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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김선우 金宣佑
1970년 강릉 출생. 1996년『창작과비평』으로 등단. 시집『내 혀가 입 속에 갇혀 있길 거부한다면』『도화 아래 잠들다』『내 몸속에 잠든 이 누구신가』등이 있음. lyraksw@hanmail.net
이건 누구의 구두 한 짝이지?
내 구두는 애초에 한 짝, 한 켤레란 말은 내겐 폭력이지 이건 작년의 구두 한 짝 이건 재작년에 내다 버렸던 구두 한 짝 이건 재활용 바구니에서 꽃씨나 심을까 하고 살짝 주워온 구두 한 짝, 구두가 원래 두 짝이라고 생각하는 마음氏 빗장을 푸시옵고 두 짝이 실은 네 짝 여섯 짝의 전생을 가졌을 수도 있으니 또한 마음 푸시옵고 마음氏 잃어버린 애인의 구두 한 짝을 들고 밤새 광장을 쓸고 다닌 휘파람 애처로이 여기시고 서로 닮고 싶어 안간힘 쓴 오른발과 왼발의 역사도 긍휼히 여기시고 날아라 구두 두 짝아 네가 누군가의 발을 단단하게 덮어줄 때 한쪽 발이 없는 나는 길모퉁이 쓰레기통 앞에서 울었지 울고 있는 다른 발을 상상하며 울었지 내 구두는 애초에 한 짝, 한 켤레란 말은 내겐 폭력이지 그러니 내가 만든 이 얼음구두 한 짝은 누구에게 선물할까 두 짝 네 짝 여섯 짝의 전생을 가졌을 구두 한 짝은,
12월 마지막 날 B형 여자의 독백
13월에게
우리 종족의 피가 네 종류뿐이란 게 부끄러워요
더 많은 피의 비밀이 있을 텐데
고작 네 종류밖엔 감당하지 못하는 걸 테니까
네 종류 피는 질서 유지의 한도
네 종류 피 속에 숨어 있는 팔만 사천가지 비밀 얘기들이 궁금해
나는 전사가 되었어요 오늘은 12월의 마지막 날
저 새의 혈액형을 알아다 주세요
내가 사랑하는 돌고래의 혈액형
귀여운 펭귄과 신비한 늙은 코끼리의 혈액형
아카시아잎 오물거리는 푸른 자벌레의 혈액형
기린과 오로라의 혈액형, 나를 홀리는 모든 존재들의 피가 궁금해
어젯밤 시실리에 떨어진 운석에 묻어 있는
얼음 종족 당신의 혈액형도, 알려주세요
당신에게 헌혈할 수 없어 안타까워요
오늘은 12월의 마지막 날
내게 남은 스물세번의 12월, 그 첫번째 12월
팔만 사천개의 혈액형이 반딧불처럼 발광하는
13월을 불러줘요 내 피를 줄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