촌평
정수일 『초원 실크로드를 가다』, 창비 2010
초원의 길에서, 역사의 물음에 답하다
장석 張碩
이우학교 이사장 seapeace@singsings.co.kr
2009년 5월의 어느날 새벽, 티베트의 라싸를 향해 칭짱고원을 서쪽으로 달리고 있는 기차 안에서, 노학자는 후에 이 책의 한장을 이루게 되는 글을 쓰고 있었다. 티베트 답사를 목적으로 그를 따라나선 일행은 모두 4인실의 침대칸에서, 기차바퀴와 레일이 만나 규칙적으로 만드는 리듬을 자장가 삼아 깊은 잠에 빠져 있던 때였다. 늦도록 마신 백주(白酒)와 밀려오기 시작한 고산증세가 나를 깨웠고, 젊은 동행들의 잠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좁은 객차 통로의 접이식 간이의자에 걸터앉아 손전등 불빛에 의지해 열중하고 있던 그를 나는 보았다.
현생인류는 6만년 전 아프리카로부터, 온 지구에 민들레 홀씨 날리듯 퍼지면서 길을 열기 시작했다. 급격한 기후변화나 먹을거리를 찾아야 하는 절박한 일상이 인류의 이동을 끊임없이 추동했고, 그중 시베리아나 동남아시아 쪽으로 길을 잡은 이들이 오늘날 동아시아인 집단을 형성했다. 무리의 전체거나, 때로는 갈라져나온 일부가 길을 따라 혹은 길을 만들며 이동하는 광경을 상상해보자.
기원전 1만년경, 농경과 그에 따른 정주생활이 시작되었고 농업생산형태에 기초해 소규모의 촌락세계로부터 도시, 그리고 점차 복잡하고도 강력한 고대문명에 이르기까지 여러 사회들이 구성되어왔다. 교류와 소통을 위한 이동의 필요는 더욱 커져갔고, 그에 따라 이동의 빈도와 규모의 증가는 길을 더욱 뚜렷하게 만들어갔을 것이다.
문명을 탄생시키고 소통시키는 길들 중 범지구적으로 현저하게 역사적 역할을 담당해왔던 길을 실크로드라 한다. 이 책에서 다루는 ‘초원 실크로드’는 3대 실크로드 간선 가운데 가장 일찍 개통된 유구한 길이다. 북방 유라시아 초원에서 유목기마민족이 펼쳐온 장대한 드라마의 무대다. 인류가 말을 사육한 역사는 6천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지만, 기원전 1천년경 서남아시아 유목민의 고삐와 재갈의 발명, 뒤이어 스키타이의 말등자 고안이 역사무대에 유목기마민족과 그 문화의 출현을 가능케 했고, 이 길과 이 길을 통한 인류의 삶에 엄청난 역동성을 불어넣었다.
정수일(鄭守一)의 자상하면서도 시종일관 소홀함이 없는 안내를 따라 상상 속에서나마 초원로를 여행하노라면, 옛 선인들이 즐겼던 와유(臥遊)의 그윽한 경지를 짐작할 수 있을 듯하다. 그러면서도 이 길에서, 우리가 이제껏 벗어나지 못했던 역사적 상상력의 고정관념과 정면으로 마주치게 된다. 그중 하나는 농경에 바탕을 둔 정주문명만이 가장 높은 수준의 고대문명을 이룩한 주역이라는 정설이다. 인간 생계양식의 기원을 탐색하는 최근의 연구들도 유목이라는 양식에는 의미있는 관심과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 그러나 초원 실크로드를 따라 기원전 5세기부터 천년 동안 스키타이와 흉노를 비롯한 유목기마민족에 의해 펼쳐진 황금문화의 자취는 이러한 ‘문명중심주의’의 협소한 편견을 수정하게끔 한다. 신라는 이 ‘황금문화의 동단에서 그 전성기를 구가’했다.
또 하나의 고정관념은 우리나라를 포함한 동아시아의 제국이 중국문화에 완전히 종속적이었다는 것이다. 즉 중화문화의 아류이며 한차원 낮은 수준의 문화가 변주되는 변방으로 파악하는 것이다. 한반도와 그 북쪽의 광활한 영역에서 중국문화와는 일정하게 독립적이고 자생적이며, 문명교류의 다른 연원과 통로를 가진 독창적이고 색채감 넘치는 문화가 존재하고 일정 시기까지 존속했다는 생각에 가장 큰 영감을 주는 연구자는 『유리의 길』의 저자 요시미즈 쯔네오(由水常雄)이다. 그는 1970년대 이래 신라 고분에서 대량으로 발견된 유물에 대한 꼼꼼한 조사와 고증을 통해, 신라가 4세기 이래 6세기 이전까지 로마문화의 나라였다고 주장한다. 초원 실크로드가 지중해유역과 흑해 남서안의 로마문화 지역과 한반도의 동남쪽 신라를 이어주었다는 것이다. 그 교류의 구체적인 성격과 양상, 그리고 경로, 특히 초원로가 몽골고원을 넘어서 한반도까지 이르는 경로의 비정(比定)에 관련해서는, 저자를 비롯한 국내 학자들에 의해 더욱 뜻있는 연구성과가 생산되기를 요청한다.
션양(瀋陽)을 거쳐, 고대 동북아의 허브였던 차오양(朝陽)에서 대흥안령(大興安嶺) 초원로의 발걸음이 시작된다. 이어 몽골과 시베리아까지 이르는 길고 먼 여정이다. 영주(營州)라고도 불렸던 차오양은 한때 고구려의 최서단 국경도시였다. 당(唐)의 한 시인은 이 도시에 넘치는 역동적이고 이국적인 분위기를 이렇게 노래한다. ‘오랑캐 땅의 술은 아무리 마셔도 취하지 않고, 그곳 아이들은 열살에 이미 기마에 뛰어나구나.’ 이곳부터 벌써 초원의 정서가 이렇게 풍부하니, 아득히 북쪽으로 우리 역사의 무대였던 장소들에 스며 있을 선인들의 체취는 어떠할까.
이 책의 여정에는 우리 겨레의 역사적 뿌리를 탐색하려는 노력이 가득하다. 이와 더불어, 고구려와 발해 등 역사시대의 겨레의 활동상과 실크로드를 통한 다른 문화와의 교역과 교류 현장이 생생하다. 나아가서, 근현대사의 격랑에 휩쓸려 시베리아에 진출하여 고난의 길을 걸었던 50만 한인의 수난사가 그림처럼 펼쳐진다.
초원에서 저자가 힘닿는 한 샅샅이 가려서 줍고자 했던 주옥(珠玉)은, 침묵의 함성을 지르고 있는, 우리 겨레의 지문이 새겨져 있는, 역사라는 저장장치에 기록되어 있는 정보들이다. 조각을 찾고 이어, 과거를 설명하고 우리의 미래를 예측하는 이론의 틀을 완성해간다.
역사지리적 감수성이 풍부하지 않아서 실크로드 연변에 펼쳐졌던 광대한 파노라마가 도무지 상상되지 않는 독자라도, 저자의 삶의 궤적에 눈을 돌리면 어떤 영감이 솟구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일제강점기 시절, 고향인 함경도 명천에서 멀리 떨어진 우리 민족 디아스포라의 ‘아름다운 구석’ 연변으로 이주한 집안에서 출생한 그는 피압박민족의 어렵지만 정감 넘치는 가정에서 성장하여 조국과 ‘특별하고 강하며 안정적인 애착관계’를 형성한다. 재능과 행운에 의해 뻬이징대학을 거쳐 카이로대학에서 아랍어와 이슬람학을 전공하고, 중국 외교부의 전도양양한 외교관으로 알제리에서 또 꾸바에서 젊은 시절을 펼쳐나간다.
‘깊은 골짜기에서 나와 높은 나무로 옮겨가는 것이 본디 인정세태이거늘’(『시경』), 그는 보장된 미래를 미련 없이 포기하고 전후의 북쪽 조국으로 환국한 후, 시대의 요청에 따라 격변의 삶을 살게 된다. 그러나 그의 삶은 한번도 해체되었다가 재조립되지 않은, 굵은 밧줄처럼 일관된 것이었다. 그 일관성의 근저에는, 리처드 니버(Richard Niebuhr)가 ‘대답하는 자아’(responsible self)라고 명명한, 타인과 공적 가치의 소명에 항상 반응하고 대답하는 자세로 삶을 조각해가는 사람이 있는 것이다. 민족과 학문에 대한 사랑과 열정이 일관된 그를 만들어왔다. 그의 학문적 성과의 대부분은 ‘무릎책상’을 놓고 ‘입김으로 언 붓을 녹여가며’ 만들어낸 것이다.
초원 실크로드 문명실록인 이 책을 마무리하고, 바닷길 답사를 준비하고 산적한 과제들을 풀어나가면서, 노학자는 주위의 강권을 이기지 못하고 수십년 세월의 지병이던 두 다리의 하지정맥류 수술을 세차례에 걸쳐 받았다. 노련한 주치의는 환자의 미련스러울 정도의 인내에 경악하면서도, 심각한 상태의 환부를 정성을 다해 시술해주었다. 마지막 수술을 마친 그는, 평생의 과업에 대한 사명감으로 단단히 조여매고 한번도 벗지 못했던 신발의 끈을 반세기 만에 비로소 잠시 푼 것처럼 보였다.
내일 그는 또 신발끈을 새로 맬 것이다. 길은 늘상 그의 앞에 펼쳐져 있으며, 그는 새벽길을 마다하지 않는다. 그에게 젊음은 이미 떠나간 것이 분명하지만, 노년은 도대체 언제 오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