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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단과 현장 | 연속기획 • 한국사 100년 다시 보기 ④
한국강제병합과 현재
조경달 趙景達
일본 치바(千葉)대학 문학부 교수. 저서로 국내에 번역출간된 『민중과 유토피아』 『이단의 민중반란』 외에 『植民地期朝鮮の知識人と民衆—植民地近代性論批判』 등이 있음.
k.d.cho@adagio.ocn.ne.jp
시작하며
한국강제병합 100년에 해당하는 올해 한국과 일본에서 다양한 집회나 심포지엄이 개최되었다. 한국에서는 전국역사학대회 ‘식민주의와 식민책임’(5월 28일)과 동북아역사재단이 주최한 ‘한국강제병합 100년 재조명 국제학술회의: 1910년 한국강제병합, 그 역사와 과제’(8월 24~26일)가 대표적인 것이었다. 일본에서는 역사학연구회 전체회의 ‘지금 식민지 지배를 묻는다’(5월 22일)와 국립역사민속박물관과 ‘한국병합’ 100년을 묻는 모임이 공동으로 주최한 ‘국제심포지엄 “한국병합” 100년을 묻는다’(8월 7~8일)가 그러했다.
시민운동적인 차원에서 이뤄진 것까지 보면 훨씬 많은 집회가 있겠지만, 일본에 거주하는 필자는 한국 안의 움직임은 잘 알지 못한다. 일본에서 특별한 점은 ‘한국병합’ 100년 시민네트워크가 2008년 10월에 조직되어 전국적인 시민운동을 전개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또한 한국과의 공조로 한국강제병합 100년 공동행동위원회가 조직되어 일본실행위원회와 한국실행위원회가 각각 8월 22일과 29일에 ‘한일시민공동선언대회’를 개최했다. 연대적인 움직임으로는 지식인 차원이긴 하지만 ‘한국병합’ 100년 한일지식인공동성명의 공개적인 표명도 주목할 만했다.
일본에서는 그밖에도 1년 동안 전국 각지에서 다양한 집회나 강연회, 심포지엄이 개최되었으며 잡지 등의 특집도 눈에 띈다. 한국강제병합 100년을 어느 정도의 관심을 가지고 맞이했는가는 일본 시민운동의 입장에서 중요한 시금석이라고 생각하는데, 시민의 관심은 예상 외로 높은 편이었다. 필자 자신도 학술 심포지엄이나 강연회 등을 포함해서 매달 어딘가에서 강단에 서거나 원고 집필에 쫓겼다.
그렇다면 이러한 다양한 행사에서 도대체 무슨 문제가 제기되었을까. 크게는 두가지로, 강제병합의 부당한 과정을 재검토하는 것과 식민지 지배의 실태를 재검토하는 것을 통한 식민지주의 비판이라고 하겠다. 동북아역사재단이 주최한 심포지엄과 국립역사민속박물관이 주최한 심포지엄에서는 이 두가지 점을 축으로 하면서도 여기에 또 한가지 역사인식의 문제가 더해졌다. 이 글에서는 세가지 문제에 대해 필자 나름의 생각을 밝히려 하는데 구체적으로 아래와 같은 논의를 전개할 것이다.
첫째, 강제병합의 역사적 위상을 비교사적인 관점에서 분석하는 일이다. 강제병합은 부당하며 그 부당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겠지만, 여기에서는 그 점을 전제로 하면서도 한국과 일본의 정치문화 차이에 초점을 맞춰 강제병합의 역사적 의미를 되새기고자 한다.
둘째, 최근 일본에서 러일전쟁 이후 강제병합까지 근대일본 국가의 건전성을 강조하려는 논의가 활발하게 벌어지는 현상에 대한 비판이다. 15년 전에 세상을 떠난 역사소설가 시바 료오따로오(司馬遼太郞, 1923~1996)는 국민적 작가로서 지금도 인기가 식지 않고 있다. 그 역사인식은 러일전쟁까지의 일본은 좋았지만, 그후로는 군부독재의 길로 치달아 근대일본은 암울한 시대에 돌입했다는 것이다. 일본의 공영방송 NHK는 러일전쟁을 그린 그의 대표작 『언덕 위의 구름』(坂の上の雲)을 작년부터 방영했는데, 이 드라마는 근대일본을 미화했다는 비판을 각 방면에서 받고 있다. 그럼에도 역사연구자 중에서는 이러한 ‘시바 사관’과 궤를 같이하는 움직임이 있다. 더구나 시바는 러일전쟁 후의 일본에 비판적이었음에도, 강제병합 직전까지 일본의 양심이 한국에 대해 실천되었던 것처럼 논의를 전개하는 연구가 나오고 있다. 그 양심이란 구체적으로 이또오 히로부미(伊藤博文)에게서 발견된다는 것인데, 여기에서는 그 문제성에 대해 생각해보고자 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식민지 실태와 식민지주의 비판의 문제를 재고하는 일이다. 최근 식민지근대화론이나 식민지근대성론이 식민지 연구에서 활발하게 논의되고 있는데, 그러한 논의는 과연 식민지주의 비판은 고사하고 ‘식민지 책임’을 유효하게 제기할 수 있을까. 근대화론의 입장이 그러한 논리를 지니고 있지 않다는 점은 자명하지만, 근대성론의 입장도 매한가지라는 것이 필자의 견해다.
세가지 모두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에 쉽게 논할 수 없지만, 지면이 허락하는 한에서 필자 나름의 논의를 펼치고자 한다.
1. 한국의 정치문화와 강제병합
한국이 왜 일본에 병합되어야 했을까 하는 문제를 둘러싸고 이제까지 다양한 논의가 전개되었다. 발전단계가 일본에 비해 뒤처졌다든가(정체론), 자율적인 역사를 지니지 않은 까닭의 귀결이라든가(타율성론) 따위는 당시부터 이어져온 논의이며 해방 후 한국인 중에도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었을 만큼 널리 퍼져 있었다. 해방 후 한국에서는 물론 북한과 일본에서도 이른바 내재적 발전론이 주창되어 그런 역사인식은 극복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식민지근대화론은 그런 논의를 새롭게 포장하여 부활시킨 판본이라고 할 수 있다.
식민지근대화론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지만, 내재적 발전론에도 커다란 문제가 있다. ‘엄밀한 의미에서의 매뉴팩처’ 단계=자본주의 맹아라고 할 만한 것은 조선 말기에서는 확인할 수 없다. 그러한 것은 일본에서도 확인되지 않는다. 더구나 그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내재적 발전론이 성황리에 논의되었던 시기에 이미 밝혀진 내용이다. 조선 말기의 발전단계에 대해 일본과의 동질성을 강조하는 내재적 발전론에서는 개국(開國)이 일본보다 늦었기 때문에 근대화에서 일본에 추월되어 식민지가 되었다는 것인데, 그것은 실증이 불가능한, 너무나 역사의 우연에 치우친 자의적인 해석이다.
하지만 마찬가지 내재적 발전론이라도 미야지마 히로시(宮嶋博史)가 제창한 동아시아 소농사회론은 큰 차이가 있다. 서구적 근대로의 발전경로를 일원적으로 보지 않고, 동아시아를 특수한 지역으로 설정하고 17~19세기 단계의 한중일 삼국을 소농사회(중국의 경우는 15세기부터)로 규정함으로써 삼국의 동질성을 주장한 것이다.1 정체론(停滯論)은 미야지마의 소농사회론에 의해 진정 타파되었다는 것이 필자의 견해다. 게다가 이 논의는 삼국의 구조적인 문제를 시야에 둠으로써 비교사의 길을 열었다고 할 수 있다. 한국이 식민지로 전락한 이유는 발전 정도의 차이가 아니라 다른 관점에서 살펴보아야 했기 때문이다. 미야지마는 그 차이를 유교모델을 수용했는지 그렇지 않은지에서 찾고 있는데,2 거기에는 하부구조적으로는 동질적이더라도 상부구조적으로는 차이성이 존재한다고 해서 하등 이상할 것이 없다는 유연한 역사적 발상이 엿보인다. 또한 그것은 유교를 단죄하는 것이 아니라 유교 중에서도 주자학의 선진성을 인정한 위에서 서구나 일본의 근대를 상대화하려는 문제의식에 동기부여를 하고 있다.
필자도 한일의 유교적 전통이 지닌 차이성에는 진작부터 주목해왔으나 그것은 정치문화의 문제로 인식해야 한다는 것이 지금의 생각이다. 정치문화에는 그 원리로서의 정치사상도 포함되지만, 여기서는 크게 두가지 점에서 필자 나름대로 한일 간의 차이에 대해 간단히 논하고자 한다.
우선 정치사상의 문제인데, 한국에서는 유교에 근거한 ‘왕도(王道)’사상이 뿌리 깊게 관철되고 있었기 때문에, ‘부국강병(富國强兵)’사상이 거의 육성되지 않았고 약육강식적인 제국주의의 현실에 제대로 대응할 수 없었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유교에서는 『맹자』의 「양혜왕(梁惠王) 편」에서 “대(大)로서 소(小)를 섬기는 것은 천리를 즐기는 것이요, 소로서 대를 섬기는 자는 천리를 두려워하는 것이다. 천리를 즐기는 자는 천하를 보전하고, 천리를 두려워하는 자는 자기 나라를 보전한다”고 했듯이 소국인 것을 오히려 바람직한 것으로 여겼다. 패도(覇道)를 배척하고 왕도의 입장에 선 것이 유교의 이상적인 국가상(像)인데 그 바탕에는 민본주의(民本主義)가 깔려 있다. ‘부국강병’은 어디까지나 민본에 반하는 정책인 것이다. 그러한 사상은 원리로서 한국사상을 구속하고 한말에 가서는 ‘도(道)’=문명으로 지상화(至上化)되었다. 위정척사파의 거두인 이항로(李恒老)가 ‘도’를 ‘국가’보다 중요하게 여겼던 것이 상기된다. 이러한 사상전통이 있는 한국에서 ‘부국강병’사상은 거의 영위되지 않았다. 그것을 대신해서 제창된 것이 ‘자강(自强)’사상이다.
한국사 연구자들 사이에서는 일반적으로 ‘부국강병’과 ‘자강’을 혼동해 사용하고 있는데, 그 둘은 전혀 다른 별개의 개념임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개국 이래 ‘부국강병’이나 ‘부강’ 같은 용어가 등장하고, 그것을 긍정적인 뜻으로 쓰는 문장도 많이 발견되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꼼꼼히 그 내용을 음미해보면, 거기에 ‘자강’의 의미가 내재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자강’이란 민본을 기초로 두고 내정(內政)과 유교적 교화의 충실을 꾀하는 것이며, 그것이 제대로 이뤄지면 침략받을 일은 없다는 것이 전통적인 국방사상이었다. 군사력 증강의 길은 민본에 반하는 것이며, 군사력은 방어하는 데 충분한 최소한도의 것이 좋다고 여겼다.3 ‘자강’은 일종의 왕도론의 발현 형태이며, 패도론의 발현 형태인 ‘부국강병’과는 명확하게 다른 개념이었음이 틀림없다. 본래 중국과의 종속관계를 오랜 시간에 걸쳐서 유지해온 한국에서 대국사상은 거의 육성되지 않았고, 그것은 근대에 들어서도 마찬가지였다. 갑신정변기 김옥균(金玉均) 등에서 대국주의가 엿보인다 하더라도 그것은 예외적이다. 개화파 안에서조차 ‘자강’론이 일반적인 사고였다. 소국주의는 때로 큰 좌절을 경험하면서도 한국근대사상사에 관철되어 있다.4
근대일본에서도 소국주의가 없었을 리 만무하다. 나까에 초오민(中江兆民)이나 이시바시 탄잔(石橋湛山) 등에서 전형적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것은 정치사상으로서는 몇개의 점과 같은 형태로밖에 발견할 수 없다. 사상의 구조로서 소국사상이 당연했던 조선과 비교하면 일본의 그것은 비교가 되지 않는다. 근세사회에서 이미 ‘무위(武威)’를 가지고 임했던 일본은 ‘패도’적 정치문화를 일면 형성하고 있었고, 그것은 근대적인 ‘부국강병’사상을 배양하는 데 매우 적합했다. 소국주의인 까닭에 원래부터 제국주의화 따위는 생각지도 않았던 한국과 사상적 차이는 역력했다.5
정치문화의 문제로서 둘째로 지적할 수 있는 것은 유교사상을 내면화한 한국에서는 교화주의(敎化主義)가 기본이어서 서구적인 근대국가에 적합한 규율주의(規律主義)는 억제되었다는 점이다. 촌락공동체는 일본과 조선 양국에서 확인할 수 있는데, 그 내실은 조금 다르다. 신분제가 느슨하고 토지매매도 자유로운 한국은 유동적인 사회였다. 촌락공동체를 구성한 이상 그 성원은 다양한 규제를 ‘동약(洞約, 향약)’을 통해서 수용했지만, 촌락 이주는 기본적으로 자유로웠다. 또한 형식상 호적이 정비되어 있었지만, 누정(漏丁)6이나 누호(漏戶)7의 엄격성이 크게 결여되었고, 오가통제(五家統制)도 정비되었지만 역시 충분한 기능을 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유민(流民)이 자주 발생했고 사회는 쉽사리 안정되지 않아 18~19세기에는 미수에 그친 것을 포함해 반란사건이 끊이지 않고 일어났다. 민란은 19세기에 자주 발생했는데, 그것은 정소(呈訴)8 방법을 잘 이해한 자율성을 지닌 운동으로 진행되다가 일탈하여 폭력화한 사례였다. 이런 폭력화는 왕왕 죽음의 제재를 동반했다.
이같은 사태는 교화주의가 규율주의를 형해화한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교화는 규율에 우선하여 실행되었으며, 때로 규율은 억지되어야 했다. 그 기초에 깔린 정치사상은 역시 유교적 민본주의다. 조선왕조라고 하더라도 법치주의가 채택되고 그것은 『경국대전(經國大典)』 이후 엄연하게 존재했다. 하지만 그것은 민중의 실정을 감안하여 임기응변식으로 적용되어야 했으며, 획일적인 법령 적용은 기피되었다. 정약용(丁若鏞)은 “가르치지 않고 형벌을 주는 것을 망민(罔民)이라고 한다”9면서, 엄치(嚴治)=규율주의에 대한 비판을 분명히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덕치(德治)=교화주의를 표방하고 있다.
교화주의적이던 근세조선에 비해 근세일본의 경우는 전국시대 같은 유동화한 사회로의 회귀를 막기 위해 다양한 조치를 강구했다. 토꾸가와(德川) 막부는 신분제를 엄격히 적용해 농민을 토지에 속박시키고 도당(徒黨)을 금지하여 직업 선택이나 여행의 자유를 제한했다. 호적에 해당하는 종문인별개장(宗門人別改帳)10도 철저하게 관리・운용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유민화 현상이 쉽게 일어나지 않았고 촌정(村掟, 동약)이 엄격하여 오인조(五人組, 오가통제)도 효과적으로 기능했으며, 백성의 민란도 막부 말기의 어느 단계까지는 대단히 규율적으로 질서있게 이뤄졌다. 밀정(密偵)이나 상호감시씨스템이 이상하게 발전하여 사람들의 생활이나 문화가 미세하게 정형화되었고, 사회의 모든 부분을 격식이 지배했다. 더구나 막부와 모든 번(藩)의 행정기구는 순식간에 군사조직으로 바뀔 수 있는 준전시 동원체제로 조직되어 있었다. 그것은 이른바 ‘병영국가’로서의 성격을 지녔다.11
대한제국의 성격을 어떻게 파악할지는 현재 한국 역사학계의 중요한 논점이 되어 있는데, 필자는 다음과 같은 문맥에서 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대한제국은 민본주의의 연장선상에서 유교적인 근대국가를 창설하려 했다. 이태진(李泰鎭)의 언급처럼 고종이 민본주의에 기초해 조선의 근대화를 위로부터 추진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 내용은 서구(일본)적인 근대화와는 달랐다. 이영훈(李榮薰)의 지적처럼 고종은 단순한 ‘도학(道學) 군주’도 아니었다.12 교화주의는 근대적인 규율국가와 양립할 수 없지만 어떤 의미에서 대한제국은 굳이 민본주의를 유지하면서 교화주의로써 근대국가를 창설하려 했고, 그러한 이상 앞에 패했다고 할 수 있다.13
이같이 유교가 절대화되었던 한국에 비해 일본의 경우는 다소 달랐다. 일본에서는 유교 이외에도 신도(神道)나 불교 등이 공존했고 란가꾸(蘭學, 네덜란드학)마저 허용되었다. 일본에 절대적인 ‘도(道)’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따라서 일본에서는 서양 충격(Western impact)에 직면했을 때 지켜야 할 무엇인가를 창조해야 했는데, 국민사상을 쉽게 발견할 수 없는 가운데 ‘국체(國體)’는 그러한 사정에 의해서 억지로 창조된 것이었다. 그리고 이미 고도로 육성된 규율주의에 기초하여 일본 전역의 폐쇄적인 무수한 촌락들과 중층화된 사회에 천황제라는 덮개를 씌우면, 일본이라는 전체로 극대화되고 안과 밖을 나눌 수 있는 거대한 ‘촌락’=국민국가를 비교적 쉽게 탄생시킬 수 있었다.
한국강제병합이란 실로 이같은 규율주의적 근대국가 일본에 의해 행해진 침략행위인 것이다. 따라서 단순히 일본에 의한 수탈일 뿐 아니라 정치문화적 갈등을 민중에게 강요한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유교적 민본주의는 덕치라는 이상주의적 이념의 이면에서 엄치(嚴治)를 기피하기 때문에 현실에서는 관헌의 다양한 부정이나 횡포를 만연시키는 정치문화이기도 했다. 하지만 민본주의는 하나의 관념으로서 관민(官民)에 공유되어 있었고, 문제를 제기하는 경로도 확고하게 존재했으며, 관은 구난(救難)시 온정주의적으로 민을 대하는 것이 당연시되었다.14 이같은 정치문화에 일면 고통스러워하면서도 동시에 익숙해 있던 민중에게 강제병합은 좀처럼 수용하기 어려운 현실이었다. 병합은 한국의 ‘병영반도화’를 의미하고 무단정치는 민중에게 미지의 폭력적 정치문화를 강요하는 것에 다름없었다. 3・1운동은 실로 그러한 정치문화=병영반도화에 대한 일대 항거였다고 할 수 있다.15
3・1운동 이후에 일본은 문화정치를 표방했지만 규율주의를 강요하는 점에서는 끝까지 변함이 없었다. 민중이 서서히 이러한 규율주의를 내면화하면서 식민지 헤게모니가 성립했다고 보는 것이 식민지근대성론의 내용이지만, 오히려 거꾸로 규율주의로 인한 고통과 심각한 갈등의 일상이야말로 식민지 조선의 현실이었다는 것이 필자의 인식이다. 이제부터 식민지의 현실을 정치문화적 측면에서 검증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2. 이또오 히로부미에 대한 재평가의 기운
안중근(安重根)이 이또오 히로부미를 사살하지 않았다면 강제병합은 없었다라는 속설이 이전부터 있었다. 이또오는 병합에 반대했기 때문에 그가 살아 있었다면 한국이 병합되는 일은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한 인식은 당시부터 존재했지만 역사학계에서도 이또오가 병합반대론자였다고 평가하는 경향은 이전부터 있었다. 그리고 강제병합 100년을 계기로 본격적으로 논의되기에 이르렀다. 이또오 유끼오(伊藤之雄)・이성환(李盛煥)이 엮은 『이또오 히로부미와 한국통치(伊藤博文と韓國統治)』(ミネルヴァ書房 2009)가 그 대표적인 연구이다.
이 책에서 이또오 히로부미에 대한 집필자들의 평가는 한결같진 않고, 개중에는 읽을 만한 좋은 글도 몇편 있다. 하지만 대체로 그를 미화하고 있으며 그중에서도 이또오 유끼오의 「이또오 히로부미의 한국통치」와 아사노 토요미(淺野豊美)의 「일본의 최종적 조약개정과 한국판 조약개정(日本の最終的條約改正と韓國版條約改正)」이 두드러진다. 전자는 이또오 히로부미의 입장이 “병합을 목적으로 한 것이라기보다 한국인의 자발적인 협력을 꾀하여 보호국인 일본이 적은 비용으로 한국의 근대화를 이끌어내고, 일본과 한국의 이익을 도모하는 것이었다”고 하고, 병합에는 시종 소극적이었다고 말한다. 또한 후자는 “이또오가 ‘자치육성정책’을 주창하여 육성하려고 했던 한국의 자치는 한일 양국민에 의한 민족공동의 자치로서 예정되었다”라면서 “그것은 일본의 지도성을 한국이 수용한다는 전제하에 한국인이 주인이고 일본인은 객이라고 규정했던 것이다”고 말한다.
이런 평가는 이또오를 한국의 근대국가화를 위해 헌신적으로 노력한 선의의 정치가로 간주하려는 것이다. 이또오 유끼오는 다른 저서16에서 “이또오에게는 전쟁의 허망함과 일본인뿐 아니라 러시아인 병사들의 희생을 깊이 안타까워하는 감수성이 있었다. 그것이 앞서 밝힌 한국의 질서있는 근대화와 발전이나 청나라도 포함한 ‘극동의 평화’를 추구할 생각으로 이어진 것이다”라고 강한 어조로 진술하고 있다. 하지만 이또오가 사람의 죽음을 마음 깊이 애도하던 평화주의자라는 것은 당시 의병 탄압의 잔혹함을 아는 자라면 도저히 입에 올릴 수 없는 평가다. 이또오는 문관이면서도 통감으로서 조선주둔군의 지휘권을 쥐고 있었는데, 이또오 유끼오는 이 점에 대해서도 이또오 히로부미가 “조선주둔군을 충분히 컨트롤하려 했다”고 진술하고 있다. 잘 알려진 바처럼 조선주둔군 사령부가 간행한 『조선폭도토벌지(朝鮮暴徒討伐誌)』(1913)에 따르면, 의병전쟁에서 살육된 의병은 17,779명에 이른다. 그중 이또오가 통감을 사임하는 1909년 6월까지 살육된 의병 수는 16,677명이다. 실로 의병 살육의 94% 정도는 이또오의 통감 재임중에 행해진 것이다. 이것이 “조선주둔군을 충분히 컨트롤하려 했던” 결과일까. 이 잔인한 사실로부터 이또오가 평화주의자였다고는 도저히 말할 수 없다. 그는 냉혹하게 한국인 살해를 인정사정없이 실행시킨 것이다. 이또오 유끼오의 연구는 이또오 히로부미 쪽에서 역사를 구성하고 있을 뿐 한국 쪽에서의 관점이 전무하다고 할 만큼 결여되어 있다. 피해자 쪽에서 역사를 보려고 하지 않은 것은 제국주의의 합리화에 지나지 않는다.
도대체 이같은 이또오 히로부미론이 왜 만들어졌을까. 이러한 이또오에 관한 평가의 근저에는 ‘보다 괜찮은 제국주의’를 추구했다는 근대일본에 대한 재평가의 욕구가 있는 듯하다. 그리고 그 배경에는 세계화(globalization)에 농락된 현재 일본의 심각한 위기감이 존재하는 것은 아닐까. 일본경제의 침체는 이미 20년이나 지속되었고, 세계화에 대한 대응에 지금도 고심하고 있다.
세계화의 기본사상인 신자유주의는 시장지상주의를 촉진하고 국경의 벽을 낮추고 있다. 그것은 국민국가의 상대화라는 의미에서 바람직한 듯 보이지만, 그에 고통받는 많은 사람들도 양산할 수밖에 없다. 신자유주의 아래서는 경쟁이 격화하고 소득격차가 확대되며, 사회는 해체되어 개인이 원자화되고 불안에 시달리게 된다. 그리고 세계화=‘열린 힘’에 대한 반작용으로서 아이러니하게도 ‘닫힌 힘’이 나타나게 된다. 즉 사람들이 무제한적으로 원자화되어서는 국가 자체의 존립이 위험하기 때문에 국가는 그러한 사태를 회피하기 위해 낡은 국가주의를 다시금 동원하는 것이다. 또한 낡은 도덕도 재동원하여 필사적으로 사회적 통합을 위로부터 꾀하고자 하는데, 거기에서 신보수주의가 탄생한다. 세계화 속에서 신자유주의와 국가주의, 그리고 신보수주의는 삼위일체가 되어 하나의 사조를 형성한다. 이러한 상황은 세계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는데, 일본에서는 미국에 이은 경제대국의 자리가 위협받고 장기간에 걸친 침체로 비롯된 자신감의 상실이 심각한만큼 그 현상이 더욱 두드러진다.
국가나 사회가 자신감을 상실했을 때는 지(知)의 재생산도 뒤따르는데, 그것이야말로 역사의 수정주의적인 움직임이다.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의 수정주의적인 운동은 한국에도 잘 알려져 있을 것이다. 물론 이또오 유끼오 등의 공동연구가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만큼 노골적인 국가주의는 아니다. 하지만 ‘보다 괜찮은 제국주의’를 발견하려는 그런 작업은 근대일본의 선의와 영광의 역사에 대한 재확인을 촉발함으로써 일본인의 아이덴티티를 재구축하려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 듯하다.
이미 필자는 이러한 비판을 수행한 바 있으며 이 글도 그러한 논의에 기초하고 있다.17 나까쯔까 아끼라(中塚明)나 미야지마 히로시, 오가와라 히로유끼(小川原宏幸) 등도 마찬가지 비판을 하고 있다.18 이에 대해 이또오 유끼오는 자신이 1차 사료를 꼼꼼히 읽고 새로운 이또오 히로부미상(像)을 제시했다고 자부하면서 “사실을 추구하기보다 감정을 우선시하여 논의를 전개하고 있다”고 반비판한다.19 하지만 그가 진정 사료를 꼼꼼히 읽었는지 묻고 싶다. 이또오 히로부미 주변의 사료만 너무도 꼼꼼히 읽은 탓에 그를 정당화하는 논의만 만들어낼 수밖에 없는 것은 당연하다. 이또오 유끼오는 얼마나 조선 쪽의 사료를 꼼꼼히 읽었을까.
『이또오 히로부미와 한국통치』는 한국과 일본 연구자의 공동연구지만, 이또오 히로부미에 대한 재평가가 나온 또 하나의 요인으로서 한국이 경제발전을 이루고 과거의 비참한 기억은 풍화되고 있는 것도 중요한 점이 아닐까 한다. 이 책의 종장은 이또오 유끼오와 이성환 공동 명의의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맺어지고 있다.
마지막으로 식민지에 대한 기억은 가해자와 피해자라는 언어로 흔히 표현된다. 일본은 가해자로서의 인식이 부족하며 한국은 언제까지 일본을 추궁할 작정인지 하는 점이다. 여기에서 굳이 말하자면 한일 양국은 피해자와 가해자의 강박관념에서 벗어나야 할 시점에 이르렀다고 하고 싶다. 특히 한국은 전후(戰後)의 발전을 긍지로 여기고 일본에 대해 자신감을 가져도 좋은 것이 아닐까. 전전(戰前)의 일본이 비서구 지역에서 유일하게 근대화에 성공한 나라라고 한다면, 한국은 식민지를 경험한 나라 중에서 유일하게 정치경제적인 성공을 이룩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한국의 자신감이야말로 일본과 대등하고 바람직한 관계를 구축할 주춧돌이라고 생각한다.
여기에서 엿볼 수 있는 것은 근대지상주의적인 사고방식이다. 근대일본은 당연히 훌륭한 국가형성을 성취했고, 한국도 지금은 일본과 견줄 만큼 발전한 국가가 되었다, 이제 과거의 어두운 기억에 대해 너무 이야기하는 것은 그만두자는 것이 이 문장의 취지인 듯하다. 하지만 현재 세계적으로 포스트콜로니얼한 문제는 뿌리 깊이 존재하고 있고, 한국도 예외는 아니다. 식민지의 유산은 분명히 계승되어 있다. 역사의 망각이란 용서될 수 없다. 하물며 역사가가 이야기할 만한 것은 아니다.
지금 한국에서는 뉴라이트가 정치적 입장을 선명히 내세우고 세력을 키우고 있다는 것이 일본에도 잘 알려져 있다. 필자 나름대로 이해하자면 이 입장은 한국의 다민족화도 시야에 넣어 민족주의를 상대화하면서 자본주의를 절대화하고, 시대에 뒤떨어진 반공주의로써 한국의 강성화(强盛化)와 내셔널리즘의 고취를 꾀하려는 점에서 특징적이다. 거기에 근대화가 지상화된 결과 식민지하에서도 근대화가 진전됐다는 점이 강조되어 일본에 식민지화의 원죄성을 따지지 않게 된다. 조선의 근대화를 위해 총독부에 협력했다는 점에서 친일파에게 면죄부를 주고, 해방 후 이승만이나 박정희 같은 독재정권도 그 반공정책과 한국의 자본주의화에 공헌한 점을 높이 평가한다. 그리고 아시아에서 가장 일찍 근대화를 달성한 일본은 당연히 훌륭한 국가이며, 식민지화되었다 해도 이제 일본과 어깨를 나란히할 만큼 발전을 이룬 한국도 훌륭한 국가라고 평가한다. 이또오 유끼오나 이성환은 그러한 입장의 상호용인을 바탕으로 이또오 히로부미에 관한 연구를 공동으로 진행할 수 있었던 것이다.
3. 이항대립의 배제 논의와 식민지 책임
강제병합 100년에 제기된 세가지 문제 중에서 가장 중요한 논점은 식민지주의 비판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학계에서는 물론이고 시민운동의 장에서는 더욱 그렇다고 할 수 있다. 식민지 지배의 책임 문제는 2차대전의 전쟁 책임론에 가려 전후 반세기 동안 활발하게 거론되지 못했다. 그러다 냉전체제가 해체된 1990년 이후 예리하게 제기되기 시작했다. 2001년 8월 31~9월 8일 남아공 더반(Durban)에서 개최된 ‘인종주의, 인종차별, 배외주의 및 그에 관한 불관용에 반대하는 세계회의’(더반회의)는 노예제와 노예무역까지 포괄하여 식민지주의를 문제삼고 ‘반인도적 범죄’를 추궁하며 식민지주의 비판에서 획기적인 전기를 마련했다. 현재 일본에서는 ‘식민지 책임’을 예리하게 제기하려는 역사학이 성립하는 중이다.20
하지만 식민지 연구에서는 그러한 흐름에 역행하듯이 식민지근대화론이 세력을 떨치고 있다. 앞서 밝힌 이또오 유끼오 등의 공동연구는 그러한 움직임의 연장선상에 있다. 근대주의 입장에서 식민지에서도 자본주의 근대화가 진전했다는 점을 실증하려는 식민지근대화론에 ‘식민지 책임’을 추궁하는 자세가 미약한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런데 최근 식민지근대화론 정도가 아니라 정체론(停滯論)을 주장하는 세력이 뚜렷하게 부활하고 있다. 예를 들어 키무라 칸(木村幹)은 조선이 “당시 일본에 비해 근대화의 관점에서 볼 때 훨씬 뒤처져 있었으며 그 과정도 더딘 것이었다”고 주장하면서 조선의 ‘소국의식’=사대주의를 단죄하고 있다.21 그리고 후루따 히로시(古田博司)의 경우는 좀더 확신범에 가깝게 조선정체론을 단언하기를 거리끼지 않는다. 그는 다음과 같이 조선=잉카제국론을 전제로 삼은 식민지근대화론을 공언하고 있다.22
(조선시대는) 상점도 필방이나 유기(鍮器)가게 정도밖에 없고, 사람들은 시장과 행상인에 의지하고 있었다. 마게모노(曲げ物)23의 기술은 없고 차륜도 타루(樽)도 없다. 물건은 지게에 지고 사람이 운반했다. 염료나 안료가 없기 때문에 민간인은 백의를 입고, 도자기는 백자였다. 이조(李朝)는 이른바 세계가 중세기였을 때 고대국가로서 발생한 잉카제국에 가까운 존재로 특필된다.
이같은 국가를 식민지로 삼은 근대일본으로부터 염료가 들어오자 백의에 무늬를 넣어 염색한 것을 ‘왜풍(倭風)’이라 불렀고, 손수레가 들어오자 차가 없었기 때문에 오늘날까지 한글로 ‘구루마(くるま)’라고 쓰기에 이르렀다. 일본 식민지시대에 조선이 연평균 3.7%의 경제성장을 이룬 것은 한국인 연구자의 실증연구로 밝혀졌으며 이제는 숨길 일이 아니다.
전후 조선은 남북으로 분단되었는데, 한국은 38도선의 덕택으로 사상 처음 중국의 세력권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 나라는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북방으로 가지 못하는, 이른바 도서화(島嶼化)한 것이다. 다른 한편 북조선은 중국의 세력권에 계속 남겨졌다.
이것은 해방 후 정체론 극복을 위해 한국이나 북한은 물론 일본에서도 열심히 쌓아온 한국사학의 성과를 단칼에 부정한 셈이다. 여기에서는 타율성사관의 부활도 명료하게 확인된다. 더구나 이런 논의는 오늘날 한국에 대해서뿐 아니라 남미의 나라들에 대해서도 무례한 것이며, 식민지주의 비판이라는 관점이 근본적으로 결여되어 있다는 점에서 대단히 우려스럽다.
현재 한류가 다시 일본을 석권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혐한류(嫌韓流)도 심각하고 폭넓게 침투하고 있다. 야마노 샤린(山野車輪)의 『만화 혐한류(マンガ嫌韓流)』(普遊社 2005) 보급을 통해서 뚜렷해진 이 현상은 특히 젊은이들 사이에서 나타나는 만큼 문제가 심각하다. 또한 북한 때리기가 지극히 집요하게 벌어지고 있다. 일본에서는 고등학교 무상화가 추진되는 와중에 그 대상에서 북한계 조선학교가 배제될 듯해 큰 물의를 빚었다. 많은 운동을 한 결과, 조선학교도 무상화 대상에 포함되었지만 이시하라 신따로오(石原愼太郞) 토오꾜오 지사는 반대 입장을 표하고 있다. 후루따의 논의는 이러한 혐한류나 북조선 때리기에 즉각 반응한 것이며, 단지 역사인식의 문제에 그치지 않는 사회성을 띠고 있다.
이러한 논의나 현상 역시 세계화가 초래한 공동체 내부를 향한 배외적인 기운을 그 배경으로 지닌다는 사실은 말할 것도 없다. 강제병합 후 100년이 지난 지금도 식민지주의 잔영이 일본사회에 뿌리 깊게 존재함을 인식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상과 같이 식민지근대화론은 일본에서는 한국관(觀)과 관련된 사회문제로까지 이어져 중대한 사태를 불러일으키고 있는데, 그렇다면 식민지근대성론 쪽은 어떨까. 식민지근대성론은 식민지근대화론과는 달리 근대가 옳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비판하는 입장에서 개진된다. 주로 사회경제적 발전지표보다는 근대적 제도나 규율과 규범의 침투성 등에 주목하고 근대적 주체 형성이나 동의(同意) 형성, 더 나아가 식민지권력과의 협력체제가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등을 문제로 삼는다. 또한 민족주의를 비판함과 동시에 지배-저항이라는 이항대립적 도식을 분명하게 비판하며, 식민지권력의 헤게모니가 성립했다고도 본다.
포스트콜로니얼이론의 영향을 받은 식민지근대성론에서는 식민지근대화론 이상으로 민족주의를 상대화하려는 문제의식이 짙으며, 이항대립적 도식을 극복하려고 시도하는데, 이는 일면 이해할 수 있다. 필자 자신도 그런 도식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해왔다고 생각한다. 조선왕조 말기에는 양반토호-민중이라는 이항대립적 도식으로 파악할 수 없는 조화로운 재지(在地) 질서관(秩序觀)이 있음을 제기하고, 이를 ‘덕망가적 질서관’으로 정식화한 것이 그런 시도 중 하나였다.24 또한 식민지시기에는 ‘식민지성의 중층성’이 있으며, 다양한 계급계층에 식민지성은 불균등하게 각인된다고 했던 것도 그러한 의도에서였다.25
하지만 식민지근대성론은 식민지권력의 헤게모니 성립을 과대평가하는 한편, 근대적 주체 형성이나 동의 형성에 지나치게 주목하기 때문에 소외된 민중에 대한 관심이 희박하다는 점이 문제이다. 이 점에 대해 필자는 여러차례 비판해왔기 때문에 여기에서는 ‘식민지 책임’론에 관해서만 한마디하고자 한다. 이항대립을 배제한다는 것은 당연히 해야 할 논의이지만, ‘식민지 책임’의 문제를 언급할 때는 뜻하지 않은 함정에 빠지지 않도록 상당히 신중하고 자각적이어야 한다. 식민지 지배에서의 폭력의 중층성을 감안할 경우, ‘식민지 책임’의 문제가 애매해질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이항대립의 배제를 무한정 밀고나가면 친일파는 고사하고 일본인 식민지 지배자마저 변호하는 논리로 귀착될 수밖에 없다. 합병조약의 당사자인 이완용(李完用)이나 한국어의 절멸을 설파한 현용섭(玄容燮)조차 그들 나름대로 갈등이나 정당성의 논리가 있었던 것은 당연하다. 또한 총독인 테라우찌 마사따께(寺內正毅), 우가끼 카즈시게(宇垣一成), 미나미 지로오(南次郞) 등에게도 ‘조선을 위해서’라는 주관적인 집착이 있었던 것은 틀림없다. 지금 이완용이나 현용섭에 대해 그러한 변호를 하는 연구가 발표되고 있다. 그들의 정신구조를 분석하는 것은 중요한 작업이지만, 그들의 주관적인 의도를 구원하려는 시도가 그들에게 고통받은 민중의 입장에서 볼 때 과연 납득할 수 있는 역사학적 행위일까. 윤해동(尹海東)이 말하는 ‘회색지대’라는 것26이 식민지 조선에 넓게 분포해 있었다고 한다면, 가장 밑바닥에서 중층적으로 폭력에 시달렸던 민중도 식민지 권력과 결탁하여 이익을 분배받은 친일 자본가, 지주, 지식인 등과 동등한 위치가 될지도 모른다. 그것은 고통의 나날을 보낸 민중의 삶을 모멸하는 것인 동시에 식민지주의 비판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빚을 것이다.
식민지근대성론은 본래 식민지주의 비판이라는 커다란 과제를 짊어진 것이었다. 하지만 이론에 치우치다보면 식민지의 실태로부터 멀어질 위험성이 있고, 본래의 뜻과 다르게 식민지주의 비판을 약화시키고 마는 아이러니에 빠질지도 모른다. 이항대립적 도식만으로 식민지의 본질을 파악할 수 없다는 것은 물론이지만, 식민지 지배의 폭력성에는 항상 이항대립적 상황을 강요하는 속성이 내재하는 것은 아닐까. 특히 폭력이 맹위를 떨쳤던 무단통치기가 그렇다. 문화정치기에는 일견 한국인의 동의를 이끌어내어 그 내면을 지배하는 식민지 헤게모니가 성립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 그 동의를 마련하는 주요 수단으로 식민지의 폭력성이 항상 존재했다. 그리고 전시체제기에 들어서면 외견은 한국인의 자발적 협력을 얻어낸 것처럼 보이면서도 식민지 폭력은 무단정치기와 비교해 모자라지 않을 정도로 명백해졌다. 그에 따라 대다수의 민중은 ‘면종복배(面從腹背)’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강제병합 100년이라는 시간은 한 세대를 넘어선 세월이며 식민지성의 풍화도 심각해 보인다. 하지만 식민지성은 한국사회에 아직도 어떠한 형태로든 잔존하고 있다. 또한 세계적으로도 식민지적 상황이 계속 이어지고 있으며 식민지주의 비판의 칼날이 녹슬었을 리 만무하다. 세계화의 진행 속에서 격차가 확대되고 사람들이 원자화되어 자립성을 상실하고 있는 지금, 시민적 공공성(公共性)보다는 오히려 힘없는 민중적 공동성(共同性)의 재생이야말로 제기되어야 한다는 것이 필자의 진단이다.
지금 일본이나 한국에서 민중사(民衆史)의 존재감이 미약해졌지만, 민중사적인 지평에서 식민지를 본다면 식민지주의 비판은 한층 유효한 것이 될 터이다. 강제병합에 의해서 가장 고통을 받았던 것은 물론 민중이다. 민중은 그 속을 꿋꿋이 살아갔으며, 그렇다고 그 삶의 방식이 꼭 아름답지만은 않았다. 민중을 미화할 필요는 전혀 없으며, 또 그래서도 안된다. 진정 필요한 것은 있는 그대로의 민중을 파악하려는 노력과 ‘밑으로부터’의 역사를 보려는 관점의 정립이다. 강제병합 후 100년, 풍요를 향유하게 되었다고 여겨지는 이때 민중사의 중요성이 다시금 문제화되고 있다.
마치며
한국병합은 한국과 일본에 이중의 트라우마를 불러왔다. 차별이나 폭력은 당연히 피해자에게 트라우마를 유발하지만, 가해자 쪽도 자신의 부당행위가 마음속 어딘가에 응어리로 남기 때문에 어떤 식으로든 트라우마를 품지 않을 수 없다.
오늘날 한국과 일본의 관계는 100년 전에 비해 크게 변했다. 한국의 경제발전은 한국인에게 깊은 자신감을 심어준 반면, 일본경제의 장기불황은 일본인에게 자신감 상실을 일으켰다. 이러한 사정을 배경으로 한국에서는 아직 반일감정을 쉽게 불식할 수 없는 상황인 한편, 일본과 대동하다는 의식이 대두하여 때로는 우월적인 태도로 나타나기도 한다. 한국인은 본래 일본인에 비해 스스로가 문명민족이라는 의식이 강하기 때문에, 그러한 콤플렉스의 전복으로서 대응하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일본의 경우는 이와 정반대이다. 일본인 대다수는 조선의 식민지 지배에 대해 죄의식이 희박한 채 오늘에 이르렀다. 그리고 지금도 과거의 부당한 우월의식에 스스로를 구속하고 있는 듯하다. 한국은 어떻게 이 정도까지 경제발전이 가능했을까, 그것이 실은 조선을 지배한 일본의 은혜가 아닐까라고 말하는 것이다. 거기에는 자신감 상실에 의해 비롯된, 과거의 예속민족에 대한 질투도 엿보인다. 한국이 일본과 동등한 위치에 서는 꼴은 두고볼 수 없다는 심정인 것이다.
이같은 양자의 입장 차이가 우호적인 교류의 한편에서 깔끔하게 정리되지 않은 상호감정을 온존시키고 있다고 보인다. 그리고 그것은 역사인식으로 파급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다른 한편 병합 100년이라는 시간은 서로가 역사인식의 ‘여유’를 가지기에 충분한 세월이기도 하다. ‘여유’는 상호인정으로 이어져 바람직하다고 볼 수도 있지만, 한국이나 일본이 스스로 선진국 혹은 선량민족이라는 자의식에 바탕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근대나 국민국가의 상대화라는 관점에서 혹은 민중적인 관점에서 새로운 문제를 불러올지도 모른다.
한국의 정치문화는 일본과 전혀 다른 점이 있었다. 분명 근대에 대응하려다 실패한 측면이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근대나 국민국가의 상대화를 생각할 경우, 시사적인 바를 일러주고 있다. 유교적 민본주의의 정치문화는 ‘민본’을 표방하면서도 그것과 반대로 민중을 괴롭히는 측면이 있기는 하지만, ‘왕도’와 ‘교화’를 중시한 점에서 ‘패도’와 ‘규율’을 추구한 서구=일본적인 근대국가를 비판할 수 있는 계기를 내포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정치문화는 지금도 한국사회의 어딘가에 계속해서 존재하고 있다. 그 재생을 지향해서는 안되겠지만, 강제병합 100년의 시점이라면 그야말로 패배한 정치문화의 역사적 의미를 냉정하게 음미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한국사・동아시아사의 방향성이나 의미도 그러한 작업 속에서 찾아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번역 | 박광현・동국대 국문과 교수
* 이 글은 본지의 청탁을 받고 필자가 일본어로 집필한 원고를 전문 번역한 것이다. 원제는「韓國强制倂合と現在—100年後に殘された問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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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宮嶋博史 「東アジア小農社會の形成」, 『アジアから考える』 6, 東京大學出版會 1994.↩
- 宮嶋博史 「東アジア世界における日本の‘近代化’」, 『歷史學硏究』 821호, 2006; 「日本史認識のバラタイム轉換のために—‘韓國倂合’100年にあたって」, 『思想』 1029호, 2010.↩
- 졸고 「朝鮮の國民國家構想と民本主義の傳統」, 久留島浩・趙景達 編 『國民國家の比較史』, 有志舍 2010.↩
- 졸고 「朝鮮における大國主義と小國主義の相克—初期開化派の思想」, 『朝鮮史硏究會論文集』 22, 1985; 「近代朝鮮の小國思想」, 菅原憲一・安田浩 編 『國境を貫く歷史認識』, 靑木書店 2002.↩
- 졸고 「總論: アジアの國民國家構想」, 久留島浩・趙景達 編, 『アジアの國民國家構想』, 靑木書店 2008.↩
- 호적에 올릴 때 부역에서 제외하기 위해 사내를 빼놓는 일—옮긴이.↩
- 호적에서 집을 빼놓는 일—옮긴이.↩
- 소장(訴狀), 고장(告狀), 소지(所志) 따위를 관청에 제출함—옮긴이.↩
- “明罰飭法 將以敎也 / 不敎而刑 謂之罔民” (『牧民心書』, 「禮典」, <敎民>)↩
- 에도시대에 막부가 민중의 신앙 조사를 위해 만든 ‘종문개장’과 주민 조사를 위한 ‘인별장’을 합쳐 부르는 이름. 후에 하나로 통합되었다—옮긴이.↩
- 丸山眞男 「開國」, 『講座現代倫理』, 筑摩書房 1959.↩
- 이태진 외 『고종황제 역사청문회』, 푸른역사 2005.↩
- 졸고 「危機に立つ大韓帝國」, 『岩波講座: 東アジア近現代通史』 第2卷, 2010.↩
- 졸고 「政治文化の變容と民衆運動—朝鮮民衆運動史硏究の立場から」, 『歷史學硏究』 859호, 2009.↩
- 졸고 「武斷政治と朝鮮民衆」, 『思想』 1029호, 2010.↩
- 伊藤之雄 『伊藤博文—近代日本を創った男』, 講談社 2009.↩
- 졸고 「問題提起: 近代日本のなかの‘韓國倂合’」, 安田常雄・趙景達 編 『近代日本のなかの‘韓國倂合’』, 東京堂出版 2010.↩
- 中塚明 「日本近代史硏究と朝鮮問題」, 『歷史學硏究』 867호, 2010. 宮嶋博史 「日本史認識のパラダイム轉換のために」, 『思想』 1029호, 2010. 小川原宏幸 「伊藤博文の韓國統治と朝鮮社會—皇帝巡幸をめぐって」, 『思想』 1029호, 2010.↩
- 伊藤之雄 「伊藤博文と韓國倂合」, 『每日新聞』 2010.7.13 석간.↩
- 永原陽子 編 『‘植民地責任’論』(靑木書店 2009)는 그런 공동연구이며, 역사학계에서 주목을 받았다.↩
- 木村幹 『朝鮮/韓國ナショナリズムと‘小國’意識』, ミネルヴァ書房 2000.↩
- 古田博司 「國家の正統性確立に苦しむ韓國」, 『産經新聞』 2009.12.29.↩
- 노송나무, 삼목 따위의 얇은 판자를 구부려 쳇바퀴처럼 만든 원통에 바닥을 메운 그릇. 주로 목욕통과 술통처럼 액체를 담아두는 용기로 쓰인다. 오께(桶)와 타루(樽) 두 종류가 있는데, 일상에서 흔히 혼동하여 부른다—옮긴이.↩
- 졸저 『朝鮮民衆運動の展開—士の論理と救濟思想』, 岩波書店 2002.↩
- 졸저 『植民地期朝鮮の知識人と民衆—植民地近代性論批判』, 有志舍 2008.↩
- 윤해동 『식민지의 회색지대: 한국의 근대성과 식민주의 비판』, 역사비평사 2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