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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김대중 자서전』(전2권), 삼인 2010

흙탕물 속의 한국정치를 감당하며

 

 

홍석률 洪錫律

성신여대 교수, 한국현대사 srhong@sungshin.ac.kr

 

 

7281고 김대중(金大中) 전 대통령의 자서전이 나왔다. ‘준비된 대통령’의 준비된 자서전이라는 느낌이다. 일반적으로 자서전은, 특히 최고 정치지도자의 자서전은 문자 그대로 혼자 스스로 써내려가는 방식으로 작성되지 않는다. 제대로 된 자서전을 집필하려면 본인이 남긴 기록은 물론이고, 관련 공문서와 신문기사 등 광범위한 자료 수집과 검토가 필요하다. 자료를 바탕으로 기억을 환기해야 하고, 일시와 장소, 사건의 배경 등도 일일이 확인해야 한다. 정치지도자의 경우 관계된 사건이 무척 많으므로 무엇을 어떻게 자서전에 남길지도 고민이다. 전문가들의 자문과 참여가 필수적이다. 김대중 자서전은 이러한 과정을 충실하게 거쳐 작성된 것으로 보인다. 자서전 집필 경위와 여기에 참여한 사람들이 책 말미에 소상히 밝혀져 있다.

그러나 자서전은 본질적으로 ‘나’의 관점에서 자신의 인생을 정리한 개인적인 기록이다. 누가 원고를 작성하든 저자가 수정, 삭제, 보완에 대한 최종적인 판단을 한다. 저자의 의도에 따라 또는 무의식적으로, 강조된 것과 소략하게 취급된 부분이 있기 마련이다. 이 책에서 상대적으로 강조된 부분은 주로 국제관계, 남북관계에 관련된 것들이다. 김대중은 1973년 토오꾜오에서 납치당했고, 이후 투옥과 가택연금이 반복됐으며, 심지어 사형선고까지 받았다. 특히 한미관계에서 김대중 문제는 자주 외교적 쟁점이 되었다. 그는 민주화투쟁 과정에서 많은 외국인의 도움을 받았고, 그들과 친분을 쌓았다. 이들과의 사적인 관계 및 대화 내용을 상대적으로 자세하게 서술했다. 대통령 재임기간을 다룬 제2권의 경우 이러한 양상이 더욱 뚜렷하다.

2000년 남북정상회담은 이 책의 절정에 해당된다. 615 공동선언문을 끌어내기 위해 김정일 위원장과 나눈 대화 내용은 대담 비망록처럼 발언 하나하나를 짚어가며 극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통일방안 문제부터 서명시 직함 표기 여부까지 쟁점이 됐던 모든 것을 상세히 서술했다. 특히 대화중에 김정일 위원장이 동북아 역학관계로 보아 평화유지를 위해 통일 후에도 미군이 한반도에 주둔해야 한다고 언급했다는 대목이 주목된다(2290면). 남북정상회담 이후 북미관계의 진전에 대한 서술도 흥미롭다. 클린턴 대통령이 임기말 북한을 방문하려 했으나 200011월 치러진 부시와 고어의 대통령선거 결과가 오랫동안 확정되지 못해 시기를 놓쳤다는 일화는 이미 알려져 있다. 그런데 클린턴은 1221일 김대통령에게 전화해서 자신의 방북이 최종적으로 무산되었음을 알리고, 그 대신 20011월 중으로 김정일 위원장을 워싱턴에 초청하겠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이 책에 따르면 실제 클린턴은 김정일에게 편지를 보내 미국 방문을 요청했지만 북이 응하지 않아 무산됐다고 한다(2380~81면). 향후 여러 논란을 일으킬 만한 증언이다.

자서전의 국내정치 관련 대목은 주요 사건과 쟁점이 대부분 짚어졌지만 국제관계에 비해 상대적으로 소략하다. 야당 정치인 시절 재야인사 등 민주화운동세력과 맺은 관계에 대한 언급은 자세하지 않다. 1987년 대통령선거 과정에서 김영삼 후보와의 단일화 문제를 둘러싼 논란도 이미 알려진 주장과 논리가 반복될 뿐이다. 부인 이희호(李姬鎬) 여사는 자서전 『동행』(웅진지식하우스 2008)에서 선거 이틀 전(1214일) “후보단일화의 결단을 내릴 수 있는 마지막 기회가 있었지만” 끝까지 ‘4자 필승론’ ‘승리는 필연’이라고 주장한 사람이 있었다고 했다. 또한 야권 후보단일화 실패에 대해 “나 역시 역사와 국민 앞에 큰 죄를 지은 느낌이었다”고 서술했다(286면). 반면 『김대중 자서전』에는 선거 이틀 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언급이 없다. 다만 후보단일화 문제에 대해 자신이라도 양보했어야 했다며, “너무도 후회스럽다”고 적고 있다(1536면). 부부가 모두 자서전을 집필한 예는 상당히 드물 것이다. 두 사람의 회고록을 보면 같이 겪은 일이지만 서술에 미묘한 차이가 나는 부분도 있다. 두 책을 비교하면서 읽으면 더욱 흥미로울 것이다.

대통령 재임기간의 국내정치에 대한 내용은 더욱 소략하다. 예컨대 외국 지도자와의 만남과 대화 내용은 자세히 서술했지만, 야당 당수였던 이회창 한나라당 총재를 비롯한 정치인과의 관계나 대화 내용은 간략하게 처리했다. 김대중은 자신이 박정희 대통령을 직접 만나 대화를 나눈 것은 단 한번밖에 없었다고 했다. 1968년 신년인사차 청와대에 갔다가 선 채로 5분 정도 이야기를 나눈 것이 전부라는 것이다(1381면). 한국정치에서 소통이 얼마나 부재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김대중은 정치란 “심산유곡에 핀 순결한 백합화가 아니라 흙탕물 속에 피어나는 연꽃 같은 것이다”라고 했다(121면). 그는 흙탕물을 평생 감당하고 살아왔으나 비켜가고 싶은 심정도 끝까지 없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러나 이 자서전에서 강조되는 것은 흙탕물이 아니라 ‘연꽃’임이 확실하다. 이 책은 감옥에서부터 청와대까지 정말 다양한 내용을 다루고 있지만 어떤 일관된 메씨지가 있다. 그것은 “정의는 반드시 승리한다”는 것이다. 사형수에서 대통령이 되고, 나아가 노벨평화상까지 받으며 세계가 인정하는 지도자가 된 그의 인생 자체가 이러한 메씨지를 자연스럽고 감동적으로 전달해준다.

정치인 김대중이 이야기하는 정의란 구체적으로는 민주주의와 남북관계의 개선으로 집약된다. 그는 자신이 생각한 옳은 것(정의)을 위해 온갖 고통을 견디며 원칙을 지켜왔다고 자부한다. 그런데 그의 민주주의관은 기본적으로 중산층 중심적이다. 이는 19604월혁명과 876월항쟁에 대한 설명에서 중산층의 역할과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에서도 잘 드러난다. 또한 외교나 남북관계 면에서 뛰어난 유연성을 보여주었지만 기본적으로 한미동맹을 절대시하는 입장이다. 그리고 김대통령은 재임기간에 외환위기를 극복하기는 했지만 소득양극화가 심화되는 것을 막지 못했음을 솔직하게 인정한다. 이로 인한 서민들의 상대적 박탈감을 “알면서도 어쩔 수 없었다”(2483면)고 술회한다. 그는 일평생 한국에서 또는 아시아에서 민주주의는 불가능하다, 남북의 화해와 통일은 불가능하다는 주장을 반박하며 그 가능성을 제시하고 이를 실현하기 위해 분투했다. 정의는 필승이라는 말과, 알면서도 어쩔 수 없었다는 말은 어딘지 서로 맞지 않는다.

이 책은 정치인 김대중이 헌신적인 노력으로 이룬 성취를 보여줌과 동시에 그의 한계, 그가 남긴 숙제도 드러낸다. 정치인 김대중이 제시한 정의의 방향에 공감했던 사람들, 그래서 절대적으로, 상대적으로, 또는 비판적으로 그를 지지했던 사람들이 앞으로 극복하고 감당해야 할 일이라 본다. 이렇듯 성취와 한계를 다 보여주기에 역시 ‘준비된’ 자서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