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사평
올해로 4회를 맞는 창비장편소설상에는 총 160편이 응모되어 장편소설 쓰기에 매진하는 작가들의 지속적인 열의와 뜨거운 관심을 엿볼 수 있었다. 전체적으로 수준이 고르고 주제도 무척 다양했다. 가족의 해체, 싸이코패스 등의 정신병리, 탈북 혹은 경계넘기, 성형과 다이어트 그리고 웰빙 집착증, 학원폭력과 십대들의 방황, 개발 이권을 놓고 벌어지는 경제발전과 환경보존의 대립 등 현실적이면서도 중요한 문제들을 다루고 있었다.
형식 면에서도 정통 소설작법을 뛰어넘어 장르소설 혹은 인접 글쓰기 장르와의 매끈한 결합을 시도한 작품이 많았다. 이런 경우 서사적 측면의 성과와 인접 장르의 도입에 따른 성과를 함께 보여주어야 한다. 그러나 글쓰기 형식에 지나치게 집착한 결과 사실을 인용하거나 나열하기에 바빠 형식미가 곧 주제로 응축되는 성취를 가져오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예심과 본심을 통합한 형태로 진행된 심사는 다섯명의 심사위원이 응모작을 나눠 읽은 후 작품을 추천하여, 최종적으로 7편의 작품을 놓고 수상작을 결정하는 절차를 가졌다. 이렇게 해서 마지막까지 논의된 작품은 모두 3편이었다.
김조을해의 『南으로』는 독창성이 뛰어난 작품이었다. 등장인물들의 동선과 화법이 기존의 그 어떤 소설과도 비슷하지 않다는 점이 커다란 강점이었다. 작품의 무대인 힐공동체는 “감옥도 수용소도 아닌, 요양원도 휴양지도 아닌” 무국적의 장소 같은 곳으로 설정되어 있다. 이곳에서 주인공 마기는 자신을 돌봐주는 관리인인 간사, 그리고 큐선생과 함께 연극대사 같은 대화를 나누는 것이 일과의 전부다. 이 소설은 다른 응모작에 비해 서술하는 톤이 안정되어 있고 소재를 완벽하게 장악하고 있어 작가의 이야기를 풀어내는 재주가 단단함을 엿볼 수 있었다. 그럼에도 작품 전반에 깔려 있는 모호함 탓에 일차적인 소통에 실패하고 있다. 그런 모호함은 마기가 흥얼거리는 노래들, 글을 썼다는 마기의 엄마에 관한 서술에서 한층 심해진다. 그리고 마기가 꿈꾸는 판타지가 “여자와 아이, 그리고 가정”이라는 서술은 이 작품의 신선함을 떨어뜨리는 주요 요인이라는 점도 지적해둔다.
김형수의 『금발의 제니』는 행방불명된 지 오래이던 할머니가 어느날 갑자기 나타나면서 할머니가 갖고 있는 60억이라는 돈의 행방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해프닝을 다룬다. 가족간의 갈등을 유쾌한 화법과 입심 좋은 디테일로 풀어나가고 있다. 할머니의 등장으로 십년 백수생활을 청산하고 피씨방을 열 희망에 들뜬 화자를 중심으로, 가족 구성원들 사이에 퍼져나가는 갈등의 무늬가 물신사회의 적나라한 모습을 설득력있게 보여준다. 그러나 동지를 밀고하고 살아남아 60년 만에 나타난 할머니의 과거, 또 그 과거가 사실이 아님이 밝혀지는 과정 등이 치밀하지 않고 상식적이면서 가볍게 처리되었다. 전체적으로 독창성 없는 익숙한 스토리라는 혐의를 떨쳐내기 어려웠다. 60억을 둘러싼 한바탕 소동이 씨트콤처럼 끝나 장편소설의 역동성, 활력을 잃고 말았다는 아쉬움이 컸다.
황시운의 『차고 날카로운 달』은 물욕과 성욕이 지배하는 현대사회에서 성장해가는, ‘서태지 세대’의 자아 형성과 탐색에 대한 이야기다. 화자는 “내가 슈퍼울트라 개량돼지이기 때문에 왕따가 된 것인지, 왕따이기 때문에 슈퍼울트라 개량돼지가 되어버린 것인지조차 분명치 않았다”라며, 모든 사람이 자기를 뚱뚱하기 때문에 혐오한다고 믿는 고등학생이다. 이 작품은 무엇보다 평이한 소재에 살을 붙여 만든 디테일들이 성공적으로 배치되어 있고 미혼모 시설 등 사회문제에까지 시선을 확장하는 솜씨가 빼어났다.
그러나 소재의 매력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에서 중요한 아이콘으로 등장하는 서태지라는 시대적 상징에 쉽게 기대고 있다는 것은 단점으로 지적되었다. 그의 노래처럼 쉽게 ‘Come Back Home’ 해버리는 결말 또한 아쉬웠다. 이것이 성장소설이라고 한다면 약간의 의미있는 비약, 뛰어넘기, 혹은 하나의 강을 건넌 듯한 느낌을 줄 수 있다면 더 좋지 않았을까.
여러 각도의 토론을 거친 결과 김형수의 『금발의 제니』와 황시운의 『차고 날카로운 달』 2편을 놓고 다시 격렬한 토론과정을 거쳤다. 그 결과 황시운의 『차고 날카로운 달』을 수상작으로 결정했다. 서태지와 왕따 세대, 코카콜라와 프링글스, 안나수이와 다이어트 싸이트를 종횡무진 누비는 화자가 세태의 한 단면을 상징하는 인물로 충분했기 때문이다. 또 작가가 이야기를 끌고 나가는 에너지가 넘친다는 점, 자기비하를 넘어서 괴물이 된 자신을 바라보고 서술하는 시선이 솔직하다는 점, 십대들이 가진 일탈충동과 그에 동반된 불안을 생기있는 언어로 묘사할 줄 안다는 점을 높이 사기로 했다. 이 기회를 통해 에너지를 잃지 않고 좋은 작품을 써내는 작가로 거듭나길 바라며 축하의 인사를 전한다. 또 올해에도 우수한 작품을 보내준 많은 작가들께 감사의 인사를 보낸다.
|강영숙 은희경 정이현 진정석 한기욱|
수상소감
황시운
1976년생. 군산대 수학과 졸업. 2007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당선.
1998년 여름은 지루했다. 슬프거나 아팠던 게 아니다. 그저 지루했다. 1997년도 그랬고, 1996년도 그랬다. 그 이전 해도, 또 그 이전 해도 마찬가지였다. 돌이켜보면 대학시절의 나는 비루하기 짝이 없었다. 그때 나는 하고 싶은 일이 단 한 가지도 없었다. 말 그대로 꿈이 없는 인간이었다. 그해 여름, 아침부터 쪼아대는 상사를 피해 도망치듯 숨어든 서점에서 내가 집어든 게 소설책이 아니라 요리책이었다면, 아마 나는 요리사를 꿈꿨을 것이다. 어쨌든 그날 이후 소설은 내게, ‘하고 싶은 유일한 일’이 되었다.
유일하게 하고 싶어진 일이 다름아닌 ‘소설’이어서 치러야 했던 댓가는 혹독했다. 나는 소설이 아닌 모든 것들에 대해 무책임해져야 했고 뻔뻔해져야 했으며 게을러져야 했다. 그 무책임함과 뻔뻔함과 게으름이 극에 달했을 무렵, 짐을 꾸렸다. 변변치 못했던 일자리마저 내팽개치고 떠도는 동안 가족은 나를 먹이고 입히고 내버려둬주었다. 나는 그들이 주는 대로 먹고 입고 놀면서 이 소설을 썼다. 그들은 내가 차고 날카로운 달의 실체를 확인하는 순간까지 단 한번의 채근도 없이 나를 기다려주었다. 이 소설을 완성할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나를 견뎌준 가족 덕분이다. 떠도는 동안 만나고 헤어졌던 사람들 덕분이다. 원주의 산과 태안의 바다 덕분이다. 고맙고 미안하고 그립다.
성실하고 정직하게 살아오신 아버지와 엄마, 항상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주는 동생과 사랑스러운 올케,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존재인 조카 채원에게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다.
소설을 완성하고도 마냥 묵혀만 두고 있는 내게 ‘시운씨 소설은 참 재미있다’고 말씀해주신 이승우 선생님과 ‘네 소설을 사랑한다’고 말해준 선미언니, 재능과 열정에 대한 회의에 빠질 때마다 ‘입 닥치고 소설이나 써’라고 말해준 은주언니에게 감사드린다. 부족한 소설에 기꺼이 문을 열어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과 창비의 여러분께도 깊은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소설이 가슴에 박혀버린 이후 등단을 하기까지 꼬박 팔년이 걸렸다. 그리고 다시 오늘까지 사년이 흘렀다. 그동안 수없이 무너지고 다시 일어서기를 반복했다. 앞으로 또 얼마나 더 무너지게 될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상관없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은 여전히 소설뿐이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소설을 쓸 때 가장 사람다워진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훌륭한 소설가가 될 자신은 없지만, 성실한 소설가가 되겠다는 약속은 감히 드릴 수 있는 이유이다.