색이자 장점은, 개별 텍스트 비평에서 드러나는 발군의 시 해석력(특히 형식분석)과 그 해석을 뒷받침하는 이론의 정합성과 정치함이다. 더욱이 실제 비평에서 그의 비평은 이론에 기대어 텍스트를 부리지 않는 미덕을 함께 지니고 있다.

이번 평론집을 이야기하려면 소략하게라도 그의 첫 평론집 『아포리아의 별자리들』(랜덤하우스코리아 2008)에서 보여준 비평적 관점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이 평론집에 실린 글 가운데 가장 인상적인 것 중 하나는 “단연코, 우리가 삶이 도덕적이어서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아름답기 때문에 도덕적이라는 확신을 구하는 것은 예술에서이다”(35면)라는 구절이다. 조강석은 이 명제를 심미적 체험을 압도하는 도덕적 반응에 대한 경고로 받아들이면서, 자신의 비평적 관심이 “선험적으로 전제된 세계의 총체성 대신 개별적이고 파편적으로만 확인되어가는 세계의 양상들을 향수자의 의식에 제시하는 방식, 즉 스타일”(37면)에 있음을 표명한 바 있다. 특이한 점은 형식주의 분석의 대가라고 할 또도로프(T. Todorov)를 사사하고 있으면서도, 그가 이 문제를 “세계의 기저에 있는 모든 편린들에 대한 감각의 탐문을 재개”(43면)하는 ‘반성’의 형식으로 전유하려는 야심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여기서 그가 ‘스타일’, 즉 ‘미학(예술)’으로써 전유하려는 것이 ‘반성’이지 ‘정치’가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하는 일은 중요한데, 왜냐하면 (그가 충실한 스승으로 삼는 칸트/아도르노에 따르면) 그는 예술을 “표상의 현실성을 통해 세계의 실재성을 탐문하는 것”(41면)으로 이해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조강석은 ‘표상’의 문제를 내세워 철학적 실재론과 맞서는 한편, 미학적으로는 예술을 직접적으로 주어진 세계의 재현이라고 보는 입장(‘리얼리즘’)과도 맞선다. 그러면서도 아도르노적 예술적 가상의 논의를 충실히 수용한 결과, 그의 ‘스타일론’은 예술지상주의와도 구별되는 ‘반성’의 형식으로서의 예술을 보게 되는데, 이는 그의 비평이 현대문학의 오랜 논쟁거리였으며 우리 시대의 첨예한 관심사이기도 한 ‘문학과 정치’ 논쟁에 대해서도 유보적인 태도를 취하는 까닭이 된다.

첫 평론집 이후 3년이 채 되지 않아 나온 『경험주의자의 시계』(문학동네 2010)의 서문을 읽어보면, 그는 스스로가 멋쩍게 여겨졌나보다. “언젠가는 형식주의자 소리를 들어도 기꺼이 감수하겠다더니 이제는 경험주의자의 시계를 만져보는 걸 보면 아직도 1인칭으로 말하지 못하고 제 이름으로 주어를 대신하는 미욱함을 떨치지 못한 듯하다”고 썼기 때문이다. 첫 평론집에서 그를 형식주의자로 키웠던 스승이 칸트와 또도로프 그리고 어떤 면에서는 아도르노였다면, 이번 책에서 그를 경험주의자로 ‘변화’시킨 멘토는 바르뜨와 로티 그리고 그 누구보다도 흄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적어도 이 두 평론집에서 형식주의자와 경험주의자는 그 간극보다 오히려 친족성이 훨씬 더 드러난다고 보는 게 옳을 것 같다. 칸트의 ‘표상’은 경험주의자의 ‘시계’로 바뀌었을 뿐이며, 무엇보다 “현재 두루 통용되는 미적 규범은 실상 성실한 귀납으로부터 비롯된 것”(32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평론집은 “예술에 있어 미적인 것을 발견하고 그 발견에 대해 판정하는 능력으로서 취미의 다양성”을 탐색하는 데 오롯이 바쳐진다. 진은영 시의 반(反)형이상학, 강정 시의 프리휴먼(prehuman), 오규원 허만하 채호기의 ‘풍경’ 등에 대한 천착은 이 ‘취미’(taste)의 다양성을 탐색하는 구체적인 전거다(그의 표현대로 ‘취미/맛’〔taste〕이라는 말 자체가 개별성·구체성을 함의한다). 2000년대에 펼쳐진 이 ‘맛(취미)’의 향연을 우선(일단) 즐기라!’는 것이 이 책의 가장 중요한 주장이다. ‘맛’에는 본래 옳고 그름이, 도덕이, 합의가, 정의가, 대세가 그리고 미의 이데아라는 연역의 눈금자들이 없기 때문이다(33면). 이런 관점에서 그는 “조건의 보편성을 재확인하는 대신 계기적 실천에 의한 검증을 택한다”(30면). 그 자신의 표현에 따르면 ‘보편명목론’을 부정하고 ‘미학적 유명론’에 비평의 길이 있다는 것이다. ‘미학적 유명론’에 분명하게 승부를 건 이 ‘경험주의자’ 비평가는 그래서 바르뜨적 의미의 ‘신화’와 로티의 ‘마지막 어휘’(final vocabulary)를 혐오한다. 신중하기로(돌아가기로) 말하면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이 비평가는, 매우 과감하게도 우리 시대의 문학에서 ‘서정’이라는 단어를 ‘신화’와 ‘마지막 어휘’의 대표적인 실례로 지목했다(「‘서정’이라는 ‘마지막’ 어휘」).

한편 이 평론집의 관점 가운데 가장 흥미로운 것 중 하나는, ‘문학과 정치성’에 대한 최근의 논의를 ‘불편하게’ 바라보는 그의 시선에 관한 것이다. 조강석은 “당신의 취미를 양보하지 말라”는 미학의 정언명법을 스스로 재확인하면서, 시민과 시인, 말과 문학의 분열상황을 해소해보려는 근래 일련의 실천적 시도들이 자칫 시민의 삶과 작가의 삶 모두를 방기하는 알리바이가 될 수 있다는 관점을 표명한다. 그리고 그 둘 사이의 간극(아이러니)을 견디면서 시인의 삶을 ‘제도’와 ‘가치’의 전장이 아니라 “취미의 전장으로 수렴”시키라고 주장한다(「경험주의자의 시계」). 이런 점에서 그는 흄을 경유한 ‘경험론자 칸트’의 제자인 것이 분명하다. ‘취미’를 통해 말과 실천이성(윤리)의 분리를 종합하려 하니 말이다. 상당한 공감을 전제로 던지는 질문 하나. 이 미학적 정언명법은 이 말이 변용되기 이전의 본래의 뜻, 즉 ‘너의 욕망을 양보하지 말라’는 정신분석의 윤리학을 감당할 수 있는가? 욕망은 주체에게 아직 알려지지 않은(경험되지 않은) 자리이다. 이 자리에는 (시대가 부과한) 금지된 것도 있고, 불가능한 것도 있다. 이 경험주의자의 혀는 몸/말을 통해 회귀하는 (시대의) ‘증상’ ‘금지된 것’ ‘불가능한 것을 맛볼 수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